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雁門關(안문관)

글/ 석연(惜緣)

[정견망]
안문관을 거닐며

안문관에 들어서니
가슴이 은근히 설레어라
천년의 옛길은 있으나
관에는 옛 모습 없어졌구나
연소는 말 달려갔고
풍운은 흘러간지 천 년
눈을 들어 관 아래를 바라보나니
대법은 중원에 있구나

踏上雁門關,(답상안문관) 隱隱胸內 .(은은흉내번)
千年古道在,(천년고도재) 關中無故煙.(관중무고연)
延昭揮馬去,(연소휘마거) 風雲逝一千.(풍운서일천)
擧目望關下,(거목망관하) 大法在中原.(대법재중원)

1998년 8월 10일 안문관에서
<<홍음-遊雁門關(유안문관)>>

안문관(雁門關)

안문관은 산서 대현(代縣) 북부에 있다. 만리장성의 중요한 관문의 하나이다. 당조(唐朝)시기 산 정상에 안문관이 설치되었는데 영무관(寧武關), 편관(偏關)과 합하여 삼관(三關)이라고 한다. 산서성의 남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현재 남아있는 관성(關城)은 명대(明代)에 건축한 것이다. 형세가 아주 험한 요지여서 역대로 오랑캐를 막아내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북송 양가장(楊家將)이 요(遼)에 항쟁하던 시기에 북송의 명장인 양업(楊業=楊繼業)과 그의 자손들이 전후로 군사를 거느리고 요나라 군대와 전쟁을 벌였는데, 그 사적을 후인들이 “양가장이 요에 항전했다”라고 칭한다. 양씨의 원래 본적은 인주(麟州) 신진(新秦, 지금의 섬서성 신목(神木)북부지방)이었다. 북송 초기에 양업이 우(右) 영위대장군 등의 직책으로 안문관 일대를 지키면서, 남쪽을 침범하려는 요나라 군대를 저지하였다. 태평(太平) 흥국(興國) 5년(980년)에 요의 경종(景宗)이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안문관을 공격하였다. 양업은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요군(遼軍)을 급습하였고 이에 요나라 군대는 패하여 되돌아갔다. 흥국 7년(982년0 4월에 요나라 군대가 길을 나누어 송을 공격하자, 양업이 군대를 지휘하여 요나라 군대를 안문관 아래에서 패퇴시키고 군사 3천명의 목을 베었으며 만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옹희(雍熙) 3년(986년)에 주장[主帥]인 반미(潘美) 등과 함께 운(云)주, 응(應)주, 환( )주, 삭(朔)주 등 네 개 주를 수복하였다. 요군이 대거 반격에 나서자 양업은 반미와 감군(監軍)인 왕일(王佚)의 명을 받들어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나아가 전투를 벌이다가 패배하여 부상당하고 포로로 잡히자, 굶어 죽었다. 양업이 죽은 후에 그의 6번째 아들인 양연소(楊延昭)가 계속하여 병사들을 이끌고 요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전후 20여 년간 송나라 변경을 지켜내어 송나라 북부 영토를 공고(鞏固)하게 하였다. 이후에 연소의 아들인 양문광(楊文廣)이 또한 부업을 이어 계속 요에 항전하였다. 송 이후 양가장이 요에 항전한 사적이 널리 유전되었는바 희곡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자료 내원 : 중국명승 색인)

발표시간 : 2001년 6월 26일
문장분류 : 인체생명우주>인류와 환경 기타
원문위치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1/6/26/1070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