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천애심법: 돈황농경(敦煌農耕)

글/ 석방행

【정견망】

신전문명에 농사로 나라 세워
고생스레 경작하며 천년을 지났네
막고굴의 회화와 조소는
신의 뜻이 이르는 곳 알아보게 하리라

神傳文明農立國
辛苦勞作千年過
莫高洞窟繪影像
神意所達勿眼拙

신농(神農)이 백 가지 풀을 맛보고 염제(炎帝)가 쟁기를 발명한 이래 우리 조상들은 한 걸음씩 신의 인도하에 점점 문명의 문턱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상고시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농업은 중화문명 발전 역사상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사실 세계문명사를 관통해보면 제1차 산업혁명 이전까지 농업이 차지한 비율이 가장 컸다. 설사 현재 세계적으로 산업화가 크게 진전되었지만 아직도 농사가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중요하다. 원인은 아주 간단한데, 양식이 없으면 사람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이 이곳의 생명이 존재하도록 배치한 방식이다.

상고(上古)시기 사람들은 노동을 통해 천지신명(天地神明)에 대한 경외(敬畏)를 표현했다. 게다가 자고이래 각 방면의 신선들이 자비로이 세상에 내려와 사람들에게 각종 현기(玄機) 등등을 알려주었다. 이것은 모두 신전문화를 다지고 창세주께서 대법을 널리 전하시는 바탕을 닦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은 천지를 경외하는 과정에서 외부환경에 대해 점차 완벽하고 분명한 인식이 생겨났다. 내가 학교에서 정치 과목을 배울 때 선생님이 고대인들은 비바람이나 번개 등 자연현상을 이해하지 못해 신화에 나오는 것처럼 무슨 “풍신(風神)”, “우신(雨神)”, “뇌공(雷公)”, “뇌모(電母)”, “우박신(雹神)” 등으로 불렀다고 가르쳤다. 당시 교사는 마치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당시 나는 생각했다.

‘사람이 모르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무엇 때문에 우리 조상들을 놀리는가? 이런 신들이 존재한다고 승인하지 않는다고 하면 날씨의 제반 변화의 근본원인을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나중에 내 기억에 지리 선생님이 기후 방면의 화제를 언급하면서 비교적 깨어있는 설명을 했다.

“지구는 복잡한 구조체이며 그 속에는 오묘한 것들이 정말 많단다. 우리가 현재 이해하는 것은 사실 너무나 적단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탐구정신으로 대해야지 고정적이고 제한된 심태로 대해서는 안 된다. 후자는 우리를 정체시키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할 것이다.”

우신(雨神)을 말한 김에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2002년 경 우리 고향에서 매우 가까운 농촌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느 이른 봄 파종을 할 때 사람들은 물을 끌어왔다. (씨앗을 심는 동시에 물을 대야 하는데 연못이나 지하에서 끌어오기 때문에 비용이 들어간다) 하지만 한 대법제자가 너무 가난해서 물을 살 돈이 없었다. 그녀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를 기다렸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나중에 파종시기를 놓치면 큰일이라 무릎을 꿇고 파룬궁 사부님께 향을 3대 올리고 기적이 일어나길 기도했다. 고향 사람들에게 대법제자는 신의 도움이 있음을 알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향을 올린 후 씨앗을 가지고 밭으로 나가 심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헛일이라고 다 웃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내가 심었으니 반드시 비가 올 거라고 했다. 과연 그녀가 파종을 막 끝냈을 때 큰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주위 사람들이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파룬궁을 배우는 사람은 신이 돌봐주는 것이다. 대륙의 한 서기는 심지어 큰 스피커로 이렇게 말했다.

“역시나 파룬궁 수련생은 신의 도움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누구도 그녀가 대법 배우는 것을 간섭하지 마십시오.”

돈황 벽화에서 나는 농경과 풍백(風伯) 우신(雨神)에 관한 그림을 몇 장 발견했다. (아래 그림을 볼 것)

우리는 상나라를 세운 탕(湯)임금이 기우제를 지낸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이곳에는 수당 시기 수문제(隋文帝)가 기우제를 지낸 그림이 있다. 사실 이 그림으로부터 백성을 걱정하는 제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백성들이 고난을 당할 때면 하늘에 기도해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우중경작도(雨中耕作圖)》는 사람들이 비가 올 때 경작하는 광경이다. 이 그림에 소가 매우 사랑스럽고 발랄하다. 그림 3, 그림 4는 아주 구체적이다.

본문에서는 농업 부분을 관장하는 신(가명: 사농司農, 여신)이 인간 세상에 태어나 법을 찾으러 다닌 경험을 쓰고자 한다.


