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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간소회 (2): 《춘추》 대의에서 ‘천하의 사정(邪正)을 정함’과 ‘충(忠)’의 의미 변천

왕사미(王舍微)

【정견망】

사마천은 《사기·공자세가》에서 공자가 《춘추》를 지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공자가 “아니다, 아니다! 군자는 세상에서 사라진 뒤 이름이 거론되지 않는 것을 걱정한다. 나의 길이 행해지지 못했으니 내가 무엇으로 후세에 나를 보여줄 것인가?” 그리고는 역사의 기록에 근거해서 《춘추(春秋)》를 지으니 위로는 은공(隱公)에서 아래로는 애공(哀公) 14년까지 열두 명의 임금을 포함하고 있다. …… 이런 기준으로 해당 시대의 시비를 판단했다. 이렇게 칭송하고 비평하는 대의는 후세 왕들이 이를 취하여 도움을 받게 했다. 『춘추』의 대의가 시행되면 곧 천하의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겁을 낼 것이다.“

이로써 “의법(義法)을 제정하여 왕도가 갖춰지고 인사(人事)가 투명해졌다.

《맹자·등문공하(滕文公下)》에서도 ‘세상에 도가 쇠미해진’ 후의 ‘아비도 임금도 없는(無父無君)’ 사회적 난상을 묘사하며, 공자가 왜 《춘추》를 지었는지에 대해 상세히 논술하고 있다.

“세상이 쇠미하고 도가 미약해져 사설(邪說)과 폭행이 일어났고, 신하가 그 임금을 시해하는 자가 있으며 자식이 그 아비를 시해하는 자가 있다. 공자께서 두려워하여 《춘추》를 지으셨다. 춘추는 천자의 일이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알아주는 것은 오직 춘추때문일 것이며, 나를 비난하는 것 역시 오직 춘추때문일 것이다!” 성왕이 일어나지 않고 제후들은 방자하며 처사들은 제멋대로 떠들어대고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의 말리 천하에 가득 찼다. 천하의 말이 양주에게로 돌아가지 않으면 묵적에게로 돌아간다. 양씨의 위아(爲我)는 임금이 없고, 묵씨의 겸애(兼愛)는 아비가 없우니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것이 금수(禽獸)이다.”

공자가 말한 “나를 알아주는 것은 오직 춘추때문일 것이다”라는 대목에서 볼 수 있듯, 그가 스스로 펼치고자 했던 ‘도(道)’는 온전히 《춘추》에 담겨 있었다. 만약 후세 사람들이 《춘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뜻을 엉뚱하게 오해한다면, 그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 또한 그에게 돌려질 것이니, 즉 “나를 비난하는 것 또한 오직 춘추때문일 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공자의 의도는 후세 사람들에게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정상적인 이치(常理)의 궤도를 남겨주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행한다면 개인의 복덕을 지킬 수 있음과 동시에 전체 사회의 도덕 질서를 유지하고 안정시키며, 인류 사회의 도덕이 아래로 미끄러지는 추세를 지연시킬 수 있다.

춘추란 본래 선진(先秦) 시대 각국의 연대기형 편년체 역사서를 가리키는데, 일만 기록할 뿐 대의는 담겨 있지 않았다. 나중에 공자가 노나라의 《춘추》를 수정하는 것을 모범으로 삼아, 역사적 사건에 대해 춘추필법(春秋筆法)을 사용해 칭찬과 깎아내림[褒貶]을 통해 춘추의 미언대의(微言大義)를 담아냈다.

사마천은 《사기·태사공자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춘추》는 위로는 삼왕(三王)의 도를 밝히고, 아래로는 인간사의 기강을 가리고, 의심스러운 바를 구별하고, 시비를 밝히며,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결정하게 하고, 선은 장려하고 악은 미워하게 하며, 유능한 사람은 존중하고 못난 자는 물리치게 하고, 망한 나라의 이름을 보존하게 하며, 끊어진 세대의 후손을 찾아 잇게 하며, 모자란 곳은 메워주고 못쓰게 된 것은 다시 일으켜 세우는 바 이것이야말로 큰 왕도입니다. …… 그러므로 《춘추》라는 것은 예의(禮義)의 근본 종주이다.”

구양수(歐陽修)는 《춘추론(春秋論)·중(中)》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자께서 무엇을 하려고 《춘추》를 수정하셨는가? 명분을 바로잡아 분수를 정하고, 실정을 구하여 실상을 책하며, 시비를 분별하고 선악을 밝히는 것이 바로 《춘추》가 지어진 까닭이다.”

후세 사람들이 《춘추》에 대해 지은 주석인 《좌전(左傳)》,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을 합쳐 ‘춘추삼전(春秋三傳)’이라 부른다.

《좌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예는 위아래의 기강이며, 천지의 경위(經緯)이고, 백성이 살아가는 근본이므로 선왕들이 이를 숭상하였다.”

