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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사랑한 아들 칭기스칸 시리즈 10 – 【칭기스칸】 중도를 점령하고, 금나라의 절반 영토를 빼앗다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成吉思汗】占领中都 夺取金国半壁河山1212년 가을, 칭기스칸이 금나라를 향한 제2차 공격을 명령했다. (에포크타임스 제작)

칭기스칸의 1211년 금나라를 향한 공세는 몽골 군대의 승리로 끝났고, 몽골 대군은 금나라 북부 국경에 주둔하며 정비했다. 금나라 장수 유백림(劉伯林), 협곡장가(夾谷長哥) 등이 투항해 왔고, 그들은 나중에 모두 칭기스칸 수하의 장수가 된다. 한편 제베가 금나라의 동경을 함락시킨 것은, 그곳에서 오로지 나라의 부흥을 꾀하던 거란인이자 금나라 천호인 야율유가(耶律留哥)로 하여금 1212년 초에 공개적으로 금나라를 배반하고 스스로 “도원수”라 칭하게 만들었으며, 몇 달 사이에 십수만 명으로 발전했다. 그 후 그는 요동으로 진입한 몽골군과 만났고, 야율유가는 거란군의 이름으로 대몽골국에 의지하며 칭기스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그 후, 금나라가 병력을 보내 야율유가를 토벌하자, 칭기스칸은 3천 기병을 파견해 지원하게 했고 금나라 군대를 대패시켰다. 금나라 사람들은 연이어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병력을 손실했고, 게다가 동북 지역이 통제를 잃었으며 하북 한쪽 날개가 이미 상실되어 산서성 단독으로는 지탱할 힘이 없었다. 여기에 금나라 군주의 유약무능, 조정의 부패, 재정 문제, 그리고 남송의 견제가 더해져 금나라 위아래로 몽골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이미 크게 사라져 있었다. 5천만 명의 인구를 지닌 금나라는 이미 진흙 발 거인이 되어 있었다.

잇따라 금을 공략해 중도를 포위하자 금나라에 내란 발생

1212년 가을, 칭기스칸은 금나라를 향한 제2차 공격을 명령했다. 칭기스칸은 주력을 이끌고 서경을 포위 공격했고, 금나라 원수좌도감(元帥左都監) 오둔양(奧屯襄)이 군대를 이끌고 증원해 오자 칭기스칸은 그를 서경 동북쪽의 밀곡구 매복권 안으로 유인하여 그들을 전부 섬멸했다. 그 후 계속해서 서경성을 공격했는데, 공성할 때 칭기스칸이 유시에 맞자 마침내 포위를 철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213년 3월, 야율유가가 동북에서 왕을 칭하고 국호를 요(遙)라 하였으니, 역사상 동요국(東遼國)이라 칭하며 대몽골국의 부속국이 되었다. 7월, 칭기스칸이 세 번째로 남하해 금나라를 공격했다. 먼저 이전에 버렸다가 금나라 군사들이 다시 점거했던 장성 변의 보루를 취하고, 그후 선덕부(宣德府), 덕흥부(德興府)를 함락시켰으며, 주력을 이끌고 선덕 동남쪽의 회래현(懷來縣 오늘날의 하북성 회래 동쪽)에서 금나라 군대와 교전했다.

금나라 군대는 완안강(完顏綱), 술호고기(術虎高琪)가 통솔하는 10여 만 명이었다. 몇 차례 교전 끝에 금나라 군대는 적수가 되지 못하고 무너졌고, 몽골군은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거용관 북쪽 입구에 도달했다.

