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8년—907년)
심연(心緣)
【정견망】

과학기술 편
천문학
당대의 뛰어난 천문학자 일행(一行 683~727년) 화상은 본래 성이 장(張)씨이고 이름은 수(遂)이며, 위주(魏州) 창락(昌樂 지금의 하남 남락南樂) 사람이다. 724년(개원 12년), 일행 화상은 동시대의 공학 전문가 양령찬(梁令瓚) 및 장인들과 함께 황도유의(黃道遊儀)를 만들어 해, 달의 위치와 운동 상황을 관측하는 데 사용했다. 일행은 관찰을 통해 항성의 위치가 이동하는 현상을 발견했다. 이는 영국 천문학자 할리가 1718년에 항성도 스스로 움직인다는 관점을 제시한 것보다 거의 1,000년이 앞선 것이다.
724년, 일행은 또한 전국 24개 지역에서 북극의 고도와 동지·하지, 추분·춘분 날의 해 그림자 길이를 측정할 것을 제의하였고, 복구도(複矩圖)라 부르는 일종의 기구를 설계해 북극 고도를 측정하는 데 사용했다. 일행은 이 측정에서 남북 두 지역의 차이가 351리 80보(현재의 129.22킬로미터)이고 북극 고도가 1도 차이 난다는 것을 계산해 냈다. 이 데이터가 바로 지구 자오선(경도) 1도의 길이가 된다. 현대적인 측정에 따른 자오선의 길이 111.2킬로미터와 비교할 때 비록 오차가 존재하긴 하지만, 이러한 과학적 방법으로 자오선을 실측한 작업은 세계 최초였다.
일행은 725년부터 새 역법을 만드는데 착수해 727년(개원 15년)에 완성을 보고 이름을 《대연력(大衍曆)》이라 지었다. 이 역법은 체계가 정밀하고 구조가 합리적이며 실제 천문에 비교적 부합하는 당시로선 아주 선진적인 역법이었다. 후대의 역법가들은 거의 모두 이 구조에 따라 역법을 편찬하였으니 명나라 말기 서양의 역법을 흡수한 후에야 비로소 변화가 있었다.
목판 인쇄술
인쇄술은 중국 고대 4대 발명 중 하나다. 가장 오래된 인쇄술은 목판 인쇄로, 대략 7세기 중엽에 이미 목판으로 인쇄한 불상(佛像)이 있었다. 780년대에 이르러 상인이 세금을 납부했다는 증거로 쓰는 일종의 영수증에 해당하는 ‘인지(印紙)’가 출현했다.
824년(장경 4년), 시인 원진이 백거이의 《장경집》을 위해 쓴 서문에 따르면, 어떤 이가 백거이 시의 필사본과 인쇄본을 들고 길거리에서 외쳐 팔거나 술, 차와 바꾸기도 한다고 했다. 문종 대화(大和) 연간에 이르러 사천과 강회(江淮) 일대 민간에서는 이미 매년 “목판으로 날짜(달력)를 인쇄해” 시장에서 판매했으므로, 조정에서 새 역법을 반포하기도 전에 “그 인쇄된 달력이 이미 천하에 가득할” 지경이었다. 당 후기에 목판 인쇄가 이미 상당 수준 발달했음을 볼 수 있다.
견직업
강남의 수공업 생산 역시 당조 시기에 큰 발전을 이루었다. 실을 뽑아 짜는 것으로 논하자면 이때 남방이 이미 북방을 초월했다. 오월(吳越)은 강남 견직물 생산의 중심지였으니 정원(貞元)(785~805년) 이후 월주(越州)가 조정에 진공한 견직품이 수십 종에 달하였고, 그리하여 당시 “월 지역 옷을 끌어다 입는다”는 말이 있었다. 형주(荊州 지금의 호북 강릉)와 선주(宣州 지금의 안휘 선성宣城) 역시 견직물의 중요한 산지가 되었으니, 형주의 공릉(貢綾)과 선주의 홍선탄(紅線毯)은 모두 전국 최고로 꼽혔다. 면직업 역시 남방에서 발전했으며 영남(嶺南)에서도 면방직업은 더욱 퍼진 것으로 보인다.