“예는 나라의 줄기요, 경(敬)은 예의 수레이다. 공경하지 않으면 예가 행해지지 않고, 예가 행해지지 않으면 위아래가 혼란해지니 무엇으로 세상을 오래 유지하겠는가?”

이뿐만 아니라 《좌전》은 노나라 소공(昭公)의 진(晉)나라 방문을 기록하면서 ‘예(禮)’와 ‘의(儀)’를 구분했는데, ‘의’는 그저 표면적이고 외적인 의식에 불과한반면, ‘예’에는 더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내용이 담겨 있으니 그것이 바로 ‘덕(德)’이다.

“덕과 의는 이로움의 근본이다”(《좌전·희공 27년》)

《좌전·양공 14년》의 기록에 따르면 초나라 영윤 자낭(子囊)이 오나라를 치고 돌아온 뒤 세상을 떠났는데, 유언으로 기필코 영(郢)에 성을 수축해야 한다고 했다. 이로부터 ‘충(忠)’에 대한 일련의 설명이 이끌어져 나온다.

“자낭은 충성스러웠다. 임금이 돌아가셨음에도 그 명예를 더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사직을 지키는 것을 잊지 않았으니 충(忠)이라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충이란 백성들의 바람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행함이 주(周)나라로 돌아가니, 만민의 바람이라. 충이로다’라고 했다.”

여기서는 충의 내함을 낱낱이 밝혀주고 있다. 군왕의 덕행이 만민의 우러름을 받기에 무장이 충성을 다해 사직을 지키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도의에 기반한 충이다.

“소위 도(道)란, 백성에게 충성하고 신(神)에게 신용을 지키는 것이다. 위에서 백성을 이롭게 할 것을 생각하는 것이 충이다.”(《좌전·환공 6년》)

이상 옛 선현들의 논술에서 볼 수 있듯이, 후세 사람들의 인식은 명분(名分)과 예의(禮義) 방면에 집중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하나의 문제가 제기되는데, 이러한 명분의 의미를 도(道)의 기점에서 인식할 것인가, 아니면 사람의 층면에서 이러한 질서를 구축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시비를 분별하고 선악을 밝힌다”는 가치 방향은 무위(無爲)의 염담허무(恬淡虛無) 속에서 일념(一念)도 일어나지 않는 방향을 향하는가, 아니면 유위(有爲)의 웅대함을 숭상하는 인심의 격동을 향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춘추 대의(大義)를 해독함에 있어서 도덕 학문과 정치 학문 사이의 갈림길이 되는 분수령이다.

《장자·천하》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춘추는 도로써 명분을 삼았다.”

“신명(神明)은 어디서 내려오는가? 밝음은 어디서 나오는가? …… 법(法)으로 분수를 삼고, 이름으로 표(表)를 삼는다.”

여기서 말하는 ‘법’이란 《황제사경(黃帝四經)·경법(經法)·도법(道法)》의 설명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도(道)가 법을 낳는다. 법이란 득실을 이끌어 규율을 삼고, 곡직(曲直)을 밝히는 것이다. …… 알고자 하는 도는 오직 허무(虛無)에 있을 뿐이니, 허무에 이르면 티끌만큼 미세한 것도 이루어지며 반드시 형명(形名)이 있게 된다. 형명이 세워지면 흑백의 구분이 끝난 것이다.”

일단 도의(道義)에 대한 관심에서 질서 구축으로 방향이 전환되고, 명분을 밝혀 질서와 등급을 확립하게 되면 반드시 형명을 표지로 삼게 마련이다. 도덕은 인간의 “선악(善惡)을 밝히는” 심법(心法)에 속하며 인간의 자발적인 준수를 필요로 하는 반면, 정치 질서는 “시비(是非)를 가리는” 치란(治亂)의 판단이다. 만약 이 두 가지를 혼동하여 섞어버린다면 도덕이란 명목 아래 정치적인 핵심이 스며들게 되고, 결국에는 도덕의 가치 내함을 변질시키게 된다.

《공양전》의 ‘왕정월(王正月)’ 세 글자에서 ‘대일통(大一統)’의 함의가 도출된다.

“왕정월이라 함은 무엇을 말함인가? 대일통을 말함이다.”

인류 사회의 도덕 수준이 끊임없이 아래로 미끄러지는 과정 속에서, 점차 ‘천인합일(天人合一)’에 대한 이해 또한 제한받게 되었고 [2], 사람들의 인식 역시 ‘대일통’에서 세간의 표면적인 정치적 의미와 시비 관념인 ‘대통일(大統一)’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한대(漢代)의 동중서(董仲舒)는 《춘추번로·옥배》에서 말했다.

“춘추의 법은, 사람은 군주를 따르게 하고, 군주는 하늘을 따르게 한다. …… 그러므로 백성을 굽히어 군주를 펴게 하고, 군주를 굽히어 하늘을 펴게 하는 것이 춘추의 대의이다.”