거용관은 천험의 요새로, 남북 두 개의 입구로 나뉘는데, 두 구 사이에는 두 산이 마주 솟아 있고 가운데는 또 깊은 골짜기가 있어 방어하기는 쉽지만 공격하기는 어려웠다. 금나라는 이곳에 중병(重兵)을 주둔시키고 철을 녹여 좁은 관문을 봉폐했으며, 또 거용관 밖 백여 리 되는 곳에 철 질려를 깔아놓아 몽골인의 공격을 엄히 방어했다. 칭기스칸은 강공을 하면 반드시 위험이 겹칠 것을 헤아리고, 이에 실한 곳을 피하고 허한 곳을 쳐서, 오직 소수의 병력만을 북구에 남겨 공격하는 척 하고, 일찍이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차팔아화자(劄八兒火者)를 파견해 제베를 인도해 샛길로 남구를 습격하여 취하게 함으로써 남북에서 협공해 거용관을 탈취했다. 칭기스칸은 친히 주력을 이끌고 우회하여 남하했다.

清 董邦达《居庸叠翠图》。(国立故宫博物院提供)

청 동방달의 《거용첩취도(居庸疊翠圖)》. (국립고궁박물원 제공)

금나라 사람들이 몽골인들의 의도를 알게 된 후, 급히 오둔양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저지하게 했다. 그가 자형관(紫荊關 오늘날의 하북성 이현 서북)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몽골 대군이 관을 지나간 뒤였고, 칭기스칸은 무칼리에게 명령해 오둔양의 군대를 방어하게 했다. 양측은 오회령(五回嶺)에서 교전했고, 금나라 군대가 크게 패배했으며, 몽골군은 마침내 동쪽으로 향해 떠났다.

이때 금나라 안에서 내란이 발생했다. 앞서 언급한 서경 수장 호사호(胡沙虎)가 1211년에 중도로 도망쳐 돌아온 후, 죄를 묻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우부원수(右副元帥) 겸 권상서좌승(權尚書左丞)으로 승진했다. 그는 더욱 기탄없고 방자해져서 자청하기를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선덕주(宣德州)에 주둔하겠다고 했으나, 조정에서는 오직 3천 명만을 그에게 떼어 주며 규천(媯川)에 주둔하라고 명했다.

1212년 정월, 호사호가 다른 곳으로 주둔지를 옮길 것을 청하자 조정의 불만을 야기하여 죄를 추궁당하고 파면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다음 해에 호사호는 또 중도로 소집되어 군사를 미리 의논하게 되었으나, 재상 도단일 등이 호사호를 임용할 수 없다고 여겨 그는 또 쫓겨났다. 파면된 후, 호사호는 황제 완안영제 좌우의 환관들과 극력으로 결탁해 다시 등용되기를 청했다. 5월에 그는 우부원수로 임명되어 무위군(武衛軍) 수천 명을 이끌고 중도성 북쪽에 주둔했다.

몽골 대군이 날로 다가옴에 따라, 우부원수인 호사호는 맞서 싸울 준비는 하지 않고 도리어 사냥에 빠져 지냈다. 이것이 완안영제의 질책을 사게 되었고, 호사호는 심한 불만을 품었으며, 마침내 8월 25일 밤에 군대를 이끌고 중도성에 진입해 수비군을 죽이고 황궁을 포위해 완안영제 등을 시해했다. 본래 그는 자신이 황제로 등극하고자 했으나, 도단일이 그를 설득하여 말하기를, 금나라의 황제는 예로부터 모두 완안씨였는데, 지금 그대가 황제를 죽이고 그 자리를 대신하려 한다면 만약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반대하러 올 때 황위 또한 오래 앉아 있지 못할 것이라 했다.

호사호가 이 말이 옳다고 여겨 완안순(完顏珣)을 추대해 황제로 삼았으니, 역사상 이를 금 선종(宣宗)이라 칭한다. 호사호는 새 황제를 추대한 공로로 태사, 상서령, 도원수로 봉해지고 택왕(澤王)으로 책봉되는 등 조정의 대권을 장악했다.

