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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사랑한 아들 칭기스칸 시리즈 3 -【칭기스칸】관대함으로 무리를 얻고 개혁을 추진해 인재를 모으다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成吉思汗】宽仁服众 推改革 招揽人才

칭기스칸(에포크타임스)

초원에서 점차 세력을 키워가던 테무진은 세 번이나 안다를 맺었던 자무카가 자신을 점점 적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테무진이 칸으로 추대된 지 1년 후인 1190년, 테무진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던 자무카는 가축 약탈 과정에서 자신의 부족민 한 명이 테무진의 부하에게 살해당했다는 구실을 내세워 13개 부족 총 3만 기마병을 규합해 테무진을 공격하러 나섰다. 테무진 역시 자신의 부하 1만여 명을 열세 개의 날개(翼)로 나누어 맞섰으니, 이를 역사에서는 ‘십삼익(十三翼)’의 전투라 부른다.

전투에서 자무카가 이끄는 연합군은 상대적으로 병력이 적은 테무진 부대를 격파하고 이들을 오논 강의 제렐네 협곡으로 밀어냈다. 이는 테무진 평생에 직접 나선 싸움에서 유일하게 패배한 전투였다. 테무진의 반격을 막고 그의 정신적 꺾기 위해 자무카는 초원에서도 드문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수법으로 포로들을 죽이고 모욕했다. 젊은 포로들을 70개의 커다란 가마솥에 넣어 삶아 죽였으며, 적 수장의 머리를 자신의 말꼬리에 매달기까지 했다.

자무카의 이처럼 잔인한 수법은 비겁한 자들을 두려워하게 만들었지만, 용사들에게는 폭정으로 여겨져 큰 반감을 샀고 이는 무형 중에 그의 이미지를 훼손시켰다. 이 전투 직후 자무카를 따르던 많은 이들이 그를 떠나 인자하고 의로운 테무진에게로 귀부했다. 이는 테무진에게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비록 전투에서는 패했으나 오히려 많은 부중(部眾)을 얻게 된 것이다. 크게 기뻐한 테무진은 오논 강 숲속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鄂嫩河是一条位于蒙古国和俄罗斯的河流。(<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OnonRiver.jpg" rel="nofollow noopener noreferrer">Chinneeb/Wikimedia Commons提供</a>)

몽골과 러시아에 걸쳐 흐르는 오논 강. (Chinneeb/Wikimedia Commons 제공)

군주의 도량과 관대함으로 무리를 얻다

타이치우드인은 테무진의 원수였고, 그 예하의 조로트(照烈)부는 테무진의 거주지와 가까웠다. 테무진은 사냥하던 중 우연히 조로트인들과 마주쳤다. 날이 저물어 가자 테무진은 조로트인들에게 함께 몰이사냥을 한 뒤 머물러 다음 날도 사냥을 이어가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조로트인들은 자신들이 400명이나 되는데 솥과 식량이 충분하지 않아 절반은 남고 절반은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테무진은 모두 남아야 한다고 고집하며 곧바로 조로트인들에게 필요한 솥과 식량을 보내주었다.

이튿날 몰이사냥에서 테무진은 일부러 포위된 짐승들을 조로트인들의 포위망 쪽으로 몰아주어 그들이 평소보다 훨씬 많은 짐승을 사냥할 수 있게 도왔다. 조로트인들은 테무진에게 깊이 감동해 남몰래 이렇게 말했다. “타이치우드가 비록 우리와 같은 혈족이라도 늘 우리의 수레와 말, 음식을 빼앗기 일쑤였고 군주로서의 도량이 없었다. 보아하니 군주로서의 도량을 지닌 이는 오직 테무진뿐이구나!”

그 후 조로트부의 수장 위뤼(玉律)는 타이치우드인의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타하이 다루(塔海答魯)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귀부하며 타이치우드인을 죽여 충성을 맹세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들은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다시 배신하여 떠났고, 얼마 안 가 타이치우드부 사람들에게 살해당하면서 조로트부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테무진의 󰡐활달하고 넓은 도량󰡑은 이미 타이치우드 산하 부족들과 초원 전역에 널리 퍼졌다. 타이치우드 지도부에 불만을 품었던 많은 이들이 의리를 사모해 속속 찾아와 투항했는데, 여기에는 훗날 칭기스칸을 보좌해 사방을 정복하는 공신이 되는 치라운(赤老溫), 제베(哲別), 실리게이 네구덴(失力哥也不幹)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또한 하늘의 안배가 아니겠는가?

