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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대만 미래과학문화 세미나 논문: “한의학의 세속화[中醫常人化]” 과정 논의

2005년 대만 미래과학문화 세미나 논문: “한의학의 세속화[中醫常人化]” 과정 논의

글: 류둥메이(劉東梅)

【정견망 2005년 6월 26일】

제1부: “한의학의 세속화” 문제의 제기와 그 역사적 의의

1. “한의학의 세속화”란 무엇인가? 왜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가?

사실, “한의학의 세속화” 논법은 설명할 필요가 없는 분명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세속화(常人化)”는 보통사람의 것으로 변했다는 것으로, 자연히 “원래는 보통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내포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한의학의 세속화”는 한의학이 어떻게 비(非)일반적인 사람들의 것에서 점차 일반적인 사람들의 것이 되었느냐는 것이다. “한의학이 원래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것” 이라는 것에 관한 문제는 원래 한의학 고유의 수련 내포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1), 수련을 하는가 하지 않는 가야말로 어떤 사람이 보통사람인지 여부를 규정하는 유일한 근거이다.

“한의학의 세속화”란 개념은 《한의학의 수련 내포》 라는 글에서 처음으로 제기된 것이다(1). 이 글은 한편의 이론 구조적인 성격을 띠는 글로써, 그 가운데 논증과 예시는 최대한 간결하게 하는 원칙에 입각해 글의 논리가 독자들에게 분명히 나타나게 했다. 또 이 개념 자체는 분명한 성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그것을 직접 상식적인 개념으로 삼아 사용하였다.

이 개념의 중복 제기와 “한의학의 세속화” 과정에 대한 진일보 된 토론은 《한의학의 수련 내포》중의 중요 개념을 더욱 구체적이고 풍요롭게 하여 이 글의 진실성과 무게를 더하게 할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각도와 입장에서 한의학의 역사와 변천에 대해 새롭게 살펴보고 평하며 아울러 이것을 하나의 구체적인 실례로 삼아 사람들이 인류의 전체 역사과정을 새롭게 인식하고 평가하도록 하는데 완전히 새로운 시각과 사고의 방향을 제공하려는 것이다.

대체로 말하면, “한의학의 세속화” 과정은 인류의 수많은 “세속화” 과정중의 하나일 뿐이다. 모든 “세속화” 과정은 인류가 일부 특정한 환경에서 “사람과 신(神)의 동거”로부터 “사람과 신의 이탈”에 이르는 과정을 생동감 있고 구체적으로 묘사해 낸다. 이런 모든 퍼즐들을 맞추어 나간다면, 그것은 바로 인류가 점차 신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되는 과정의 완전하고 생동감 있는 묘사가 된다. 이 과정은 일반인들에게 “인류사회의 앞을 향한 발전”이라는 미명으로 불려진다. 사실, “앞을 향한 발전”인지 “아래로 향한 추락” 인지는 완전히 추론자가 사용하는 전제에 따라 달라진다.

연극이 끝나면 연기자들은 각자 흩어진다. 그러나 연극의 전체 내용은 관객들의 마음속에 남아있으며 아울러 그들의 생활 속에 영향을 주는데 그들의 언행과 전체 생활에 영향을 끼치고 지도하는 역할을 한다. 역사 역시 연극의 내포에 불과하며 인류는 연기자이자 관객이다. 역사는 인류가 미래에 남겨 줄 수 있는 유일한 집단 창작의 선물이다. 특히, 인류의 한 문명이 완전히 소멸된 이후 다음 문명 가운데 인간이 계승할 수 있는 것은 지난 문명의 역사 혹은 단편적인 것에 불과하다. 옛 사람들은 역사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역사를 거울로” 삼음을 강조했고 후손들로 하여금 선인들의 경험과 실천 유산을 존중하여, 이로써 자신의 언행을 지도하게 하였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역사에 대해 점점 더 무관심해지고 있는데 물론 역사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2. 불변하는 역사, 변화무쌍한 인식

한 보통 사람이 알고 있는 모든 역사가 전적으로 진정한 역사는 아니다. 보통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역사도 완전히 진정한 역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모든 사실을 평탄하고, 공평하며 조금도 숨김없이 사람들에게 드러낸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 경험, 지식 배경, 신앙, 흉금 및 용기의 차이로 인해 충분한 이해와 수용 및 상상력으로 역사를 전체적으로 수용할 능력을 갖출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수용능력을 근거로 하여 역사에 신발, 모자 그리고 옷을 입힌 후, 역사의 발을 깎고, 머리를 베고, 몸을 도려내어 가까스로 자신을 그 준비된 틀에 끼워 맞춘다. 이러한 역사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역사이며 심지어 이미 억눌려 죽은 역사, 더 심하게 말하자면 이미 사지가 갈가리 찢겨진 불완전한 역사이다!

예를 한번 들어보자.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에서 편작(扁鵲)을 위한 전(傳)을 만들 때, 그는 중서자(中庶子)의 편작에 대한 힐난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사료(史料) 문제에 부딪혔다. 중서자가 묘부(苗父)와 수부(俞跗)란 두 고대 명의를 예로 들어 편작의 말을 가로막고, 황궁에 들어가 시궐(屍厥)에 걸린 태자를 진찰하지 못하게 했다. 여기서 말하는 묘부는 “상고(上古)시대의 의사”로서, 즉 황제(黃帝) 시대 이전의 의사였다. 그는 모든 병자들에게 초구(草狗 풀로 만든 개)만을 사용하여 북쪽을 향해 주문을 외게 했다. 그래서 부축되어 온 사람이든, 들것에 실려 온 사람이든 막론하고 즉시 원래의 건강을 회복했다.[참고자료 (2),(3)]

수부는 황제(黃帝)와 기백(歧伯) 시대의 의사로서, 외과 수술만으로 병을 치료했다. 그는 진단에 있어서는 절대로 편작의 아래가 아니었으며, 외과 수술 방면에 있어서도 분명히 화타(華佗)를 능가했다. 사람들은 그가 기사회생시킬 능력이 있으며, “죽은 사람도 살려낼 수 있다”고 했다. [참고자료 (3)(4)(5)] 사마천은 묘부의 진실성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묘부에 관한 부분을 없앴고, 수부와 관련된 자료만을 남겼다. [참고자료 (4)] 아쉽게도,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역사학자인 사마천조차 역사에 대해 “발을 깎아 신발을 맞추는” 불합리한 일을 피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송대(宋代)에 이르러, 당시 명의였던 방안시(龐安時)도 고대 의사들의 치료능력을 믿을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화타가 마비산(麻沸散)을 사용해 외과수술에 사용한 일을 묻자, 그는 의외로 “만약 의술이 이러한 경지에 올라갔다면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사서에서 날조된 거짓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참고자료 (6)] 화타가 만든 마비산의 마취작용도 믿을 수 없는 그에게 의학사 책을 쓰게 한다면, “발을 깎아 신발을 맞추는” 것뿐만 아니라 아마도 “목을 자르고 모자를 씌우는” 격이 될 것이다. 이로써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의학의 역사에 대한 인간의 왜곡과정은 한 걸음 한 걸음씩 뒤로 갈수록 더 심해졌다는 것이다.