몽골인들의 공세에 직면해, 원수우감군(元帥右監軍) 술호고기가 거듭 싸워도 이기지 못하자, 호사호가 그를 협박하며 만약 다시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군법으로 처단하겠다고 했다. 다시 출전했으나 술호고기가 또 패배했다. 죽임을 당할까 두려운 그는 10월 15일 군대를 이끌고 중도에 진입하여 호사호를 살해한 뒤 황제에게 죄를 빌었다. 금 선종은 그를 사면하고 좌부원수(左副元帥)로 임명했으며, 한 무리의 장사들에게도 각각 등급에 따라 봉상을 내렸다. 나중에 금 선종은 또 조서를 내려 폐위당한 완안영제를 회복시켜 위왕(衛王)으로 삼고 시호를 소(紹)라 하였으니, 후세 사람들은 그를 “위소왕(衛紹王)”이라 칭한다.

이때의 몽골 대군은 이미 역주(易州), 탁주(涿州)를 격파하고, 거용관을 공격해 차지했으며, 양 군이 중도를 직접 압박했다. 하지만 중도는 험고(險固)해서 곧바로 함락시키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해, 칭기스칸은 오직 일부 군대만 남겨 중도를 포위하게 하고, 나머지는 세 갈래로 병력을 나누어 황하 이북의 여러 주를 평정하게 했다.

황하 이북의 여러 주를 평정

이 세 갈래 인마(人馬)의 병력 상황은 이랬다. 칭기스칸의 세 황자 주치, 차가타이, 우구데이가 우군(右軍)이 되어 태항산을 따라 남하하며 보주(保州), 수주(遂州), 안숙, 안주, 정주, 형주, 명주, 자주, 상주, 위주, 휘주, 회주, 맹주를 취하고, 택주, 로주, 요주, 심주, 평양(平陽), 태원, 길주, 습주를 약탈하며, 분주, 석주, 남주, 흔주, 대주, 무주 등을 함락시키고 돌아왔다.

칭기스칸의 아우 카사르 및 옷친나얀, 졸차(拙赤), 박찰(薄刹)이 좌군(左軍)이 되어 바다를 따라 동쪽으로 나아가 계주, 평주, 란주, 요서의 여러 군을 취하고 돌아왔다.

칭기스칸과 황자 톨루이가 중군(中軍)이 되어 웅주, 패주, 막주, 안주, 하간, 창주, 경주, 헌주, 심주, 기주(祁州), 여주, 기주(冀州), 은주, 복주, 개주, 활주, 박주, 제주, 태안, 제남, 빈주, 체주, 익도, 치주, 유주, 등주, 래주, 기주(沂) 등을 취했다. 또 무칼리에게 명령하여 밀주(密州)를 공격하게 했다.

겨울 10월, 칭기스칸이 회병하여 중도 부근에 이르렀고, 세 갈래의 인마가 모두 잇따라 돌아와 중도 서쪽의 대구(大口)에서 군대를 모았다. 이 해에 하북의 군현(郡縣)들은 11개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것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모두 몽골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다.

금나라 도성이 남쪽으로 천도하고, 몽골이 중도를 취하다

칭기스칸의 몽골 대군은 중도 북쪽 근교에서 1214년 3월 봄까지 주둔했고, 여러 장수들이 승세를 타고 중도를 깨자고 청했으나 칭기스칸은 동의하지 않고, 도리어 사신을 보내 금 선종에게 말했다.

“금나라의 산동, 하북 군현은 이미 모두 우리에게 점령되었고, 너희들이 수비하는 것은 오직 연경성(燕京城 중도)에 불과할 뿐이다. 하늘이 이미 너를 약하게 만들었는데, 내가 다시 너를 억지로 험지에 들어가게 한다면 하늘이 나를 어떻게 보겠느냐? 그러므로 나는 군대를 돌이키려 한다만, (내 수하들이 동의하지 않으니), 너는 어떤 방법으로 나의 몽골 제장들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겠느냐?”

