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8년—907년)
심연(心緣)
【정견망】
대당 복국 후의 제위 다툼
무측천이 죽은 후 아들인 중종(中宗)이 즉위했다. 중종은 어리석고 무능한 황제였고, 그의 황후 위씨(韋氏)는 잔혹하고 음탕하며 야심이 가득했다. 위씨는 무측천처럼 자신도 황제의 자리에 오르길 희망했기에 딸인 안락(安樂)공주 및 무씨 가문과 동당(同黨)을 맺고 조정 정사를 손에 쥐고 주물렀다. 710년, 위황후는 독약으로 남편인 중종 이현을 살해하고 이 소식을 봉쇄한 뒤 무측천을 본받아 자신이 즉위하려 도모했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조정 정사를 부패하기 짝이 없게 만들어 “공사(公私)가 모두 폐지되고”, “열 집에 아홉 집이 비는” 지경에 이르게 했다. 이때 무측천의 넷째 아들이자 당 예종이었던 이단과 무측천의 딸 태평공주가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위후의 독재에 장애가 되었고, 결국 위씨 일당이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예종의 아들 이융기(李隆基)는 상당한 정치적 안목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무측천의 딸이자 고모인 태평공주와 손잡고 금군(禁軍)을 이끌고 후궁으로 돌진하여 위후와 안락공주, 무씨 종족을 살해하고 무력으로 그녀들의 여황제 꿈을 산산조각 냈다. 동시에 부친인 예종 이단의 제위를 복원시켰으며, 이후 이융기는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예종 역시 나약하고 무능하자 태평공주가 조정 정사를 좌우지했다. 태평공주 세력의 팽창은 이융기와 격렬한 충돌을 일으켰고, 태평공주는 태자 이융기를 폐위하고자 했다.
712년, 당 예종이 태자에게 자리를 물려주어 이융기가 합법적으로 즉위하니, 역사에서는 이를 당 명황(明皇 현종)이라 부르며 연호를 개원(開元)이라 했다. 이듬해 태평공주가 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후 사사당했다. 이로써 10년 가까이 지속되던 제위 다툼이 마침내 끝나고 정국도 점차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현종 이융기의 출생과 기이한 현상(異相)
현종의 휘는 융기이며, 예종의 셋째 아들이다. 《구당서》에서는 “성품이 영민하고 단호하며 예능이 많았고, 특히 음률을 잘 알았으며 팔분체(서예)에 능했다. 용모와 풍채가 위엄 있고 수려하여 비범한 외모를 지녔다”고 기록했다.
고종 3년, 초왕(楚王)에 봉해지고 개부(開府 왕부를 여는 것)하여 관속을 두었으니 이때 나이 겨우 일곱 살이었다. 자란 후에는 다시 임치군왕(臨淄郡王)으로 바꿔 봉해졌다. 무측천 신룡(神龍) 원년, 위위소경(衛尉少卿)으로 옮겼다가 훗날 노주별가(潞州別駕)를 겸하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가 추가되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노주 경내에서 황룡(黃龍)이 대낮에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하루는 이융기가 들판을 걸어가는데 자주색 구름이 그의 머리 위를 감쌌으니 따라가던 자들이 모두 볼 수 있었다. 이 외에도 그의 처소 밖에 연못이 있었는데 한참 동안 물이 넘치자 망기가(望氣者 기를 보는 이들)들이 이를 용의 기운이라 여겼다. 이와 같은 상서로운 일들이 십여 차례나 나타났다. 옛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이융기에게는 제왕(帝王)의 상(相)이 있었다.
당 현종의 개원의 치
* 즉위 초의 부국강병책
스물여덟의 나이에 황위에 오른 현종은 안정되고 태평한 정국이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에, 즉위하자마자 즉시 현재(賢才) 요숭(姚崇)을 발탁해 재상으로 삼았다. 현종은 일찍이 “내가 요숭에게 정사를 위임했으니, 큰일은 나와 함께 논의하고 작은 일은 스스로 결정하라.”라고 했다. 군신들은 모두 현종이 군신(君臣)의 도리를 잘 알고 대장(大將)의 풍모가 있다고 여겼다.