테무진의 군주다운 도량은 그가 제베를 대한 태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제베’는 몽골어로 ‘활을 잘 쏘는 자’라는 뜻이다. 그는 과거 타이치우드 수장을 위해 일했으며 자무카가 일으킨 전쟁 중 테무진의 군마를 활로 쏴 죽인 적이 있었다. 제베가 귀부해 왔을 때 테무진은 자신의 아끼는 말을 쏴 죽인 자가 누구인지 물었고, 제베는 즉시 자신이 한 일이라 시인하며 “만약 저를 용서해 주시고 목숨을 살려주신다면 당신을 위해 불속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뛰어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테무진은 곧바로 이렇게 말했다.

“제베가 이렇게 솔직하니,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러면서 제베에게 “내 곁에 있는 다른 ‘제베’들처럼 나를 보호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전 잘못을 따지지 않는 테무진의 태도와 진심 어린 대우에 제베는 크게 감동했고, 그때부터 테무진에게 충성을 다 바쳤다.

哲别,蒙古语的意思是“善于射箭”。(shutterstock)

제베는 몽골어로 “활을 잘 쏘는 자”란 뜻이다. (shutterstock)

타타르부를 공격하며 중원 문화와 접촉

1196년, 30대 초반의 테무진에게 세력을 더욱 확장할 또 한 차례의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금(金)나라 황제가 타타르인의 수장 메구진 세울레투(蔑古真薛兀勒圖)가 맹약을 어겼다는 이유로 군대를 파견하고 동시에 케레이트의 옹 칸에게 연합 공격을 제안했다. 칭기스칸은 이 소식을 접하고 타타르인이 철천지원수였기에 옹 칸에게 자원해 참전하겠다고 요청했다. 그는 또한 키야트부의 분파인 세체 베키슈(薛徹別吉帥), 타이추(泰出) 등 주르킨인들에게도 도움을 청했고, 주르킨인들도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엿새를 기다려도 주르킨인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테무진은 옹 칸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우룰자 강(浯勒劄河)을 따라 내려가 금나라의 왕경(王京) 승상과 함께 타타르부를 협공했다.

타타르부가 금나라 군대에 대패하여 우룰자 강으로 도망쳐 왔을 때 테무진과 옹 칸의 연합군과 마주쳤다. 메구진 세울레투는 일부 타타르인을 이끌고 아직 완공되지 않은 방어책에 들어가 결사 항전했고, 일부는 동쪽으로 도망쳤다. 테무진은 방어책 안의 타타르인들을 공격했고, 옹 칸은 도망치는 자들을 추격했다.

포위 공격 속에서 타타르인들은 완강히 저항했고, 테무진은 무리를 이끌고 보름이나 공격한 끝에야 함락시킬 수 있었다. 요새가 무너진 후 메구진 세울레투와 수많은 부중이 살해되었고 일부는 포로로 항복했다. 테무진은 수많은 가축과 치중(軍需品), 물품을 노획했는데, 그중 상당수는 은으로 조각된 요람과 큰 진주로 장식된 이불 등 중원(中原)의 정교한 수공예품들이었다. 요람 안에는 잘생긴 갓난아기가 있었고, 테무진은 이를 어머니에게 보내 키우게 하며 자신의 또 다른 동생으로 삼았다.

중원의 수공예품이 존재했던 이유는 타타르인들이 한화(漢化)된 금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그들이 소유한 한지(漢地)의 물품이 초원의 어떤 부족보다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테무진이 중원 문화와 이토록 생생하게 접촉한 첫 순간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화려한 공예품을 본 몽골인들이 찬란한 한(漢) 문화에 동경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테무진의 마음속에도 깊은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훗날 테무진의 대외 확장 과정에서 한인(漢人)과 한인의 영향을 받은 거란인들은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고, 한 문화 역시 몽골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타타르를 격파한 후 금나라는 테무진에게 ‘자우트 홀리(劄兀惕忽裏)’, 즉 초토사(招討使)라는 칭호를 내렸고, 케레이트의 토오릴 칸(옹 칸)은 ‘왕(王)’으로 봉했다. 이로써 테무진은 다른 몽골 부족들을 통제할 권력을 한층 높였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추종자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옹 칸을 도와 케레이트부를 재건하다

케레이트의 옹 칸이 타타르인들을 추격할 때 그 재물에 눈이 멀어 회군이 늦어지는 바람에 후방이 텅 비게 되었고, 나이만(乃蠻)부가 이를 틈타 옹 칸의 이복형제 에르케 카라(額兒客合剌)를 도와 본거지에 남겨진 옹 칸의 동생 자하 감부(劄合敢不)를 공격했다. 패배한 자하 감부는 북쪽으로 퇴각했고, 이에 나이만인들과 에르케 카라는 옹 칸이 돌아오는 길에 매복을 설치했다.

