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크타임스 문화팀
칭기스칸 (에포크타임스)
부중(部眾)과 동맹들의 지지 및 장생천(長生天)의 비호를 얻은 후, 칭기스칸이 금나라를 정벌하는 전쟁을 발동하는 것은 이미 화살이 시위에 얹어진 격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여진족을 향한 전쟁이 시작된 이후, 몽골 대군이 초원을 돌파해 나갈 뿐만 아니라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에서 다뉴브강 유역까지, 태평양에서 지중해 동쪽 연안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누비게 될 줄은. 앞으로 30년 동안, 몽골인들은 그들이 마주치는 그 어떤 군대든 격파하고 모든 요새를 탈취하며 모든 성지(城池)를 함락시킬 것이었다.
몽골인들이 초원을 돌파하고 심지어 자신들의 고향에서 그토록 먼 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전민개병제(全民皆兵制)와 그들이 어려서부터 기사와 궁술에 능숙했던 것 외에도 무시할 수 없는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그들이 장거리 원행에 매우 적합했다는 점인데, 그들은 자신에게 유용한 물건들만 몸에 지녔다. 예를 들어 악천후에 필수적인 의복, 부싯돌, 물과 우유를 담는 가죽 주머니, 줄칼, 올가미, 바늘, 작은 칼과 도끼 등이었고, 열 명당 작은 천막 한 동씩을 가지고 다녔다.
또 다른 하나는 그들이 먹는 것이 매우 단순했다는 점이다. 고기, 육포, 우유, 치즈 위주였고, 그들은 멈춰 서서 불을 피워 밥을 지을 필요 없이 열흘 연속으로 행군할 수 있었으며, 목이 마르면 말의 피를 마실 수 있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군량미를 가져가거나 거대한 후방 보급선을 가질 필요가 없게 만들었고, 오직 자신들을 따르는 충분한 말만 있으면 되었다. 이것은 전통적인 군대에 비해 훨씬 쉽게 빠르게 행군할 수 있게 하였고 더욱 기동성을 갖추게 했다.
몽골 군대의 기동성은 또한 그들이 모두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고 보병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에서도 드러나는데, 몽골인들이 직면한 다른 군대들은 주력이 모두 보병이었다. 초원에서 축적한 적을 신속히 섬멸하는 이동전 등의 작전 방법 외에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서하와의 교전 역시 칭기스칸으로 하여금 더 많은 한족(漢族) 장인들을 소유하게 하였고 견고한 성벽을 겨냥한 일종의 전법을 터득하게 했다.
몽골 군대의 특성과 칭기스칸의 탁월한 지도력은 뒤이어 벌어진 대금(對金) 전쟁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났다.
어떤 사람이 일찍이 “금나라는 바다와 같고, 몽골은 한 주먹의 고운 모래와 같다”고 말했기 때문에, 금나라 사람들은 몽골인들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종적인 결과는 ‘고운 모래’가 ‘바다’를 메워버렸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칭기스칸과 몽골인들의 용맹함과 그들의 독특성에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그들이 전쟁 전에 충분한 준비를 하여 지피지기(知彼知己)를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금나라는 요나라를 멸망시킨 후 강역(疆域)이 광대하여, 남쪽으로는 진령(秦嶺)과 회하(淮河)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농서 진안(秦安) 육반산(六盤山) 동쪽, 북쪽으로는 대흥안령 동쪽 비탈에서 북쪽으로 흑룡강 상류에 이르렀고, 동쪽으로는 송화강을 따라 내려가 오늘날의 러시아 연방 극동의 아마르강 어구 타타르 해협에 임박했으며, 국토 면적이 총 361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했다. 다시 말해, 그 국토 면적은 오늘날의 동북 삼성, 하북, 하남, 산동, 산서 및 안휘, 호북 일부 지역을 포괄했다. 북쪽에서 몽골인들의 습격과 소란을 막기 위해, 금나라는 금나라와 몽골의 경계처에 무려 3000여 리에 달하는 장성(長城)을 축조했고, 이것이 바로 칭기스칸이 직면해야 할 도전이었다.
금나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칭기스칸은 대내적으로 어진 인재들을 널리 받아들이고 임용했으며 군사(軍事)를 부지런히 정비했고, 대외적으로는 서하를 정복하고 몽골국 주변 세력을 복속시키며 금나라에 대한 외부 원조를 제거함과 동시에 후방의 안전을 보장하고 금나라 장성의 서부 빈틈을 여는 것 외에도, 금나라를 위해 경계를 수비하던 옹구트부(汪古惕部)를 받아들이고 그들과 혼인 동맹을 맺어 음산(陰山) 북쪽 지역을 금나라 공격의 기지로 삼았다.

