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미(王舍微)
【정견망】
중국의 고대 몽학(蒙學 아동교육)은 일반적으로 여덟 살이나 아홉 살의 아동을 위해 마련되었다. 몽학 교재를 ‘몽서(蒙書)’ 또는 ‘몽양서(蒙養書)’라고도 불렀는데, 즉 역대의 몽학 경전을 통해 글자 익히기를 기본으로 하고, 다시 역사적인 전고, 시사(詩詞) 음운, 수신격언(修身格言) 등을 거쳐 배우는 아동들로 하여금 ‘동몽양정(童蒙養正 아동의 몽을 바르게 기름)’을 실현하게 하는 것이다. 그중 《삼자경(三字經)》, 《천자문(千字文)》, 《백가성(百家姓)》 또한 글자를 익히는 몽서였다. 그리고 역사적인 전고(典故)를 배우는 몽서로는 당대(唐代) 이한(李瀚)이 지은 《몽구(蒙求)》가 가장 유명한데, 5백여 가지가 넘는 전고와 명인의 일화가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경(經)·사(史)·자(子)·집(集) 방면의 지식까지 관련되어 있다.
그중 《천자문》은 세계적으로 사용 기간이 가장 긴 아동 계몽 글자 교육서로 공인되어 있으며, 남북조 시기 주흥사(周興嗣)가 지은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남조 양무제(梁武帝) 소연(蕭衍)이 황자들에게 글씨를 가르치기 위해, 사람들로 하여금 왕희지의 비문에서 겹치지 않는 일천 개 글자(정체)를 탁본하게 하여 임모(臨摹)에 대비하게 했다고 한다. 또 주흥사(470년~521년)에게 명하여 한 편의 글로 엮게 하였다. 주흥사는 곰곰이 생각하며 밤을 새워 하얗게 머리가 세며 몽학 경전 《천자문》을 엮어냈다.
명 만력 연간, 고굉(焦竑)이 황자(皇子)의 강연관(講官)으로 있을 때 장자인 주상락(朱常洛)을 권도해 유가의 정통을 잇도록 하기 위해 편찬한 《양정도해(養正圖解)》는 주 문왕부터 송대까지의 전설과 고사를 모아 그림 60폭을 그려 넣었으며, 이 역시 하나의 몽학 독본이 되었다. 그 서문에서 이르기를,
“무릇 성인은 모름지기 배워야 하고, 배움은 모름지기 발라야 하며, 공은 반드시 몽양(蒙養 몽을 기름)에서 시작해야 한다. 옛사람은 8세에 밖에 나가 스승을 모시고 작은 기예를 배우고 작은 예절을 실천했으며; 머리를 묶으면 대학에 들어가 큰 기예를 배우고 큰 예절을 실천했다”고 했다.
《양정도해》 속에는 “선언격천(善言格天)–선한 말로 하늘을 감동”이라는 한 가지 전설이 있는데, 춘추시대 송경공(宋景公) 때 형혹성(熒惑·화성)이 심수(心宿)에 머문 일을 말한다. 여기서 형혹성은 곧 화성이고, 심수는 동쪽의 별자리이며 송나라의 분야(分野)에 대응한다. 화성은 하늘에서 벌 주는 별이며, 그것의 징조는 동란, 도적, 질병, 기아, 전쟁이다. 그것이 머무는 국가는 재앙을 입게 된다. 송경공은 매우 두려워하여 태사(太史) 자위(子韋)를 불러 이 일에 대해 물었다.
자위가 말했다.
“형혹은 하늘의 징벌이니, 재앙은 마땅히 임금님 몸에 내려질 겁니다. 그러나 그것을 재상에게 옮길 수 있습니다.”
송경공이 말했다.
“재상은 나와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인데, 재앙을 그에게 옮기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자위가 또 말했다.
“재앙을 백성에게 옮기게 할 수 있습니다.”
경공이 말했다.
“백성이 죽는다면 내가 또 누구의 군주가 될 수 있겠는가?”
자위가 이어서 말했다.
“재앙을 한 해의 농사에 옮길 수 있습니다.”
경공이 말했다.
“농사가 안 되면 백성이 굶주리고, 백성이 굶주리면 반드시 죽는 이가 있을 것이다. 군주가 되어 도리어 자신의 백성을 죽여 자신이 살고자 한다면, 또 누가 나를 군주로 여길 것인가? 나의 운명이 본래 다한 것이니, 그대는 더 이상 말하지 말라.”
자위가 몸을 돌이켜 빨리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말했다.
“신이 감히 임금님께 하례드립니다. 하늘은 멀리 높이 있지만 지상의 말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임금님께서는 품덕이 지극히 고상한 세 마디 말씀을 하셨으니, 하늘은 반드시 임금님께 세 차례 상을 내리실 것입니다. 형혹이 세 별자리의 위치를 이동할 것이고, 각 별자리는 일곱 개의 별을 거쳐 이동하며, 별 하나가 움직일 때마다 1년에 해당하니, 셋에 일곱을 곱하면 곧 21년입니다.”
송경공이 오직 스스로 재앙을 감당하려 했으니, 이 선념(善念)이 일어나자 당일에 화성이 곧장 세 성좌만큼 물러났고, 경공의 수명이 21년 연장되었다.
‘양정(養正 바름을 기름)’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고전 문헌은 《역경》 네 번째 괘인 ‘몽(蒙)’ 괘에서 유래했다. 《주역·단전(彖傳)》에서는 “몽(蒙)은 산 아래 험함이 있고, 험해서 멈추는 것이 몽이다. 몽형(蒙亨)은 형통함으로 때에 맞게(時中) 함이다…… 몽을 바르게 기름은 성인의 공이다(蒙以養正,聖功也).”라고 했다.
