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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윈관지(神韻觀止)】: 수수무(水袖舞) 속의 인생

천객(天客)

【정견망】

나는 중국을 떠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사람이 고향에 있을 때는 흔히 향수(鄕愁)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산과 물은 늘 곁에 있고 고향 말은 귓가에 들리며,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 오면 잎이 지니 이 모든 것이 그저 평범하기만 하다. 그러다 어느 날 멀리 떠나와 수많은 강과 산을 건너 뒤돌아보았을 때 비로소 진정으로 사람을 그리워지게 만드는 것은 고향의 어느 성(城)이나 작은 골목만이 아니라, 이미 생명과 하나로 이어져 온 말로 다할 수 없는 정신적 유대감임을 깨닫게 된다.

고시(古詩) 한 구절, 거문고 소리 한 가닥, 긴 치맛자락, 여인이 고개를 숙이고 돌아볼 때의 함축적이고 온화한 자태는 모두 부지불식간에 마음속 깊은 곳의 기억을 일깨우곤 한다. 그렇기에 지난 몇 년간 나는 매년 한 번씩 션윈(神韻)을 보러 가기를 즐겨 했다.

아마도 처음에는 그저 향수를 달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음악이 울려 퍼진다. 무대 위로 한 무리의 여인들이 사뿐사뿐 다가온다. 가벼운 옷차림, 차분한 걸음걸이, 길고 긴 수수(水袖·소매 끝에 달린 긴 천) 한 쌍이 늘어뜨려져 있다가 팔을 따라 부드럽게 위로 솟구친다.

한 번 밀어내면 긴 소매가 허공으로 날아가고, 한 번 돌려주면 또 먼 곳에서 아득하게 피어올라 돌아온다.

어떤 때는 흐르는 물처럼 곁을 졸졸 스쳐 지나가고, 어떤 때는 구름 기운처럼 공중에서 피어났다 감긴다. 무용수가 몸을 돌릴 때면 긴 소매가 어깨끝에서 날아올라 등 뒤로 길고 아스라한 호선(弧線)을 그려낸다. 사람은 이미 몸을 돌렸는데도 소매는 마치 여전히 공중에 머물러 있는 듯하여, 본래 짧았던 하나의 동작이 긴 소매에 의해 아주 멀리, 아주 멀리 연장된다.

중국인들이 수천 년간 전해 내려온 무용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니.

하지만 오래 바라볼수록 점차 깨닫게 된다. 긴 소매의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비단 밖으로 뻗어 나갈 때만이 아니라는 것을. 안으로 거두어들일 때도 있음을.

한 쌍의 긴 소매에 뻗어 나감만 있다면 그것은 그저 비상(飛翔)에 불과할 터이지만, 거둠이 있기에 다음의 뻗어 나감이 존재할 수 있다. 거두고 뻗어 내는 그 사잇길에 춤은 숨결을 갖게 되고, 기복을 갖게 되며, 온갖 천 갈래 만 갈래의 변화를 얻게 된다.

인생이 어찌 이와 같지 않겠는가?

젊은 시절, 사람은 언제나 밖으로 향해 걸어 나간다. 집을 떠나 먼 곳으로 가서 공부하고, 일하고, 가정을 이루며 이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낸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고,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싶어 하며, 더 먼 곳을 보고 싶어 한다. 마치 삶의 의미가 끊임없이 밖으로 뻗어 나가는 데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펼침[放]’이다. 마치 한 쌍의 긴 소매가 무용수의 손에 의해 부드럽게 밀려 나가 몸을 넘고, 눈앞을 넘어, 먼 곳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세월의 발자취를 조금 겪고 난 후, 비로소 천천히 깨닫게 된다. 인생에는 뻗어 나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둠[收]도 있다는 것을. 어떤 욕심은 거두어야 하고, 어떤 날카로운 기운도 거두어야 한다. 한때는 도저히 내려놓을 수 없었던 얻고 잃음도 마침내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한때는 기어코 시시비비를 가려야겠다고 여겼던 일들도 돌아보면 세월 속의 한바탕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을 붙들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언제 앞으로 나아가고 언제 물러서야 하는지, 언제 자신을 세상에 던지고 또 언제 저 바깥에 흩어져 있던 마음을 거두어들여야 하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진정한 ‘거둠’은 결코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는다.

