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7년—959년)
심연(心緣)
【정견망】
오대 시기, 남방과 하동(河東) 지역에도 앞뒤로 10개의 할거 정권이 존재했으니, 역사상 이를 ‘십국(十國)’이라 부르며, 곧 오, 남당, 오월, 전촉, 후촉, 민, 남한, 초, 남평 및 산서의 북한이다.
오와 남당의 흥망 (937~975)
오를 건국한 사람은 양행밀(楊行密)로, 장강 하류와 회남(淮南 회수 이남) 지역을 점거했다. 892년, 그는 당조에 의해 회남(淮南)절도사로 승진했다. 902년, 당 조종이 그를 오왕(吳王)에 봉하고 양주(揚州)에 도읍을 정했으며, 세력 범위는 지금의 강소, 안휘, 하남(회하 남쪽), 호북 동부와 강서 대부분을 포함한다. 양행밀의 아들인 양부(楊溥)가 재위할 때, 승상 서온(徐溫) 등이 양보를 천자로 세우고 국호를 오라 했다.
937년, 서온의 양자 서지고(徐知誥)가 양보를 폐위하고 자립해 국호를 당이라 하고 금릉(金陵 지금의 남경)에 도읍을 정한 뒤, 성명을 이변(李昪)으로 바꾸었으니 역사상 이를 ‘남당’이라 부른다. 오와 남당은 남방의 할거 정권 가운데 가장 강력해서, ‘땅이 넓고 힘이 강하며 인재가 많다’고 일컬어졌다. 20여 년 동안 휴양생식(休養生息)을 거치며 경제가 어느 정도 발전했다. 943년 이변이 죽고, 그 아들 이경(李璟)이 즉위하여 국가가 전성기에 들어섰다. 훗날 쇠락하기 시작해 후주에 신하를 칭했다. 961년 이경이 죽고 마지막 황제인 후주(後主) 이욱(李煜)이 즉위했다. 975년 북송에 의해 멸망했다.
이경과 이욱 부자는 모두 매우 높은 문학적 조예를 가졌으며, 그들의 사(詞) 작품은 송사(宋詞)의 발전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전촉과 후촉의 흥망 (907~965)
당조 말년, 황소(黃巢)가 장안을 점령한 후 당 희종(僖宗)이 성도로 피난을 갔고 장군 왕건(王建)이 어가를 따라 촉으로 들어갔다. 희종이 장안으로 돌아온 후 왕건을 벽주(壁州 지금의 사천 도강)자사로 임명했고, 894년 무렵부터 서천(西川), 동천(東川)과 한중(漢中) 땅을 병합했다. 903년, 당조에 의해 촉왕(蜀王)에 봉해졌다. 후량(後梁)이 건립된 후, 그는 907년 성도(成都)에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촉이라 했으니 역사상 이를 ‘전촉’이라 부른다. 관할 구역은 사천, 감숙 동남쪽, 섬서 남부 및 호북 서부 일대를 포함한다. 왕건은 학식 있는 선비를 등용할 줄 알았으므로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했습니다. 왕건이 죽은 후 아들 왕연(王衍)이 뒤를 이었는데, 사치와 황음, 백성에게 가혹함으로 유명했다. 925년, 후당의 장종이 군사를 보내 전촉을 멸하고 맹지상(孟知祥 이극용의 조카사위)을 검남서천절도부대사(劍南西川節度副大使)로 임명했다.
926년, 맹지상이 성도에 와서 관리들의 비리를 정돈하고 가혹한 세금을 줄였으므로 사회가 안정되고 힘이 크게 증대했다. 그는 932년 동천을 공격해서 차지했다. 934년, 맹지상이 성도에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촉이라 했으니 역사상 이를 ‘후촉’이라 부른다. 그해 맹지상이 죽고 아들인 맹창(孟昶)이 즉위하여 다시 봉주(鳳州)를 취하니 영역이 전촉과 같아졌다. 맹지상과 맹창 부자의 통치 기간 동안 사회 경제가 안정적으로 발전해 오대십국 시기 남당과 비견할 수 있는 경제 문화가 발달한 양대 지역이 되었다. 965년, 후촉은 북송에 의해 멸망했다.
오월의 흥망 (907~978)
당조 말년 진해(鎭海), 진동(鎭東) 두 진의 절도사 전근(錢槿)은 절동, 절서 11주의 땅을 관할하였으며, 902년 당 정부에 의해 월왕(越王)에 봉해졌고, 904년엔 오왕(吳王)으로 봉해졌다. 907년, 후량이 그를 오월왕(五越王)으로 봉하자 항주(杭州)에 도읍을 정하고 양절(兩浙)의 땅을 소유했다. 이 지역은 전쟁이 매우 적고 생산이 발달해 경제가 번영했다. 유명한 전당(銭塘) 이 이때 건설된 것이다.
이 외에도 전근은 인력을 조직하여 항주성(杭州城)을 확장하고 서호(西湖)를 준설했으며, 영은사(靈隱寺)를 확장했다. 항주는 오월의 도읍이 된 수십 년 동안 큰 발전을 이루어, 100여 년 뒤 남송(南宋)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기초를 다졌다.
오월의 도읍 항주는 이미 동남의 번영한 대도시가 되어, “화(華)와 이(夷)를 겸한 부유함”, “온갖 일이 번창함(百事繁庶)”이라 하였으며 ‘지상 천궁(天宮)’이라는 칭호가 있었다.
전씨 정권은 5대를 전하여 전숙(錢俶)에 이르렀고, 978년 북송에 투항했다.
