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인간 시리즈:천지지행(8) 기쁘게 법을 얻다
작가:소련
【정견망2007년 07월21일】
제3장 오늘 아침 법을 얻어 미혹을 타파하다
제3절 기쁘게 법을 얻다
처음 <전법륜>을 열어보았을 때 사부님의 사진을 보고 매우 친근했는데 사부님은 매우 자연스럽고 자비스러웠다. 책속의 사전문명과 다른 공간에 대한 논술을 보고 나는 생각했다: 이런 것은 내가 책에서 이미 보았던 것이 아닌가? 또한 책에서 “심성제고” “대인지심이 있어야 한다” 등을 제기 했을 때 이것은 어느 방면에서 보아도 맞다 고 생각했다. 당시 수련에 대한 이해는 별로 깊지 않았고 내가 여러 해 찾고 동경했던 것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법을 배우는데 좀 저애가 있었다. 당초 모친은 내가 그것을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말씀하시기를: 이 공법은 손해를 보고 양보를 하라는 것인데 그럼 학대를 당하라는 것이 아니냐? 하며 공부를 못하게 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모르게 굳건하게 이 공법을 배웠고 학교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했다. 예를 들어 당시 우리 학교에 컴퓨터 실이 있는데 학우들이 들어가면 슬리퍼로 바꾸어 신어야 한다. 어떤 아이는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놓으면 나는 그 신발을 가지런히 놓았다. 한번은 아침 당번을 하는데 우리조에서 내가 가장 일찍 왔고 다른 사람이 아직 오기 전에 자습을 시작하려고 할 때 나는 반 전체를 깨끗이 청소하는 등등이었다. 이것은 사실 생명의 본능에서 나온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인문학과를 배울 때 학우들이 사람의 본성이 선한 가 악한 가하는 토론이 있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일을 할 때는 또 매우 이기적이었다. 이것은 학교에서의 일인데 사회에서는 이런 이기심은 더욱 심하지 않은가?
대법은 우리의 내원의 미혹을 풀어주었다. 우리가 이번 생의 상황이 왜 이렇게 좋지 않은가, 우리 생명이 존재하는 근본 목적을 개시하여 주었다. 당연히 과학자들이 다년간 연구해도 잘 알지 못하는 여러 미혹도 답해주었다. 또한 우리에게 일종의 생명의 경지를 제고하는 연구수준과 능력 방식을 제공해 주었다. 도덕 수준이 제고되어야만 사회는 건강히 발전하는 것이다.
내가 법을 처음 얻었을 때 어느 날 나는 밤의 단체 학습에 참가 했다. 좀 피곤하여 상에 누워 잠시 휴식하였는데 천천히 자기의 신체가 공중으로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연후에 매우 신성한 여자부처님이 내 앞에 나타났고 사부님은 옆에서 만면의 미소를 짓고 보고 계셨다. 이 부처의 신체는 매우 컸는데 나는 당시 그분의 전체 모습을 다 볼 수 없었다. 나중에 사부님이 나를 도와 가지하여 나의 신체를 매우 크게 만들어 주고 날게 해주셨다. 그렇게 하여 그녀의 어깨까지 날아갔는데 그녀는 자비스럽게 말하기를 : 너는 반드시 사부님을 따라 수련을 잘하여야 한다. 나는 천상에서 너의 모친이다.(천상에는 부동한 층차의 모친이며 최종 층차의 모친이 아니다) 네가 수련하여 오면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다. 절대 기억하라, 절대 기억해! 말을 마치자 곧 사라졌다. 나중에 관세음보살이 손에 꽃병을 들고 나타나 매우 자비롭게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마음을 안정시켜 법공부를 할 때 때로는 이 책(법륜공의 다른 서적도 마찬가지였다)에서 매 한글자의 배후에 붉은 빛을 보았으며 더 아래로 보니 매 글자의 배후에 부처님의 형상이 있었다. 심지어 책속에서 다른 공간의 산수화초 등등을 보았는데 매우 미묘한 경치였다.