긴 소매를 거두어들이는 것은 춤의 끝이 아니라, 다음의 뻗어 나감을 위한 힘을 비축하는 것이다.

문득 음악이 울려 퍼진다. 무용수들이 회전하기 시작한다.

한 쌍의 긴 소매가 날아오르고, 두 쌍, 열 쌍…… 긴 소매가 회전에 맞춰 동시에 펼쳐지며 무대 위에 둥글고 또 둥근 호선을 그려낸다. 본래 부드럽기만 한 비단이 마치 생명이라도 얻은 듯 회전하고, 펼쳐지고, 흐르며, 원을 거듭하며 바깥으로 끝없이 펼쳐진다.

이러한 광경을 볼 때마다 나는 아주 특별한 느낌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 순간, 나는 회전하는 만(卍)자 부호를 떠올리게 된다. 내가 일부러 어떤 형태를 찾으려 해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회전하고 끊임없이 밖으로 뻗어 나가는 그 긴 소매 속에서 그와 닮은 힘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힘은 마치 무대 중앙에서 뿜어져 나와 회전하는 원을 따라 사방으로 확장되는 것만 같다.

놀라운 것은 그것이 사람에게 압박감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정반대로 그것은 밝고, 상서롭고, 선의(善意)로 가득 차 있다. 마치 따뜻한 힘이 긴 소매를 따라 층층이 물결처럼 퍼져나가 무대 전체를 채우고, 객석에 앉은 이들에게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다.

이쯤에서 다시 저 무용수들을 바라보노라면, 나는 전통문화 속의 여인들을 자주 떠올리게 된다.

전통 여성의 미(美)에는 아주 특별한 ‘부드러움’이 있다. 그것은 억지로 표현하는 연약함도 아니고, 남에게 의존하는 유순함도 아니다. 그녀들의 미는 대개 함축적이고, 드러내지 않으며, 앞서려 다투지 않는다. 눈썹을 내리깔고, 고개를 돌리고, 손을 들고 발을 디디는 그 모든 곳에 절도가 있고, 절제가 있으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단정함이 있다.

수수무(水袖舞 긴 소매 춤)는 바로 이러한 아름다움을 남김없이 표현한다.

소매도 부드럽고, 춤사위도 부드럽고, 미소 또한 부드럽다. 긴 소매가 팔을 따라 부드럽게 뻗어 나가면 날카로운 기운은 없지만 아주 멀리까지 가닿을 수 있다. 무용수들의 발걸음은 가뿐하고 자태는 유연하면서도 늘 내면의 안정감을 잃지 않는다. 그것은 바람만 불면 쓰러지는 연약함이 아니라, 마치 겉보기에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워 보이지만 자신의 힘을 품고 있는 물과 같다.

전통문화는 음양(陰陽)을 말하지만 음과 양을 칼로 베듯 갈라놓지는 않는다. 일체(一體)의 안에도 음양이 있어 부드러움 속에 강함이 있고 강함 속에 또 부드러움이 있다. 중국 전통 여성의 품격 역시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 온화함 속에 원칙이 있고, 겸양 속에 지조가 있으며, 함축성 속에 굳은 절개가 있다. 평상시에는 그 힘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진정으로 짊어져야 할 순간이 오면 그 부드러움 속에 감춰져 있던 ‘강함’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가장 부드러운 것 역시 힘을 품을 수 있으며, 가장 함축적인 중국 전통 여인의 아름다움 또한 결코 연약함과 동의어가 아니다.