몽골기병 (shutterstock)
전쟁 전 철저한 준비
이외에도 금나라 변방을 수비하던 장수들의 내응(內應)을 받아들이고, 각종 채널을 이용하여 금나라의 정치, 군사 정보를 수집했으며, 동시에 몽골 내부의 정보를 봉쇄하고 출병 의도를 은폐하는 등의 일을 했다. 출병하기 전에, 칭기스칸은 또 소부대들을 파견하여 먼저 깊숙이 들어가 수원(水源), 야영지 및 주변 환경 등을 탐색하게 했다.
그러나 칭기스칸이 한 가장 멋진 한 수는 거란과 금나라 사람들을 이간시킨 것인데, 그는 공개적으로 금나라 정벌은 거란인들을 위한 원수를 갚는 것이라고 선포했다. 몽골과 같은 언어를 구사하는 친척으로 여겨졌던 거란이 여진에게 나라를 멸망당한 후, 당연히 신복(臣服)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칭기스칸의 대금 정벌 행동은 많은 거란인들의 지지를 얻었고, 적지 않은 거란인들이 몽골에 투신했다. 이후 거란인들은 더욱 몽골 대금 정벌의 조력자가 되었다.
칭기스칸은 금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서하를 항복시켜 금나라의 팔다리를 잘라내었고, 또 옹구트부를 항복시켜 남하하는 향도로 삼았으며, 다시 거란인들과 연계해 그들로 하여금 금나라 내부로부터 변고가 일어나게 만들었으니, 이런 각종 조치들은 칭기스칸이 위대한 전략가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와 상대적으로, 금나라의 무능한 위소왕(衛紹王)은 비록 칭기스칸에게 배반할 마음이 있음을 알면서도, 몽골을 훨씬 초과하는 자신의 힘과 장성의 존재를 믿고 몽골인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으며, 칭기스칸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했고, 자신에게 위험성을 일깨워준 대신들에게는 도리어 투옥으로 응수했으며, 군사적인 대비(軍備)를 약화시키고 경제의 쇠퇴, 재정의 곤란조차 알지 못했고, 그 주된 병력은 모두 금나라와 송나라의 경계에 배치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바로 1206년에 남송이 병력을 보내 금나라를 공격했으나 패배하였고, 양측이 1208년에 <가정화의(嘉定和議)>에 서명했기 때문이다.
《금사(金史)》의 기록에 따르면, 위소왕이 즉위한 후 경내(境內)에는 빈번하게 이상 현상이 나타났는데, 지진, 유성, 검은 기운의 출현, 대가뭄, 일식 등이 있었으며, 이것은 마치 금나라 정권이 하늘에 의해 버림받고 있음을 예시하는 것 같았다.

여진족 남자 수렵도. 15세기 회화 작품. (공유 영역)
오사보 첫 전투에서 금나라를 물리쳐
1211년 봄, 칭기스칸은 주치(術赤), 차가타이(察合台), 우구데이(窩闊台), 톨루이(拖雷) 네 아들을 거느리고 10여 만의 병력을 이끌고 출병해 금나라를 정벌했다. 금나라의 위소왕은 칭기스칸이 군대를 이끌고 금나라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즉시 서북로초토사(西北路招討使) 점합합(粘合合)을 보내 화의를 의논하게 하였으나 칭기스칸에게 거절당했다. 위소왕은 어쩔 수 없이 긴급히 대신들을 소집해 대책을 토론했다. 이때 서북에서 수비하던 이는 평장정사(平章政事) 독길사충[獨吉思忠, 본명은 천가노(千家奴)]과 참지정사(參知政事) 완안승유(完顏承裕)였다. 이 두 사람의 지위는 모두 재상과 동등했다.
이와 동시에, 칭기스칸 및 몽골 대군은 거용관(居庸關) 바깥 보루에 거주하며 수비하던 옹구트부의 인솔 아래 장성의 서쪽 끝을 우회해 동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오늘날의 내몽골 우란차부맹(烏蘭察布盟) 흥화현(興和縣)에 위치한 오사보(烏沙堡)로 직행했다. 이 보루는 금나라의 평장정사 독길사충이 몽골인들이 장성을 돌파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1210년에 축조한 것이며, 오사보 뒤편의 오월영(烏月營)에 병력을 집결시켰었다. 당시 칭기스칸은 일찍이 제베에게 명령하여 오사보를 축조하던 금나라 군대를 급습해 섬멸시킨 적이 있다.