현대에 와서 특히 대륙의 중국인들은 강제로 주입당한 “역사적 유물론”의 사상 통제를 받았기 때문에, 초상(超常)적이고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들은 모두 유물론 원리에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 부정하고 개조했다. 현재 한의과 대학 학생들 가운데 과연 몇 명이나 편작과 화타의 비범한 능력을 믿을 수 있겠는? 수십 년 전에 한의과 대학에서 사용한 의학사 강의에서는 이미 아예 편작의 뛰어난 가르침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참고자료 (7)] 한의학의 역사 교재를 쓴 사람들과 그들의 교재를 읽은 절대다수 학생들의 마음속에 있는 한의학의 역사는 역사를 난도질하여 역사적 유물론이란 옷에 끼워 맞춰 새롭게 만들어 낸 산물인 것이다!

역사는 스스로를 변화시키지 않지만 그러나 사람들의 역사에 대한 인식은 오히려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 동일한 역사 혹은 동일한 사실에 대해, 서로 다른 시대의 사람들은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으며 동일한 시대의 서로 다른 사람들도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심지어 동일한 시대의 동일한 사람들도 사상의 변화로 전후에 서로 다른 견해를 빚어낸다.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역사관”의 차이와 변화로 귀결짓는다.

3. 천차만별의 역사관, 두 개의 전제

동일한 역사에 대해,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각자 독특한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관은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 일부 사학자들은 역사관을 크게 “유물사관(唯物史觀)”과 “유심사관(唯心史觀)” 두 가지로 나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역사관의 범주 확정과 내포 역시 번잡하고 모호한 것으로, 논리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하자면, 모든 사관은 가장 기본적인 전제와 역사적 사실을 논거로 하여 유도해낸 대량의 결론을 포함하고 있다. 만약 그 중 가장 기본적인 전제를 찾아내지 못하고 다만 서로 다른 사관을 이야기 한다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논리력이 없는 것이다. 사관이란 결국 하나의 견해에 불과하며, 극히 강한 주관적 요소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엄격한 논리적 추리를 통한 결론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리, 과학, 실제 상황에 더욱 부합하는 방법을 채택하고 가장 기본적인 전제에서 출발하여, 모든 사관과 개인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모두 논리적 추리의 결론으로 해석한다. 역사관은 “세계관”의 일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에, 세계관의 전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욱 개괄적이고 일반적이며 간편한 방법이다.

원인을 끝까지 따지고 근원을 찾는다면 사람들은 천차만별의 세계관이 분리되거나 교착되는 두 개의 대립되는 기본 전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더욱 간편하게 보기 위해서, 우리는 여기서 본문에서 필요로 하는 범위 내에서 그것들을 다음과 같이 귀납해 보고자 한다.

전제 1: 인류는 더 고층차의 생명이 한 걸음 한 걸음씩 탈바꿈한 산물이다. 고층 생명은 줄곧 인류가 원래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돕고자 시도하고 있다. 인류 사회의 모든 사건은 고층 생명이 인류가 원래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돕기 위해 내린 안배와 관련이 있다. 인류 사회는 인류가 원래의 곳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가장 낮은 차원이다. 인간의 진정한 생명은 불멸(不滅)하는 것으로 인류 생명의 긴 과정 중에 모든 생명은 서로 다른 존재 형식을 겪어왔다.

전제 2: 인류는 생명이 없는 것에서부터 생명이 있는 것으로, 저급 생명에서 고급 생명으로 차츰 진화한 것으로 모든 진화는 많은 가능성 중에서 때마침 진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나 발생한 것이다. 인간은 가장 고급적인 생명이다. 그러므로 인류를 통제할 수 있는 더 높은 생명은 없다. 인류 사회의 모든 사건은 인류 자신의 염원과 선택의 결과일 뿐이다. 인간의 생명은 일회적인 것으로 죽으면 아무것도 없게 되며, 인간은 영혼이 없는 존재이다.

이 두 가지 전제는 각각 유신론과 무신론의 입장이다. 그들을 역사관에 적용하면, 각각 “신이 전한 역사(神傳歷史)” 와 “인간인 창조한 역사(人創歷史)”의 대립사관이 되며, 우리는 간단히 그것을 “신전론(神傳論)”과 “인창론(人創論)”이라고 칭해도 무방할 것이다.

4. “한의학의 세속화” 과정을 서술하는 역사적 의의

위의 두 가지 기본 전제를 비교해 보면, “전제 1″은 전반적으로 모든 역사 사건을 수용하여 “발을 깎아 신발에 맞추는” 식의 수정을 하지 않은 보편 적당한 전제이고, “전제 2″는 반드시 역사에 대해 “발을 깎아 신발에 맞추고”, “목을 베어 모자를 씌우는” 것 에서 나아가 “사지를 갈가리 찢고” 심지어 “난도질 하여 다지는” 식의 “칼로 붓을 대신하는” 협애한 전제이다

“인창론” 사관 혹은 이른바 “역사적 유물론”의 사관으로 씌어진 역사 서적을 보면 우리가 상술한 결론이 공평무사하고 타당한 것임이 분명하다. 특히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국가, 그 가운데 특히 중국은, 어용 “사학자”들이 역사에 대해 제멋대로 재단하며, 근거 없이 날조하며, 적나라하게 역사를 위조하고 있다. 이러한 위조는 공산당이 아직 정권을 장악하지 못했을 때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다. 예를 들면, 국민당이 항일(抗日)을 확대해 가며 장병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투쟁을 벌인 공훈을 말살하고, 동시에 항일에서 공산당의 역할을 과장하고 날조하였다. 특히 “문화대혁명” 시기에, 이러한 역사 날조는 그야말로 우스꽝스러울 정도였다. 한 화가로 하여금 안위안(安源)으로 가서 마오쩌둥(毛澤東)의 유화를 그리게 했는데, 아주 수월하게 다른 사람의 오랜 “혁명공적”을 온통 “위대한 수령” 의 이름 아래에 늘어놓은 것이다. 역사적 증거를 요구하는가? 바로 이 유화가 역사적 증거이다.

중국 의학사로 말하자면, 중국 대학들이 가장 먼저 사용한 “중국의학사강의(中國醫學史講義)”는 이미 역사 기록 가운데 거의 모든 초상적인 내용을 삭제하였고, 아울러 “유물” 사관에 따라 모든 의학 분야의 개인성과를 무단으로 노동 인민의 실천, 총결, 계승의 결과로 간주했다. [참고자료 (7)] 초상적인 수단을 통한 공헌은 모두 철저히 부인되었다. 그 가운데 많은 것은 현대 과학을 포함하여 이미 내재적인 가치를 실증한 것인데, 예를 들면 침구 경락과 혈(穴)자리의 객관적 존재성, “경락이 민감한 사람”이 보는 침구 경락과 혈의 초능력, 한의학 태교 이론과 실천의 과학성 등이다. 이외에도 각종 초능력을 이용한 진료와 난치병을 치료하는 실제적인 능력 등등은 부연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므로 전제 1의 기초위에서 한의학의 세속화 과정을 묘사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모든 재단을 중단하는 것으로, 가장 자연스런 관점에서 한의학의 역사를 인식하고 점진적으로 한의학 역사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적 인물들의 사상을 존중하고, 역사적 사건 중의 모든 역사적 기록의 평등한 권력을 존중하는 것이다. 자신의 어떤 “주의”와 “사관”에 근거하여 함부로 시비와 참 거짓을 억측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유물”적인 방법이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은 모두 “물질”이기 때문에 자신의 견해에 근거해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는 그것을 역사에서 제거하는 것으로 역사를 유린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유롭게 자신이 좋아하는 전제와 사실을 선택하여 역사를 인식하고 해석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함부로 역사의 어떤 부분을 재단할 권력은 없다. 인간의 사상은 변화하고 승화 되는 가운데 원래 근본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던 것이, 나중에는 이상한 것이 아닌 상식(예를 들면 한의학의 태교 이론)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만약 함부로 역사를 유린한다면, 자신의 일시적인 얕은 견해로 역사의 어떤 부분의 내포를 영원히 상실하게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신전론자들은 인류역사 자체는 하나의 세속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한의학의 세속화 과정을 묘사하는 것은 전형적인 예시가 되어, 기타 각종 세속화 과정을 묘사하는 것에 하나의 구체적인 방법과 사고의 방향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인류가 진정한 역사를 찾는데 있어 실행 가능한 경로를 제공하였다.

