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8년—907년)
심연(心緣)
【정견망】
사학(史學) 편
당조(唐朝) 이전의 사서(史書)는 대개 개인 편찬이었다. 당 태종 때에 이르러 비로소 사관(史館)을 설립하고 전담 인원을 지정하여 전대(前代)와 본조(本朝)의 국사를 편수하게 했으며 재상으로 하여금 감수하게 했다. 이로부터 정사로서 기전체(紀傳體) 사서의 편수 작업은 완전히 조정에서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당조부터 시작하여 이후 각 조대가 이 제도를 따라서 연속해서 사서를 편찬하니 점차 하나의 제도가 되었다. 지금까지 나온 정사(正史) 24사 중에서 당조 때 편수된 것만 8부에 달하니, 즉 《진서(晉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수서(隋書)》 6부와 이연수(李延壽) 개인이 편찬했으나 조정의 승인을 얻어 정사가 된 《남사(南史)》 및 《북사(北史)》 2부다. 양, 진, 북제, 주, 수 5사에 《지(志)》가 없음을 감안하여 나중에 다시 《오대사지(五代史志)》를 증수(增修)했으니, 이것이 바로 현재 《수서》 안에 들어 있는 《지(志)》이다.
상술한 정사 외에도 당조에는 또 사학 대가 몇 사람이 출현했다. 예컨대 평생의 정력을 다해 《사통(史通)》 20권을 편찬한 유지기(劉知幾 661~721년)가 있다. 이 책은 중국 최초의 체계적인 사학 이론 전문 서적이다. 이 책에서 유지기는 과거의 사학 저작에 대해 체례(體例), 사료(史料), 언어문자에서부터 인물 평가, 사실 기록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인 분석과 비판을 진행하여 자신의 독특한 견해를 제시했다. 그는 역사가와 역사를 쓰는 것에 대해 몇 가지 기준을 제시하며, 우수한 역사학자는 반드시 재(才 재능), 학(學 학문), 식(識 식견)의 ‘세 가지 장점’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식’을 강조했다.
역사를 쓰는 것에 대해 그는 ‘직필(直筆)’을 제창하며 “훌륭한 역사가는 실록(實錄)과 직서(直書)를 귀하게 여긴다”고 주장했다. “악(惡)을 숨기지 않고, 아름다움을 꾸며내어 허황되게 쓰지 않는다.” “권력자를 피하지 않고”, “아첨해서 비위를 맞추거나 감추는 바가 없어야 함”을 요구했다. 《사통》은 후세 사학 발전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현종 시기의 두우(杜佑 735~812년)는 유질(劉秩)의 《정전(政典)》을 바탕으로 확충하고 개편하여 30여 년의 시간을 들여 《통전(通典)》 200권을 완성했으니, 식화(食貨), 선거(選擧), 직관(職官), 예(禮), 악(樂), 병(兵), 형(刑), 주군(州郡), 변방(邊防 변경 방어)의 9문으로 나누어 상고부터 당 대종(代宗) 연간에 이르기까지 각종 전장(典章)제도의 연혁을 기록하였으며, 당조(천보 이전)에 관한 기록이 특히 상세하다.
《통전》은 중국 최초로 전장제도를 기록한 전문 역사서로, 극히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닐 뿐만 아니라 후대의 전장제도 분류 전문 사서의 선례를 열었다.
이길보(李吉甫 758~814년)가 지은 《원화군현지도(元和郡縣圖志)》는 역사 지리 전문 저작으로 총 40권이다. 각 군현(郡縣)의 호구(戶口), 물산(物産), 산천 고적, 지리 연혁 등의 내용을 기록하여 당대(唐代) 역사와 지리를 연구하는 중요한 저작이다. 원서 각 진(鎭) 처음에 나오는 지도는 송조 때 이미 유실되었으므로 후인들은 이를 다시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라 고쳐 불렀다.
산문·전기(傳奇) 편
당대 이전, 특히 남북조 시기에는 변체문(駢體文)이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변체문은 성률(聲律), 사조(詞藻 화려한 수사), 전례를 사용해 문풍(文風)이 미미하고 형식이 굳어져서 내용이 공허해져 풍부한 현실 생활을 반영할 수 없었다. 당대(唐代) 경제와 문화의 발전에 따라 이러한 문체 형식은 이미 현실 사회의 요구에 적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대에 고문(古文)을 제창하는 운동이 출현했다.
고문운동의 실질은 고대 산문의 우수한 전통을 계승하는 바탕 위에, 자연스럽고 질박하며 내용에 중점을 두는 새로운 산문체로 한계에 도달한 변문(駢文)을 대체하고자 하는 것으로, 문체, 문풍, 문학 언어가 시대적인 요구에 적응하게 하려는 혁신 운동이었다.
초당(初唐)의 진자앙이 이 운동의 초석을 놓았고, 고문운동의 주요 제창자는 한유(韓愈)였다. 한유는 글을 쓸 때 창조성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인습과 모방을 반대했다. 그는 자신이 제창한 새 산문체를 각 방면의 글쓰기에 광범위하게 응용해, 일찍이 높은 예술적 기교를 지닌 300여 편의 산문을 써냈다. 그의 작품은 기세가 웅혼하고 감정이 풍부한데다 문자가 정교하고 세련되며 언어가 생동해 후세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외에도 유종원(柳宗元)이 고문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발휘하였으니, 그의 400여 편 산문은 매우 높은 성취를 지니고 있다. 유종원의 산수 여행기(山水遊記)는 자연 경관에 대한 묘사가 생동하고 진실해서 역시 높은 조예를 지니고 있다.
당조 중·후기에는 도시 경제의 번영으로 인해 그에 상응해 전기(傳奇)소설이 출현했다. 육조(六朝)의 지괴(志怪)소설과 비교할 때 전기소설에서 활동하는 주인공은 이미 귀신이 아니라 현실 생활 속의 사람이었으므로 작품이 비교적 풍부한 사회 내용을 지니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당대 고문운동은 소설 창작을 위해 표현력이 뛰어난 새로운 산문체를 제공했고, 시가(詩歌)의 발달 역시 풍부한 영양분을 공급해 전기소설의 창작 예술은 각 방면에서 새로운 발전을 이루었다.
전기소설의 출현은 중국의 고전 소설이 싹트는 단계를 벗어나 점차 발육하고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유명한 작품으로는 심기제(沈既濟)의 《침중기(枕中記)》, 이공좌(李公佐)의 《남가태수전》, 진홍(陳鴻)의 《장한가전》·《동성노부전》, 백행간(白行簡)의 《이왜전(李娃傳)》, 장방(蔣防)의 《곽소옥전》, 원진(元稹)의 《앵앵전(鶯鶯傳)》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