초당 시기는 중국 금릉(錦綾 비단) 직조 기술의 중요한 전환을 맞이한 시기였다. 당대에는 기존에 있던 날실 직조 기술에 씨실 직조를 더했고, 동시에 무늬가 들어간 고급 비단인 능(綾)을 짜는 기술이 분화되어 여러 가지 꽃문양을 짜낼 수 있었다. 씨실 직조는 동시에 8가지 색의 실을 운용할 수 있어 기존 날실 직조의 3색 범위를 대체했다. 예컨대 성당(盛唐) 때 유행한 ‘화문금(華文錦 꽃무늬를 수놓은 비단)’은 풍부한 색채 지니고 있었다.
도안(圖案)을 논하자면, 당대 장언원(張彥遠)이 지은 《역대명화기(歷代名畫記)》라는 책 속에서 초당 때 익주(益州 지금의 사천 성도)의 직조 전문 공인 두사륜(竇師綸)의 이름을 언급한 바 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궁궐의 창고 속에 두사륜이 짠 금릉(錦綾)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그 도안이 풍부하여 쌍꿩, 싸우는 양, 날아오르는 봉황, 노니는 기린 및 기타 신수(神獸)가 있었으니 이 금릉들이 이른바 ‘서금(瑞錦 상서로운 비단)’ 및 ‘궁릉(宮綾 궁중 비단)’이었다. 동시에 당 연재(延載) 원년(694년), 황제가 수놓은 도포를 3품 이상의 문무관에게 하사했는데 각 품계마다 도포의 장식 문양이 서로 달랐다.
8세기 성당 견직 예술의 대표 작품은 신강 아스타나에서 대력(大曆) 3년(773년) 문서 무덤에서 출토된 한 쌍의 비단 버선을 꼽을 수 있다. 이것은 다홍, 분홍, 하양, 먹색, 파색, 노랑, 보라, 먹자색 등 8색 실로 짠 씨슬 위금(緯錦)이다. 그 도안은 붉은 바탕에 오색 꽃으로 크고 작은 꽃들로 구성된 꽃무더기를 중심으로 하고, 옆으로는 각종 새와 날아가는 구름 및 흩어진 작은 꽃들이 둘러싸고 있다. 외측에는 다시 꺾인 꽃가지 및 산돌과 멀리 있는 나무를 섞어 놓았다. 비단 바탕 가장자리 근처에는 넓이 약 2센티미터의 보라 바탕 오색 화훼로 꽃띠를 짜 넣어 구도가 반복되는데 색상 배치가 화려하면서 조직이 치밀했다.
당 전기(前期)에 방직, 야금 주조, 자기 등 몇몇 부문의 수공업 생산은 모두 현저한 발전을 이루었다.
첫째는 방직업(紡織業)이다. 북방은 명주를 잘 짰고 강남은 베를 많이 생산했으니 당 전기에 대체로 그러했다. 송주(宋州 하남 상구), 박주(亳州 안휘 박현)에서 생산된 견직물의 질이 가장 높았다. 정주(定州)는 능견(綾絹) 생산량이 가장 많아 매년 황제에게 1,500여 필을 진공했다. 강남의 견직물 역시 큰 발전을 이루었다. 강남동도(江南東道 지금의 강소 남부와 절강 일대)의 견직물은 종류가 풍부해 많은 것이 공물로 진상되었고 생산량에서 이미 하남도와 하북도의 뒤를 이어 전국 제3위로 뛰어올랐다. 당시의 견직물 품종과 스타일은 모두 매우 많아서 자웅을 다퉜고 화려함이 극치에 달했다.
당시 면방직(棉紡織) 역시 매우 발달해서 황주(黃州 지금의 호북 황강)의 자포(貲布)가 제1등으로 꼽혔다. 면방직도 당대에 현저한 발전을 이루었으니 당시 서북의 투루판과 남방의 운남, 양광(兩廣), 복건 등지 여러 민족이 갈수록 보편적으로 목화를 심고 면포(綿布)를 생산했다. 이때 염직 기술도 뚜렷히 향상되었다.