초의 흥망 (907~951)
당말, 마은(馬殷)이 호남을 할거했다. 907년, 후량이 그를 초왕(楚王)에 봉하자 담주(潭州 지금의 장사)에 도읍을 정했고, 20주의 땅을 소유하여 오늘날의 호남 전역, 광서 동북쪽, 광동 서북쪽 및 귀주 동부 일대에 해당했다. 927년, 후당이 다시 그를 초국왕(楚國王)으로 봉했다. 마은은 재위 기간 동안 경제 발전을 촉진하는 조치들을 취해 국력이 어느 정도 증강했다.
마은이 죽은 후 여러 아들들이 후계자리를 다투어 정국이 혼란해졌고, 951년 남당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다. 그러나 남당이 초를 멸한 지 오래되지 않아 초나라 장수 유언(劉言)이 다시 군사를 일으켜 남당군을 격파하고 계속해서 호남을 차지했다. 이후 유언이 그 부하에게 살해당했고, 주행봉(周行逢)과 그 아들 주보권(周保權)이 선후하여 호남을 통치했다. 963년 북송에 의해 멸망했다.
민의 흥망 (906~945)
893년, 왕심지(王審知)는 그의 형인 왕조(王潮)를 따라 복주(福州)를 점거했다. 897년, 왕심지가 왕조의 뒤를 이어 위무군(威武軍 오늘날 복건성 일대) 절도사가 되었다. 909년, 후량이 그를 민왕(閩王)에 봉하자 천주(泉州), 정주(汀洲) 등을 차지했다. 왕심지는 민중(閩中 복건 중부) 5주의 땅만으로는 세력이 미약해 오월 등 이웃 나라와 경쟁하기 어렵다고 여겨, ‘경계를 지키고 백성을 휴식’한다는 입국 방침을 정해 중원 왕조에 신하를 자칭하고 공물을 바치며, 이웃 나라와 우호적으로 지내고 지역 경제와 문화를 발전시키며 해외 무역을 발전시켰으니, 이는 훗날 송조의 해외 교통이 발전하는데 기초를 다졌다.
하지만 왕심지가 사후 즉위한 이들이 모두 폭군이었으므로 내란이 그치지 않았다. 945년 남당에 의해 멸망당했다.
남한의 흥망 (917~971)
905년, 유은(劉隱)이 당 정해군(靜海軍 오늘날 광서 및 베트남 북부)절도사가 되었다. 907년, 후량이 그를 대팽군왕(大彭郡王)으로 봉했다. 유은의 동생 유암(劉巖)이 즉위한 후 세력 범위를 확장하여 917년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월(越)이라 하고 광주(廣州)에 도읍을 정했으며, 이듬해 국호를 한(漢)으로 바꾸었으니 역사상 ‘남한(南漢)’이라 부른다.
남한의 군주는 모두 극도로 사치스럽고 통치가 매우 잔혹해서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971년 북송에 의해 멸망했다.
남평의 흥망 (924~963)
907년 주온이 후량을 건립한 후 고계흥(高季興)을 형남(荊南)절도사로 임명했다. 924년, 후당 장종이 그를 남평왕(南平王)으로 봉하자 강릉(江陵)에 도읍을 정했으나 겨우 형주(荊州) 한 땅만 관할했고, 당 명종 때에 이르러서야 귀주(歸州)와 협주(峽州) 두 주를 얻었으니 십국 중 가장 약소한 국가였다. 그러나 남평은 줄곧 낮은 자세를 유지하며 중원에 신하를 칭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 여러 나라와의 충돌을 피했다. 963년 북송에의해 멸망했다.
북한의 흥망 (951~979)
북한은 후한(後漢) 고조의 동생인 유숭(劉崇)이 건립했다. 951년, 곽위(郭威)가 한나라를 대신했다. 유숭은 하동의 땅을 점거하고 태원(太原)에서 황제라 칭하며 여전히 한을 국호로 사용했으니 역사상 ‘북한’이라 부른다.
북한은 “토지가 척박하고 백성이 가난한데, 안으로는 군사와 나라에 바치고 밖으로는 거란을 섬겨, 세금이 번잡하고 부역이 무거워 백성들이 제대로 살 수 없었으니” 사회적 모순이 매우 첨예했다. 979년 북송에 멸망했다.
이 외에도 변방 지역에 몇몇 정권이 있었으니 주요하게는 동북에 요(遼 거란), 서북에는 고창(高昌), 서남에는 토번(吐藩), 대리(大理) 등 소수민족 정권이 있었다.
이상 간단한 서술을 통해 볼 수 있다시피, 오대십국은 당말 번진 할거의 계속이자 발전이었다. 북방 중원 조정이 내전과 정권 다툼으로 바빴던 것과 다르게 남방의 여러 국가는 기본적으로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에 놓여 있었고, 경제도 어느 정도 발전을 이뤘다. 말하자면 오대 시기의 발전을 거치며 전국 경제의 중심이 황하 유역에서 장강 유역으로 차츰 이동했다. 북송 초기 통계에 따르면 북방 인구는 겨우 100여 만 가구였는데, 훗날 남방의 여러 국가를 차례로 평정해 다시 230여 만 가구를 얻었다. 당시에 남방 인구가 이미 북방의 2배를 넘어섰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남방 경제의 발전이 날로 북방을 초과해 점차 전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음을 설명한다. 북방 경제가 남방 경제보다 낙후되기 시작한 것은 대략 이 시기부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