몽골군이 철수한 후, 금나라 사람들은 오사보는 재건했다. 오사보는 방어하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웠으며, 암도가 딸려 있어 오월영과 서로 통했고, 독길사충이 직접 병력을 거느리고 수비하는 것까지 더해져 몽골군은 백여 일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초조함 속의 칭기스칸은 곁의 야산에 올라이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장생천이여, 금나라가 나의 종친을 죽였으니, 만약 하늘이 나에게 원수를 갚는 것을 허락하신다면 신께서 나를 도와주소서.” 로그가 끝난 후, 그는 어렴풋이 오월영의 밥 짓는 연기를 보게 되었고, 마침내 그 위치를 알게 되었다.
칭기스칸은 즉시 대장 제베를 오사보의 뒤쪽으로 우회시켜 오월영을 직접 공략하게 했다. 이때는 7월이었다. 얼마 안 있어 오월영이 제베에게 함락되었다. 오월영이 함락됨으로 인해 오사보는 방어 기능을 잃어버렸고, 금나라 방어사령관 독길사충은 할 수 없이 병력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철수해야 했다. 칭기스칸은 오사보를 점령한 후 그것을 파괴했다. 첫 전투인 오사보의 승리는 몽골인들의 사기를 크게 북돋았고, 그들은 한 달 가량 정비한 후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서부터 몽골군은 두 갈래로 병력을 나누었다. 동로(東路)는 칭기스칸이 친히 인솔하여 중도(中都)로 향했고, 서로(西路)는 칭기스칸의 아들 주치, 차가타이, 우구데이가 인솔해 금나라 서경(西京 산서 대동)으로 향했다. 당시 금나라는 요나라의 오경제(吳慶濟)를 답습하고 있었는데, 즉 동경(東京) 요양부(遼陽府 요녕 요양), 서경 대동부(大同府 산서 대동), 북경 대정부(大定府 오늘날의 내몽골 영성寧城), 남경 변경부(汴京府 하남 개봉), 그리고 중경 대흥부(大興部 지금의 북경)였다.
회하보 전투에서 금병에 대승
독길사충은 오사보와 오월영이 함락된 일로 인해 해직되었고, 완안승유가 서북(西北) 군사를 주관하게 되었다. 완안승유는 당시 야호령(野狐嶺 하북 만전萬全 서북쪽)에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현성(縣城)의 토호(土豪)가 현지의 토병(土兵)들을 선봉으로 삼고, 행성병(行省兵 완안승유의 부대)을 지원군으로 삼아 몽골인들과 교전할 것을 청원했으나, 완안승유는 원조가 부족할 것을 염려하여 감히 이 방법을 쓰지 못하고, 다만 선덕(宣德 지금의 선화宣化)으로 가는 길을 물을 뿐이었다.
그러자 토호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시내는 굽이치고 꺾이며 흐른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행성(行省 완안승유를 가리킴)은 지리를 이용해 힘써 싸울 줄은 모르고 오직 달아날 궁리만 하니, 이번에 패할 것이다.”
그날 밤, 완안승유는 병력을 거느리고 남하해 선평(宣平 지금의 장가구)으로 향했고, 몽골 군대는 곧바로 뒤를 따라 이르렀다. 몽골군은 이곳에서 증원하러 온 서경 수장(守將) 호사호(胡沙虎)의 7천 정예병을 만났는데, 이 7천 명은 야호령에서 몽골의 근 10만 대군과 하루 동안 격전한 끝에 저녁나절이 되어서야 흩어졌다. 몽골인들은 야호령을 공격해, 재물을 약탈한 뒤에 떠났다. 뒤이어 몽골군은 또 대수락(大水濼), 풍리(豐利) 등의 현을 탈취했다.
완안승유는 30만 대군(자칭 40만)을 선평의 회하천(會河川 하북 만전 서쪽) 일대에 집결시켜 몽골의 공격을 저지하려 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금나라는 석말명안(石抹明安)을 보내 칭기스칸과 담판을 짓게 했다. 석말명안은 거란인인데, 그는 칭기스칸의 권유 아래 투항했고, 금나라 군대의 방어 배치 정보를 제공했다.
적의 상황을 분석한 후, 칭기스칸은 집중 돌파 전술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친히 중군을 이끌고 회하보(會河堡 하북 회안懷安) 각 채를 공격했으며, 무칼리에게 명령해 좌군을 이끌고 환아취(獾兒嘴 오늘날의 득승구得勝口 북쪽 산부리 일대) 통로를 기습 공격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싸웠으나 금나라 군대는 전투력이 완강하여 몽골군은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다음 날 공격하기 전에, 무칼리는 무리 군사들 앞에서 칭기스칸을 향해 맹세했다.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죽음에 이르지 않고서는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사기가 드높은 몽골 결사대가 무칼리가 앞장서서 돌격하는 기세 아래 완안승유의 중군(中軍) 대영을 향해 일제히 죽이며 쳐들어갔다. 칭기스칸은 곧바로 대군을 지휘해 적진으로 돌입했다. 금나라 병사들은 지휘와 통제가 매끄럽지 못해 군심이 흩어지고 사방으로 달아났으며, 장군 완안구군(完顏九軍)이 전사했다.