개원 4년(716년) 요숭이 재상에서 물러난 후, 현종은 다시 송경(宋璟)을 재상으로 중용했고, 간언을 구하고 간언을 받아들여 폐단을 혁파하며 사치를 배척했다. 요숭은 권세가를 억누르고 관작과 포상을 아끼며, 직언하는 간언을 받아들이고 공물을 물리치며 대신을 예우할 것을 제안했다. 송경은 인재를 잘 선발하고 형벌과 포상에 사사로움이 없었으며, 감히 황제 앞에서 직언으로 간했다. 요숭과 송경이 집권하던 시기에는 부역(賦役)이 너그럽고 평등했으며, 형벌이 깨끗하고 간소해 천하가 풍족했다. 이후 현종이 등용한 장가정(張嘉貞), 장열(張說), 한휴(韓休) 및 장구령(張九齡) 등의 여러 재상들 역시 현량(賢良)하다고 칭송받을 만하였고 각기 장점이 있었다. 바로 이러한 어진 재상들의 보좌 하에 현종은 당시의 폐단을 겨냥해 몇 가지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정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개원의 치는 정관의 치를 흉내 낸 것에 불과했다.
구체적인 개혁 조치는 다음과 같았다.
1. 정관 시기의 “관대하고 어짐을 다스림의 근본으로 삼는” 법치(法治) 원칙을 회복하고, 무측천 시기의 혹리(酷吏) 정치와 엄혹한 법을 폐지했으며, 잔혹한 형벌과 형벌의 남용을 금지해 인의(仁義)를 행하는 것을 천하를 다스리는 가장 중요한 책무로 삼았다. 이 외에도 현종은 《당육전(唐六典)》을 편찬하도록 명령했는데, 이는 현존하는 중국 최초의 행정법전(行政法典)이다. 이 법전은 총 35권으로 16년의 세월이 걸려 개원 26년에 완성되었으며, 당조의 정치 체제가 완비되어가고 있음을 상징한다.
2. 남아도는 관리 도태 및 이치(吏治) 정돈: 중종 때 위후 및 안락공주 등이 정권을 손에 쥐고 벼슬을 대대적으로 팔아넘김으로써 관료 기구가 비대해지고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을 초래했다. 현종은 즉위 후 기구와 관원을 감축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개원 11년, 정사당(政事堂)을 중서문하(中書門下)로 바꾸고 그 안에 이방(吏房), 병방(兵房), 호방(戶房), 형례방(刑禮房)을 두었으며,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증원하고 심복 관원을 선발해 임명해 “내명(內命 황제의 교서)”을 전담하게 했다.
3. 농업 생산을 중시해 정관 시기의 균전제(均田制), 조용조제(租庸調制), 요역과 부세 감경 정책 및 이와 관련된 호구 조사 정책을 계속 시행했다. 현종 때에는 기존 균전제에서의 “남자는 16세부터 20세까지를 중(中), 21세부터 59세까지를 정(丁), 60세 이상을 노(老)”로 삼던 것을 “18세부터 22세까지를 중, 23세부터 정”으로 바꾸었다. 국가는 해마다 계장(計賬)을 하나 만들고 3년마다 호적을 만들었다. 호구장부는 국가가 균전과 조용조 제도를 추진하는 의거였습니다.
무측천 시기 균전제는 이미 점차 파괴되어 토지 겸병과 농민의 도망 현상이 날로 심각해졌는데, 721년(개원 9년) 현종은 우문융(宇文融)을 권농사(勸農使)로 파견하여 각지에서 도망친 호구와 장부 외의 토지를 조사하게 했다. 몇 년간의 노력 끝에 총 80여 만 호의 객호(客戶)를 찾아냈고 토지 역시 그에 상응하게 찾아냈다. 당 정부는 이들 객호에 대해 정(丁)당 세금 1,500전을 매기고 조용조와 부역을 6년간 면제해 주었으며, 이후 각 주현(州縣)에서 균전 토지에 안착시켰다. 이 조치는 개원성세를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
현종은 황실 종친 및 공신들이 식읍으로 받은 호구로부터 직접 조조(租調)를 요구하지 못하게 하고 정부가 통일적으로 징수한 뒤 정부로부터 수령하도록 규정했다. 이 외에도 현종은 하동도, 관내도, 하남도, 하서도, 농우도, 하북도, 검남도 등지에 둔전(屯田)을 대대적으로 일으키도록 명령했는데, 당시 전국에는 총 992개의 군둔(軍屯)이 있었고 개간된 토지 면적은 500만 무(畝) 안팎에 달해 변방 군구(軍區)가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했다.