한번은 당시의 심태가 매우 좋았을 때 밤에 내가 조용히 책을 보고 있는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매우 미묘한 음악소리를 들었다. 나의 원신이 따라 나가 매우 청정하고 신성한 곳에 도착하니 그곳에는 여러 선인들이 연주를 하고 있었는데 매우 미묘했다.
또 한번은 5장 공법을 연마하는데 나의 원신이 나가서 달과 화성으로 날아갔다. 그곳에 가보니 원래 우리가 늘 말하는 것처럼 그렇지 않았다.
출정한 후 나는 부동한 과학의 발전방향이 인류에 대해 얼마나 다른지를 자세히 사고했다.
지금의 과학은 실증과학 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만지고 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연구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나 계기가 측정해내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건드리지 못하며 혹은 자연현상이나 불명한 현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연현상이나 불명확한 현상이라고 들으면 더 이상 생각해보지 않고 잘 알려고 하지 않는다.
천문학과 고고학 양면에서 말하자. 우리가 만든 우주선이 다른 별나라로 가서 일부 견본을 가지고 성공적으로 돌아와 우리과학자들의 연구에 제공한다고 하자.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자. 이런 연구와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연구와 뭐가 다른가? 설사 외계에 생명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주선이 내려서 견본 샘플을 채집하는 지점에 없다면 그럼 이 별에는 생명이 없는 것인가? 또 생명에 대해서 말하면 반드시 인류 이런 환경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과학자들은 대서양 아래에 두 개의 지각이 강렬하게 부딪치는 곳에 대량으로 삼산화 유황증기가 나오는 환경에 생명이 존재한다고 하지 않는가? 또 우리 생명의 구성은 탄소를 골간으로 하는데(각종 유기물 성분은 거의 다 탄소이다) 과학자는 나중에 어떤 생명은 규소를 중심으로 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렇다면 이런 생명이 환경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탄소를 중심으로 하는 생명의 환경과 완전히 똑 같다고 할 수 있는가 ?
또 고고학의 방면에서 우리의 고고학들은 대개 화석이나 당시 남겨진 기록 혹은 출토된 것을 연구한다. 이런 연구를 하여 얻은 것은 흔히 단편적이어서 근본적으로 역사의 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우선 출토된 문물에 대한 연구를 말하자. 가령 당시 어느 부자 집에서 가지지 않으려는 것과 매우 가난한 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이 음차양착으로 우연히 한곳에 있다고 치자. 여러해가 지난 후 우리의 고고학자가 발견했다면 그가 어떻게 이 두 가지 물건이 다른 주인에게 속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며 또 빈부의 차이가 매우 큰 두 집에 속한다는 것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만일 하나의 물건이 신이 지구를 만들 때 부동한 별에서 가져온 것이고 또 다른 물건은 우리의 선배들이 만든 오래전에 속하는 것이라면 그것들이 동시에 우리에게 발견되었을 때 고고학자는 이런 복잡한 정황을 이해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은 그럼 현재 방사성원소의 측정법이 있지 않느냐고 한다. 남아있는 방사성 원소의 비율을 보아서 산출할 수 있는데 사실은 그것도 매우 국한된 것으로서 비록 이 방사성원소가 몇 만 년 몇 백만 년 붕괴할 시간이 있었다고 할지언정, 가령 이 물체가 이런 원소가 생기기 전에 만들어졌고 또 문명이 존재했다면 어떻게 하겠는 가 ?