삼국시대 왕필(王弼)은 《주역주(周易注)》에서 “(몽매한) 때에 바라는 것은 오직 ‘형통’뿐이다. 형통으로 행함은 ‘시중’을 얻었기 때문이다.”라고 주해(注解)를 달았다.
당대(唐代) 공영달(孔穎達)은 《주역정의(周易正義)》에서 “‘몽매함을 바르게 기르는 것은 성인의 공’이란 말은 몽매(蒙昧)하지만 묵묵히 스스로 바른 도를 길러 마침내 지극한 성인의 공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이 한 구절은 경문의 ‘곧게 함이 이로움(利貞)’를 풀이한 것이다.”라고 주소를 달았다. 즉 ‘때를 얻음’과 ‘스스로 바른 도를 기름’을 강조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지극한 성인에 이르는 오솔길이다.
한편 괘사 ‘곧게 함이 이롭다(利貞)’에 대한 왕필의 주해는 “‘몽’이 이로운 바는 곧 바름이 이로운 것이다. 무릇 밝기로는 성인만한 이가 없고, 어둡기로는 몽매만한 것이 없으니, 몽매함으로 바름을 기르는 것이 바로 성인의 공이다. 그러므로 바름을 길러서 밝아지면 그 도(어리석음)를 잃는 것이다.”라고 했다.
《설문해자》에서는 ‘매(昧)’에 대해 “매상(昧爽)은 이른 아침이다. 해(日)를 따르고 소리는 미(未)를 따른다. 일설에는 어두움이라고도 한다.”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매상’이란 새벽녘, 아침 햇살이 희미할 때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왜 ‘몽매’하면 바름이 이롭고, ‘바름을 길러서 밝아지면’ 도리어 ‘그 도를 잃는’ 것일까?
소식(蘇軾)은 《동파역전(東坡易傳)/몽괘사(蒙卦四)》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몽(蒙)이라는 것은 외물에 가려져 있을 뿐, 그 가운데 본래 스스로 바름이 있다. 가림이 비록 심할지라도 끝내 그 바름을 없애지는 못하니, 안에서 싸워 스스로 도달하기를 구해야 하는데, 도달하고자 함에 따라 한 번 발휘하고 그 바른 마음[正心]을 맞이하면 그는 거침없이 절로 얻을 것이다. 만약 도달하고자 함을 기다리지 않고 억지로 발하게 하면, 한 번 발해 통하지 못해 두 번, 세 번에 이르기까지 비록 얻는 바가 있을지라도 그 바름이 아니다.”
의미인즉슨, 몽 중에는 그 가운데 본래 바름이 있으니 ‘동몽(童蒙 몽매한 어린이)이 나를 구하는’ 바른 마음으로 도달하고자 함을 거쳐야만 비로소 가능하며; 만약 억지로 발하게 한다면, “도달하기를 구하는 힘이 미치지 못하면 곧 바른 마음이 이기지 못하게 되고; 바른 마음이 이기지 못하면 내가 비록 일러줄지라도 스스로 들어갈 곳이 없다.” “만약 도달하고자 함을 기다리지 않고 억지로 한다면, 한 번 발해 서지 못하고 두 번, 세 번에 이르러 비록 얻는 바가 있더라도 그 바름이 아니다(《소씨역해/권제일》).”
그러므로 ‘몽매’한 상태에 있을 때 바름을 기르는 것이 유리하며, 만약 그 바름을 얻으려면 “때를 맞춰” “스스로 이기기를 기다릴” 필요가 있으니 절대로 억지로 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마치 소식이 말한 “성인이 몽에 처함 역시 그 발할 만할 때를 기다려 발하고, 불가하면 내버려둔다. 까닭은 그 바른 마음을 길러 스스로 이기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며, 이것이 성인의 공이다”라는 의미와 같다.
그러나 후인들은 흔히 ‘몽(蒙)’을 단순한 ‘몽매(蒙昧)’로 이해하고, 교육을 통해 힘을 써서 이 상태를 타파하고 바꾸어야 한다고 여긴다. 게다가 ‘정(正)’의 의미를 ‘정도(正道)’에서 ‘정기(正氣)’로 변모시켜, 부지런히 ‘나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 그것을 “크고 강하게 하여” “천지간에 가득 차게” 하려 한다.
이를 수학으로 비유하자면, ‘정도(正道)’는 마치 사인(Sine) 곡선의 가로축과 같고, ‘시중(時中)’은 값이 가로축에 회복하는 기준선과 같으며, ‘양(陽)의 반쪽 파동’은 ‘지나침(過之)’과 같고, ‘음(陰)의 반쪽 파동’은 ‘미치지 못함(不及)’과 같다.
반면에 ‘정기(正氣)’는 마치 땅 위, 하늘 아래에 있는 사이클로이드(Cycloid)와 같아서, 오직 ‘정(正)’의 ‘지나침’과 높고 낮음의 구분만 있을 뿐, 다시는 ‘부(負)’의 ‘미치지 못하는’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높음’과 ‘큼’이 영원히 정확한 방향이 되어버린다. 예를 들면 국가와 개인, 공(公)과 사(私) 등의 범주 문제 위에서 이러한 사유 방식은 쉽게 정도(正道)에서 벗어나 정치적 사유의 함정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추진제가 되곤 한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바름을 길러 밝히고자’하는 강제적인 밝음은 흔히 전통 가치 속 중용의 ‘시중(時中)’과 멀어진다. 그리고 ‘몽으로 바름을 기르는 것’은 오직 전통 가치라야 ‘그 바른 마음을 맞이할’ 가능성이 있다. 인간 세상이 혼탁하고 어수선한데, 만약 정법(正法)이 널리 전해지는 것을 만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