전리품을 가득 싣고 돌아오던 옹 칸은 부족 내부의 변화를 전혀 모른 채 귀환 도중 매복에 걸려 대패하고 말았다. 적들이 자신이 테무진에게 의탁하는 것을 막으리라 판단한 옹 칸은 소수의 인원을 이끌고 서쪽으로 도망쳐 나이만 목장을 우회하여 거란의 후예가 세운 서요(西遼)로 향했다. 이에 에르케 카라는 옹 칸의 모든 목장을 이어받아 새로운 케레이트의 칸이 되었다.

자하 감부 및 나이만인들에게 맞설 수 없었던 옹 칸의 일부 구부(舊部)들은 테무진에게 귀부했다. 한편 서하에 의탁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망 속에 돌아온 옹 칸은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자 사람을 보내 테무진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신의를 중시하는 테무진은 즉시 군사를 파견해 옹 칸을 도와 에르케 카라와 전투를 벌였다. 내부가 불안정했던 에르케 카라는 단 한 번의 전투 만에 패배하여 나이만부로 도망쳤다.

테무진의 도움을 얻은 옹 칸은 자신의 정치적 호소력과 타타르부를 격파해 조상의 원수를 갚았다는 전공을 바탕으로 부중과 백성들을 다시 불러모아 세력을 되찾았고, 마침내 케레이트부를 재건했다. 비록 전성기 시절에 비해서는 부중이 조금 줄어들었지만 말이다.

이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테무진과 만난 옹 칸은 부자(父子)의 맹세를 거듭 확인했으며, 심지어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부중과 백성을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테무진에게 넘겨주겠다고 암시했다. 그 후부터 정벌에 나설 때마다 옹 칸은 기꺼이 테무진과 함께 출전했다. 하지만 옹 칸의 신하들은 테무진이 그의 후계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여전히 테무진의 힘에 의존해야 했기에 잠시 그와 공존했다.

在《马可波罗游记》插画中的“长老约翰”(中间穿红衣者),即王汗。(公有领域)

《마르코 폴로 여행기(동방견문록)》 삽화 속의 ‘장로 요한'(중앙의 붉은 옷을 입은 이), 즉 옹 칸. (공유 영역)

분배 방식을 바꾸어 더 많은 민심을 얻다

초원에서 패권을 다투던 다른 부족 수장들과 달리 테무진은 정복 전쟁을 치르는 동시에 몽골 부족의 행정 기구를 초보적으로 정비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초원 생활을 지배해 온 오랜 관례들을 근본적으로 개혁했다.

예컨대 1202년 타타르부를 상대로 한 전쟁 이후 테무진은 부중(部眾)들에게 “완전한 승리를 거둔 뒤에 전리품을 분배해야 하며, 전리품을 탐내느라 패배한 자들이 도망쳐 재집결한 뒤 반격할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엄명했다. 당시 그가 내린 군령은 이러했다. “적과 싸워 이겼을 때 재물을 탐해서는 안 된다. 적을 물리치면 그 재물은 모두 우리의 것이니 우리가 함께 나누면 된다. 만약 적에게 밀려 처음 돌격했던 원래 진지로 물러나면 다시 반격해야 한다. 처음 돌격했던 원위치로 밀려났는데도 반격하지 않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

게다가 그는 사적(私的)으로 약탈하는 행위를 엄금하고 전리품 분배 방식을 바꾸어, 모든 물품을 그가 직접 집중 통제한 뒤 부중들에게 적절히 재분배하도록 했다. 이 분배 대상에는 전사한 모든 군인의 미망인과 고아들도 포함되었다. 이러한 정책 덕분에 테무진은 기층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충성을 얻어낼 수 있었다. 비록 자신들이 전사하더라도 남겨진 가족들이 상응하는 보살핌을 받을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혁은 귀족들과 일부 추종자들의 불만을 샀지만, 더 많은 민심과 충성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는 매우 명확했다. 테무진의 부족은 더 많은 재물과 가축을 소유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완벽한 군대와 모든 평민 계층을 온전히 장악하게 된 것이다. 서로 다른 혈연 집단으로 이루어진 무리를 어떻게 하나로 융화시킬 것인가는 분명 테무진이 마주한 새로운 과제였다. 이때부터 부족 간의 정략결혼이나 고아 입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군대 편제를 개혁하고 케식 제도를 세우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타타르부를 정복한 이듬해, 테무진은 몽골 군대와 부족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군대를 십진법에 따라 편제해 10명을 1대(隊)로 삼고 대장 혹은 ‘패자두(牌子頭)’를 두었으며, 이 직책은 대개 가장 연장자가 맡았다. 이 10명은 혈족 집단이나 부족 출신이 달라도 마치 형제처럼 서로를 대하도록 요구받았다. 다만 부자와 형제는 함께 소속되는 것이 허용되었다.