우리 현재의 사람도 마찬가지다. 한 가지 일을 함에도 출발점이 다르지만 형식적인 표현은 아마 같을 것이다. 역사상 한차례의 전쟁을 어떻게 싸웠고 싸움하는 법이 무슨 정도로 싸웠는지, 이 점은 역사상의 기록 중에는 반드시 전면적이거나 상세하지 못하며 심지어 당시 인물의 심리에 대해서는 많은 경우 추측하거나 자기의 경험에 근거하여 당시 환경을 생각한다. “그냥 이렇게 생각한다” 혹은 “응당 이렇게 생각한다.”이다. 명백히 말하면 자기의 생각을 후세 사람에게 남기는 것이다! 이것과 당시 사람의 실제 생각과 출발점은 흔히 다른 것이다! 당시의 문헌 기록도 단지 사물이나 사건의 표면만 표현 했지 인물의 내심과는 매우 거리가 있는 것이다!
당연히 인류가 존재하는 공간은 미혹된 공간이며 이 공간의 생명은 너무 많이 알게 하지 못한다. 바로 이런 생명들이 각종의 가상적인 환경에서 생활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제 딴엔 대단하다고 여기며 또 전 우주에서 지혜가 가장 높은 생명의 즐거움이 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현재 실증과학의 국한성을 제기하면 그는 곧바로, 그럼 신을 여기 데려와 봐라, 네가 사전문명을 이야기 하는데 그럼 시공을 거꾸로 돌려 내가 사전문명이 어떠한지 한번 보게 해 주라고 말한다.
내가 말한다면: 그럼 너는 달에 가서 어떤가 한번 봐라, 네가 만일 매우 미세한 공간에 가서 도저히 신이 존재하는지 한번 보아라. 그러면 그는 단지, 우리 현재의 과학이 국한성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어떻게 말하던지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데 이 본신이 자기의 “유심(唯心)”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망망한 우주 도처에 다 물질인데 하나의 작디작은 사람으로서 누가 이 일체의 거대함과 미세한 것을 뚜렷이 인식하여 말할 수 있는가?
기왕 이렇다면 다르게 보는 방법이 나타남을 허용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일종 정확하고 적극적인 사유방식이다.
우리 이 사회에는 이미 이런 좋지 않은 현상이 나타났다: 우리는 늘 어떻게 사람을 다스리고 관리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심지어 사당이 만들어낸 단어와 문구를 사용한다. 사실은 이 몇 년의 투쟁적인 방법을 써서는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반대로 사회의 좋지 않은 현상은 더욱 많아지고 있다. 현재 신문에 모두 이런 광고를 싣고 있다. 무슨 술집에서 남녀 종업원을 초빙하는데 나이는 18-26세 사이, 용모가 잘 생기고 남자는 1미터 75 이상, 여자는 1미터 65이상, 월급은 만원이 넘음. 매일 결산함. 전화: XXX…. 현재 회사에 출근하여 8시간 일하는 기술자의 월급이 많아야 일 개월에 천원 좌우인데 이런 광고는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면 그러한 “성매매산업”의 모집광고이다. 그런 돈만 위해서 사회여론에 대해 감독 작용을 소홀히 하는 매체는 현재 부지기수로 많다. 더욱 나쁜 일도 더욱 많다.
이 한 시리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은 “사람 마음”이며, 사람의 선심을 어떻게 깨워주어 자신으로 하여금 자신을 단속하게 하는가 이다. 그럼 어떠한 좋지 못한 일도 그들 역시 더 이상 가서 행하지 않을 것이며 이렇게 전반 사회는 자연스럽게 호전되지 않는가?
이런 것들은 선전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심의 개변에 의지하여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당시의 5,6월경은 우리 그 곳의 수련인의 인원수가 가장 많이 급증한 시기였다. 만고의 기다림, 만고의 윤회 모두 지금의 법을 얻기 위해서였다.