수문제의 기우(祈雨). 제323굴, 초당


우중경작도(雨中耕作圖). 제23굴, 성당


뇌신(雷神)과 전신(電神). 제249굴, 서위(西魏)


풍백(風伯)과 우사(雨師). 제249굴, 서위

천계(天界)에서 창세주는 인간 세상 중토(中土) 이 지방 사람들에게 종자를 심고 식물을 키우는 일이 점차적으로 발전하도록 안배하신 후 많은 신들이 이 방면에 상세한 안배를 했다. 종자를 심든 식물을 키우든(수산물 양식을 포함) 모두 일단 대상의 특징을 잘 알아야만 비로소 “사물이 저마다 제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게(物盡其用)” 할 수 있다.

인간 세상에서 이와 관련된 최초의 전설은 바로 신농이 백초를 맛본 일이다. 후세에 이 이야기를 “개인 영웅주의”로 만들어 완전히 신농씨 본인을 돌출시켰다. 하지만 여태 신농씨가 당시 백초를 맛본 과정에 몇 명의 다른 신선을 만나 그를 도운 일이 있음을 생각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전설에서 말하는 신농이 백초를 맛본 일은 당연히 입으로 맛을 본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 전혀 그런 개념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의 사유로 신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당시 신농씨는 상천이 세상에 내려와 사람들에게 식물을 인식하도록 가르치라고 배치한 신(神)이다. 인간계에서 그에게 사람 몸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입으로 맛을 보고 눈과 손으로 만지고 관찰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 주변에 그를 협조하기 위해 배치된 신들이 있는데 바로 우리가 본문에서 말하려 하는 주인공인 사농(司農)이다. 여기서 사(司)란 관리한다는 뜻이다. 또 ‘司’는 ‘侍’와 매우 비슷한데 여기서는 신농을 돕는 신으로 이해하면 된다.

신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녀의 본래 면목을 부르는 방법이며 그때 인간계에서 그녀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상태였다. 당시 부락의 원시인들은 아주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냥을 위주로 했으며 나중에 하늘에서 신을 안배하여 인간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식물을 인식하고 가축을 기르도록 가르쳐 주었다. 어떤 사람은 물가에 있는데 신이 이곳에 와서 사람들에게 물고기를 어떻게 잡는지 등등으로 점점 농사, 목축, 어업을 열어주었다. 신농씨는 바로 이런 신들 중 하나였다.

전설에 따르면 신농씨는 수정처럼 투명한 배와 두 개의 포대를 지니고 있었는데 하나는 왼쪽(식용) 하나는 오른쪽(약용)에 두었다고 한다. 백초를 맛볼 때 눈으로 식물이 내장에서 움직이는 과정 상황을 관찰했다 (성질, 형상, 약리 효과가 인체에 미치는 효능).

사실 신을 말하자면 설령 그가 사람 몸(人身)을 지니고 세상에서 활동한다 해도 이때 일반적인 정황 하에서 그의 눈과 사유는 미혹되지 않았고 단지 신의 법력이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사람들에게 표현되어 나오지 않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사람을 교화하자면 신통을 크게 드러낼 수 없고 그렇게 하면 사람을 구하는 게 아니라 망치기 때문이다. 사람은 오직 이런 미혹 중에서 성자(聖者)의 말을 믿어야만 비로소 구도 받을 수 있다. 알아야 할 것은 한사람이 스스로 내심에서 우러나와 선을 향하지 않으면 절대 구도 받을 수 있는 표준에 도달하지 못한다.

당시 신농씨는 한 부락의 수령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식물의 성질과 특징을 인식하게 했다. 사농 등은 바로 식물을 인식하도록 도운 사람이다. 신농은 확실히 몇 차례 식물의 맛을 보았고 더욱이 그는 공능을 통하여 식물의 특징을 알아냈다. 왜냐하면 식물 그 자체 역시 생명이기 때문이다.

현대 서방에서 전자를 연구하는 박스터란 사람이 있는데 그는 연구를 통해 식물에게도 의식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실 중국에 판매되는 <물은 알고 있다>는 것이 그 일례다. 식물은 얼마나 많은 물로 이루어져 있는가. 물이 보고 읽고 듣고 하는데 식물은 어떻겠는가!

신농이 표본을 만들 때에 이를 기록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사농이었다. 당시에는 종이와 연필이 없고 단지 기호와 기억에 의존했다. 예컨대 일종 식물을 먹을 수 있는 것이면 그 잎은 한 조각 씹어서 찬 성질이면 잎을 아래로 한번 꺾어 놓았다. 더운 성질이면 위로 꺾었고 중성이면 옆으로 꺾었다. (이런 것은 모두 표본에 대한 처리이다) 물론 더 상세한 것도 있고 더 복잡하다.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새끼줄로 묶어 표시하는 것보다 더 개량된 방법이다. 부락중의 사람들이 한번 보면 이런 식물을 특징을 알 수 있게 했다.