10개의 대(隊)가 모여 100명으로 이루어진 ‘백호(百戶)’를 구성하고, 그들은 스스로 지도자인 백호장(百戶長)을 선출할 수 있었다. 10개의 백호가 모여 1,000명으로 이루어진 ‘천호(千戶)’를 구성하고 지도자는 천호장(千戶長)이 되었다. 10개의 천호가 모여 1만 명으로 이루어진 ‘만호(萬戶)’를 구성하고 지도자는 ‘만호장(萬戶長)’이 되었다. 만호장은 테무진이 직접 임명했는데, 이는 어떤 인물이 중책을 감당할 수 있는지 그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군을 재편할 때 테무진은 이미 95개의 천호를 거느리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실제로는 정원이 채워지지 않은 천호도 있었음을 감안할 때 전체 병력은 8만 명 미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분명 이 완전히 새로운 체제는 기존의 혈통, 종족, 부족, 민족의 경계를 완전히 깨뜨려 작전 효율성과 군대의 기동성, 충성도를 극적으로 끌어올렸으며, 훗날 몽골 기병이 유럽을 휩쓰는 든든한 초석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테무진은 천호장, 백호장, 패자두 및 평민 자제 중에서 기술과 체격이 뛰어난 이들을 선발해 ‘케식(怯薛)’, 즉 호위군을 창설했다. 이 중 80명은 숙위(宿衛), 70명은 시위(侍衛), 400명은 전통사(箭筒士)로 삼았고 인원은 점차 늘어났다. 나중에는 테무진이 극히 신임하던 보르굴(博爾忽), 보오르추, 무칼리, 치라운 등 4인과 그 자손들이 이끄는 4개 조가 정해진 날자에 따라 교대로 당직을 섰다.

케식은 몽골 사회에서 기존의 부족 소속에서 벗어나 오직 한 개인에게 복종하는 ‘안다’로부터 발전한 제도로, 부족 전체가 아니라 주군(主君) 개인에게 예속되었으며 주군은 이들에게 생활 자원과 보호를 제공했다. 케식의 지위는 매우 높고 권력도 막강했다. 한편으로는 칸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몽골 군대의 핵심 역할도 했다. 아울러 이들은 음식, 말 사육, 의약, 매사냥 등 왕실의 가사(家事) 전반도 관장했다.

몽골인들의 성지(聖地)를 건립하다

테무진은 상구르(桑沽兒) 강과 케를렌(客魯漣) 강이 합류하는 곳에 본영인 ‘취뒤아란(曲雕阿蘭)’을 세우는 한편, 성산(聖山)인 부르칸 칼둔(不兒罕‧合勒敦)에서 발원하는 오논 강, 케를렌 강, 툴라 강 등 상류 수원(水源) 지대에 몽골 부족의 고토(故土)로서 비밀 영지를 조성했다. 그는 그 누구도 이 삼하(三河)의 수원 지역에 진영을 설치하지 못하도록 엄명했을뿐더러, 이 영지는 외부인에게 철저히 봉쇄되어 오직 몽골 황실 일가만 예외적으로 출입할 수 있다고 선포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가족 제사를 지내고 비밀 가족회의를 열며 비밀 의식을 거행할 수 있었고, 사후에도 이곳에 안장되었다. 말하자면 이 영지는 몽골인들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었다.

다양한 인재를 등용

인구를 늘리고 부를 축적하며 기술을 개량하여 대규모 생산·저장·보급을 보장하기 위해, 테무진은 각지 언어에 능통한 자, 교제에 능한 자, 특기(特技)를 가진 자들에게 각 부족의 호구를 총괄하게 하고 인재를 영접·초청하여 대외 교류 및 무역 등에 종사하도록 명했다. 이 가운데는 한족(漢族)의 숙련된 장인(工匠)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테무진은 훗날 인재 등용의 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자에게는 군대를 맡기고, 활기차고 날쌘 자에게는 치중(輜重 군수물자)을 지키게 하며, 어리석은 자에게는 채찍을 쥐여주고 가축을 지키게 하라.” 이는 그가 실전 속에서 터득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이었을 것이다.

의심의 여지 없이, 테무진의 이러한 개혁은 몽골을 통일하고 세계를 정복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토대를 다졌으며, 그의 왕자다운 풍모가 바야흐로 만개하려 하고 있었다.

(계속)

참고자료:
《蒙古秘史》
《元史》
《成吉思汗與今日世界之形成》
《中國曆代戰爭史》(元朝) 台灣出版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0/10/2/n12448572.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