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이 조조를 알았을까?
작가: 남산(南珊)
【정견망 2007년 11월 27일】
만약 누군가 “유방이 조조를 알았을까요?”하고 묻는다면 당신은 아주 가소로운 질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 B.C. 206-195 재위)은 서한(西漢)을 창립한 개국군주이고 조조(曹操)는 동한(東漢) 말기 한헌제(漢獻帝 189-220 재위)때의 승상으로 둘 사이에는 약 4백년의 시차가 있기 때문이다. 조조야 당연히 황제들의 조상인 유방을 알았을 테지만 유방이 어떻게 조조를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만약 한헌제가 유방의 환생이고 조조는 한신의 환생이라면 이 질문이 그리 가소롭진 않을 것이다.
설화고전 명작 『유세명언(喻世明言 세상을 깨우치는 밝은 말)』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한 영제(靈帝 168-189) 때 사마(司馬)씨란 성을 가진 수재(秀才)가 있었다. 어느 날 밤 그는 삼라전(森羅殿 염라대왕이 사는 궁전)에 불려가 염라대왕과 함께 350년간 누적된 사건을 판결했다. 바로 충신을 살해한 사건으로 원고는 한나라 개국공신인 한신(韓信), 팽월(彭越), 영포(英布)였고 피고는 한고조 유방과 그의 아내 여후(呂后)였다. 한신은 유방이 천하를 차지하는데 큰 공을 세워 십대공로가 있었지만 유방이 천하를 얻은 후 상을 주기는커녕 관직을 깎아 내렸다. 나중에는 여후와 소하(蕭何)의 모략에 걸려 장락궁(長樂宮)에서 억울하게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32세였다.
팽월은 의표(儀表)가 아름다워 여후가 보고 반했다. 하지만 사람됨이 바르고 강직해 고조가 출정할 때 태후가 있는 깊은 궁궐에 들어감은 예법에 어긋난다고 여겨 여후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크게 분노한 여후는 그를 죽이기 위해 팽월이 모반을 저질렀다고 무고했고 결국 일족이 몰살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한편 영포는 여후가 팽월을 죽인 후 시체를 소금에 절인 것을 먹으라고 보내자 자신에 대한 압박으로 여겨 살기위해 모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한나라의 3대 개국공신들이 모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수재는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한신, 당신은 정성을 다해 나라를 위해 보답했고 한 황실을 대신해 천하 강산의 절반 이상을 얻었음에도 억울하게 죽었다. 당신을 초향(樵鄕) 조숭(曹嵩)의 집에 태어나게 하되 성은 조(曹), 이름은 조(操), 자는 맹덕(孟德)으로 한다. 우선 한나라의 승상이 되고 나중에 위왕(魏王)이 되며 허도(許都)에 머물며 한나라 영토의 절반을 향유하게 할 것이다. 그때 당신의 위세와 권력은 천하를 뒤덮을 것이며 전생의 원수를 갚을 수 있게 해주겠다. 대신 황제를 칭하지 않게 하여 당신에게 한(漢)을 배반할 마음이 없었음을 밝히겠다. 당신의 아들이 선양받아 당신을 무제(武帝)로 추존하고 십대공로를 표창할 것이다.”
또 처분을 기다리던 한고조 유방을 불러 “당신은 다음 생에 한 황실에 태어나 헌제(獻帝)로 삼겠다. 일생 동안 조조에게 모욕을 당하며 전전긍긍하면서 편안하지 못하고 하루가 일 년과 같을 것이다. 이는 당신이 전생에 임금이 되어 신하를 저버린 까닭에 내생에는 신하에게 모욕당하는 것이다.”라고 판결했다.
또 여후를 불러 “당신은 복(伏)씨 집안에 태아나 나중에 헌제의 황후가 될 것이다. 조조에게 온갖 굴욕을 당하다 끝내 궁중에서 죽임을 당할 것이다. 이는 장락궁에서 한신을 죽인 원한에 대한 보응이다.”
영포에게는 “당신은 강동(江東) 손견(孫堅)의 집에 태아나 이름은 권(權), 자는 중모(仲謀)라 불릴 것이오. 먼저 오왕(吳王)이 되고 나중에 황제를 칭할 것이며 강동에 자리 잡아 나라가 부귀할 것이다.”
또 팽월에게는 “당신은 정직한 사람이니 유(劉)씨 집안에 태어나 이름을 비(備)라 하고 자는 현덕(玄德)이라 불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어질다고 칭송하고 당신의 의(義)를 기릴 것이며 후에 촉의 황제가 되어 촉중(蜀中)을 차지하고 조조, 손권과 함께 천하를 삼분할 것이다. 조 씨가 한나라를 멸한 후 당신이 한황실의 뒤를 잇게 해 그대의 충심(忠心)을 드러내게 하리라.”
바로 이와 같았다! 조조가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하고 총명한 한 헌제가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결국 실권이라곤 전혀 쥐어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자신의 비(妃)와 태후(太后)가 모두 조조를 제거하려다 도리어 조조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으며, 자신 역시 조조의 아들에게 핍박 받아 4백년 유 씨 강산을 넘겨주고 울면서 떠나야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한나라 4백년 강산이 셋으로 나뉜 것이 표면상으로는 “평화가 오래되면 반드시 분열”되는 것이지만 사실상 유방과 여후가 공신들을 살육하여 그 응보를 받은 것이다. 단지 몸으로 그 고통을 감당했을 뿐만 아니라 천하 역시 공손히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방과 여후를 생각하면 분명 후회가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오늘이 있음을 알았던들 그리 하진 않았을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사마 씨 성을 가진 이 수재는 판결문을 작성해 “천지는 사사로움이 없고 인과응보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다.”는 천리(天理)에 부합했기 때문에 지극히 부유하고 지극히 귀한 복을 쌓았다. 그는 내생에 “성은 그대로이고 이름만 바꿔 사마 씨 집안에 태어나 이름이 의(懿), 자는 중달(仲達)이다. 일생동안 나가서는 장수요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어 자손들에게 그 자리를 전하니 결국 삼국을 병탄하고 국호를 진(晉)이라 하리라.”
원래 진(晉)나라가 위촉오(魏蜀吳) 삼국을 멸하고 다시 천하를 통일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선에는 선한 보응이 있고 악에는 악한 보응이 있음은 한치의 오차도 없는 하늘의 이치이다. 사람이란 마땅히 선을 행하고 악을 버려야 하며 자신과 자손을 위해 복과 덕을 쌓아야 한다!
발표시간: 2007년 11월 27일
정견문장: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07/11/27/4957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