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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인간 시리즈:천지지행(7) 애타게 찾아 헤매

천상인간 시리즈:천지지행(7) 애타게 찾아 헤매

작가: 소련

제3장 오늘 법을 얻어 미혹을 타파

제2절 애타게 추적하여

【정견망 2007년 7월 21일】 중국 대륙에서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는 고난(문화혁명)이 갓 끝나고 각종 문파의 기공 역시 갓 나타날 시기에 북방 성의 한 중소도시에서, 추운 겨울 날 이 사당 스스로 진행한 운동으로 인해 국가가 망하게 되어 회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11차 3중전회) 정책을 한차례 조절하고 오랫동안 꽉 조인 중국인의 숨통을 풀어줄 때 나는 시의 조산원에서 태어났다.

후에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내가 태어날 당시 몸에 솜털이 아주 많아 까맸다고 해다. 한 쌍의 검은 눈동자도 아주 까맸다. 우리 집은 농촌에 있어 방은 아주 추웠고 외할머니 외삼촌은 나를 아주 사랑하여 도시로 데려왔다. 그 당시 외할머니 집도 부유하지 못했지만 외할머니 일가족은 온갖 정성으로 나를 돌봤다. 겨울이라 외삼촌은 내가 추워할 까봐 깊은 밤에 옷을 걸치고 나가 불을 땠는데 그 때 외삼촌은 겨우 13살이었다!

이로 인해 나는 지금까지 영원히 외할머니 댁 식구들의 나에 대한 은정을 잊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도 그 당시 무척 힘들었다. 그 당시 몸이 아주 허약하여 어릴 때부터 소아마비를 얻어 한 쪽 다리는 정상이지만 한 쪽 다리는 가늘고 또한 오른 쪽 발은 왼쪽 발보다 작아 길을 걸으면 다리를 절어서 무척 불편했다. 아버지의 일은 아주 바빴고 봄에 늘 비가 와서 황토로 올린 연통이 무너졌고 가을에는 연통을 아직 올리지 못하여 방에 불 때는 것이 불편했고 밥을 지을 때 숨이 막혔다. 그리고 나는 철이 없어 어른이 나를 내려놓으면 울어댔다. 어머니는 방법이 없어 그의 가냘픈 몸으로 나를 업고 밥을 했는데 늘 지쳐서 온 얼굴이 땀 투성이고 또 연기에 숨 막혀 눈물 투성이 었다! 그 당시 고생스러운 일들이 너무 많아 이루다 예기할 수 없다.

나의 선천적인 특성이 조금 나타나, 예를 들어 아주 총명하고 말을 잘 하여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았다. 후에 농촌에 돌아와서 좀 더 성장했고 어머니는 나에게 숫자를 가르쳤다. 나는 아주 빨리 배웠고 길에서 나보다 더 큰 많은 아이들이 늘 나에게 시험을 했다. 내가 맞게 대답하면 그들은 나에게 많은 맛있는 것을 주었다.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는 나에게 이 음식을 누가 주었는가고 물었고 나는 한 큰 형이 나에게 숫자로 시험했는데 내가 맞춰서 받은 것이라고 답하자 어머니는 웃으셨다. 그렇게 즐겁게 웃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그때 매우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도시 사람이었고 농촌에서 큰 일을 하시려고 농촌으로 시집갔다.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나의 아버지한테 시집갔는데 그 당시 아버지는 능력 있고 착실하다는 이유 뿐이었다. 사실 이런 것은 모두 표면 원인인데 그들 사이의 연분을 나는 <<윤회기실: 금생 부모>>편에서 상세히 이야기했으며 여기서 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 일체의 좋은 나날은 오히려 오래가지 못했는데 내가 4,5살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조그마한 일로 늘 싸웠고 아버지는 가끔 아주 화가 났지만 또 어머니를 감히 때리지 못해 내가 그의 화풀이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런 정황은 늘 야밤에 발생했다. 내가 잠을 잘 때 아버지는 가끔 미친듯이 나의 머리를 마구 때렸고 내가 엉엉 크게 울 때까지 때렸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당시 간염이 있어 힘이 없었는데 아버지가 나를 때리는 것을 보고 아버지를 욕하면서 울기만 했다.