도자기업
당대에 자기(瓷器) 생산 역시 중대한 발전을 이루었다. 당 전기에 이미 대량의 백자(白瓷)를 구워 만들었으니 형주요(邢州窯 하북 임성현)에서 생산된 백자는 “은과 같고”, “눈과 같다” 하여 질이 매우 높았다. 이조(李肇)의 《국사보(國史補)》에서 가로되 “내구(內丘)의 백자 사발, 단계(端溪)의 자석 벼루(紫石硯)는 천하에 귀천 없이 통용된다”고 했다. 형주요 백자의 생산량이 매우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사천의 대읍요(大邑窯) 역시 백자 생산으로 유명했다. 강서 창남진(昌南鎮 지금의 경덕진)이 자기 생산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당 전기로, 그곳에서 구워낸 백자와 청자는 당시에 ‘가옥기(假玉器 옥그릇과 유사하다는 의미)’라 불렸다.
당대에 전문적으로 청자(靑瓷)를 굽던 가마는 대부분 남방에 있었으니 월주요(越州窯)의 제품이 가장 뛰어났다. 월요(越窯)에서 구워낸 청자는 태토의 질이 얇고 우아하며 수정처럼 광택이 났다. 당시(唐詩)에 “한가을 바람과 이슬에 월요가 열리니, 천 봉우리의 푸른 빛을 빼앗아 왔도다(九秋風露越窯開,奪得千峰翠色來)”라는 구절로 월요에서 만든 청자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표현했다.
당대에는 또한 노랑, 초록, 하양, 빨강, 파랑 등의 채유(彩釉)를 바른 도자기가 출현했으니 이를 ‘당삼채(唐三彩)’라 부른다. 당삼채는 당대 도기(陶器)의 대표로서 일종의 저온 납유(鉛釉) 도기이며, 흰 찰흙으로 바탕을 만들고 동, 철, 망간, 코발트 등의 광물이 들어있는 것으로 유약 물감을 삼았으며 유약 안에는 다시 납을 첨가해 용제(熔劑)로 삼아 최종적으로 저온을 거쳐 구워낸 것이다.
좁은 의미에서 당삼채는 당대에 생산된 삼채 유도(釉陶)를 말하는데, 즉 하양, 초록, 노랑 세 가지 색을 주요 색조로 하는 도기를 가리킨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채색 유약 도기는 단색에서 시작해 점차 이채유(二彩釉)로 발전하고 다시 다채유(多彩釉 여러 색깔 유약) 단계로 발전했기 때문에 이 몇 가지 단계의 유도를 통칭해서 ‘당삼채’라 부른다. 즉 당삼채에는 단색, 쌍색, 삼채 심지어 다채가 있어 색을 띠는 범위가 붉은색, 노랑, 초록, 파랑, 보라, 갈색, 하양 등에 미쳤으며, 고대에는 습관적으로 3을 극수(極數)로 삼았으므로 삼채(三彩)란 다채를 대표한다.
당삼채는 동한 이래의 초록유와 노랑유 도기를 종합한 바탕 위에 다시 페르시아 파랑유 기술을 도입하여 창조해 낸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당삼채 중 푸른색을 띠는 코발트 재료 역시 페르시아에서 수입한 것이라 사람들은 흔히 “삼채는 푸른색이 귀하다”고 말한다. 이 외에도 당삼채 중의 봉두병(鳳頭瓶 봉황 머리 모양의 병) 역시 페르시아 사산 왕조 은기(銀器)의 영향을 받았다.
당삼채 도기는 주로 명기와 용(인형)에 사용되어 건축, 가구, 일용품, 가축, 인물 등을 표현하였으니 양식이 번다하여 당대 사회 생활 풍모를 재현할 수 있어 당대 사회의 ‘백과사전’이라 예찬 받았습니다. 당삼채의 번성 시기는 개원 성세 때였으며 천보 이후 점차 쇠퇴했습니다.