금 선종이 대신들과 함께 상의하니 어떤 이는 주전(主戰)을 주장하고 어떤 이는 주화(主和)를 주장했으니, 즉 몽골인들이 퇴병한 후에 다시 싸우고 지킬 계책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이에 금 선종은 사신을 보내 화친을 구하고, 위소왕의 딸 기국(岐國)공주 및 금백(金帛), 동남동녀 5백 명, 말 3천 필을 칭기스칸에게 바쳤으며, 또 승상 완안복흥(完顏福興)을 파견해 칭기스칸 일행을 전송해 거용관을 나가게 했다. 화약(和約 평화협약)을 체결한 후 칭기스칸은 병력을 철수하였고, 전군이 북쪽으로 돌아갔다. 금나라는 잠시 숨을 돌릴 기회를 얻었다.

金宣宗为了与蒙古和谈以解中都之围,1214年将卫绍王的女儿岐国公主(图中左边马上的人物)送给成吉思汗和亲,而后蒙古退回漠北地区。本图出自《史集》。(公有领域)

금 선종이 몽골과 화친을 맺어 중도의 포위를 풀기 위하여, 1214년에 위소왕의 딸 기국공주(그림 속 왼쪽 말 위의 인물)를 칭기스칸에게 보내 화친하게 했고, 그 후 몽골은 막북 지역으로 물러났다. 그림 출처는 <집사>. (공유 영역)

5월에 금 선종은 국내에 대사면령을 내렸고, 나라가 위축되고 병력이 약하며 재정이 결핍되어 중도를 지킬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또 도단일과 태학생들의 반대를 아랑곳하지 않고 수도를 남경인 변경(汴京 지금의 개봉)으로 옮기기로 결정했으며, 황하의 천험(天險)에 의지해 경성을 보호하기를 바랐고, 완안복흥 및 참정 말연진충(抹撚盡忠)에게 명해 태자 수충(守忠)을 보좌하여 중도에 남아서 지키게 했다. 그러나 진정한 원인은 금 선종이 몽골군이 다시 중도를 공격하여 스스로 험지에 빠질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금 선종이 중도 서남쪽의 양향(良鄉)에 이르렀을 때, 호송하던 거란 투항군에게 원래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갑옷과 말을 전부 관에 바치라고 명령했다. 이로 인해 거란 투항군은 금나라가 신의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마침내 원망하는 말을 내뱉었으며, 심지어 난을 일으켜 금나라 주수(主帥)를 살해하고, 작답(斫答) 등 거란인을 주수로 추대하여 중도를 공격했다. 중도 수비 사령관 완안승휘(完顏承暉)가 병력을 보내 막았으나, 작답은 사람을 보내 칭기스칸에게 투항하겠다며 원조를 청했다.

당시 칭기스칸은 어아락(魚兒濼 하북 장북현 서북쪽)에서 피서하고 있었다. 그는 금나라 군주의 천도와 작답의 난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해 말했다.

“금나라 군주가 이미 나와 화친하고 우호적으로 지내기로 해놓고 도리어 남쪽으로 천도를 선택한 것은, 의심이 있기 때문이니, 다만 화의를 가지고 나를 속인 것이로구나.”

칭기스칸은 마침내 사무합(撒木合)에게는 몽골군을, 석말명안(石抹明安)에게는 투항한 금나라 군병을 거느리고 고북구(古北口)로 들어가 작답의 거란인들과 회합해 함께 중도를 포위하게 했다. 가을 7월에 금나라 태자 수충이 남경으로 도망갔고, 중도는 더욱 인심이 흉흉해졌다. 한편 사무합 등은 성을 포위하고 지원군을 치면서 투항을 권유하는 책략을 취하여, 금나라 우부원수 포찰기(蒲察圻) 등이 투항하도록 강제했다. 또 조운을 끊었으며, 금나라의 지원병 및 식량 운반대를 섬멸해 중도의 식량이 다하고 원조가 끊어지게 했다. 그동안 칭기스칸은 또 부장 오묵하이(唵木海)의 건의를 받아들여, 중원의 선진 기술을 흡수하고 몽골 포군(炮軍)을 조직했으며, 이때부터 성을 공격할 때는 투석기를 우선으로 사용하는 것을 중시했다.

