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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 다시 살아난 사람들

해도(海濤)

【정견망】

사람은 죽으면 살아날 수 없다고 하지만 세상에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런 사람들이 어떤 경험을 했는지 과학계에서는 외면하고 있다. 그 이면의 비밀을 파헤치려면 역사의 단편적인 이야기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진서(晉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원강(元康) 연간에 양(梁)나라의 한 여자가 남자에게 시집가기로 하고 예물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시집도 가기 전에 남자가 장안을 지키러 파견되어 몇 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여자의 가족은 그녀를 다른 남자에게 시집보냈다. 여자는 부모에 의해 강제로 시집갔지만, 시집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나중에 장안을 지키던 여자의 남편이 돌아오자, 그는 정혼하지 않은 아내의 죽음을 듣고 아내의 묘소를 찾았다. 애통해하던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내의 관을 열었고 아내는 살아났다. 그는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이 사실을 안 여자의 두 번 째 남편이 아내를 데려오려고 관가에 가서 소송을 걸었다. 이 일이 너무 이상해서 사건을 심리하는 관리들도 결단을 내리기 어려워 조정에 보고했다. 비서랑 왕도의(王道議)는 “이는 보통의 일이 아니니 상식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고 전남편에게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했다. 조정에서도 여자는 마땅히 전남편을 따라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 사건이 정사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아마 당시 황친들도 한동안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다. 사실 이렇게 죽었다가 살아나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다. 우리가 피해갈 수 없는 역사 인물을 한번 말해보자.

그 사람은 바로 간보(干寶)다. 사서에 따르면 간보는 “어려서 근면하게 배우고, 책을 널리 읽었으며, 재능과 기량을 가졌다.”고 되어 있다. 그는 음양술수(陰陽術數)를 잘 알았고 《진기(晉紀)》, 《춘추좌씨의외전(春秋左氏義外傳)》을 썼으며, 《주역(周易)》, 《주관(周官)》 등 수십 편의 글에 주석을 달았다. 그의 잡문집은 모두 세상에 널리 퍼져 좋은 역사책으로 불린다. 역사뿐 아니라 신선류의 유명한 필기문학 《수신기(搜神記)》를 썼는데, 이 책에는 수많은 신선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왜 이런 사학의 대가가 《수신기》와 같은 소위 ‘지괴(志怪) 소설’을 썼을까? 이것은 그가 직접 겪은 두 가지 기이한 일로부터 시작한다. 《진서》에는 간보의 아버지에게 총애하는 시비(侍婢 여자 종)가 하나 있었는데 모친의 질투가 심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관을 내릴 때, 그의 어머니는 뜻밖에도 그 시비를 산 채로 무덤에 매장해버렸다.

십여 년이 지난 후, 간보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가족들이 부모를 합장하려 했다. 무덤을 열어보니 그 시비가 관 위에 엎드려 있는 모습이 생전 그대로였다. 그들은 매우 이상하게 여겨 수레에 시비를 태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후 뜻밖에 그 시비가 깨어났는데, 무덤 속에서 간보의 아버지가 물과 음식을 가져다주곤 했다며, 은혜가 생전과 똑같다고 했다. 이때부터 그 시비는 길흉을 예언할 정도로 영험했고, 나중에 시집가서 아이까지 낳았다.

이 일은 우리 현대인들이 듣기에는 그야말로 신화 이야기가 되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기이한 것이 하나 더 있다. 간보의 형은 중병에 걸려 숨이 끊어졌으나, 며칠이 지나도 그의 몸은 굳어지지 않았다. 후에 그의 형은 다시 깨어났다. 그는 천지에 귀신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자신이 죽은 줄 모르고 꿈을 꾼 것 같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사건이 간보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간보는 이로써 고금의 신령과 기이한 인물의 변화를 모아 찬했다.”(《진서(晉書)》)

이 때문에 간보는 천지에 더 높은 생명이 존재한다고 믿었고, 전설적인 신선들의 이야기를 모아 《수신기》라는 책을 썼으며, “신도(神道)를 밝히기에 충분했다.”(《진서》)