성당 시기 삼채는 생산량이 많고 품질이 높았다. 삼채용(三彩俑)은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주며 유약의 색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서로 스며들어 색채가 화려하여 몽롱한 아름다움을 나타내 예술 수준이 아주 높았다. 현재 출토된 당삼채는 대부분 당대 두 도성인 서안(西安)과 낙양(洛陽)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 외에 양주(揚州)에서도 일부 출토되었다. 현재 발견된 당삼채 가마터는 하남 공현요(鞏縣窯) 한 곳뿐이다. 공현요에서 출토된 당삼채에는 사발, 대접, 병, 항아리 등이 있고 또한 첩화(貼花) 장식용 거푸집은 발견되었으나 용(俑)은 발견되지 않았다. 당삼채는 후대의 도자기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니 외국의 페르시아 삼채, 이슬람 삼채, 신라 삼채, 일본 나라 삼채 등과 중국의 요삼채(遼三彩), 송삼채(宋三彩), 명삼채(明三彩), 청삼채(清三彩) 등이 모두 그 영향을 받았다.
제지업
제지업은 당대에 널리 발전했는데 중요한 산지는 대부분 남방에 분포했다. 선주, 흠주, 항주, 무주(婺州), 형주(衡州), 월주, 균주(均州), 익주, 소주(韶州) 등이 모두 당시에 이름난 종이 산지였다. 익주에서 생산된 마지(麻紙)와 절동에서 생산된 등지(藤紙)는 오래 견디고 튼튼하여 아주 널리 유행했다. 성당 이후 익주의 제지 기술은 더욱 향상되고 꽃의 색깔이나 품종도 더욱 많아졌으며 형주, 양주, 교주, 광주 등지에서는 뽕나무 껍질로 종이를 만들었으니 이를 곡지(穀紙)라 불렀다. 소주(韶州)에서는 대나무로 종이를 만들어 이후 대나무 종이가 신속히 발전하는 역사를 열었다.
이 외에도 선주(宣州) 경현(涇縣)에서 만든 선지(宣紙)는 세밀하고 균일하며 깨끗하고 하얗고 부드러우며 오래 지나도 색이 변하지 않아 서화가(書畵家)들이 즐겨 사용하는 종이가 되었다.
야금업
야금 주조업 역시 당대에 큰 진보가 있었다. 唐朝 규정에 따르면 서, 북 변방 주에 철을 제련하고 광산을 채굴하는 것을 금지한 외에 나머지 여러 주의 동과 철이 나오는 곳은 사람들이 사사로이 채굴하도록 허용하고 관에서는 세금을 거두었다. 기록에 따르면 당 전기에 은, 동, 철, 주석 제련소가 168곳 있었으니 섬주(陝州 하남 섬현), 선주(안휘 선성), 윤주(潤州 강소 진강), 요주(饒州 강서 파양), 구주(衢州 절강 구현), 신주(信州 강서 상요) 여러 주에 은 제련소가 58곳, 동 제련소가 96곳, 철산이 5곳, 주석산이 2곳, 납산이 4곳 있었다. 이것은 아주 대략적인 통계라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당 선종(宣宗) 때 한 번에 철산 71곳을 늘렸으니 전국에서 철이 나는 곳이 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때 금속 주조 기술이 새 수준에 도달했다. 근래 서안 남쪽 근교의 하가촌(何家村)에서 출토된 한 성당(盛唐) 시기의 매장 문물이 있으니, 그중에는 대접, 반(盤 대야), 병, 항아리 등 금은 그릇 270점이 있어 조형이 우아하고 문양이 정치하고 화려했다. 그 절삭 공예를 볼 때 아마도 손으로 돌리고 발로 밟는 간단한 선반을 사용했을 것이다. 이는 당시 제조 기술의 진보를 반영한다.
621년(무덕 4년), 당조는 새 화폐를 주조하기 시작하여 이름을 ‘개원통보(開元通寶)’라 지었으니 지름이 8분이고 10개의 돈 무게가 1냥이었다. 당조 이후 10개의 무게가 1냥이 되는 돈이 유행하기 시작하여 청조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고 이어졌다. 현종 천보(天寶) 말년에 전국에 분산된 돈을 주조하는 가마가 총 99곳으로 매년 돈을 주조하는 양이 32만 7천 관에 달했다.