그 당시 늘 이러했다. 혹은 내가 사소한 일을 잘못 했을 때(예를 들어 조심하지 않아 그릇을 깨뜨릴 때) 아버지는 어머니한테 화가 났다는 이유로 머리 엉덩이를 가리지 않고 마구 때렸다. 이렇게 나는 5살 때 멍청하게 변했고 말도 매우 어눌하고 반응이 느렸다. 부모가 싸우기만 하면 혼자서 늘 죽을 생각을 했는데 그들에게 부담이 되는 것이 싫었다! 외삼촌이 나를 보러 왔을 때 내가 이 모양으로 변한 것을 보고 아버지를 무척 원망했으며 지금도 이 일을 생각하시면 아주 마음이 불편해 하신다. 나는 어릴 때부터 체질이 아주 약하고 마을의 위생원(작은 병원)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다행히 어머니의 한 친척이 병원 부근에서 살았기에 우리는 많은 지출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아주 신기한 현상은 내가 고열을 앓을 때 머리를 박박 깎아 버리기만 하면 고열과 기타 병들이 즉시 나았다! 어느 한 점치는 사람이 어머니한테 이 아이는 어느 한 생에게 스님이었기에 이렇다고 했다!

어릴 때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책보기를 좋아했다. 그 당시 글자를 많이 알지 못했지만 책을 뒤적거리며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성격이 무척 내성적이지만 내심은 아주 선량했다. 나는 하루종일 맑은 하늘 혹은 온 하늘에 가득한 별들을 보고 멍하니 있었는데 너무나 많고 많은 우리들이 잘 알지 못하는 일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늘 했다.

그 당시 생활이 무척 어려웠는데 아버지가 길 닦는 회사에서 하루 종이 일하여도 일년에 겨우 400위안의 돈을 벌었고 또 돈을 주지 않았다. 모두 마을에 바쳐 수시로 가져갈 수 있는 돈으로 하거나 혹은 농업세로 했다. 집에는 전혀 소금 간장을 살 돈도 없었으니 나에게 옷과 장난감을 살 돈은 더욱 없었다. 먹는 음식은 전부 우리가 농사를 짓고 남겨둔 양식이거나 밭에서 나는 야채들이다. 입은 거의 모두 큰 이모가 준 옷이다. 후에 어머니는 닭을 몇 마리 기르셨고 이 닭들이 낳은 계란을 거의 모두 가져다 팔아서 소금 간장 기름을 샀으며 계란 일부분만 남겨서 손님과 나에게 주었다.

그 때 가장 맛있던 것이 계란이었다. 나는 암탉이 계란을 낳자마자 꺼내 씻지도 않고 가마에 던져 넣었다!

후에 학교에 다니면서 “왜?”라고 묻기를 좋아했고 학교 노동에 참가했을 때 내가 아주 둔한 아이라는 것을 알았다. 학교에서 성적이 아주 좋아 항상 일등을 하고 늘 상품을 탔다.(연필 한웅큼) 내가 열한 살 때 아는 글이 이미 많았다. 어느 날 정오에 학교가 파했다. 집에 돌아와 할 일이 없어 어머니의 옛날 책을 뒤적거렸다. <<오묘한 비밀>>이란 잡지가 있었는데 소식 한 편이 올라와 있었다. 어느 한 저명한 과학자가 기공현상에 대해 중시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기공과 다른 공간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 같았다. 이 소식은 나의 이후의 나날에 영향을 끼쳤다.

또 한가지 일이 있었는데 나의 피부를 의사들은 “특이성피부”라고 했다. 이런 피부를 타고 나는 것은 10만분의 1이었다. 그 당시 BCG 접종을(아마도 오래된 일이라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어쨌든 이런 종류의 예방주사인 것 같았다) 맞았는데 나의 왼 쪽 팔에는 물집이 생겼고 어른 눈알만한 크기였다. 나이가 들면서 그것도 커졌다. 여러 병원을 찾았지만 이런 현상은 아주 보기 드물다고 하거나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 물집은 가끔 아주 아팠고 무척 아플 때 나는 물집을 붙잡고 살살 문질러야 했는데 이렇게 하면 조금이라고 통증을 덜 수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후 나는 대천세계에 관한 서적을 찾으려고 방법을 다했다. 자신도 끊임없이 이 문제를 사고했다. 동시에 주변에서 발생하는 한 시리즈의 일들은 나로 하여금 도덕과 발전에 대해 냉정한 사고를 하게 했다.