각종 식물에는 모두 각 식물의 ‘왕(王)’이 있다. 이 ‘왕’들은 신농씨가 그것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그들 본신의 능력을 드러냈다. 사실 이런 것은 모두 사람들이 식물을 인식하고 이를 통해 문명방면에서 발전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 생에 사농은 이 일을 위해 적지 않은 애를 썼고 또 수많은 대가를 치렀다. 하지만 수천 년간 전해지는 가운데 그녀와 다른 이들의 이름은 인멸되었다. 때문에 신농이 백초를 맛본 이야기 역시 후세에 왜곡되었다.

사농은 헌원황제 시기 서왕모 주변의 사람인데, 서왕모는 황제가 치우와의 대전을 돕도록 그녀를 파견했다. 그러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대체 무엇 때문에 서왕모가 헌원을 돕도록 사람을 파견했을까? 나중에 헌원황제 역시 도를 닦아 신선이 되지 않았는가?’

치우가 포악한 것은 한 가지 측면이다. 다른 측면은 황제와 치우 사이의 정벌전쟁은 후세의 여러 제후국들 상호간의 그런 정벌이 전혀 아니라 이번 차례 문명의식의 형태와 지난 차례 문명이 남긴 의식 사이의 전쟁이었다. 이 역시 서남지역 일부 소수 민족들이 치우를 자신의 선조로 여기는 까닭이기도 하다. (이 방면에 대해 나는 전에 다른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의식형태(意識形態)’란 한 가지 표현에 불과하고 부동한 문명은 모두 부동한 신이 질서 있게 배치하여 나온 것이다. 때문에 한 문명의 말기에 생명이 나쁘게 변했을 때 그더러 물러나 퇴장하라고 하면 그는 분명 반항할 것이다. 이는 필연적이다. 하물며 우주 중에는 바른 신(正神)이 있으면 또 반드시 사악한 신(邪神)이 있다.

사악한 신은 인간세상의 악인을 이용해 인간을 해친다. 이것은 바로 헌원황제가 인간세상에서 장래 창세주께서 대법을 널리 전하도록 바탕을 닦은 중화 5천년 신전문명(神傳文明)과 대립하는 것이다. 아울러 곤륜산(崑崙山)은 이번 차례 문명에서 바른 신들이 거주하는 곳이기 때문에 자연히 헌원황제가 사악한 신 및 인간세상의 그 대리인인 치우를 싸워 이기도록 돕는 신선이 있게 마련이다.

사실 이 한 장면은 지금 사회, 특히 미국 대선과 아주 유사하다. 사악이 비록 일시적으로 아주 창궐할 수는 있지만 결국에는 정의가 반드시 승리한다. 정의의 힘은 자연히 여러 신들의 도움을 얻게 된다. 또 바로 이런 과정 중에서 생명의 태도와 생각을 보는 것이다. 이는 생명이 신의 구도를 받을 수 있을지 여부를 결정하는 관건이다.

대월지(大月氏)와 흉노가 차례로 돈황을 통치하는 동안 사농은 늘 이곳 식물 요소들을 관리하는 신이었다. 그런데 대월지와 흉노는 유목민족이라 농업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다. 설사 이렇더라도 그녀는 온갖 방법을 다해 장래 이곳 돈황 지역에서 사람들이 농작물을 인식하도록 애썼다.

나중에 진한(秦漢)시기에 들어와 이 지역은 점차 중원왕조의 관할에 들어왔고 농업 역시 점점 회복되고 발전하게 되었다. 게다가 비단길의 개통으로 다른 지역의 농경 방식과 식물의 상호 교통이 많아지면서 식물 종류가 아주 풍부해졌다. 이때 사농은 한번 하늘로 돌아갈 기회가 있어서 이 지구의 농업 발전의 책임을 다른 신에게 위탁했다.

그녀가 천상으로 돌아갔을 때 창세주께서는 마침 다른 신들과 돈황 막고굴의 각종 안배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막고굴에 대한 배치를 실천할 시간이 이미 거의 다 되었고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부서를 명확히 삼는 등의 일이었다.

이때 사농은 직접 농업 방면의 일을 동굴 벽에 그림으로 남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때 농업에 관련된 일을 관리하는 다른 신들도 분분히 직접 내려가서 나타내고 싶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막고굴에 한 획을 남겨놓을 수만 있다면 장차 공덕이 무량한 일이기 때문이다.