의학
당대 의학은 분과가 비교적 세밀했을 뿐만 아니라 명의(名醫)가 배출되었으니, 그중 가장 뛰어난 이가 경조(京兆) 화원(華原 지금의 섬서 요현耀縣) 사람 손사막(孫思邈 581~682년)이다.
손사막은 당대의 뛰어난 의학가로 ‘약왕(藥王)’으로 존경받았다. 그는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7세에 하루에 천 자를 읊을 수 있어 사람들이 ‘성동(聖童)’이라 불렀다. 20세에 제자백가의 학설과 천문 역법에 통달했고 노자와 장자를 좋아했으며 불학(佛學)도 좋아했다. 그는 백 세를 넘개 살았지만 여전히 귀가 밝고 눈이 맑으며 정신도 또렷해 참으로 박학다식 장생불로(長生不老)한 사람이었다. 재상 위징이 제서, 양서, 진서(陳書), 주서(周書), 수서(隋書) 5대의 정사를 편수할 때 유실이 있을까 두려워 자주 그를 찾아가 묻곤 했는데, 그가 일일이 말하는 것이 치우치거나 빠뜨림이 없었고 마치 직접 눈으로 본 듯했다.
하루는 노조린(盧照隣)이 손사막에게 물었다.
“명의는 어떻게 병을 잘 고칠 수 있습니까?”
손사막이 대답했다.
“제가 듣건대 인체는 반드시 천지 운행의 법칙을 참조의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늘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과 금, 목, 수, 화, 토 오행의 변화가 있어 일월이 앞으로 이동하면 추위와 더위가 서로 교대하며 쉼 없이 순환합니다. 천지의 기운이 조화로우면 비가 내리고, 성내면 바람이 불며, 떨어지면 이슬이 내리고, 엉기면 서리와 눈이 되며, 두루 퍼지면 무지개가 되니 이것이 대자연의 정상적인 규칙입니다. 사람에게는 사지와 오장, 수면과 각성, 호흡이 있어 정기(精氣)가 순환하여 왕래하니 유통하는 것은 기혈이요 표현되어 나오는 것은 기색이며 나오는 것은 소리이니 이 역시 인체의 정상적인 규칙입니다.
양(陽)은 그 정기를 쓰고 음(陰)은 그 형질을 쓰니 하늘과 사람이 동일합니다. 일단 음양의 조화가 깨져 양기가 솟구치면 열증(熱症)이 되고 음기가 응체되면 한증(寒症)이 생기며 정기가 굳어서 뭉치면 혹이나 종양이 되고 기가 허하여 아래로 함몰되면 옹저(癰疽)가 되며 기가 역하여 망행하면 심허(心虛)하고 기침이 나고 기혈이 쇠갈하면 초췌하여 고갈되니, 증상은 얼굴에 나타나고 변화는 형체에 나타나므로 이런 이치로 천지를 관찰해도 또한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금, 목, 수, 화, 토 5대 행성이 차고 이지러지는 변화, 하늘의 성신(星辰)이 궤도를 벗어남, 일월에 식(蝕)의 변화가 발생하고, 혜성이 출현함은 천지에 나타나는 위험한 징조입니다. 추위와 더위가 계절에 따라 오지 않음은 이것이 천지의 한열병이요, 돌이 솟아오르고 땅이 융기함은 천지의 혹이나 종양이요, 산이 무너지고 땅이 꺼짐은 이것이 천지의 옹저요, 광풍과 폭우는 천지의 숨참이요,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아 천택(川澤)이 가뭄으로 마르는 것은 천지의 초고(焦枯 바짝 마름)입니다.
훌륭한 의사는 약물로 소도시키고 침구(針灸)로 치료하며 성인(聖人)은 지극한 덕으로 천하를 조화롭게 하고 다시 인위적인 노력으로 도우면 사람 몸에는 고칠 수 있는 질병이 있고 천지에도 없앨 수 있는 재앙이 있으니 사람과 천지의 규율은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이 단락의 말은 의학계는 물론 세인들에게 널리 칭송받았다.