10월에 칭기스칸은 또 무칼리에게 명령하여 요동으로 진군하게 함으로써 야율유가를 지원하게 했다. 무칼리가 요동을 정벌할 때, 고주(高州)의 노종(盧琮), 금박(金樸) 등이 항복했고, 금주(錦州)의 장경(張鯨)이 그 절도사를 살해하고 스스로 임해왕(臨海王)이라 칭하며 또한 사신을 보내 항복해 왔다. 그때 금나라는 포선만노(蒲鮮萬奴)를 시켜 대군을 거느리고 야율유가를 공격하게 했는데, 몽골인들의 지원 아래 야율유가는 귀인현(歸仁縣 지금의 요녕 창도) 북쪽 하천 위에서 금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승세를 타고 요동의 주군(州郡)을 점령했으며, 함평(咸平)에 도읍을 정하고 중경(中京)이라 불렀다.

1215년 1월, 무칼리와 야율유가가 금나라의 동경을 공략해 점령하고 수비하던 금나라 신하 인답호(寅答虎) 등 47명의 항복을 받아내었으며 32성(城)을 평정했다. 야율유가의 부하들이 그에게 칭제(稱帝)할 것을 권유했으나 그는 줄곧 거절했다. 11월에 야율유가가 비밀리에 자신의 아들 설도(薛闍)와 함께 두터운 예물을 가지고 막북으로 가서 칭기스칸을 알현했다. 칭기스칸이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금호부(金虎符)를 하사하고 그를 요왕(遙王)에 봉했다.

3월에 금 선종은 중도를 수비하던 사령관인 완안승휘가 백반으로 쓴 다급함을 고하는 주장(奏章)을 쓴 후에, 원수좌감군(元帥左監軍) 완안영석(完顏永錫), 원수좌도감(元帥左都監) 오고론경수(烏古論慶壽)에게 각각 군대 3만 9천 명을 거느리고 중도를 구원하러 가라고 조령을 내렸고, 어사중승 이영(李英)을 파견하여 하간부 청주, 창주의 항몽 의용군을 모집하게 하였으며, 그에게 청주에서 출발하여 군량을 운반해 중도를 구하러 가라고 명령했다.

이영이 대명부(大名府)에 이른 후에 수만 명의 병사를 모집하고, 각 사람마다 식량 세 말을 짊어지게 명했으며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도중에 이영의 부대가 몽골 군대와 패주 북쪽에서 만났는데, 이영이 술에 크게 취하여 군대를 통솔하지 못하여 금나라 군대는 대패했고, 이영은 전사했으며, 사졸들은 전멸당했고, 압송하던 군량은 모조리 몽골군에게 탈취당했다. 오고론경수, 완안영석은 군대를 거느리고 이미 탁주(涿州)에 이르렀으나 역시 몽골군에게 격파되었고, 그들은 군대를 거느리고 흩어져 달아나 돌아왔다.

이로부터 중도를 구원하려는 시도는 전부 실패했고, 중도는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히 끊어졌으며, 성 안에는 기근이 심각해 심지어 사람을 잡아먹는 상황까지 나타났다. 5월에 몽골인들이 공성 작전을 펼쳤고, 한 번에 곧 수백 문의 포를 사용하기에 이르러 신속하게 성을 격파했다. 더 이상 지탱할 힘이 없던 완안승휘는 독약을 먹고 자살했고, 부사령관인 말연진충은 도망쳤으며, 남은 무리들이 성을 바치고 항복했다.

몽골군이 중도를 점령한 후에 이름을 바꾸어 연경이라 하고, 칭기스칸은 시키쿠투쿠(失吉忽突忽), 왕고아(汪古兒), 카사르(哈撒兒)를 보내 위로하게 했으며, 중도성 창고의 재물을 검사해 모두 몽골 초원으로 운송하게 했다. 금나라 창고를 지키는 하급 관리가 스스로 똑똑한 체하며 일부 재물을 세 사람에게 보냈으나 오직 시키쿠투쿠만이 거절했다. 그가 말하기를, “이 물건들은 이전에 모두 금나라 황제의 것이었으나 우리에게 점령당했으니, 지금은 곧 칭기스칸의 재물이다. 단 1푼이라도 누구도 사사롭게 차지할 수 없다”고 했다. 칭기스칸이 그 소문을 듣고 그를 칭찬했다.