동중서가 펼친 ‘춘추대일통’ 사상은 신민(臣民)을 군주의 부속물로 여기고 천인합일 중 천도(天道)를 갈라놓은 것으로, 일반 백성들은 오직 ‘군주를 따라야’ 할 뿐만 아니라 ‘군주를 펴기’ 위한 굴욕까지 짊어져야 했으며 정작 천도와는 합일할 수 없었다.

이를 통해 볼 수 있듯, 역사 발전 과정에서 세간의 정치적 관념이 스며듦에 따라 도(道)에 부합하는 ‘충(忠)’의 전통적 가치 내함은 점차 ‘충군(忠君 임금에 대한 충)’이라는 정치 윤리로 대체되었다.

수백 년 동안 (악비가 지은 것으로) 널리 전해져 온 《만강홍·사회(滿江紅·寫懷)》, “정강의 치욕은 오히려 씻기지 않았고, 신하의 한은 언제쯤 소멸되랴? 큰 수레를 몰아 하란산을 짓밟아 무너뜨리리라”라는 구절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고증을 거쳐 이것이 악비의 이름을 거짓으로 빌려 지은 가탁이라고 보았다. 또한 이는 악비의 사상 경지 및 심경과도 일치하지 않는다[3]

악비가 지은 《소중산(小重山)》에서 “백발이 되어서야 공명을 구하는구나. 옛 산의 소나무와 대나무는 늙어가고 귀향길을 가로막네. 내 심사를 요금(瑤琴)에 부치려니 알아주는 이 드물고 줄이 끊어져도 들을 이 누구리오?”와 비교해 보면 충만된 고요함과 은은함, 곡절을 머금은 부드러움이 전혀 같지 않다.

그렇다면 왜 많은 사람들이 이 시를 악비의 작품이라고 자주 인용하는 것일까? 이것은 시 속에 격앙된 사람 마음과 분노에 찬 감정이 가득 차 있으면서도, 동시에 당시 통치자의 정치적 수요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이 주장의 근거는 첫째, 악비의 후손인 악림(岳霖)과 악가(岳珂) 두 대에 걸쳐 편찬된 《금타수편(金佗粹編)》 및 《악악왕행실편년》에 이 시가 모두 수록되어 있지 않는다는 점이고,

둘째 ‘정강의 치욕’에서 ‘치(恥)’ 자를 사용한 것이 예(禮)와 법(法)에 모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송대 사람들의 기록에서 임금을 속이고 윗사람을 범한다는 뜻을 지닌 ‘치(恥)’ 자를 사용한 이가 없으며, 남송 때 정강 2년(1127년)에 휘종과 흠종 두 황제가 포로로 잡혀간 사건을 기록할 때 사용했던 어휘는 ‘정강의 화(靖康之禍)’, ‘정강의 란(靖康之亂)’ 또는 ‘정강의 난(靖康之難)’이었다.

동진(東晉)의 경학자 범녕(範寧)은 《춘추곡량전집해》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하의 사업을 이룩하고, 천하의 사정(邪正)을 바로잡는 데는 《춘추》보다 나은 것이 없다. 춘추의 전(傳)에는 셋이 있지만 경(經)의 취지는 하나이니, 선악이 서로 다르고 포폄(褒貶)이 나아간 바가 다르다. 대저 구류(九流)가 나뉘자 미언(微言)이 숨겨졌고, 이단(異端)이 나타나자 대의(大義)가 어그러졌다.”

그렇다면 사정(邪正)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후세 사람들이 도(道)의 층면에서 도덕을 표준으로 삼지 못하고 세간의 정치 등 요소를 가미할 때, 그것이 바로 전통 가치에서 벗어나기 시작하고 이단이 흥행하며 대의를 등지는 시기, 즉 “이단이 나타나자 대의가 어그러진” 때이다.

인류 사회의 역사는 본래 하나의 거대한 역사극이다. 동서고금에 걸쳐 흥망의 교체는 모두 인류의 문화적 기억을 풍부하게 하고 인류가 미래에 승화하기 위한 기초를 다지기 위함이었다. 5천 년 문명은 모두 “몇 송이 매화가 천지에 봄을 알리는” 그 휘황찬란한 순간의 출현을 기다려온 것이다.

“탕탕한 천문이 만고에 열리니 몇 사람이 돌아가고 몇 사람이 왔는가”

蕩蕩天門萬古開,幾人歸去幾人來

(북송 소강절의 《매화시》)

[주석]
[1] 협(浹): 투명하고 맑음(澄澈).
[2] 도간소회(道澗遡洄) (1): ‘천인합일(天人合一)’과 ‘천인상분(天人相分)’에 대한 초보적인 탐구
[3] 정견망: “遐思錄:忠的觀念維度和應用層面淺析”(https://www.zhengjian.org/node/285115).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4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