당 태종과 아들인 고종 모두 일찍이 그를 불러 접견하고 벼슬을 내린 적이 있으나 끝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682년 손사막이 세상을 떠났는데, 죽은 지 한 달이 넘도록 용모와 색깔이 여전히 변하지 않았고 시신을 들어 관에 넣으려 하니 무게가 없었으며 나중에 관을 열어보니 다만 옷가지뿐이었다. 이 내용은 정사는 물론 《태평광기》 등의 책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652년(영휘 3년), 손사막은 첫 번째 의학 저작인 《비급천금요방(備急千金要方)》 30권을 써냈다. 30년 후 다시 《천금익방(千金翼方)》 30권을 써내 앞 책의 부족을 보충했다. 흔히 이 두 부의 저작을 간단히 《천금방(千金方)》이라 부르니 이것은 손사막이 평생 고생스레 탐구한 결정이다.
손사막은 책에서 당 이전 역대 의가들의 의학 이론과 치료 경험을 총결해 5,300여 개의 처방을 수집했다. 그는 부인과와 소아과를 특히 중시해 책머리에 배치해 독립된 과를 설립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약물 배오(配伍)와 변증시치(辨證施治)에 주의해 복방(複方 두 가지 이상의 약재를 유기적으로 배합해 만든 처방)을 창시했고 한 처방으로 여러 병을 고치거나 여러 처방으로 한 병을 고치는 방법을 제시했다. 약물의 채집과 응용 방면에서도 손사막은 두드러진 성적을 보였다.
《천금방》은 총 800여 종의 약물을 수록하였고 그중 200여 종 약물의 채집과 포제에 대해 전문적인 기록을 남겼다. 손사막은 약물학과 의학에 입혀놓은 거대한 공헌으로 인해 후세에 ‘약왕’으로 존경받았다.
당조 의학의 또 다른 뛰어난 성취는 현경(顯慶) 4년(659년) 소경(蘇敬) 등이 단체로 편수한 그림과 글이 함께 들어있는 약물학 전문 서적인 《당신본초(唐新本草)》다. 이 책은 총 53권으로 약물 844종을 수집했으며 세계 최초로 국가에서 반포한 약전(藥典)이다.
*침구의 거두 견권
견권(堅權)은 일대(一代) 침구의 거두로서 의술이 숙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양생(養生)의 도에 통달해 음식을 담백하고 간단히 먹으면 위기(胃氣)를 조화롭게 하고 정기를 기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노주자사(魯州刺史) 고적애(庫狄縊)가 풍병으로 고통받아 손으로 활을 당길 수 없었으나 그를 치료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견권이 “활을 쏘는 자세를 유지하면 침을 한 번 놓으면 바로 활을 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견권이 그 견우(肩隅)혈에 침을 놓으니 과연 한 번 침이 들어가자마자 즉시 활을 쏠 수 있었다. 심주자사(深州剌史)가 목구멍이 막혀 물과 밥을 내리지 못한 지 이미 사흘이었는데 견권이 삼릉침으로 그 손가락에 침을 놓으니 호흡이 통하고 다음 날 음식 먹는 것이 예전과 같았다. 견권이 병을 고침은 대부분 이러했다.
정관 17년, 당 태종이 친히 그 집에 가서 음식과 기거를 묻고 약을 쓰는 도(道)를 문의하며 아울러 조산대부(朝散大夫) 직을 수여하고 지팡이와 의복을 하사했다. 그해 견권이 세상을 떠나니 향년 103세였다. 그는 평생 저술이 매우 많아 《명당인형도(明堂人形圖)》를 그렸고 《침경초(針經鈔)》, 《맥경(脈經)》, 《침방(針方)》, 《맥결부(脈訣賦)》, 《약성론(藥性論)》 등을 지었으나 애석하게도 지금은 유실되었다. 그중 일부 내용이 《비급천금요방》, 《천금익방》, 《외대비요(外台祕要)》 등의 저작에서 볼 수 있어 후세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명당인형도》는 당시에 광범위하게 유행하였으니 당대 명의 손사막이 그의 그림을 근거로 다시 그리고 수정해 ‘인체경락수혈채도(人體經絡俞穴彩圖 현재 유실)’로 삼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