7월에 칭기스칸은 사신을 보내 금 선종에게 “만약 하북과 산동의 아직 공략되지 않은 성들을 바치고 금나라 임금의 제호(帝號)를 철폐한다면, 금나라 군주를 하남왕으로 삼을 수 있다. 몽골 또한 병력을 거둘 것이다”라고 효유했다. 하지만 금 선종은 이를 거절했다.

한인(漢人) 장인의 장점을 알게 된 후에, 몽골인들은 성을 공략하고 땅을 빼앗는 동시에 특히 장인을 수색하는 것을 중시하여, 어떤 때에는 한 성에서 수만 명을 얻기도 했다. 수많은 장인을 얻은 후 칭기스칸은 명령해 공장군(工匠軍 일종의 공병대)을 건립하게 하고, 공장을 만들어 철을 녹여 병기를 제조하게 했다. 게다가 몽골인들은 또 통신 연락상에서 “전속전기(箭速傳騎-화살처럼 빨리 다리는 신속 기병)”를 창건하여 하루에 수백 리를 달렸으며, 군령 전달과 군대 조련 속도가 빨라졌고, 기병의 장점을 잘 발휘했는 데 이를 “몽골 선풍(旋風)”이라 불렀다.

1215年,蒙古军围攻金国中都。本图出自《史集》。(公有领域)

1215년, 몽골군이 금나라의 중도를 포위 공격하는 모습. <집사>. (공유 영역)

금나라의 반쪽 강토를 빼앗다

몽골인들의 연이은 공세는 금나라 정권을 아주 위태롭게 만들었다. 이때 몽골인들은 이미 중도를 포함한 성읍 총 862좌(座)를 차지했고, 금나라의 판도는 축소되어 가고 있었다.

1216년 봄, 칭기스칸은 어아락에서 여구하 행궁(廬朐河行宮 현재 몽골 동부 크룰렌강 변)으로 돌아왔고, 요서 및 중원의 주현을 조속히 공파하고 금나라 남경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키기 위하여, 그는 체르비(扯兒必 시종이란 의미) 탈룬(脫侖)과 무칼리를 파견하여 관동 일대의 아직 공략되지 않은 곳을 평정하게 했다. 반년 내에 기본적으로 평정되었다.

그해 가을 8월에 칭기스칸은 또 사무합에게 1만 기병을 거느리고 서하를 거쳐 관중으로 향하며, 하서 지역에서 섬서로 진입해 동관(潼關)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동관은 난공불락이라 몽골군은 첫 공격이 순조롭지 못하자, 곧 동관을 우회해 남쪽 측면의 산지로 진입했다.

산지의 길 상태는 매우 위험했으나 강인한 몽골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들은 위험하고 양의 창자처럼 구불구불한 좁은 길을 걸으며 철창을 하나하나 서로 연결하여 산골짜기의 준곡 위에 “다리”를 가설했다. 겹겹의 위험과 방해를 거친 그들은 산봉우리에 기어올랐고, 하늘에서 내려오듯 여주(汝州)로 향했으며, 금나라의 남경 변경 서남쪽에 홀연히 나타나 금나라 사람들의 예상을 크게 벗어났다. 금나라 군대 중에서 감히 직접 그들과 싸울 자가 없으니 분분히 흩어지며 무너졌다.

그 뒤로 사무합 부대는 변경(汴京)으로 곧장 달렸고, 그곳에서 20리 떨어진 행화영(杏花營)에서 금나라를 지원하러 온 지방 의용군인 화모군(花帽軍)과 만났다. 몽골인들이 우세를 점하지 못하자 사무합은 마침내 부대를 거느리고 섬주(陝州 하남 섬현)로 퇴각했다. 마침 황하 물이 얼어붙어 몽골인들은 이에 황하를 건너 정비했다.