이뿐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많은 고서에서 사람이 죽었다 살아났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가령 《삼국지》에는 “이 해에, 안오(安吳) 백성 진초(陳焦)가 죽어서 묻었다가 6일 만에 다시 살아나 흙을 뚫고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수서(隋書)》에는 “지덕(至德) 3년 8월, 건강(建康) 어느 집의 노비가 죽었고, 묻힌 지 9일 만에 다시 살아났다. 소몰이꾼이 그것을 듣고 달려갔다.”는 기록이 있다.

《신당서》에는 “광계(光啟) 원년 습주(隰州) 온천 민가에 죽은 사람이 있었는데, 묻힌 지 보름 만에 행인들이 땅속에서 외치는 소리를 듣고 파냈더니 다시 살아났고, 세월이 흘러 죽었다.”고 했다.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정사의 편찬은 아주 엄숙하고 상세한 것으로 정사에 실린 이야기는 신뢰성이 대단히 높다. 즉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설명한다. 사실 현대에도 죽었다가 살아나는 일도 많고, 현대인들은 소위 ‘임사체험(臨死體驗)’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구조된 사람들이 죽을 때 겪는 신기한 경험을 표현하기도 한다.

중국 학자들이 1987년에 당산(唐山) 대지진 당시 구조된 생존자 81명을 대상으로 임사체험을 과학적으로 조사한 연구가 1992년 중화신경정신과 저널에 발표돼 파문이 일기도 했다. 81명의 응답자 중 최대 40가지 유형의 임사체험이 있었으며, 그 중 비교적 비율이 높은 것은 신체가 낯선 느낌, 아주 명확한 사고, 감정 상실, 물질 신체가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무중력 상태등이다.

이외 세계가 파괴되거나, 심판받는 느낌, 갑작스런 깨달음, 우주와 하나가 되는 느낌, 시간이 가속되거나 감속되거나 또는 멈추는 느낌, 예견적인 시각, 비정상적인 후각 경험, 끌려가거나 눌리는 느낌과 같은 다른 체험들이 포함되었다.

필자의 친구도 필자에게 이런 일화를 들려주었다. 몇 년 전, 그들 마을의 한 가족이 잔치를 했는데, 그때 많은 친척과 친구들이 갔다. 한 마을 사람이 그 가족에 원한이 있어 술자리 음식에 독을 넣었다. 연회석 후 친구의 한 할머니가 심한 중독 증세를 보였고(친구는 중독된 마을 주민이 많다고 했지만, 가장 심한 것은 그 할머니였다) 그녀는 처음에는 메스꺼움과 구토를 하다가 기절했다.

그때 마을에는 자동차가 없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짐수레로 그녀를 보건소로 밀고 갈 수밖에 없었다. 보건소에서 보자마자 구할 수 없다며 읍내 병원으로 보내라고 했다. 모두들 또 부랴부랴 그녀를 읍으로 끌고 갔고, 후에 읍내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해 돌아왔다.

이상한 것은 그녀가 정신을 차린 후에 놀라운 일을 말했다는 것이다. 당시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마을로 배웅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길가를 따라 아주 높고 큰 고대 성벽이 있는 것을 보았지만 사실 그 길에는 아무런 성벽도 없었다. 그때 그녀는 이미 기절해서 모두가 그녀가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똑똑히 보았고, 아주 진실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그녀는 누가 그녀를 보냈고, 누가 수레를 밀었는지도 자세히 알고 있어, 정신을 잃은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토론하며 그녀가 아마 저승의 장면을 본 것 같다고 여겼다.

친구의 친척이 본 옛 성벽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이 다른 공간을 볼 수 있는 것도 결코 빈말이 아니다.

성덕부(成德富)라는 노병이 직접 겪은 경험을 털어놓았는데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놀라움을 자아냈다.