완안승유는 회하보로 달아났으나, 미처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몽골 군대에게 포위되었다. 격전 끝에 금나라 군대는 거의 전군이 전멸했고, 완안승유는 홀몸으로 달아났다. 이 전투에서 몽골인들은 10만의 병마로 적어도 30만의 금나라 정병을 이겼고, 강력한 전투력으로 금나라를 경악하게 했다. 완안승유는 재상직에서 면직되었고, 지모가 많기로 유명한 도단일(徒單鎰)로 교체되어 몽골과 금나라의 전쟁을 책임지게 했다. 독길사충이 패전한 후 아예 관직에서 쫓겨난 것과 달리, 완안승유는 그토록 참혹한 패배를 당했음에도 단지 함평로병마총관(咸平路兵馬總管)으로 강직되었을 뿐이다. 즉 금나라 임금의 상벌이 불명확한 점 또한 군대 내부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1211년 몽금전쟁(蒙金戰爭)에서 몽골군이 야호령 전투에서 금군 40만을 섬멸했다. 사진은 《집사》에서 발췌. (공유 영역)
서경과 동경 함락
8월에 회하보에서 승리한 후, 9월에 동로 몽골인들은 또 덕흥부(德興府 하북 탁록涿鹿)를 차지했고 거용관 수비 장수가 달아났으며, 제베는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거용관으로 진입하여 금나라 중도(오늘날의 북경) 성 아래 이르렀다. 중도는 계엄령이 내려졌다. 도단일이 보낸 지원군은 동북에서 온 2만 명 및 하북성 술호고기(術虎高琪)의 3천 병마가 있었으니, 금나라 황하 이북이 텅 비었음을 한눈에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중도는 성루(城壘)가 견고하고 중병(重兵)이 방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몽골군이 성을 공격하기 불리했기 때문에 포위를 철수하고, 마침내 경기(京畿 수도 주변 지역) 지역을 공략하고 떠났다.
《금사》에서는, “이때 덕흥부, 홍주(弘州), 창평, 회래(懷來), 진산(縉山), 풍윤(豐潤), 밀운(密雲), 무녕(撫寧), 집녕(集寧), 동쪽으로는 평주(平州)와 난주(灤州)를 지나고, 남쪽으로는 청주(淸州)와 창주(滄州)에 이르며, 임황(臨潢)을 거쳐 요하(遼河)를 건너고, 서남쪽으로는 흔주(忻州)와 대주(代州)에 이르기까지 모두 대원(大元)에 귀속되었다”고 했다. 칭기스칸이 인솔한 몽골 대군의 용맹함이 이와 같았다.
한편 몽골 서로군은 칭기스칸의 몇몇 아들의 인솔 아래 연이어 운내(雲內 오늘날의 내몽골 투메트좌기 동남), 동승(東勝 오늘날의 투오퉈), 삭주(朔州) 등을 공략하였고, 11월에 서경 대동을 함락시켰으며, 금나라 서경 수비 사령관 호사호는 몽골군이 이른다는 소식을 듣고 성을 버린 채 중도로 도망갔다.
그 후 양 갈래의 몽골군은 오늘날의 하북 및 산서 북부 지역에서 대량의 사람, 가축, 재물을 약탈한 후 금나라 북부 국경으로 철수했는데, 약탈당한 사람들 속에는 바로 몽골이 급히 필요로 하는 각 방면의 한족 인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 패주(覇州)에 있던 거란인 서목로액삼(舒穆魯額森)이 금이 요를 멸망시킨 원수를 갚기 위하여 백여 명을 거느리고 칭기스칸에게 투항했고, 금나라의 근본인 동경(지금의 요양)을 공격할 계책을 바쳤다. 칭기스칸은 그의 계책을 따르고, 좌군 통수 제베를 파견해 동경을 공격하게 했다. 12월, 제베가 동경을 공격했으나 첫 공격에는 함락시키지 못하자, 이내 500리를 거짓으로 퇴각한 후 수비군이 경계를 소홀히 하는 틈을 타 경기병(輕騎兵)으로 밤낮으로 달려 되돌아와서 일거에 습격해 함락시키고, 한 달간 크게 약탈한 뒤 회군했다.