창세주께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일체는 배치가 저절로 있다. 무슨 일이든 모두 인연을 따라 협력해야 한다.”

나중에 창세주께서는 농업과 관련된 신들이 만장한 역사 속에서 아래로 내려간 세월 속에 매우 큰 연분이 있는 다른 신이 내려가서 이 일을 완성하게 했다. 또한 사농과 같은 신들은 점화하고 전개하는 일을 책임지게 했다.

사농에게 인간 세상에서 사람의 방식으로 나타나도록 배치된 신(神)은 아주 높은 경지 중의 그 법왕(法王)으로 당시에는 사농과 같은 체계 중에 있었다. 그들은 인간 세상에서 전생(轉生)할 때도 늘 함께 있었고 그들과 부동한 층차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서위(西魏) 시기에 풍백, 우사, 뇌신, 전신 등이 바탕을 닦았고 초당시기에는 수문제가 기우제를 지낸 표현이 있었기 때문에 그 높은 경지의 법왕(法王)은 성당 시기에 화공(畫工)으로 전생했다. 또 사농의 도움 하에 인간세상의 안료를 가지고 농민이 빗속에서 경작하는 장면을 한 폭 그려내었다. 이 그림을 통해 후세인들에게 아주 명쾌하고 직관적으로 신전문명 중의 농경의 상태를 느낄 수 있게 했다.

당시 그가 이런 것을 그릴 때 왜 이 동굴에 그림을 남겨야 하는가? 생각해보았다. 또 내가 보니 여기에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그린 벽화나 조소상이 있으며 매우 생생하다. 다 그린 후 그는 누워서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는 사농이 그의 의혹을 아는 듯이 그들 데리고 함께 사농이 전에 알던 신을 만나러 갔다. 이 신들도 명확하게 아는 것이 아닌 듯했다. 그들은 도처로 물으러 다녔고 어느 높은 산에 도착했을 때 공교롭게도 그곳에서 창세주를 뵈었다. 그들은 창세주를 보자 예를 마치고 돈황 회화에 관한 연유를 물었다.

창세주께서는 웃으시며 신통으로 그들의 예전 기억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이제야 비로소 원래 그들 한층 우주에 패괴(敗壞)가 나타난 것을 알았는데 그들과 뭇 신들은 힘이 없었고 나중에 창세주를 만나 창세주와 함께 서약하고 내려와 창세주가 인간세상에 대법을 널리 전할 때 제자가 되기로 한 것을 알았다.

나중에 그들은 이따금씩 같이 있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했으며 부동한 층차에 출현하여 나중에 삼계 부근에서 창세주를 중토의 돈황이란 이 지방에 신앙과 문명 발전에 관련된 표현을 남겨놓아 후세인들을 일깨우려 했다. 그들 역시 여기에 참여했기 때문에 비로소 현재 그와 사농이 협력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이 이런 것을 알았을 때 다시 한 번 창세주께 감사드렸다.

창세주께서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셨다.

“당신들은 대법이 널리 전해질 때 농업과 인연을 맺을 것이다. 다만 경작하는 형식은 아니다. 당신들은 인연이 있기 때문에 때가 되면 부부로 전생할 것이다. 비록 어떤 사람은 법을 얻지 못해도 다른 사람이 법을 얻는데 잘 협력해야 한다. 반드시 잘해야 한다.”

그는 창세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격동해서 깨어났다. 나중에 그와 사농은 함께 여러 생에 태어났으며 문학가, 무술가, 태수 등 여러 역할을 했다. 금생에는 동북에서 태어나 사농은 대법제자가 되었지만 그는 그녀의 남편이 되었다. 금생에 그들은 농경과 관련된 일을 하지만 직접 농사를 짓지는 않는다. 구체적인 것은 설명할 수 없으니 독자들의 양해를 바란다.

바로 다음과 같다.

농사의 신이 범부를 깨우쳐
늘 동행하니 예전 인연 귀하구나
금생에 법을 얻어 다시 협력하니
각자 온 힘을 다해 서약을 실천하네

農神點悟凡夫繪
一路同行前緣貴
今朝法傳重配合
各盡所能誓約兌

설명: 신농씨는 염제와 같은 사람이 아니다. 백초를 맛본 신농씨는 이 부락의 최초 수령이었고 염제는 그의 몇 세대 후손으로 역시 부락의 수령이었다. 이 점은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사기》〈오제본기〉 중에 “신농씨가 몇 세(世)에 쇠퇴했다”라는 말이 있으니 이 몇 글자로 설명이 충분할 것이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637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