관중의 삼보(三輔) 지역에서는 “여러 왕공(王公)과 권세 있는 집안들이 모두 수로를 따라 방죽을 쌓아 수전(水田)에 피해를 주자”, 현종은 이를 모조리 철거하도록 명령하여 “백성들이 큰 이익을 얻게” 했다.
4. 절검을 제창: 현종은 전국적으로 위로는 왕공에서 아래로는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일체 사치스럽고 두터운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하였으며, 황친(皇親)이나 총애하는 신하라 할지라도 법을 어기면 서민과 똑같이 죄를 물었다.
개원 시기 정치의 청명함과 안정은 경제를 다시금 발전시켰고, 국력은 날로 발전해 전례 없이 강대해졌고 당나라 역사상 또 하나의 성세 시기인 ‘개원성세(開元盛世)’를 출현시켰다.
그러나 현종 시기에는 불교를 억누르기 시작했다. 무측천 통치 시기 수많은 사찰을 지어 수많은 사람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중종과 예종 때 불교 세력이 계속 발전해 전국의 승려와 비구니 수가 수십만 명에 달했다. 현종은 요숭의 건의를 받아들여 천하의 승려와 비구니를 도태시키라는 명령을 내려 환속시킨 자가 1만 2천 여 명에 달했다. 그는 또 각지에서 절을 창건하지 못하게 했으며, 민간에서 불상을 주조하거나 불경을 베껴 쓰는 것을 금지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모두 불교의 발전을 억제했다.
개원성세의 풍경
당조의 저명한 대시인 두보(杜甫)는 시 〈옛날을 기억하며(憶昔)〉에서 개원성세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옛날 개원(開元) 연간의 온 세상이 전성기이던 시절을 기억하네.
작은 고을에도 수만 세대의 집들이 넉넉하게 살았었지.
쌀밥은 윤기가 흐르고 조밥은 눈처럼 하얘,
관청과 민간의 창고마다 곡식이 가득히 풍족했었네.
온 나라 길에는 이리와 호랑이 같은 위협이 없어,
멀리 길을 떠날 때도 굳이 길일을 골라 떠날 필요 없었지.
제의 비단과 노의 명주를 실은 차와 말이 사방으로 달렸고,
남자는 밭 갈고 여자는 누에 치며 각자 본분을 잃지 않았네
憶昔開元全盛日,小邑猶藏萬家室。
稻米流脂粟米白,公私倉廩俱豐實。
九州道路無豺虎,遠行不勞吉日出。
齊紈魯縞車班班,男耕女桑不相失。
이 시를 통해 개원 시기의 풍족하고 안정된 장면을 엿볼 수 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개원 28년(740년) 전국 호적에 등록된 호구는 정관 시기의 300만 호에서 841만 호, 4,814만 명으로 늘어났으며, 754년에 이르러서는 906.9만 호, 5,288만 명으로 더욱 증가했다. 경작지 면적 역시 8억 무 안팎에 달했다. 749년, 중앙 식량 창고에는 총 1,245만 석의 식량이 축적되어 있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민간에 저장된 식량 역시 매우 많아 “집마다 저장한 식량이 수만 석에 달했다”고 한다. 이는 농업이 해마다 풍년을 맞아 가져온 풍요로운 풍경이었다.
