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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수 없는 나무

원형(源馨)

【정견망】

“옛말에 달 속에 계수나무와 두꺼비가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서(異書)에 이르기를, ‘월계(月桂)의 높이는 5백 장이고, 그 아래에 한 사람이 있어 항상 이를 찍는데, 나무의 상처는 찍는 대로 바로 아문다. 이 사람의 성은 오(吳), 이름은 강(剛)이며 서하(西河) 사람인데, 신선을 배우다 허물이 있어 벌로 나무를 베게 하였다’고 했다.”(《유양잡조·천지(天咫)》)

월궁(月宮)에 관해, 항아(嫦娥)가 달로 날아간 것과 옥토끼가 약을 찧는 것 외에도 널리 전해지는 또 다른 이야기가 하나 있으니 바로 ‘오강벌계(吳剛伐桂–오강이 계수나무를 찍다)’이다. 수천 년 동안 이 오래된 전설들은 추석의 밝은 보름달과 함께 사람들의 입을 통해 대대손손 전해져 왔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오강은 수행하는 과정에서 과오를 범하여 월궁으로 유배되었고, 명을 받들어 계수나무를 베게 되었다. 하지만 이 계수나무는 매우 신기하여 도끼자국이 나자마자 나무가 곧바로 아물었다. 오강이 아무리 여러 번 베어도 나무는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오강이 도대체 어떤 잘못을 저질렀으며 왜 그런 잘못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고서에 상세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영원히 베어낼 수 없는 계수나무를 베게 한 것으로 보아, 이 일은 아마도 그의 수행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그에 대한 징벌이라 하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바로잡을 기회를 주어 끝없이 나무를 베는 작업 속에서 심지(心志)를 단련하고 집착을 제거하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서유기》 속 봉선군(鳳仙郡)의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봉선군후(郡侯)가 하늘을 공경하지 않아 현지에 연이어 가뭄이 들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 이와 상응하여 하늘에는 손오공조차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쌀 산, 밀가루 산, 황금 자물쇠가 놓여 있었다. 나중에 봉선군의 온 백성이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며, 신을 공경하고 불법을 예경하며 심성을 닦고 선을 행하자, 선념(善念)이 생겨남에 따라 쌀 산, 밀가루 산과 황금 자물쇠가 저절로 해결되었다. 오강에게 계수나무를 베게 한 것도 아마 이와 유사한 이치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강의 ‘잘못’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그는 매번 온 힘을 다해 계수나무를 내리쳤지만, 나무의 상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한 번 베어낼 때마다 한 차례 실망을 겪어야 했고, 매번의 도모가 헛수고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의 고통이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사람의 마음을 차갑게 식게 하고 절망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것은 현장(玄奘)이 불법을 구하기 위해 서역으로 갈 때 했던 그 결연한 서원을 연상 한다. “차라리 서천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다 죽을지언정, 동토를 향해 반 걸음 물러나 살지 않겠다(寧向西天一步死,莫退東土半步生).” 어렵고 힘든 역경에 직면해서도 흔들리지 않고, 거듭되는 좌절 앞에서도 여전히 버텨내는 것, 그것이 바로 오강이 수행해야 할 부분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어느 날, 오강이 계수나무를 쓰러뜨리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여기지 않고, 계수나무가 언제 쓰러질지 늘 주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나무를 베는 과정 자체가 바로 자신을 흔들리게 하고, 물러서게 하며, 끝까지 버티지 못하게 하는 망념(妄念)과 사심(私心)을 갈아내는 것임을 깨달았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매번 온 힘을 다해 휘둘렀던 도끼는 비록 계수나무를 베어내지 못했을지라도 마음속의 집착과 잡념을 베어내고, 자신의 승화와 전진을 가로막는 ‘가시덤불’을 끊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바로 그 순간이 오면, 계수나무는 오히려 베지 않아도 저절로 쓰러질 것이다.

사람이 바른 일을 할 때, 만약 일시적인 득실에 동요하지 않고 한결같이 견지할 수 있다면 성공이란 대개 물이 흐르면 자연히 길이 생기는 것처럼 저절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중화 전통문화에는 ‘물방울이 돌을 뚫는다(水滴石穿)’는 견인(堅靭 굳세게 견딤)이 있고, ‘한 걸음 한 걸음 쌓여 천 리를 간다(跬步千里)’는 축적이 있으며, ‘쇠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鐵杵磨成針)’는 계시가 있다. 사람들은 ‘백 리를 가려면 구십 리를 반으로 삼는다(行百里者半九十)’는 공휴일궤(功虧一簀 성공을 눈 앞에 두고 한 삼태기가 부족해서 실패하는 것)을 탄식하기도 하고, 맹모의 ‘베 짜던 북을 끊어 배움을 권한(斷織勸學)’ 깊은 뜻을 찬양하기도 한다. 이로 볼 때 고대인들은 최종적으로 어떤 결과를 얻었느냐보다 사람이 그 과정에서 어떻게 품성을 제고하고, 어떻게 의지를 단련하며, 어떻게 도덕을 함양했는지를 더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 이르러 외부 환경에서 오는 온갖 유혹과 각종 현대적 관념의 충격은 사람들이 점차 육안으로 볼 수 있고 측정할 수 있는 ‘성과’에만 익숙해지게 만들었고,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가장 귀중한 선념(善念)과 의지는 쉽게 소홀히 하도록 만들었다. 사람이 지나치게 외적인 결과에 집착하게 되면, 일단 대가가 즉시 돌아오지 않을 경우 쉽게 불안, 실망, 나아가 고통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번잡하고 복잡한 환경 속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바른 행실을 고수하고 선량한 본성을 지키며, 일시적인 득실 때문에 동요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훌륭한 일이다.

무엇이 진(真)이고 무엇이 거짓(假)이며, 무엇이 선(善)이고 무엇이 악(惡)인가? 우리는 무엇을 굳게 지켜야 하며 또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가? 이에 여러분께서 진심으로 파룬따파의 주요 저서인 《전법륜(轉法輪)》을 읽어보시길 권한다. 아마도 독서와 사유의 과정 속에서 많은 의혹들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며, 마음속 또한 툭 트이게 될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3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