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0년—1279년)
심연(心緣)
【정견망】
음악 및 복식 편
음악
송금(宋金) 시기 음악 문화의 발전은 시민 음악의 발전을 중요한 표지로 삼으며, 수당(隋唐) 음악보다 훨씬 깊이 있게 발전했다. 도시 상품 경제의 번영과 함께 시민 계층의 문화 생활 수요에 부응하는 오락장인 ‘와사(瓦舍)’, ‘구란(勾欄)’이 생겨났다. ‘와사’와 ‘구란’에서 사람들은 규성(叫聲 역주: 시장의 외침이나 소리를 모방한 가창), 표창(嘌唱 역주: 북을 치며 가성 및 기교를 섞어 부르는 경쾌한 단곡), 소창(小唱 역주: 박판을 들고 부르는 상대적으로 아기자기한 소곡), 창잠(唱賺 역주: 여러 곡조를 엮어 화려하게 부르는 발전된 형태의 대곡) 등의 예술 가곡을 들을 수 있었고, 설창(說唱)류 음악 종류인 애사(崖詞 역주: 운율을 맞추어 엮어 읊거나 부르는 방식), 도진(陶真 역주: 초기 설창 형태로 불교 설화나 민간 전설 전달), 고자사(鼓子詞 역주: 북 장단에 맞추어 이야기와 노래를 교대로 구연), 제궁조(諸宮調 역주: 여러 궁조의 곡을 엮어 거대한 서사를 완성한 최고 수준의 설창뿐만 아니라 잡극(雜劇), 원본(院本)의 공연도 볼 수 있었다.
이 가운데 창잠 중의 ‘전령(纏令)’, ‘전달(纏達)’ 두 가지 곡식 구조는 후세의 희곡(戱曲) 및 기악 곡식 구조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아울러 고자사(鼓子詞)는 후세의 설창 음악인 고사(鼓詞)에 영향을 주었다.
금나라 통치 영역 내에서 유행한 것은 강창(講唱, 이야기와 노래를 곁들임)을 위주로 하는 일종의 희곡인 제궁조(諸宮調)였다. 그중 가창(歌唱)이 비교적 큰 비중을 차지했다. 제궁조는 당대 말기 설창 문학의 총집결이라 할 수 있는데, 동일한 궁조 속의 여러 서로 다른 곡조들로 세트를 구성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서로 다른 궁조와 모음들을 엮어 하나의 장편 이야기를 만들었다.
게다가 수당의 곡자사(曲子詞)를 기초로 하여 송대(宋代)의 사조 음악(詞調音樂)은 전례 없는 발전을 이룩했다. 이러한 장단구(長短句) 가창 문학 체재는 인(引), 만(慢), 근(近), 박(拍), 영(令) 등의 사패(詞牌)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전사(填詞 정해진 규격에 맞게 사의 가사를 짓는 것) 수법에는 이미 ‘탄파(攤破)’, ‘감자(減字)’, ‘투성(偷聲)’ 등이 있었다. 남송의 강기(姜夔)는 시를 지을 뿐만 아니라 사에 맞추어 곡을 지을 줄 알았던 저명한 사인(詞人)이자 음악가였다. 그에게는 17곡의 자도곡(自度曲 창작곡)과 감자보(減字譜)로 된 금가(琴歌) <고원(古怨)>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이 작품들은 대부분 작가의 조국과 인민을 염려하는 심정을 표현하고 청아하고 쓸쓸한 비극적 의경(意境)을 그려내었으니, <양주만(揚州慢)>, <격계매령(鬲溪梅令)>, <행화천영(杏花天影)> 등이 그러하다.
송대의 고금(古琴) 음악은 곽초망(郭楚望)의 대표작 <소상수운(瀟湘水雲)>으로 고금 유파(流派)의 선구를 열었다. 이 작품은 작가가 조국의 산하를 사랑하는 취향을 표현했다.
궁현악기(弓弦樂器, 현을 활로 켜는 악기)의 발전 역사 속에서 송대에는 ‘마미호금(馬尾胡琴, 말총 호궁)’에 대한 기록이 나타났다. 악학(樂學) 이론에 있어서 송대에는 연락음계(燕樂音階)에 대한 기록이 나타났다. 동시에 초기 공척보(工尺譜 역주: 중국 전통 음악에서 음높이를 기록하기 위해 사용한 전통 악보 방식)의 보식(譜式)이 장염(張炎)의 <사원(詞源)>과 심괄(沈括)의 <몽계필담(夢溪筆談)>에 나타났다. 근대에 널리 사용되는 공척보는 바로 이 시기에서 직접 유래한 것이다.
송대는 또한 희곡(戱曲)이 무르익어 성숙해지던 시대였다. 그 표지는 남송 때 남희(南戲)의 출현이다. 남희는 온주잡극(溫州雜劇), 영가잡극(永嘉雜劇)이라고도 불리며 그 음악이 풍부하고 자연스러웠다. 처음에는 일부 민간 소절(小調)로서 연창할 때 궁조의 제한을 받지 않았다. 나중에 곡패체(曲牌體) 희곡 음악으로 발전할 때는 서로 다른 곡패의 여러 악구(樂句)로 하나의 새로운 곡패를 구성하는 ‘집곡(集曲)’ 형식이 나타나기도 했다. 남희는 연창 형식에 있어 이미 독창, 대창(對唱), 합창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지금까진 전해지는 세 가지 남희 극본 <장협상원(張協狀元)> 등은 <영락대전(永樂大典)>에서 볼 수 있다.
복식
송조 한족 남자의 복식은 당대의 대금우임교령(大襟右衽交領, 옷깃을 오른쪽으로 여미는 큰 깃의 교령)과 원령(圓領)이라는 두 가지 전통 복식 양식을 이어받았다. 원령 양식의 경우 당나라 때에 비해 소매 입구가 넓게 변했다.
송조 한족 여자의 복식은 세 가지로 나뉘었다.
첫째는 황후와 귀비로부터 각급 명부(命婦)에 이르는 이들이 사용하는 ‘공복(公服)’,
둘째는 평민 백성들이 사용하는 길흉복인 ‘예복(禮服)’,
셋째는 평상시에 사용하는 상복(常服)으로 기본적인 양식은 대금우임교령과 대금(對襟, 맞깃)의 두 가지가 있었다.
송대 관가(官家)의 복식은 보편적으로 매우 사치스러웠으며 민가(民家)의 옷차림 역시 매우 까다롭고 정교했다. 의복 재료의 선택이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단장하는 법도 특별하여 어떤 이는 머리를 땋아 어깨로 늘어뜨렸고, 어떤 이는 운광교액(雲光巧額 구름처럼 아름다운 자태와 정교하게 꾸민 이마)에 빗살 장식으로 금봉황을 떠받쳤으며, 가난한 이들은 종이를 오려 머리를 장식하고 몸에 향을 바르며 발에는 수놓은 신발을 신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