11월에 몽골인들은 다시 동관을 공격했고, 금나라의 안서군 절도사 니방고포로호(泥旁古蒲魯虎)가 전사하면서 동관이 몽골인들에게 함락되었다. 그러나 구원군으로 파견되었으나 두려운 나머지 몽골인과 감히 전쟁을 치르지 못하고 동관의 함락을 좌시했던 완안영석(完顏永錫)은 도리어 겨우 작위만 깎이는 작은 처벌을 받았다. 이것이 금나라 군대의 인심을 위아래도 더욱 산란하게 만들었다.

동관을 함락시킨 후에 한동안 정비를 거친 후, 사무합은 군대를 거느리고 협주(峽州) 등을 탈취했고, 그런 다음 동진하여 다시 변경을 향해 진군했다. 변경성 아래에 도착한 후에 사무합은 정탐 결과 금나라가 중병을 주둔시키고 있어 곧바로 공격해서 얻기는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에 황하를 건너 북상해 평양부(平陽府 산서 임분현)를 포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몽골 대군에 대항할 힘이 없음을 절감한 금 선종은 사신을 칭기스칸에게 보내 화친을 구했고, 칭기스칸은 응낙할 준비를 하고 조서를 내려 사무합에게 철군하라고 했다. 하지만 군공없이 돌아가길 원치 않았던 사무합은 마침내 사람을 보내 금나라 군주에게 다시 예전과 같은 조건을 제기했다. 하북과 산동의 아직 공략되지 않은 성들을 바치고 금나라 군주의 제호를 철폐하면 몽골이 병력을 거두겠다는 것이었다. 금나라 군주가 거절하자 평화회담은 다시 좌절되었다.

1211년 칭기스칸이 금나라를 향한 전쟁을 발동한 이래, 몽골 기병은 장성 안팎을 종횡무진 누비며 대량의 금나라 군대 주력을 섬멸했고, 금나라의 반쪽 강토를 함락시켰으며, 몽골 군대 또한 확충되었다. 특히 군에서 사용하는 용구와 무기를 제조하는 대량의 장인들을 얻은 후에 실력이 크게 증대했다. 그러나 이전과 마찬가지로 많은 주현에 대해 몽골군은 일단 점령하고 약탈한 뒤에 곧바로 철수했다. 한편 금나라는 바람 앞에 흔들리는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계속 발버둥 쳤고, 금나라 남쪽의 송조(宋朝) 역시 오랫동안 누적된 쇠약으로 금나라와 전쟁을 치를 힘이 없어 그저 가정화의(嘉定和議)를 중지하고 세폐 바치는 것을 중지했을 뿐이다. 송조는 그 뒤에 마침내 몽골인들에게 멸망당하는데 여기서부터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1217년, 몽골군은 또 무평(武平)과 패주(覇州)에서 금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8월에 요서를 평정하고 요동을 다시 안정시킨 공로로, 칭기스칸은 무칼리를 태사(太師)이자 국왕(國王)으로 봉하고 서권금인(誓券金印)을 하사하며 조서를 내려 말했다.

“자자손손 나라를 전해 세세토록 끊이지 않으리라.”

또 그에게 전권을 주어 몽골병 1만 3천, 옹구트부병 1만 및 몽골에 항복한 거란, 한족 여러 군대를 통솔해 금나라를 공격하라고 명령했고, 또 그에게 중원의 호걸들을 초청해 받아들이고 행성을 설치해 중원을 경략하라고 유시(諭示)했으며, 자신은 주력을 이끌고 몽골로 돌아와 서정을 준비했다. 세계는 이로부터 크게 진동하게 된다.

(계속)

참고자료:
《蒙古秘史》
《元史》
《成吉思汗與今日世界之形成》
《中國曆代戰爭史》(元朝) 台灣出版
《金史》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0/11/6/n12531008.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