그때 우리집은 우리 소대에서 유일한 외자식 집안이었다. 국가에는 일년에서 30위안의 독생자녀 양육비를 준다는 규정이 있었는데 후에 60위안으로 되었다. 그러나 마을에 가면 그 관리들은 돈이 없다고 기어코 주지 않았다. 그들은 아이를 한명 이상 낳는 가족에게 몇천위안의 벌금을 안기고 있었다! 그들은 쓸 돈이 없을 때 가족계획반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돈을 요구했다.(예를 들어 이 집안에 초과하여 낳은 아이가 있고 1984년 생이면, 갓 태어날 때 이미 2,3천위안의 벌금을 냈지만 이러한 벌금을 여러 차례였다. 가족계획반의 사람은 그의 집에 가서 “위”에서 1982년 이전에 초과하면 3백위안이고 1982년 이후는 6백위안 벌금을 물리라고 했다고 한다!) 돈이 없다? 그렇다! 물건을 건드리지 않고 집 문서를 가져간다. 토비와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그들에게 독생자녀 생육비를 요구할 때 그들은 서로 미루면서,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할 시간이 없다, 어느 날 향에 올라가서 물 물어봐라!

어머니는 향에서 시에 까지 찾아갔지만 모두 서로 미루면서 주지 않았다. 후에 어머니는 정말로 방법이 없자, 그 당시의 성장(省長)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마을의 이런 행위는 “국가적 난을 이용한 부자 되기”라고 했다. 후에 성장은 이 일에 대해 지시가 있어 대대는 부득이하게 생육비를 주었다. 8년간 합해 480위안이었다.(독생자 생육비는 13살 될 때까지 지급된다) 그들이 하룻밤 마작을 놀고 잃는 돈도 안 된다. (한 친척이 말하기를, 우리 대대 서기는 하룻밤 사이에 1,2천위안의 돈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물론 모두 공금이고 백성들의 피땀이다!)
그리고 한 친척은 후에 대대서기가 되었는데 늘 우리 집안을 무척 깔보았다. 그의 아내는 여름에 큰 오리를 풀어 우리 집 밭으로 몰아 우리 집의 파란 싹들을 짓밟았다. 농작물이 거의 무르익을 때 그들은 곧 추수할 우리집의 농작물을 훔쳤다. 원인은 딱 한가지, 아버지가 너무나 착실하다! 어머니는 예쁘게 생기고 문화가 있다는 것이다.(그 당시 고등학교 졸업은 현지에서 높은 학력이었다!) 마음에 질투가 생겨 이러한 일을 저지르는 것이었다.

나는 늘 이런 생각했는데 한 사람이 착실하면 남한테 업수임을 당해야 하는 이유인가? 만약 이 당이 모두 우리 마을의 작은 관리들과 같다면 이 당은 절대로 좋은 것이 아니다! 사회의 발전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 배척하고 괴롭히는 중에 발전한단 말인가? 만약 이렇다면 인류가 만약 선진기술을 더 많이 장악할수록 인류를 놓고 말할 때 더욱 위험한 것이 아닌가? 어느날 자신이 장악한 선진무기로 상대방을 소멸하거나 심지어 함께 무덤으로 갈 것이다.

사실 나의 천목은 어렸을 때 이미 열려있었고 집 안에서 지붕 위에 떠 있는 오색 구름을 볼 수 있었다. 당신 불을 보았다고 오인하였는데 다른 사람들은 불이 붙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나는 어렸을 때 공중에 매우 작지만 많은 것이 회전하는 것을 보았는데 당시는 무엇인지 몰랐었고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나는 생각이 매우 간단했기 때문에 주위의 아이들은 나를 멍청하다고 했으며 늘 방법을 다해 나의 편의를 보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다투지 않았고 남들이 나쁜 마음으로 나를 대한다는 것을 알고서도 나는 다른 사람을 고려했다.

예를 들어 어머니한테는 <샬록 홈즈의 탐정집>이 한권 있었는데 이웃 아이가 빌려갔다. . 며칠도 안 되어 그의 집에 놀러 온 친척집 아이가 몇 페이지를 망쳐놓았다. 그때 마음이 너무나 아팠지만 그저 이 책 다봤니 안봤니 ? 아직 다 안봤으면 계속 봐도 돼!라고 했다.

그 때 이미 일부 자연의 지식을 배웠지만 스스로 이렇게 생각했다. “산과 물은 어디에서 오는가? 지상의 생물은 어디에서 올까? 사람은 정말로 진화되었는가? 왜 책에서는 고대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했다고 하는가, 그러나 현대의 원숭이는 사람으로 진화하지 없는가?” 우리는 늘 사람 밖에 사람 있고 하늘 밖에 하늘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연과학면에서 인류보다 발달한 문명을 가진 더욱 고급적인 인류가 있지 않을까? 우리가 존재하는 이 환경 밖에는 또 인류에게 더 적합한 환경이 있지 않을까?!