이 노병은 중경(重慶)시 점강(墊江)현 계계(桂溪)진 출신으로 1965년 10월 38군 114사단 42연대에서 복무했다. 당시의 어려운 여건 때문에 군대에 있을 때 많은 병의 뿌리를 남겼다. 제대 후 그는 사방으로 의사와 약을 구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1997년 친구의 소개로 파룬궁을 배운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아 온몸의 병이 온데간데없고 몸이 건장하게 된 성덕부는 이때부터 수련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99년 7월 중국 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하자 그는 잔혹한 박해를 받았고 아내와 자식들은 중국 공산당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그를 떠났다.

2011년 두 번째 부인도 중국 공산당의 오랜 괴롭힘에 못 이겨 이혼장을 남기고 떠났다. 우울한 기분으로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성덕부는 아내를 찾아 점강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차 안에서 그는 “갑자기 가슴을 세 번 두드리는 느낌이 들더니 두 사람이 내 어깨를 비틀어 앞으로 나가는 게 속도가 너무 빨라서 바람소리만 귓전을 스쳐 지나갔다.”[1]

성덕부는 그렇게 기괴하게 염라대왕의 앞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염라대왕의 조사 결과, 그들이 잡으려던 사람은 진덕부(陳德富)라는 사람이었고, 저승사자가 두 사람 이름의 중국어 발음이 같아 사람을 잘못 잡아온 것이었다. 염라대왕은 성덕부에게 자신의 손님이라고 일러주었고, 그는 일찍이 지옥에서 제명되어 자신의 관할이 아니었으며, 심부름꾼을 시켜 지옥을 보여주고, 지옥에서 본 것을 이승에 있는 사람에게 들려주게 하여 선악이 보답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였다.

심부름꾼이 성덕부를 데리고 나하교를 건너자 끝없이 펼쳐진 피바다가 온통 인간인 것을 보았는데, 이들은 대부분 공안, 검사, 법관 등 각종 제복을 입고 있어 한눈에 봐도 모두 중국 공산당 관리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악어, 독사, 사자 등 각종 육식동물에 머리를 물어뜯기고 손과 다리를 물어뜯고 고기를 뜯어 먹히며 온갖 울음소리,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는데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성덕부는 또 다른 형벌 광장에서 각각 네 가지 법 집행부 복장을 한 4명이 형벌을 받는 참상을 목격했다. 그들은 모두 (중공) 국장 모자를 쓰고 한 형틀에 거꾸로 묶인 채, 하나의 강철 끌이 네 사람의 허리를 가로지르며, 한쪽에 하나의 형벌로 강철 끌로 밀고 당기고 가는데, 네 사람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저승사자는 그에게 말했다.

“법 집행관은 권선징악을 해야 한다. 그들은 오히려 인민의 돈으로 부패와 권세를 위해 선악을 구분하지 않고, 선량한 사람을 해치고, 법을 집행하여 법을 범했으니, 피의 빚이 산더미처럼 쌓여, 얼마나 많은 선량한 사람을 억울하게 했는가, 지옥에 떨어지면 이러한 고문으로 그들에게 억울하게 당한 사람을 갚고, 한 사람을 밀치고, 한 사람을 돌려준다.”

훗날 염라대왕이 성덕부에게 시간이 다 되었다고 말하자, 두 명의 저승사자가 그를 던져버렸다. 그는 자신이 형벌을 받는 광장으로 차일 것을 두려워하여 큰 소리로 외치자 곧 살아났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이미 병원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물어보니 선량한 기사와 판매원이 그가 기차에서 갑자기 기절하는 것을 보고 그를 현 병원에 보내 응급치료를 한 것이었다.

이런 실제 사건들은 모두 우리에게 인간의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선에는 선보가 있고 악에는 악보가 있다는 우리 선조들의 충고도 봉건미신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진정한 도리다.

여러분은 혹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얘기를 들어보았는가? 이 이야기를 많이 알려주기 바란다.

참고자료 : 정견망 《어느 퇴역 군인이 저승에 다녀온 실화》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0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