제2부: “한의학의 세속화” 과정

1. “한의학 세속화”의 근원

“한의학의 세속화” 과정이 발생한 뿌리는 일반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한의학에도 있지 않다. 심지어 평생 노력하여 “한의학의 세속화” 과정을 크게 추진했던 저명한 의학자들에게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사회 변화의 원칙과 안배의 산물일 뿐이다. 그러나 모든 안배와 사건들은 인류의 정체적인 소망, 노력과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구현될 수 있다. 또한 인류에 대한 고층생명의 권고, 경고, 계시로써 직접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고층 생명은 줄곧 인류가 원래의 곳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에, 이러한 노력은 계속해서 그들이 인류가 이미 원래의 곳으로 되돌아갈 희망이 조금도 없다고 생각할 때까지 계속된다. 그래서 상술한 두 가지는 보기에는 완전히 서로 다른 안배이지만, 실제로는 마찬가지로 고층 생명이 계속해서 인류가 원래의 곳으로 되돌아 갈수 있도록 돕는 것을 나타내 준다.

신전론자가 근거로 하고 있는 전제 1에 따르면, 인류사회의 모든 큰 사건들은 더 높은 차원의 생명의 개입 혹은 안배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가(佛家)의 이론에 따르면, 전체 우주는 “성, 주, 괴, 멸”의 과정에 따라 발전하고 있다. “괴, 멸” 단계에 놓여있는 인류와 그 사회는 심성(心性) 파괴, 도덕적 타락, 신의 모든 영향을 거절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래서 각종 영역에서 “세속화”의 경향과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한의학의 세속화” 과정이 그것의 평가가 어떠한지 상관없이 보통 사람들 가운데 일부 사람들의 개인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귀결지을 수 없다. 신전론자로서, 우리는 인류의 발전 방향이 전반적으로 신의 뜻을 위배하는 것이기에 역시 좋지 못하다고 본다. 그러나 매 역사 인물에게 적용할 때는, 설령 그가 이 방향의 추진자라 할지라도 그의 도덕과 심성이 반드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낮다는 것은 아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당시 사람들 가운데 그는 심성과 인품, 덕성이 비교적 높은 사람으로, 이러한 상황은 “한의학의 세속화” 과정 중에서 역시 비교적 흔히 있는 일이다. 우리가 한의학 발전 과정 중에서 세속화 경향을 지적하는 것은 단지 의학의 역사를 회고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보편타당한 전제를 더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더 진정하고 가감 없는 한의학의 역사에 접근하게 하려는 것이다. 특히 “역사적 유물” 사관에 속박 당한 사람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선택과 해탈의 길을 제공하려는 것이다.

2. “한의학 세속화” 과정의 표현형식

<한의학의 수련 내포>라는 글 중에서, 우리는 이미 한의학 각 분야의 수련 내포에 대해 비교적 명확한 설명을 하였다. [참고자료 (1)] 어떠한 수련 이론과 실천이든 모두 일반적인 사람을 뛰어넘는 것으로, 원래 한의학은 일반적인 사람의 차원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바로 비범한 수련 내포에 있다. 그래서, 한의학을 일반적인 사람의 것이 아닌 것에서 일반적인 사람의 것으로 바꾸려면 반드시 그 수련 내포를 없애야 한다.

한의학 수련 내포를 제거하는 과정은 한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각종 세속화 과정에 따라 차츰차츰 걸어 나간 것이다. 각 시대의 사람들은 초상적인 수련 이론과 실천을 수용하고 용인하는 정도 역시 각기 다르다. 이러한 과정이 바로 우리가 묘사할 “한의학의 세속화” 과정이다.

표면적으로 본다면, 만약 일종 한의학 능력의 학습과 실천 속에서 학습자들이 어떠한 수련 이론과 실천, 불필요한 어떤 초상적인 방법과 능력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학습과 실천은 세속화된 것이다. 예를 들어, 진맥을 예로 들자면, 편작은 결코 진맥으로 질병을 진단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겉모양으로만 질병 증세와 맥의 상태의 상응하는 변화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면서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구체적인 형상에 의존하여 자신의 진단의 진실성을 이해하도록 했다. [참고자료 (5)]

이후의 일부 도의(道醫)들은 능력이 편작처럼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물론 편작처럼 일부러 그런 사람도 있었다) 실로 환자의 손목 부위를 묶고 맥을 잡았다. 사실은 환자의 정보를 실을 통해 전달해야만 스스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능력이 더 떨어지면, 정말로 환자의 손에 접촉해야만 비로소 필요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정보는 여전히 초상적인 감지 능력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코 삼부구후맥[三部九侯, 한 손가락이면 충분하면 “일지선(一指禪)]”을 진단할 필요도 없고, 생각하거나 추론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한 사람이 완전히 심성 수양을 저버리고, 반복적인 맥결(脈訣) 암송과 스승의 사례 시범을 통해 각종 맥의 상태를 느낄 때는, 그가 환자의 정보를 획득하는 과정은 바로 손의 삼부구후 감각에 암기하고 있는 맥의 상태 묘사, 그리고 다시 논리적인 추리를 통해 완성한 것이다. 이 역시 세속적인 방법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반복적인 논리적 추리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설명할 때 종종 심오하고 신뢰감을 주며, 쉽게 일반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후세의 많은 유의(儒醫)들이 의학의 이치를 논하는 것을 숭상하여 실제적인 병치료 효과가 떨어지게 된 원인이다.

3. “한의학의 세속화”는 “세속화” 중의 완벽한 예시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괴, 멸” 단계에 놓여있는 인류사회는, 그 전체 발전과정이 완전히 신의 영향에서 철저히 벗어난 “세속화” 과정이다. 그래서 인류사회의 모든 부분에 “세속화” 경향이 드러나는데, 세속 사회에서 “세속화” 발전 경향이 나타난다. 그러나 많은 “세속화” 과정 속에서, “한의학의 세속화”는 전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세속화” 사례이다.