이것이 아마도 수수(水袖 긴 소매)의 가장 감동적인 부분일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부드러움을 잃지 않은 채 회전 속에서 힘을 만들어낸다. 알고 보니 진정한 부드러움이란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강압적인 방식으로 힘을 드러낼 필요가 없을 뿐이다.

선(善)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수수가 부드러울수록 회전할 때 그 힘은 오히려 더욱 선명해진다. 부드럽기에 무용수의 마음을 따라 자연스럽게 펼쳐질 수 있고, 부드럽기에 힘이 긴 소매를 따라 끝까지 전해질 수 있으며, 또 부드럽기에 그 힘에 날카로운 기운이나 압박감이 없으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는 것이다.

부드러움이 힘에 흐를 수 있는 형상을 부여한다면, 선(善)은 힘에 온기를 부여한다.

그리하여 저 회전하는 수수 한 쌍 한 쌍을 다시 바라보노라면, 눈앞에 날아오르는 것이 비단 한 벌의 무의(舞衣)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둥글게 원을 그리며 펼쳐지는 저 긴 소매는 마치 일종의 선의(善意)와 광명(光明)을 춤사위에 실어 온 공간으로 보내고 있는 것만 같다.

음악이 서서히 잔잔해진다. 회전이 느려진다. 뻗어 나갔던 수수들이 한 쌍, 또 한 쌍 무용수의 손으로 되돌아온다. 무대는 다시 고요를 되찾는다. 그리고 나의 마음 역시 저 수수 한 쌍을 따라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천천히 거두어져 돌아온다.

수수를 밖으로 뻗어 나게 하는 것은 먼길을 떠나는 여정이고, 수수를 거두어들이는 것은 마치 고향으로의 귀환(歸還)과도 같다.

여기까지 보고 나니, 어째서 한 쌍의 수수가 홀로 고향을 떠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이의 마음을 이토록 깊이 울리는지 문득 깨닫게 된다. 아마도 향수라는 것의 본질은 애초 ‘돌아감[歸]’이라는 한 글자에 있는지도 모른다.

중국 문화 속에서 이 글자는 수천 년 동안 쓰여 왔다. 고향으로 돌아가고(歸鄕), 전원로 돌아가고(歸田), 은거하며(歸隱), 진리로 돌아가고(歸眞), 저 세상으로 돌아간다(歸去). 어렸을 적 이 글자들을 읽을 때는 선인들이 늘 고향을 그리워하는가 보다 하고만 여겼지만, 멀리 떠나와 더 많은 것을 겪고 보니 중국인들이 마음속에 품은 ‘돌아감’이란 어쩌면 인간 세상의 특정한 어느 한 장소로 되돌아가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점차 짙어진다.

내가 매년 션윈을 보러 가는 것은 어쩌면 처음에는 그저 향수를 달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꿈결에도 아물아물 그리운 옛 중국을 한 번 보고 싶어서, 오래도록 잊고 지냈던 옛 의관들을 바라보고 익숙하면서도 아득한 음악을 들으며 이국땅의 두 시간 동안 내가 떠나온 지 오래되었으나 늘 그리워하던 그 문화의 고향을 다시 한번 만져보고 싶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 멀리 뻗어 나간 수수가 회전하고 펼쳐졌다가 가볍게 거두어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내가 그리워하는 것이 비단 이미 오래전에 떠나온 저 고향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수수를 밖으로 뻗어 나가면 천차만별 다양한 삶이지만, 거두어들이면 여전히 한 몸으로 귀결된다.

무대 위의 수수는 이미 조용히 늘어져 내려와 있다. 그러나 저 ‘돌아감’이라는 글자는 여전히 가슴속에 남아 있다. 사람이 비록 아무리 멀리 걸어간들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자신이 마땅히 돌아가야 할 곳, 생명이 진정으로 유래한 그 곳이 늘 자리하고 있는 법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45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