시초에 법을 얻을 수 있도록 배치된 부동한 층차의 생명들을 위해 바른 신들도 아주 세밀한 배치를 했다. 그 낡은 세력들도 많은 생명들을 파견하여 인간세상에서 전생하게 했고 대법이 널리 전해지는 시기에 표면에서는 법을 얻었지만 사실상 교란하고 파괴하는 작용을 일으켰다. 이렇게 진실과 가짜로 한동안 사람들로 하여금 갈피를 잡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당시 배우는 사람들 중에 각종 계층의 사람들이 모두 있었고 모두들 배우고 나서 생명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모두들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반본귀진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노력하여 앞으로 나아갔고 있는 힘을 다해 정진하고 있었다… …
그들은 수련한 후 좋은 사람에서 시작하여 자신의 나쁜 점을 고치려고 노력하고 주위 사람들을 선하게 대하려고 했다. 모든 일에서 되도록 남을 위해 고려했고 원한이 없었으며 고생을 낙으로 삼았다. 그 당시 일부 사람들은 이 사람들의 거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이 아주 “멍청하다”고 여겼다.
그들은 늘 웃으면서 말한다. “우리는 생명의 의미가 사람들 속에서 돈을 위해 죽고 명을 위해 죽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우리는 수련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심신을 승화시켜 우리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 그 곳은 고뇌가 전혀 없고 이러한 좋지 못한 일들이 없으며 아울러 더욱 즐겁게 살 수 있고 더욱 기쁜데 얼마나 좋은가! 지금을 말하자면, 우리는 수련한 후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알았고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도와 심신을 정화시켜 주었기 때문에 병이 없다. 병원에 가서 주사 맞고 약을 필요가 없고 침대에 누워 남의 간호를 받을 필요가 없다. 남들이 간호해 주더라도 그 괴로움은 또 스스로 감당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일에 부딪치면 모두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일반 사람처럼 대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끔은 손해본다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는 더욱 큰 복을 얻는데 백색물질 덕이다. 그리고 우리는 진솔하고 선량하고 남을 관용하고 양보할 수 있다. 그럼 남들은 모두 우리를 신임하고 늘 우리를 중용하는데 그럼 많은 이익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다. 당신이 말해보라, 우리가 멍청한가? 그리고 우리는 “심법(心法)”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단속할 수 있다.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는 나쁜 일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돈이 있다고 해도 그렇게 좋지 못한 장소에 가서 한바탕 “멋을 부리지 않는다.” 더 큰 유혹은 우리를 놓고 말할 때 마음속에 두지 않는데 이런 것에는 모두 한 가지 원인이 있다. 우리는 대법 속에서 일체 좋지 못한 물질과 관념 생각들을 씻어내서 깨끗이 하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무사무아의 무척 자비롭거나 혹은 일체가 진실한 생명으로 변한다. 기타 인간세상에서의 이른 바 일체 “아름다움”을 우리는 가히 소유할 수 있지만 중하게 보지 않는다! 인류는 마치 일부 기본 입자의 수명처럼 몇 미초와 같지만 우리는 더욱 영원하고 더욱 아름다고 더욱 순정하고 더욱 신성하고 영원한 일체를 얻는다. 그럼 당연히 인간세상의 무엇에 집착하지 않는다! 물론 인간세상에서 일체를 반드시 잘 해야 하고 반드시 인간세상에서의 책임을 이행해야 한다! 이 일체는 모두 수련 속에 있다! ”
그럼 만약 모두 이러하다면 일체 사회 문제는 즉시 해결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수련을 통해 닦아낸 지혜와 신통, 역사와 현재의 일에 대해 과학자보다 더욱 똑똑히 더욱 투명하게 볼 수 있는데 우리가 “멍청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럼 반대로 말해서, 눈앞의 한 점의 이익과 허용을 위해 이 억만년 동안 기다린 대법을 놓친다면 그것은 얼마나 우둔한 것인가, 심지어 그들은 그가 잃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을 때 그것은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자책과 후회, 원한일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서 나는 대법제자들 속에서 널리 전해지는 노래 한수<<득도>>가 생각났는데 여기서 함께 감상해 보자.
되돌아갈 길을 잃었네
천백 년 돌고 돌아
다행히 사존의 보도(普度)를 만났네
득도(得度) 득도(得度)
기연을 더 이상 놓치지 마세!
(계속)
발표시간:2007년 7월 21일
정견문장: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7/7/21/4490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