예를 들어,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종교의 세속화” 과정은 가장 직접적으로 인류가 어떻게 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 “세속화” 전후에 인간 생활에 대한 객관적인 영향의 차이는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증거를 찾기가 힘들다. 종교 신자들 가운데 수십 년간 교회나 사찰의 규율을 지켜가는 사람은 이미 너무나 줄어들었다. 정말로 지키는 사람들도 타인으로 하여금 이렇게 하는 것이 실제로 어떠한 장점이 있는지 받아들이게 할 방법이 없다. 심지어 더욱 오랫동안 수련 원칙을 지켜나갈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일반 사람들 가운데 거의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러나 한의학의 상황은 다소 다르다. 비록 도의(道醫)는 이미 매우 적어졌지만, 때때로 두각을 드러내면서 일반 사람들의 사회에 뛰어난 수단을 보여주며, 사람들로 하여금 아직 “세속화” 되지 않은 한의학의 초상성을 생각나게 할 수 있다. 게다가 한의학과 인간의 생활은 밀접하고, 아울러 수많은 괴이한 증상들이 한의학에서 만족스럽게 치료될 수 있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일부 한의학 사례를 통해 사람들에게 일깨우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 사람으로 하여금 “과거의 한의학이 정말로 대단해”라고 느끼게 한다. 수백 년, 수천 년 전의 진료 기록은, 오늘날 한의학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어느 정도 참고 작용을 하며 이것은 사람들에게 “세속화” 과정 전후가 대비되는 하나의 기회이다.

4. “한의학 세속화”의 역사 과정

“한의학 세속화” 과정의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뚜렷한 표현은 바로 한의학의 “유도(儒道) 분류”이다. [참고자료 (1)] 한의학에 대해 어느 정도 접촉한 사람들은 이런 느낌을 가지고 있다. “현재의 한의학은 신비롭지 않다”. 다시 말해, 원래 한의학의 초상적인 질병의 진단과 치료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비록 신비로운 도의(道醫)는 아직 남아 있으나 이미 극소수여서 매우 드물다. 게다가 많은 유의(儒醫)들은 숨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보기 어렵다. 도의가 너무나 적은 이유는 도의가 “보수”적이라 후계자를 돌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도의 자체가 포함하고 있는 수련 내용이 일반 사람이 수용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도의가 자신의 의도(醫道)를 계승할 사람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도의와는 유사하지만 또 다른 민간 의사는 종종 어떤 특수한 질병 치료에서 독특하고 신비한 능력을 갖춰 직접 본 사람들로 하여금 한의학의 신기하고 비범한 성질에 대해 찬탄을 금할 수 없게 한다. 이러한 사례는 심지어 현재 법륜불법(法輪佛法)의 경전에도 기재되어 있어 한의학사에 있어 합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필자는 접골에 능한 한 아마추어 민간 의료인을 알고 있다. 그는 “맨발 의사 교류회”에서 자신의 특기를 보여주었다. 커다란 수탉 한 마리를 잡아다가 환자 역할을 하게하고, 모두가 보고 있는 자리에서 “딱딱” 소리와 함께 수탉의 다리뼈를 절단하고, 모두에게 부러진 골절을(뼈 부스러기를 만질 수 있었다.) 손으로 만져보게 했다. 그리고는 약초를 입으로 씹어 끈적끈적한 상태로 만들어 수탉의 부러진 다리에 바르고 다시 떨어진 천을 찾아 약봉지를 싸매고 무명실로 묶었다. 며칠이 지난 후, 수탉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말하는 바에 의하면, 사람을 치료하는 방법과 효과와도 완전히 일치해서, 그가 치료한 사람들이 그 증거가 된다고 한다. 이러한 부류의 의사들은 비록 일반적으로 사회적 지위가 낮지만 함부로 의술을 남에게 전수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러한 능력을 선물로 받게 되었을 때, “마음씨가 아주 좋은” 사람에게만 전수하며, 그렇지 않으면 관에 들어갈지언정 절대로 함부로 전수하지 않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류의 의사들은 후계자를 찾기가 매우 힘들다. 하물며 이보다 더 엄격한 수련을 요구하는 도의는 어떻겠는가?

그래서, 세간에서 보게 되는 한의학은 기본적으로 일반적인 방법을 통해 배운 유의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설명해야 할 것은 우리는 유의와 도의에 대해 함부로 판정하거나 상하를 나누며 좋고 나쁨을 평가할 뜻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최대한 객관적으로 신전론의 기점에 서서 한의학의 변천
과정을 묘사하려는 것이다. 사실, 도의와 유의는 각자 자신의 역사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매 사람의 지위 역시 생생세세 맺어진 인연이다. 신전론자들도 인연을 믿으며 결코 어떤 질투심이 없다. 게다가, 유의와 도의의 구별은 주로 수련 내포와 초상적인 기능을 포함하는지 여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다. 많은 유의들은 마음이 비교적 바르고, 어떤 부분에서 일정 정도 초상적인 능력을 보여준다. 필자의 선친께서도 전형적인 유의로서 부인과와 진맥 부분에 있어서 신선의 경지에 도달하셨다. 그럼에도 도의를 매우 앙모하여, 도의(道醫)의 전통이 더 광범위하게 세상에 퍼져 중국 의학이 대대로 높은 수준을 확보하기를 희망하셨다.

편의를 위해, 우리는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세속화 과정 중에서 비교적 중요한 의사 혹은 저작을 줄거리로 하여 간단명료하게 독자들에게 한의학 세속화의 대체적인 윤곽을 그려볼 수 있게 하겠다.

4-1 원고(遠古)시대의 한의학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遠古”는 《황제내경(黃帝內經)》에서 말하는 “중고(中古)” 및 그 이전 시대를 가리킨다. 필자가 이해하는 바로는, 황제와 기백은 황제 이전 시대를 모두 “고(古)”대로 칭했으며, 그 중 비교적 가까운 것은 “중고(中古)”, 보다 먼 것은 “상고(上古)”라고 칭했다. 이 시대는, 후세에 “인간과 신이 동거”했다고 칭하는 시대도 포함되어 있다. 이 시대 사람들의 의료실천 상황에 대해, 우리들은 《황제내경》 안에서 후대 사람들이 기재한 것을 통해 대략적인 이해를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한의학의 세속화” 과정을 토의할 때, 이러한 이해도 대체로 괜찮은 편이다. 우리의 결론은 그 당시 의사들은 모두 특이공능(초능력)이 매우 강한 도의(道醫) 및 도사였으며, 그들의 수련실천과 의약분야의 비범한 능력 혹은 단번에 획득한 뛰어난 기술은 절대로 일반 사람들이 배우거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반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당시에는 “세속화” 개념이 출현할 수 있는 토양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시대에, 우리가 현재 알고 있고 실제로 의약에 종사한 것으로 기재된 저명한 의사들로는 신농(神農), 묘부(苗父), 수부(俞跗) 등이 있다. 그 중 신농은 신인(神人)으로, 주로 당시 농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의 저명한 의약실천은 “자편(赭鞭)”이라는 회초리를 가지고 “오악사독(五嶽四瀆 중국의 5대 산과 4대 강을 말함)”을 두루 다니며, “흙에서 나는” 모든 약초를 하나하나 쳐서, 그 주치(主治)를 알아냈다고 한다. [참고자료 (1), (9), (10)]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의 신력(神力, 저급한 생명체들과 사상을 교류할 수 있는 특이공능)을 사용하여 그 약초들에게 자신의 주치 기능을 알려주었다.