칭기스칸의 1211년 대금(對金) 공세는 몽골 군대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그때 몽골인들의 대금 정벌은 여전히 적의 섬멸, 성곽 파괴, 그리고 재물과 인원을 약탈하여 돌아오는 것에 치중해 있었으므로, 몽골인들이 떠난 뒤에는 파괴된 성들이 금나라 사람들에 의해 다시 점령되고 재건되었다. 몽골에게 포로로 잡힌 금나라 병사들에 대해서는, 새롭게 편성해 원래 직무를 맡기되 재물 운송 등의 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충성을 다할 수 있는 자는 몽골군의 전투 부대에 배정되었다.
몽골에는 기술 장인이 부족했기 때문에, 포로들 가운데 한 가지라도 뛰어난 재능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가족을 데려오는 것을 허락하고 안치해 주었다. 이처럼 앞서 서하를 공격할 때 포로로 잡았던 한족 장인들과 합쳐져, 몽골군 속에서 그들을 위해 각종 생활 및 전투 도구를 만들어 주는 장인들이 날로 늘어났고, 몽골 군대의 전투력을 한층 더 강화시켰다.
병법에 능한 맹장 곽보옥을 얻다
칭기스칸이 금나라를 겨냥해 발동한 첫해의 공세 속에서, 또한 한 명의 한인 맹장(猛將)을 기쁘게 얻었다. 그가 바로 천문(天文)과 병법(兵法)에 통달하고 기사와 궁술에 능했던 곽보옥(郭寶玉)이다. 그는 당대의 명장 곽자의(郭子儀)의 후예로, 금나라 말년에 그는 “분양군공(汾陽郡公)” 겸 맹안(猛安 금나라 초기 여진족 군대 조직 명칭으로 3000호를 관할함. 금나라 군대가 중원으로 남하했을 때 일부 맹안들은 하북, 산둥 일대로 이주하여 토지를 받아 정주하였으며 지방 조직에 해당)에 봉해져 정주(定州 오늘날의 하북 정현定縣)에 병력을 거느리고 주둔했다. 1211년, 무칼리가 금나라 장수 독길사충을 격파한 후, 곽보옥은 자신이 관할하던 부대를 이끌고 몽골군에 투항했다.
무칼리는 병법에 통달하고 또 중원의 정황을 잘 아는 곽보옥을 칭기스칸에게 추천했고, 칭기스칸은 그에게 중원을 취할 전략에 대해 물었다. 곽보옥은 중원 지역은 금나라의 세력이 여전히 매우 크니 경시해서는 안 되며, 마땅히 먼저 서남 지역의 토번, 남조(南詔)국 등을 정복한 뒤에 이 힘을 이용해 금나라를 공격해야만 반드시 중원을 통일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는 또 태조에게 계책을 바쳐 말하기를, “건국 초기에는 마땅히 새로운 영(令)을 반포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칭기스칸은 그의 건의에 따라 5조의 새로운 명령을 반포했다.
예컨대 ① 행군 작전 시 무고한 이를 억울하게 죽여서는 안 된다; ② 중죄가 있는 죄인에 대해 사형에 처할 수 있는 것 외에 다른 죄인들은 정황을 참작하여 장형에 처한다; ③ 군호(軍戶)의 경우 몽골인과 색목인은 정(丁)마다 1명을 군인으로 삼고, 한인(漢人)은 밭이 4경이고 사람이 3정인 자는 1명을 차출함; ④ 나이 15세 이상이면 성정(成丁 성인 남자)이 되고 60세면 파노(破老 노인)가 되며, 참호(站戶 역참을 관할하는 호구)는 군호(軍戶)와 같고 민간인 장인은 땅을 1경으로 제한하는 것; ⑤ 승려와 도사 중 나라에 이익이 없고 백성에게 손해를 끼치는 자는 모조리 금지하는 것 등이다.
곽보옥은 지혜가 뛰어나고 모략이 많았기 때문에 칭기스칸에게 중용되었고 심복으로 여겨졌다. 그 후 그는 무칼리를 따라 병력을 이끌고 남하했고, 또 칭기스칸을 따라 서정하여 그를 위해 계책을 세웠다. 잇따라 전공을 세운 덕분에 단사관(斷事官)에 임명되었다. 1226년 몽골 군대가 동쪽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하란산 군영에서 병사했다.
(계속)
참고자료:
《蒙古秘史》
《元史》
《成吉思汗與今日世界之形成》
《中國曆代戰爭史》(元朝) 台灣出版
《金史》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