그때 온 머리 속에 있는 이런 물음들을 해답해 줄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한테 물었을 때 어머니는 늘 이런 것을 알려고 하지 말고 공부를 잘해, 책을 많이 보거라. 내가 너에게 지어준 이름은 사실 네가 장래로 깊은 지식을 지닌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단다. 때문에 나는 알지 못할 문제를 머리속에 집어넣고 학습에 노력했고 책을 보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어느 날에 이런 것을 명백하게 알아내려고 했다.

1989년 그 여름 방송을 통해(우리 집은 아주 가난하여 TV를 살 수 없었고 녹음기는 남들이 사용하다 버린 것이다. 늘 고장이 나서 사이가 좋은 어느 한 아저씨한테 가서 늘 고쳐다 썼다. ) 어느날 많은 대학생들이 천안문광장에 갔고 탐관오리를 반대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중앙도 이는 학생들의 애국행동이라고 했다. 그러나 며칠 안 되어 또 학생들이 군용차를 태우는 등등의 폭력을 행사했다고 했다. 군대는 참을수 없는 정황 하에서 폭력행동을 진압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리고 몇 사람은 “공화국위사”라고 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 이런 선전은 들을 수 없었다. 단지 방송에서는 의식형태에 대한 반복적인 선전이었다. 이는 나를 아주 곤혹시켰다. 만약 이 사람들이 정말 국가를 위한 것이라면 그럼 왜 이후의 6.4에서 이런 회고와 선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가?

93년의 늦 겨울 우리는 외할머니 집으로 이사갔다. 사실 나의 득법(得法)을 위한 배치였다! 여기서 우리는 과일을 팔아 생활을 유지했는데 돈을 많이 벌지 못했지만 농촌에서 살 때보다 훨씬 좋아졌다.

여기서 나는 열심히 공부하여 중점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 인생과 외부세계에 대해 더욱 깊은 사고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무슨 모모주의 경제학, 철학을 배우는데 미국 고등학생들도 이를 배울까? 북한에서는 김씨 부자의 통치로 인해 더욱 가난해졌다는데. 또 나는 신문가게에서 비행접시와 사전 문명에 대한 소식을 보았는데 정말일까? 그리고 사회의 발전과 사람 도덕과의 관계. “사람”은 마땅히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기타 동창생과 세인들처럼 잘 살기 위해 이름 날리기 위해 힘들게 뛰어다녀야 하는가, 이렇게 하면 결국에는 늙는 것 이외에 무엇을 얻는가? 그때에 이르러 명성을 날리고 돈이 있어본들 신체와 정신은 고통 속에 처하는데 또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당시 정말로 대학에 못 가면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가서 한 평생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필 인간세상 속에서 흐리멍텅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는가?

이때 나는 기공을 접하게 되었고 처음에는 단지 신체를 단련하기 위해서였으며 한동안 배운 후 느낌이 없었다. 후에 도가의 고대 수련방법에 대한 소개를 보았다. 그러나 보고 나서도 “도”가 도대체 무엇인지 몰랐다?!

그 당시 무협소설<<의천도룡기>>란 책을 보았는데 무술에 관해서는 인상에 남는 것이 없고 주인공이 덕으로 원한을 풀고 세간의 권리와 지위에 대해 조금도 중하게 보지 않는 심경이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실은 나의 사유가 점점 의문으로 가득차고 갈망으로 가득 차 있을 때였다. 1996년 4월 하순 어느 날 공원에 놀러나갔는데 3,40명이 그곳에서 연공을 하고 있었고 또 우리가 셋째 형이라고 부르는 한분이 이전에 다른 공법을 한 친구와 그곳에서 연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연공이 끝난 후 다가가서 물었다. 이 질문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천만년의 법연은 천만년의 기다림, 천만년의 힘들게 찾았던 것을 마침내 맞이하는 미혹 중 법을 얻는 그 날을 맞이했다!!

바로 이러했다:

고해와 미혹에서 이끌어준 연선(缘线)은
천년 만년에도 끊어지지 않았네
미혹 속에서 법을 얻어 자신의 승리를 경축하고
대법으로 미혹을 타파하고 진정한 하늘을 보네!

(주:”진정한 하늘(真天)”은 여기서 진실한 일체 현실을 가리킴.)

발표시간: 2007년 7월 20일
정견문장: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7/7/20/4490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