두우의 《통전》에 따르면 당시 천하에 비싼 물건이 없었고 장안과 낙양의 쌀값은 한 되에 20전을 넘지 않았고, 밀가루는 한 되에 30전, 비단은 한 필에 210전이었다. 실로 “천하가 풍요롭고 편안해 멀리 길을 떠나는 사람이 무기 하나 소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농업의 발전은 상업의 발전 역시 촉진했다. 오늘날 은행과 유사한 궤방(櫃坊)이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어음 환전 증서인 ‘비전(飛錢)’도 출현했다. 도읍인 장안은 정치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상업의 중심지였다. 수많은 외국 상인들이 장안, 낙양 및 남방의 양주(揚州), 성도, 광주(廣州) 등지로 찾아와 무역을 진행했다. 상업의 번화함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개원 25년(737년) 전국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이 겨우 59명에 불과하여, 대리시의 감옥은 쓸쓸하기 짝이 없어 까마귀와 참새가 나무에 집을 지을 정도였다고 한다. 인의(仁義)를 행하는 것을 나라를 다스리는 첫째가는 책무로 삼은 것이 정관의 치와 유사한 효과를 거두었음을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현종 자신이 다재다능했기에 문화 예술을 더욱 대대적으로 제창했다. 유명한 시인 이백, 두보, 맹호연, 왕유 등이 모두 이 시기에 활발히 활동했으니, “기인(奇人) 아사(雅士)가 모두 경성(京城 장안)에 있도다”라고 이를 만했다. 시가, 무용, 서예 등 당나라의 문화 예술은 모두 이 시기에 정점에 달했다.
‘명(明)’에서 ‘혼(昏)’으로 간 당 현종 — 당조 전성기에서 쇠퇴 시작
개원성세를 거친 당 현종은 점차 “사치와 욕망을 제멋대로 부리며 정사를 게을리하기” 시작했다. 개원의 치는 ‘정관의 고사(故事)’에 의거한 것이었으나, 현종이 태종에 미치지 못한 점은 ‘수성(守成)의 어려움’을 알지 못했고 ‘처음처럼 끝을 신중히 함’을 알지 못해, 일단 성세의 성취를 이루자 자기만족에 도취해 버린 것이다. 여기에 어진 신하들을 배척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을 가까이 하니, 한때의 명군(明君) 역시 점차 혼군(昏君)으로 변하고 말았다.
* 간신을 총애하고 신뢰
당 현종이 ‘명’에서 ‘혼’으로 치달은 전환점은 개원 22년 간신 이임보(李林甫)를 재상으로 등용한 것이 표지였다.
이임보는 젊었을 때 품행이 좋지 못했으나 수완을 부리는 데 능해 어사중승(御史中丞), 형부시랑(刑部侍郎)을 거쳐 승상의 직위에까지 올랐다. 당시 사람들은 누구나 이임보가 말은 달콤하게 하지만 뱃속에는 칼을 품은 ‘구밀복검(口蜜腹劍)’의 음험하고 교활한 자임을 알고 있었으나, 그는 또한 “교묘한 말로 충성을 가장”했다. 당 현종은 이에 충신과 간신을 구별하지 못하고 그에게 19년 동안이나 권력을 독점하게 했으니, 한때 조정을 청명하게 만들었던 삼성합의제(三省合議制)는 이때에 이르러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20년 넘게 황제를 지낸 현종은 오직 욕망을 방종하게 즐길 생각만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절대가인(絕代佳人)인 귀비 양옥환(楊玉環)과의 유흥에 빠져 지냈다. 이임보는 오로지 황제의 뜻에 맞추기만 하고 견해가 다른 이들을 배척해 현종을 교만함에서 우둔함으로 나아가게 했다. 이러한 황제가 있고 이러한 재상이 있었으니 당조가 어찌 쇠락의 길로 들어서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 성색(聲色)과 향락에 깊이 빠지다
현종은 재위 기간이 길어지면서 점차 성색(聲色)을 즐거움으로 삼았고, 천보(天寶) 2년 이후 양귀비를 총애한 후로는 정사를 더욱 소홀히 했다. 양귀비는 이름이 양옥환으로, 그녀의 조상은 수조의 명신(名臣)이었다. 그녀는 본래 현종의 아들인 수왕 이모(李瑁)의 비(妃)였으나, 현종이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현종은 양옥환을 차지하기 위해 그녀를 먼저 도사(道士)로 출가시키고 도호를 태진(太真)이라 했다. 1년 뒤, 그녀를 태진비로 맞아들였고 훗날 귀비(貴妃 역주: 당 황실 후궁 중 황후를 제외하면 서열 1위, 당시 황후가 공석이라 양귀비가 실질적인 황후 역할을 함)로 책봉했다.