묘부와 수부는 서로 시대 간격이 비교적 먼 고대의 의사이다. 묘부는 모든 병자들에게 한 마리 초구(풀로 만든 개)만을 사용하여, 입으로 열 자를 중얼거리면 모든 질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 수부는 각종 대수술을 한 외과 전문가로 그 수준이 화타를 능가하였다. 그래서 그는 마비산 류와 같은 마취약을 쓰지 않고도 큰 수술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참고자료 (3)]

여기서 지적할 만한 것은, 그 당시 의사들은 “사진(望, 聞, 問, 切:)” 을 써서 질병을 진단할 필요가 없었으며, 다만 병자의 눈을 보고 질병의 위치와 정도를 알아내 손으로 병을 제거했다. 이렇게 말하면, 일부 독자들은 아마도 “좀 허무맹랑하다”라고 느낄 것이다. 게다가 당시 사람들의 이러한 능력 유무는 고증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조금도 “허무맹랑” 하지 않다. 편작이 이러한 투시능력을 가졌다는 것은 정사(正史)에 기재되어 있다. 게다가 인체의 내장을 투시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심지어 더 “허무맹랑” 한 것도 얼마든지 있다.

한의학의 전통 기술 중에 “격산조(隔山照)”라고 하는 특수한 진단 방법이 있다. 이는 의사들이 병자를 볼 필요도 없이 정확하게 그 질병을 진단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의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다만 병자들이 병에 걸린 후 접촉한 어떤 물건 등이다. 이러한 능력은 분명 “환자를 한번 살펴보는” 것과 비교해 볼 때 훨씬 뛰어난 것이다. 필자는 한의학을 배우는 과정에서 비록 이런 말을 듣긴 했지만, 직접 이런 달인을 만나본 적은 없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필자가 미국에서 유학할 때 한의학을 전혀 모르면서도 이런 특수한 진단 능력을 가진 미국인 교수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대학을 다닐 때, 한 대만사람에게서 간단한 좌선방법을 배웠다고 한다. 두 눈을 가볍게 감고, 가부좌를 하고 앉아 두 손을 일치시켜 가슴과 배 사이에 놓으며 가능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6개월 후, 그는 그의 손에 강력한 힘이 위로 올라오는 것을 느꼈으며, 매우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계속해 나가면서, 많은 특이공능도 계속해서 생겨났다고 한다. 그 중에 특이한 진단 능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미국에 왔을 때는 마침 그가 진찰을 돕는 것을 좋아할 때였는데 한 환자가 “당신이 어디에 문제가 있다면 백발백중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먼 곳에 사는 나의 한 친구가 사진을 보내온 적이 있다. 그는 사진을 보고서 친구에게 최근 나타난 증세를 정확하게 진단해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상대방이 보내온 편지도 괜찮다고 했다. 그는 특이한 진단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특이한 치료도 할 수 있었다. 그는 우선 오른손으로 병자의 병소 부위를 향해 몸 밖으로 맹렬하게 긁어낸다. 다시 왼손을 넣어 일반 사람이 보지 못하는 “병”을 움켜쥐며 재빠르게 창 밖으로 던져버린다고 한다. 병자는 바로 원래 통증을 느꼈던 곳이 사라진 것을 느낀다. 마치 원래부터 통증을 느끼지 못했던 것처럼. 그러나 어떤 때 심각한 증세의 병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는 오랫동안 해야만 비로소 붙잡아 낼 수 있는데 자신도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는다고 했다.

이 사건은 필자에게 커다란 놀라움을 일으켰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나로 하여금 “우리가 많은 세대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만들어 낸 일반적인 한의학 방법을 학습하는 것이 정말로 필요한가?” 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 미국 친구는 한의학은 전혀 몰랐지만, 오히려 다년간 간단한 가부좌를 통해 더 좋은 질병 진단과 치료 능력을 획득하였다. 도대체 어떤 길이 더 좋은가? 간단하게 가부좌하는 방법은 보급될 수 있는가? 필자가 “한의학의 세속화” 과정을 생각하게 된 동기와 일부 견해들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반복적인 생각에서 생긴 것이다.

4-2 《황제내경》

한의학의 어떤 유파든지 막론하고, 심지어 한의학을 배우진 않았으나 다소 역사적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황제내경》이야말로 한의학(中醫學)의 가장 위대한 서적이라고 인정한다. 그것은 한의학 일체 이론의 원천으로 간주지며, 후세 의가(醫家)들이 한의학에 얼마나 위대한 공헌을 했든지 막론하고, 그들의 이론적 토대는 《황제내경》이다.

유명한 편작의 《황제팔십일난경(黃帝八十一難經)》>(보통 《난경(難經)》으로 약칭)은 한의학 발전에 있어 심원하고 보편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황제내경》과 비교해 본다면 함께 이야기할 수 없다. 게다가 《난경》이 의가들의 보편적인 중시를 받은 것은, 당(唐), 송(宋) 이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황제내경》은 시대를 넘나드는 위대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황제내경》의 내용은 <소문(素問)>과 <영추(靈樞)> 두 개 부문을 포함하는데, <소문>에서는 주로 기본 이론을, <영추>에서는 주로 침구에 관련된 내용이 적혀 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두 권의 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황제내경》은 통상적으로 한의학에서 《내경(內經)》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황제는 대략 기원전 2700년~ 2600년의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황제내경》이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것은 춘추전국시대의 일이다. 아무리 빨라야 기원전 770년에 불과하다. 그 사이에는 약 2천년의 시간적 간격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의 주요 내용은 《황제내경》이란 책이 보편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전에, 이미 다른 형식으로 2천년 간 전해져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우리가 현재 보는 《황제내경》의 내용에서도 약간의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사실, 《황제내경》은 분명 여러 차례 수정과정을 거쳤다. 그 가운데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당, 송 두 번의 수정은 일반사람들에게 공개되어 보편적으로 알려진 이후에 가장 크게 수정된 두 차례였다. 이런 설명 후에, 우리는 독자들을 일깨우고자 한다. 우리가 《황제내경》을 사용한 모든 곳은 현재 모두 볼 수 있는 것으로, 당, 송 양대 수정을 거친 버전이다. 《황제내경》에 대한 결론은 단지 이 버전 책의 결론일 뿐이다. 황제 시대《황제내경》의 진실한 모습에 대해서는 우리는 지금껏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도 다만 하늘의 안배라고 생각할 뿐이다.

《황제내경》 중 고대 수련인에 대한 묘사와 찬탄은 물론 후세의 많은 유의들로 하여금 난처함을 느끼게 하거니와, 그 가운데 각 시대의 질병 표현과 의료방법 및 치료효과를 모두 인간의 도덕적 작법으로 귀결지은 것은 많은 후세 의사들로 하여금 더욱더 망연자실하게 했다.

“상고시대 성인께서 탕액요례(湯液醪醴)를 만들어, … 이로써 대비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까닭에 복용하지 않았다. 중고 시대에는 도덕이 다소 쇠퇴하고 사기(邪氣)가 때로 임하면 복용하여 만전을 기했다[上古聖人作湯液醪醴,…以為備耳,…故為而弗服也。中古之世,道德稍衰,邪氣時至,服之萬全” 참고자료 (11)]

“상고시대 성인”들도 어떻게 “탕약요례”를 만드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결코 병자들이 사용하도록 주지 않았고 다만 만일을 대비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이는 현재 진정한 수련인이 약이 있어도 먹지 않는 상황과 유사한 점이 있다. “중고(中古) 시대”에는 사람들의 도덕이 다소 쇠퇴하여 사기도 수시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고 이 때문에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약(藥)”의 힘을 빌려 “병사(病邪)”의 공격을 막아냈다.

