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단(顏丹)
【정견망】
‘평범한 악(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은 20세기 60년대 한 사상가가 제기한 것이다. 이 개념은 한 나치 장교가 선악의 선택을 마주하기를 거부하고, 오직 맹종하며 학살 명령을 집행하다가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재판에서 공범으로 규정되어 극형에 처해진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사실 유대인을 학살한 그 죄악 속에서 참여자는 이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수없이 많은 공범들 속에는 ‘유대인 종족 등록을 하던 하급 사무원’, ‘명령을 받고 유대인들을 집에서 격리 구역으로 몰아내던 경철’, ‘유대인들을 기차로 몰아넣은 승무원’, ‘수용소의 치안을 유지하던 보안원’, ‘시신 수거를 담당했던 청소부’ 등등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인물들로 보이고, 살인 도구를 들고 흉악한 행동을 저지른 것도 아니며, 심지어 주관적인 살인 동기조차 없었지만, 결국 법의 제판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단지 인간 세상의 법률이 용납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천도윤회(天道輪回)와 인과법칙 역시 오직 지시만을 따르며 악을 협력해 저지른 방조자와 공범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중국 역사에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일부 기록되어 있다.
청조(淸朝)에 승려 한 사람이 있었는데 법호는 윤중(允中), 속명은 장온휘(張蘊輝)였다. 그는 본래 부처를 믿지 않았는데, 출가하게 된 까닭은 바로 자신이 상관의 남살(濫殺)과 억울한 살인을 협력하여 저지렀던 수많은 일에 대해 속죄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본적은 강소(江蘇) 장주(長州)이며, 소시적에 공부가 뜻대로 되지 않자 집을 나와 사람들을 따라 돈과 양식, 장부를 관리하는 사무를 배웠다. 나중에 호남(湖南)으로 가서 노계현(瀘溪縣) 지현(知縣, 현령) 황병규(黃炳奎)에게 채용되어 돈과 곡식을 관리하는 사무를 돕는 전곡사야(錢穀師爺)가 되었다.
가경(嘉慶) 원년, 호남에서 묘족 반란군(苗匪)이 소란을 피웠다. 일부 지방관들은 공을 세우고 싶어 안달이 나서 묘족을 붙잡기만 하면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여버렸다. 그 황(黃) 지현 또한 7~8명을 붙잡았다. 본래 형사 소송을 담당하는 형명사야(刑名師爺)가 처리해야 했으나, 마침 그가 자리에 없었다. 그리하여 판결문을 초안하는 일이 전곡사야로 있던 장온휘의 몫으로 떨어졌다.
처음에 장사야는 힘껏 막아보려 권했으나 지현이 듣지 않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어, 곧 사건조서를 상부에 보고하고 몇 명의 묘족 사람들에게 참형을 선고했다. 1년 뒤 반란(匪亂)이 평정되었으나, 황 지현은 그만 갑자기 폭사하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도 채 되지 않았다.
가경 19년 8월, 장온휘는 양주(揚州)로 갔다. 저녁에 한 주점에 머물렀는데, 그날 밤 두 사람에게 붙잡혀 어디론가 끌려가는 꿈을 꾸었다. 눈 깜짝사이에 그는 마치 순무(巡撫)의 아문 대청 같은 곳으로 끌려갔다. 그가 고개를 들어보니 젊은 관리가 당상에 앉아 있고, 양쪽에는 몇 명의 아전(衙吏)들이 서 있었다. 장온휘는 즉시 자신이 심문을 받기 위해 끌려왔음을 느꼈으나, 무슨 일 때문인지는 알지 못했다.
이때 당상(堂上)의 관리가 그의 이름을 부르고는 물었다.
“묘족 장(張) 모모의 사건은 네가 처리한 것이냐?”
장온휘는 이 말을 듣자마자 당시의 그 묘비 처리 사건을 떠올렸다. 이에 대답했다.
“일반적으로 전곡과 형명 두 사야가 사건을 처리할 때는 반드시 동가(東家), 즉 주임 관원의 안배를 따라야 합니다. 묘족 반란 사건은 제가 동가를 말렸으나 그가 듣지 않았기 때문에 저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당상의 관리가 말했다.
“판결문은 바로 네가 초안하고 보고한 것인데, 어찌 책임이 없단 말이냐?”
장온휘가 여전히 변명하려 했으나, 고개를 돌려보니 그 황 지현도 뒤에 서 있었다. 그는 이미 형구(刑具)를 차고 있었고 계속 통곡하며 울기만 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당상의 관리가 입을 열어 곁에 있던 아전에게 말했다.
“내가 보니 그의 선심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으니, 잠시 그를 이승에 돌려보내도록 하라! 돌아간 후 만약 불문(佛門)에 귀의하여 남은 여생으로 성심껏 뉘우치고 또 《금강경》을 삼천 번 염송한다면, 이전의 죄를 면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앞서 그를 데려왔던 두 사람이 다시 다가와 그를 부축하고 대청을 걸어 나갔다. 길에는 눈과 비가 엇갈려 내리고 사방이 캄캄하기만 했는데,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게 그는 문득 발을 헛디뎌 넘어졌고, 그 바람에 꿈에서 깨어났다. 꿈속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더할 나위 없이 생생했다. 그는 다음날 곧바로 행장을 꾸려 강소로 돌아가 고민사(高旻寺)로 가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고인(古人)은 보편적으로 마음에 경외가 있었고, 살인하면 목숨으로 갚아야 하며 선악에는 보응이 있다는 천리를 믿었다. “”라는 말이 천년을 내려오며 누구나 다 아는 속담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고인이 생명을 얼마나 중시하고 소중히 여겼는지 여실히 증명해 준다.
[역주: “나는 백인(伯仁)을 죽이지 않았으나, 백인은 나 때문에 죽었구나(我不殺伯仁,伯仁因我而死)라는 구절은 진서(晉書)에 나오는 말로 왕도(王導)가 주의(周顗 백인)를 오해가 그가 살해되는 것을 방치한 후 나중에야 진실을 알고 반성하며 한 말이다. 비록 직접 주의를 죽이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주의를 죽게 만들었다는 의미.]
무고한 사람이 억울하게 판결을 받았음을 뻔히 알면서도 순풍에 돛을 달듯 방조하고, 악을 돕고 학정을 비호하며, 억울함을 당한 이들이 목숨을 빼앗기는 것을 눈뜨고 지켜보는 것은, 직접 손으로 살육을 자행한 것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그리하여 부주의하게 또는 고의로 ‘평범한 악’에 가담한 이들은 현세의 보응이 늘 맹렬하고 참혹하게 찾아오기 마련이다.
인간 세상의 보편적 가치는 서로 통하며, 천리(天理)는 밝고 밝아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타인의 생사가 걸린 중대사와 자신의 선악 선택을 마주할 때 태도가 거만하고 요행을 바란다면 자신에게 무모한 재앙을 불러올 뿐이다.
참고자료: 《이원총화(履園叢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