당조 시인 백거이는 〈장한가(長恨歌)〉에서 양귀비의 미모와 그에 대한 현종의 감정을 잘 묘사했다.
“눈길 돌려 한 번 웃으면 백 가지 아양 생겨나니
육궁의 삼천 후궁들 얼굴빛을 잃었도다”
“봄날 밤 너무 짧아 해 높이 떠서야 일어나니
이로부터 임금님은 조회를 보지 않으셨네”
“후궁에 아리따운 미녀 삼천 명이 있었으나
삼천 명 받을 총애 한 몸에 모였도다”
위 시에서 볼 수 있다시피 정에 빠진 당 현종은 이미 나라의 큰일을 도외시했으니, 간신의 기만에 빠지는 것 역시 자연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양귀비 자신이 정사에 간섭하진 않았으나, 사촌 오빠 양국충(楊國忠)이 이임보가 죽은 후 또 권력을 독차지했다. 그는 재상이 된 후 혼자서 무려 40여 개의 관직을 겸임했다. 양국충은 성품이 강퍅하고 경솔해 조정을 독단으로 전횡했으니, “공경(公卿) 이하의 관리들에게 눈짓으로 호령하니 위축되어 떨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한편으로는 현종의 뜻에 맞추고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들을 피골이 상접하도록 수탈해, 조정 정사를 이임보 재임 시절보다 더욱 패망하게 만들었다.
《국사개요》에서는 이임보가 “천하의 난을 키웠다”면, 양국충은 “마침내 그 난을 완성시켰다”고 했다. 이임보와 양국충의 잇따른 전횡 및 백성들에 대한 수탈과 천하 재물을 긁어모은 것은 훗날 ‘안사(安史)의 난’을 위한 복선을 깔게 된다.
* 절제 없는 영토 확장
이 외에도 현종은 스스로 국력이 웅장하고 군대가 강성하다고 여겨 영토 확장에 매우 열중해 토번, 남조, 거란을 상대로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다. 이는 민족 관계를 악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재정이 부족하게 만들어, 이에 왕홍(王鉷) 같은 재물을 긁어모으는 신하들을 등용해 백성들에 대한 수탈을 한층 가중시켰다. 동시에 변방 군대의 군비를 대량으로 확충해 군사 배치상 밖은 무겁고 안은 가벼운 현상을 초래했다. 부병제가 붕괴함에 따라 개원 11년 모병제(募兵制)를 실시했다. 이들 용병들은 정부에서 식량과 봉급을 지급해야 했기에 군비가 큰 부담으로 떠올랐다. 개원 초기 군비는 200만 관이었으나 개원 말 군비는 1,000만 관으로 늘어났고, 천보 말년에는 군비가 1,500만 관까지 늘어났다. 한때의 ‘성세’가 어찌 이러한 빈번한 시련을 견뎌낼 수 있겠는가?
개원 연간 변경에는 총 10개의 절도사(節度使)가 설치되었는데, 그들은 “이미 토지를 소유하고, 인민을 소유하며, 갑병(甲兵)을 소유하고, 재부(財賦)를 소유해” 정권(政權), 군권(軍權), 재권(財權)을 한 몸에 집약시켜 반(半) 할거 세력을 형성했다. 현종 시기 변방에 주둔한 군사는 전국 총 병력의 85% 이상을 차지했다.
당 조정의 정사가 부패함에 따라 서역에서의 당조의 위신은 곤두박질쳤고 변경의 위기는 날로 가중되었다. 변경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조정은 절도사들에게 더욱 의존했다. 이러한 상황은 절도사들을 교만하고 횡포하게 만들었고, 자연히 중앙정부에서 벗어나려는 원심력이 날로 커졌다. 천보 연간 ‘안사의 난’이 바로 변경 절도사들이 난을 일으킨 것으로, 당조는 이때부터 성세에서 쇠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