왜 그랬을까? 왜냐하면 “덕이 완전”한 사람만이 “위험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12)] 여기에서는 직접적으로 사람의 “덕”의 많고 적음과 사람의 저항력 및 질병의 예후 상황을 연결시켰다. 이런 관점은 도의(道醫)와 후세 유의(儒醫)를 가르는 이론적인 시금석의 하나로, 도의(道醫) “병리학” 가운데 가장 심오한 전제 중의 하나이다.

질병의 가장 근본 원인은 “덕(德)”과 대립하는 “업(業)”에 의해 유발되는 것으로, “덕” 과 “업”은 일정한 조건에서 상호 전화될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수련 중에 “덕”을 닦을 수 있는 사람은 질병이 그들에게 어떠한 위험도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표명한다. 그래서 “상고 성인” 들은 “약탕요례”를 만들었으나 병자들로 하여금 복용하도록 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에는 든든한 이론적 토대가 있는 것이다.

“상고 시대”와 “중고 시대”의 치료방법과 효과를 순서대로 서술한 이후에, 《황제내경》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暮世)의 병 치료는 그렇지 않다. 사시(四時)에 중심을 두어 치료하지 않고, 일월(日月)을 모르며, 역종을 살피지 않아 병이 이미 형성되어, 침으로 그 밖을 치료하고 탕액으로 그 안을 치료한다. 돌파리들은 공격적인 치료법을 쓸 수 있다고 여기나, 원래 병이 아직 낫지 않았는데 새로운 병이 다시 생긴다.”[暮世之治病也,則不然,治不本四時,不知日月,不審逆從,病形已成,乃欲微針治其外,湯液治其內,粗工凶凶,以為可攻,故病未已,新病復起 참고자료 (13)]

이 문장은 문투가 매섭고 격분하는 정서를 나타내며, 그야말로 “돌파리”를 의사의 다른 종류로 삼아 대대적인 비난과 비판을 가하고 있다. 게다가 이 시대를 “지금”으로 지칭한 것은 매우 특별한 표현으로, 황제나 기백의 말투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이 문장이 씌어진 시대에 “한의학의 세속화” 과정이 이미 공개적으로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묘사하는 “사시에 중심을 두지 않고, 일월을 모르며, 역종을 살피지 않는다”,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환자에게 “탕액”을 먹이고 침을 놓는 제멋대로인 “돌파리”라는 표현은 분명 전통적인 도의나 신인(神人)이 아니라, 단지 “도(道)”의 이치를 모르는 용렬한 의사(庸醫)로, 그 결과 오랜 병이 치료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병이 나타나게 된다! 이런 용렬한 의사가 도의(道醫) 가운데 “실도(失道)” 한 후에 떨어져 내려온 것이든 아니면 일반 사람들 가운데 무모하고 무지한 자가 “배출” 된 것이든 상관없이 어쨌든 그들은 우리가 볼 수 있는 최초의 세속화된 의사이다.

물론 《황제내경》은 여러 차례 수정되는 가운데 필연적으로 후세 의가들의 일부 관점과 기술이 첨가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의학의 세속화” 과정이 황제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황제내경》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전과 후의 변화가 가장 큰 변화였다고 생각한다. 상술한 인용문과 같은 글처럼, 세상에 널리 알려질 때 첨가되었을 가능성은 공개된 이후 첨가되었을 가능성보다 훨씬 크다. 특히 춘추전국시대 인심(人心)의 혼란과 시국의 동요와 불안을 고려해볼 때, 당시야말로 한 편의 수련 경문을 대대적으로 뜯어 고친 후 세속사회에 전할 가능성이 가장 크며 또한 가장 쉽게 일반 사람이 수련 내포의 것을 가져다 당연스럽게 시험해 보기 쉬운 시대였다. 그래서 필자는 “한의학의 세속화” 과정은 대체적으로 《황제내경》이 세상에 널리 알려질 때인 춘추전국시대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추론한다. 물론, 좀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황제내경》에서 처음으로 “한의학의 세속화” 과정을 기재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다만 이러한 견해는 확정적인 시간을 제시할 수 없다.

필자는 신전론자의 입장에서 볼 때, 《황제내경》이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전해진 것은, 한편으로는 당시 세속사회의 염원과 현황에 부응한 것인 동시에 고층 생명이 인류가 스스로 너무 빨리 몰락해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고심끝에 안배한 것이다. 상술한 것처럼, 당시 이미 많은 일반 사람들이 수련 내포를 가진 도의(道醫)의 방법을 세속사회에 시험 삼아 도입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고통을 구하는데 효과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수련 방법까지 망쳐버렸고 완전히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이렇게 하도록 수수방관하여, 파괴를 더욱 빨라지게 했다.

이렇게 신속하게 고조되는 흐름에 대해, 《내경》에서처럼 “돌팔이”라고 혹독하게 지탄하는 것도 이미 효과가 없었다. 가로막는 것은 그것을 지도하는 것만 못하다. 게다가 고급 생명의 인류에 대한 영향은 영원히 “권선(勸善)” 과 “선도(先導)”의 형식이다. 사람 마음의 변화는 절대로 어떤 강제적인 형식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도의의 수련 내포를 일반 사람이 알 수 있도록 축소시켰고 또 반드시 일반사람이 알 수 있는 정도로 축소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떤 형식으로 일반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인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일반 사람이 알게 한 ” 부분을 전할 뿐이다. 왜냐하면 수련의 내포가 많이 전해지면 수련계를 망칠 뿐만 아니라(예를 들면 불합격된 “半神”이 출현한다), 또한 일반 사람들의 사회 상태를 어지럽히는 것이다.(예를 들면 초상적인 능력을 일반 사람들에게 남용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반드시 일반 사람이 알아야 하는” 부분을 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야만 일반 사람을 인도하여 위를 향해 돌아가는 반성과 계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로 하여금 “세상밖에 하늘이 있고, 하늘에는 신이 있으며 자신이 수련하여 신의 경지로 회귀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리려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야말로 《황제내경》이 이러한 형식과 내용으로 이러한 시대에 일반 사회에 널리 전해지게 된 진정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물론, 일반 사회에 전해진 것은, 그 수련 내포가 도대체 얼마나 남겨야만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고, 또 일반사람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정도”가 될 것인가의 문제는 일반 사회의 변화와 함께 변화하는 것이다. 고대에는 일반 사람들의 심성이 고결하여 보다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으나, 후세 사람들은 심성이 저하되어, 단지 약간의 것만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왜 수련의 것이 전해진 후에, 종종 일부 혹은 전체가 “산실(散佚)”되거나 혹은 “소실(消失)”된 이유이다.

예를 들면, 《황제내경》과 동시에 전해진 《황제외경(黃帝外經)》은 그 안에 더욱더 구체적인 수련 내포를 담고 있으나(현존하는 부분에 근거해 판단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 필기 도구가 상당히 발달된 후에야, “단절”과 “산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예를 들면 현대 서적의 형성), 이 시기 수련의 내포 조정은 “자연”적 형식을 채택하였다. 책의 문자는 불변했으나, 사람들의 심성이 변화됨에 따라 이러한 책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와 수용 수준이 자연스레 변화된 것이다. 이것이 왜 사회의 “발전” 과 함께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점점 더 수련 경전을 믿지 않는 진정한 이유이다.

그러나, 어떤 시대든지 항상 심성이 고매한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수련경전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신임은 일반 사람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고이래로 모든 왕조에는 항상 그런 소수의 사람들이 다수의 사람들이 믿지 않고 비웃는 경전을 보배로 여겼으며 또 좀 더 고생을 겪고, 이익을 손해보며, 심지어 목숨을 잃으면서도 경전을 받들었다.

