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샤오(刘晓)
【정견망】
추석순(鄒錫淳)은 자가 공미(公眉)·고여(古馀), 호가 예호(醴湖)이며, 강소성 진강부(鎮江府) 사람이다. 청나라 건륭 50년(1785) 5월 23일에 태어났으며, 몰년은 미상이다. 가경 13년(1808) 순천(順天)의 거인(舉人)이 되었고, 국자감학정(國子監學正)을 거쳐 강소성 회양도(淮揚道) 도태(道台) 관직에 이르렀다. 도광 3년(1823) 5월, 하북동(河北道)에 보임되어 무척현(武陟縣)에 주재하며 회경(懷慶)·장덕(彰德)·위휘(衛輝) 삼부(三府)를 관할했다.
그가 소년 시절일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으나 절개를 지켜 다시 시집가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오로지 마음을 다해 아들을 길러 그 현숙한 이름이 사방에 널리 알려졌다.
추석순이 11살 때, 진강에 큰가뭄이 들어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지부(知府)는 현지 성내외의 부유한 가문들에 호소하여 이재민을 구제할 돈과 곡식을 기부하도록 했고, 추 씨 가문 역시 넉넉한 집안에 속했다. 당시 진강의 최고 부자는 재산이 약 2백만~3백만 냥의 은화에 달했으나, 추 씨 가문의 재산은 대략 2만 냥 정도였다.
구제 소식을 들은 추 씨 어머니는 아들에게 말했다.
“내 아들아, 네가 장차 큰일을 이룬다면 비록 1만 냥의 은화만 있어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요, 만약 이렇다 할 일 없이 평범하고 변변찮은 사람이 된다면 비록 백만금의 재산이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올해는 흉년이니, 마땅히 선을 행하고 복덕을 쌓아야 한다. 너는 오늘 지부 관아에 가서 1만 냥의 은화를 기부하거라.”
어머니의 분부에 따라 추석순이 관아에 도착했을 때, 이미 관아에는 몇몇 부유한 가문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는 아직 아이였기 때문에 가장 뒷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기부 액수를 적을 때가 되었으나, 사람들은 서로 양보하며 누구도 감히 먼저 숫자를 적으려 하지 않았다. 추석순이 아이인 것을 본 지부 어른은 그에게 먼저 기부할 액수를 적도록 했고, 추석순은 이에 1만 냥의 은화를 기부하겠다고 적어 넣었다.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크게 놀랐다.
이에 지부가 물었다.
“네 집 재산이 2만 냥을 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이제 1만 냥을 기부한다고 적었으니 혹시 잘못 적은 것이 아니냐?”
추석순이 대답했다.
“저는 어머니의 명을 받들었는데 감히 잘못 적을 리가 있겠습니까?”
지부는 믿지 않았고, 사람들도 모두 깊이 의심하여 함께 추 씨 집으로 가서 사실을 확인하려 했다. 추 씨 어머니는 늙은 하인을 보내 지부에게 답변을 전하게 하였는데, 1만 냥의 은화를 기부한다는 것은 과연 거짓이 아님을 확인해 주었다.
진장의 온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모두 추 노부인의 고결한 덕행을 찬탄했다. 모든 부유한 가문들이 깊이 감동하여 다투어 기부와 곡식 내놓기에 동참했다.
추석순은 장성한 후 4품 대관인 도태(道台)에 올랐다. 추 노부인은 70세 넘도록 살았다. 손자인 추조배(鄒祖培)는 호북(湖北) 일대에서 소금 상인으로 일하며 재산이 수십만 냥에 달했다. 함풍 4년(1854), 태평천국군이 진강을 점령했다. 추조배의 온 가족은 무사히 탈출하여 장강 북쪽으로 피난할 수 있었다. 비록 집안은 이때부터 쇠락했으나, 온 가족이 전란 속에서도 모두 안전무사할 수 있었다.
만약 추 노부인이 널리 복덕을 쌓지 않았더라면, 추 씨 가문의 자손들이 어찌 이와 같은 복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또한 청나라 강희년간 산동(山東) 출신으로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오른 왕즐(王骘)의 어머니인 왕 태부인 역시 남 돕기를 좋아하고 베풀기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어느 해, 왕 씨 가문에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지역에 큰가뭄이 들어 다섯 명의 굶주린 백성들이 왕 씨 집에 찾아와 먹을 것을 구걸했다. 당시 왕 씨 집에는 쌀이 겨우 세 말밖에 없었다. 선량한 왕봉옹(王封翁, 왕즐의 아버지)은 이 쌀을 모두 굶주린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했다.
왕 태부인이 말했다. “세 말의 쌀로는 다섯 명의 주린 이를 살릴 수 없습니다. 차라리 그들을 집에 머물게 하고, 당신과 저 부부가 매일 나가서 땔감을 하고 채소를 팔아 벌어들이는 돈으로 일곱 식구를 먹여 살리기에 족할 것입니다. 내년에 풍년이 들거든 그때 고향으로 돌려보내시지요.”
왕봉옹도 이에 동의했다.
이와 비슷한 선행은 왕즐의 부모가 행한 것 중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왕즐이 상서가 된 이후부터 왕 씨 가문의 자손들 중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이들이 끊이지 않았고, 고관대작과 귀한 인물들이 대대를 이어 배출되었다.
출처: 청나라 《권계록팔록(勸戒錄八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