다시 한번 현대인들을 한번 살펴보면, 교류할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에 쉽게 한 가지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비록 인자(仁者)는 인(仁)을 보고, 지자(智者)는 지(智)를 본다고 하지만, 다른 서적에 대해 수련 경전을 대하는 것처럼 하지 않는데, 사람마다 아주 큰 차이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견해에 대해 의아해 하고, 분노하며, 인내할 수 없으며, 심지어 상대방을 죽이고 싶어 한다. 그 이유를 세밀히 생각해보면, 자연적으로 수련의 내포를 조정하는 이런 기제가 사람들로 하여금 탄식하며 관망하게 하고, 동시에 사람으로 하여금 고급 생명에 대해 경외하게 하기 때문이다.

4-3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

장기(張機 약 150년에서 219년 사람)의 자는 중경(仲景)으로 동한(東漢) 말년 남군 녈양(南郡涅陽, 오늘의 허난성 난양현(河南省南陽縣)이다.)사람으로, 한의학 역사상 현존하는 한의학 체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의사이다. 그가 저술한 《상한잡병론》이라는 책은 자신의 “상한(傷寒)” 류 질병과 “잡병(雜病)” 진료 경험에 대해 총괄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변증시치(辨證施治) 방법과 이법방약(理法方藥)을 융합하여 유기적인 체계로 만든 한의 방제학(方劑學) 등 각 분야에서 현존하는 한의학 체계에 혁신적인 공헌을 했다. 책에서는 “상한” 류 질병에 대해 “육경변증(六經辨證)”을 채택하였고, “잡병”에는 “장부변증(臟腑辨證)”을 채택하여 후세 의사들의 “팔강변증(八綱辨證)”, “삼초변증(三焦辨證)”, “영위기혈변증(營衛氣血辨證)” 등 변증 방법에 길을 열어 주었다.

이 책은 처음으로 이법방약(理法方藥)을 융합하여 하나의 유기적인 시스템으로 만들었고, 이론 인식과 임상 진료를 밀접하게 결합시켰다. 이는 한의학 사상 첫 번째 임상의전이다. 책에서 사용한 2백6십여 개의 방제들은 후세사람들에게 “경방(經方 처방의 경전과 같다는 의미)”으로 받들어져서, 방제학의 시조로 간주된다. 송대에 이르러, 《상한잡병론》은 《상한론(傷寒論)》과 《금궤요략(金匱要略)》 두 권으로 분리된다. 그 가운데 《상한론》은 계속해서 후세 의사들이 주석과 토론을 진행하여, 후세 한의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참고 자료 (14)]

그러나, 《상한잡병론》의 공헌이 얼마나 큰 지에 관계없이, 그것은 “현존하는 한의학체계”에 대한 공헌일 뿐이다. “현존하는 한의학체계”는, 우리의 견해에 따르자면, 기본적으로 “한의학의 세속화” 길을 걷고 있다. 그래서, 《상한잡병론》의 거대한 공헌과 발명은 인창론자(人創論者)들의 입장에서야 당연히 한의학을 적극적으로 앞을 향해 발전시킨 대약진이다. 그러나 신전론자(神傳論者)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도의(道醫)의 전통을 위배한 것으로, 다시 말해 신(神)의 방향을 위배한 철저한 방향 상실이다.

비교적 체계적이고, 영향력이 큰 《상한론》을 예로 들자면, 전서(全書)에서는 결코 수련과 도덕에 대하여 아무런 요구도 언급하지 않았고, 게다가 어떤 초상적인 진단이나 치료 수단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후세 의사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음양오행의 분석방법조차도 사용하지 않았다. 《상한론》중에 유일하게 사용한 전통이론은 바로 병사(病邪)가 경락에 머물 때의 증상이다. 그러나 경락은 인체에서 어느 정도 객관적인 존재로, 병사가 경락에 머물 때의 증상 반영은 실천의 누적을 통해 획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상한론》은 고대 도의의 의학에 대한 정의(定義)적인 요구를 완전히 버렸고 일반 사람들이 받아 들일 수 있는 수용능력을 넘어서는 도의(道醫)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을 회피하였다. 이렇게 하여, 누구든 열독하고, 익숙하게 암기하며, 실천하고, 피드백을 반영하여 수정하는 것과 같은 완전히 세속화된 방법으로 《상한론》의 내용을 배우고 파악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것은 순수하게 세속화 된 것이 되버렸다!

다시 하나의 비유를 들어보겠다. 고대 도의(道醫)들의 진료와 치료 과정은 “흰 상자”(최소한 회색상자) 조작이었다. 그들은 특수한 진단능력으로 직접적으로 병소가 있는 부위 혹은 층차를 보거나 느낄 수 있었다. 초상(超常)적인 수단으로 직접 “병소”를 끄집어내거나 혹은 약물로 쫓아낸다. (후세 도의들이 약을 써서 병을 치료할 때는, 특이공능을 사용해 직접 약을 선택하였고 일반 사람들처럼 약 처방을 암송하거나 처방가감에 의존하는 수단을 사용하지 않았다.) 스스로 진단과 치료 과정 전반에 대해 손바닥처럼 알고 있어 마치 투명한 상자(혹은 최소한 안의 변화 과정을 보는 것과 같았다.)

《상한론》에서 사용한 방법은 일종의 “검은 상자” 조작이다. 그것은 반드시 숙독하고 기억해야 할 각종 전형적인 증세와 육경 반영 사이의 관계 및 그로 인해 도출해 낸 병사의 깊이와, 경락에 머무르는 결론이다. 만약 이 증세에 약을 쓸 수 있다면 상응하는 처방과 치료방법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들은 눈앞의 병세에 근거해, 기억하고 있는 재료를 탐색하고, 거기에 논리적인 사고와 추리과정을 더해 완성하는 것이다. 그 중 어떤 부분의 잘못도 치료의 무효 혹은 병세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게다가 의사가 자신의 추리 결과가 현실과 부합하는지 볼 수 없기 때문에, 마치 검고 불투명한 상자 안에 물건을 넣은 것과 같다. 다른 부분에서 결과가 나와 자신의 방법이 정확한지 여부를 다시 추측해야만 한다.(증상의 개선은 결코 병사에 대한 자신의 인식이 완전히 옳다는 것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추측일 뿐이다.) 왜냐하면 의사 자신이 근본적으로 그것의 중간 조작과정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상한론》에서 한 방법은 비록 전통 도의의 수련 방면의 엄격한 요구를 없앴지만, 일반 사람들에게 순서대로 착실히 의학을 배우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후세 의사들을 “쉽게 배우지만 정밀하긴 어렵다(易學難精)”는 진흙탕으로 밀어 넣었다. 《상한론》 중에서 열거한 전형적인 증상은 398 종류이다! [참고 자료 (15)]

이것은 장중경은 자신이 “상한” 류 질병을 치료할 때 부딪힌 모든 것을 기록한 것일 뿐이므로, 전체 “상한” 류 질병의 전형적인 증상을 모두 포괄하고 있지는 않다. 게다가 질병은 분명 사회의 변화와 함께 변화하는 것으로, 이러한 변화과정은 일반적으로 줄어들지 않고 증가할 뿐이다. 있던 질병은 자취를 감추지 않고, 새로운 질병이 범람한다. 예를 들면, “상한” 류 질병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볼 수 있다. 후대에 발생한 열병(熱病) 물결은 이미 세차게 출렁이고 있다! 그래서 후세로 갈수록, 한의학을 배우는 사람들의 부담이 더욱 커졌다. 각종 질병의 전형적인 증세, 각종 방법의 기본적인 처방은 점점 더 많은 한약을 파악해야만 하고, 머릿속에 넣어야 할 정보가 급속히 증가하였다. 한의학으로 병을 치료하는 효과는 확실히 점점 더 이상적이지 못했다. 특히 “중서의 결합(한의학과 서양의학의 결합)” 이후, 한의학은 이미 양의에 몸을 파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세속화를 이용한 학습 방법이 고대 도의(道醫)의 수련형식을 대체했을 때, 의도(醫道)는 일반인의 차원으로 떨어져, 일반인의 것이 되었으며, 그 효과 역시 필연적으로 일반인들이 도달할 수 있는 효과로 떨어져 절대로 원래의 도의와 같은 초상적이고 신기한 효과가 아니었다. 초상적이고 신기한 효과는 반드시 초상적인 방법에서 비롯된다. 일반인들은 질병의 심층적인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일반인들이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정상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질병을 진료할 때 실수를 저지르거나 사망을 초래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일반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질투심이라고 부르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라고 부르든, 어쨌든 거의 모든 사람마다 일종의 심리경향이 있다. 즉, 자신에게 없는 것은 원하지 않으며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있을 것이라고도 믿지 않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좌우명은 바로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을 나는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이용한다면 한 사람의 부정적인 결론 중에 그 자신이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지 쉽게 살펴볼 수 있다.

《사기》 〈편작창공열전〉을 읽어본 사람들은 편작의 신기하고 초상적인 진료수단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한 것이 그가 가사 상태에 빠진 괵국(虢國) 태자의 “시궐(尸厥)”을 치료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장중경《상한론》 서문의 첫 마디는 바로 “논하여 가로되, 나는 매번 월인(편작을 말함)이 괵국에 들어가 진료할 때, 제후의 안색을 살폈다는 대목에서 그 재주의 빼어남을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다(論曰:余每覽越人入虢之診,望齊侯之色,未嘗不概然歎其才秀也)”. [참고 자료 (16)]

정말로 놀랄만한 말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편작이 병을 진료하는 수단의 초상적인 성질을 승인하는 것과는 달리 그것을 일반인의 “재주”의 범위에 포함시켰다. 표면적으로 그가 편작의 “재능이 뛰어남”을 과장하고 있지만, 사실상 편작을 고집스레 일반인 가운데 내던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그가 서술한 자신의 질병 진료와 《상한잡병론》을 서술한 과정을 살펴보라.

“부지런히 옛 교훈을 구하고, 널리 많은 처방을 취하여,… 평맥변증을 아울러 《상한잡병론》의 십육 권으로 했다.”

이것은 확실히 완전히 착실한 일반인의 방법이다. 그래서, 장중경은 전통 도의와 다른 길을 걸어갔다. 사실은 그가 도의의 전통 방법을 위배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애초 세속화된 의사 가운데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출현은 “한의학의 세속화” 과정이 시작된 지 약 900년 후로, 세속화된 한의학이 이미 엄청나게 많아진 형세 하에서 나온 필연적인 산물이다.

이상을 종합하면, 《상한잡병론》은 “한의학의 세속화” 과정에 “명분이 정당하면 말도 이치에 맞는다”는 기치를 세우고 평탄하고 넓은 길을 개척하였다. 이 책 이전에도 비록 이미 많은 일반인들이 《황제내경》과 기타 의서를 이용해 한의학을 배우고, 아울러 의술을 직업으로 삼았지만 (적지 않은 세대를 전해 내려왔다.) 이 사람들의 의료 수준은 일반적으로 매우 낮아(장중경도 통렬하게 그들을 비난하고 있다)), 《황제내경》에서 비난하는 돌팔이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도의의 흐름에 참여할 수 없었고, 기타 문파에도 들아갈 수 없었다. 《상한잡병론》이 세상에 등장한 이후, 일반사람들이 의학을 배우는 데 방법상의 참고와 이론상의 지지가 되었고, 아울러 빠르게 새로운 “유의(儒醫)” 파로 결성되었고 결국에는 대세가 되어 흡사 한의학의 대표처럼 되었다.

그래서, 《상한잡병론》은 한의학 “유도(儒道) 분류”의 분수령으로, 유의들의 새로운 종묘이다. 이 책은 다만 일반인들이 수용할 수 있는 개념과 일반인들이 본떠 할 수 있는 방법만을 사용했기 때문에, 학습자들을 유의의 범위 내에 머무르게 할 뿐 영원히 도의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러나, 이 책과 장중경에 대한 후세 유의들의 추종은 날로 높아져만 갔다.

진대(晉代) 황보밀(皇甫謐)은 중경을 “대 성인의 뜻을 조술했다(祖述大聖人之意)”고 칭했다. 아울러 “이윤(伊尹)은 원래 성인의 재능으로, 신농 본초를 찬”했고, “중경은 이윤의 법을 본으로 하고 이윤은 신농의 경을 본으로 한다.”라고 떠받들었다. 그래도 칭찬에 절도가 있었고, 게다가 큰 테두리를 뜯어내긴 했지만 그래도 신농에게 귀결시켰다.

후대의 유의들은 이렇지 않고, 직접적으로 중경을 “의학의 으뜸가는 성인”이라고 칭하며, 그의 책을 “방법을 드리우고, 터를 세웠다(垂方法,立津梁.)”(17)고 칭찬했다. 심지어 “중경의 법은 천하 후세의 권형이다(仲景之法,天下後世之權衡也)”라고까지 여겼다. (18)

그야말로 중경의 책을 한의학의 지고무상한 유일한 권위로 만든 것이다! 기본적으로 임상서적에 불과한 이것을 지고무상한 지위로 받들었으니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 후세 유의들이 아무리 총명하고 아무리 노력하든지 상관없이 고대 도의들의 그러한 치료 효과를 획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필자는 신전론자의 관점에서 볼 때, 《상한잡병론》의 출현은 주로 당시 일반 사회의 강렬한 바람에 부응했다고 생각한다. 즉, 한편으로는 도의(道醫)의 흐름에 참여하거나, 참여할 수 없었고, 심지어 《황제내경》에서 일반 사람의 차원을 넘어서는 어떠한 도의의 개념도 수용하길 원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의학의 구체적 방법을 파악하여, 직업적인 의사가 되기를 절박하게 희망했다. 《상한잡병론》의 형식과 내용은 완전히 일반 사람의 이러한 소망을 만족시켰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일반 사람의 높은 찬양을 얻었던 것이다.

필자가 아는 바에 의하면, 후세 의가 중에는 《상한잡병론》의 이론에 낮고 간단하며, 진료 방법이 “시험기록”에 가까운 것에 대한 약간의 비평도 없었다. 인간은 일찍이 《황제내경》 가운데 도의와 유의의 색채 차이와 높고 낮음의 차이에 대해 마땅히 있어야 할 민감성을 상실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런 커다란 역사적 사건이 필연적으로 의미 있는 안배이다. 게다가 이러한 안배는 마땅히 일반 사람이 회귀할 수 있도록 모종의 역할을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