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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통과 수련

숙명통과 수련

작자:담연(淡然)

【정견망 2006년 12월 5일】

개요

본문은 여러 차례 윤회전생 중 과거와 지금의 수련의 근원, 천목으로 본 인과응보와 “회귀(回歸)”에 대한 것이다.

나는 유물론의 독해를 깊이 받아 대법에 들어온 후 몇 편의 문장을 쓰긴 했지만 돌이켜 보면 관념의 작용 하에 온통 황당한 소리들로 가득했다. 끊임없이 깨끗이 씻어내는 중에 매번 한층 제고할 때마다 이전의 인식이 매우 낮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법을 공부하고 수련이 깊어짐에 따라 천목, 숙명통 공능의 현상이 끊임없이 나타났고 그래서 나의 층차에서 본 상대적인 진실의 단편을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주려고 한다. 인연 있는 사람들이 “물속의 달(水中月)” 이나 “거울 속의 꽃(鏡中花)”을 버리고 만년의 기다림을 저버리지 말고 진정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1. 사부님과의 인연

사부님께서는 설법 중에 제자들의 세 가지 내원을 말씀하셨는데 정법노정이 진행됨에 따라 나는 사부님과의 깊은 연원을 보게 되었다. 무수한 생에 걸쳐 사부께서는 우리를 찾으셨고 정법시기의 인연을 맺으셨다.

아주 오래고 오랜 옛날, 나는 일찍이 무사(武士)였다. 광활한 개펄에서 많고 많은 사람들이 소황제(小皇帝)를 따라 바다로 피난을 떠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개펄까지 올 수 있던 사람은(마치 오늘날 대법을 만난 사람들처럼) 모두 쉽지 않았고 현실 이익에 유혹된 많은 사람들은 그대로 남았다. 나는 다행히 소황제를 따라 배에 올랐다. 당시 아주 많은 배가 있었는데 나는 그 중 한척에 올랐다. 내가 탄 배는 소황제가 탄 배는 아니었다. 소황제는 그 생에 사부님의 화신(化身)이었다.

또 한 세(世)에 나는 힘들고 험한 인생을 겪었고 이미 중년이 되었다. 늘 사부님을 볼 수 있었음에도 그 분이 사부님인지 몰랐다. 무수한 마난 중에서 그 노인은 늘 묵묵히 나를 부축해주었다. 용감하고 힘이 대단한 그는 내가 늘 찾고싶던 의지처가 되었다. 어느 날, 한 무리 흉포한 자들이 노인과 의지하며 살아가는 소년을 쫓아가 때렸다. 노인이 “왜 빨리 가사(袈裟)를 입지 않느냐” 라고 고함치자 그를 쫓던 사람들이 흩어졌다. 나는 비로소 그 노인이 불가(佛家)의 사람임을 알았다. 나는 그의 제자가 되기를 발원했지만 그 일 세의 인생은 곧 끝났다.

다음 생에 나는 다시 사존을 뵈었다. 나는 어리석은 아이였으며 세간에서 홀로 떠돌아 다녔다. 사부님께서는 나를 찾아내셨고 “땅 속(地心)” 깊은 곳에서 잃어버린 “마음(心)”을 되찾아 그것을 닦고 영원히 하늘로 향하도록 가르치셨으며 내가 영원히 미혹되어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셨다. 나는 마침내 사부님의 제자가 되었다. 사형(師兄)은 지난 생의 소년이었는데 그 때는 이미 성인이 되어 있었다.

윤회 중에서, 인간 세상의 알력 중에서 나는 또 한 번씩 “마음”을 잃어버렸는데 사부께서 거듭 내가 그것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왔고 나로 하여금 영원히 그것을 받들게 하셨다. 이번 생에는 그것을 이용해 사부님의 설법을 가까이 하도록 하였다. 오래 헤어졌다 재회한 그런 느낌은 세세생생의 뿌리가 박혀 있다. 때문에 99년 7.20 이후 내게 관심을 가지는 직장 상사에게 말했다. “내가 당신들을 상사로 모신 것은 삼생(三生)에 행운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번 생에 사부님을 만날 수 있고 가까이서 법을 얻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천생 만생의 행운으로 결코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2. 수련의 인연

이번 생에 우리 집에는 전생의 네 나한이 모여 있다. 우리는 세세생생의 미혹 중에서 최후의 회귀를 위해 심후(深厚)한 인연을 맺었다.

“행, 인, 자(行, 忍, 慈)”는 나의 고모인데 그녀는 이번 생에 여전히 고생스럽게 수련하고 있으며 젊었을 때 불교에 귀의해 가정을 이루지 않았다. 중년에는 신앙이 겁난을 당했으나 고통속에서도 견지 했으며 대법을 만났을 때는 이미 노인이었다. 그녀는 별로 배운 것이 없었다. 『전법륜』을 다 읽은 후 그녀는 즉시 나에게 말했다. “이것은 수불(修佛)수도(修道)하는 책이구나. 내가 늙어서 수련할 수 없는 것이 애석하다”라고 했다. 이 일념이 그녀로 하여금 법을 얻지 못하게 했고 98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후 이십칠일 째 되는 날 우리보다 한층 높은 삼계내의 공간인 도리천(忉利天)에 갔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아직도 미혹 중에 수련하고 있는데 모호한 상태였다. 나는 아직 그녀와 법리로 통할 수 있다. 그녀는 일찍이 중공 당원이었는데 내가 이 공간에서 그녀를 대신해 탈당시킨 후 그녀는 즉각 반응이 있어서 속박과 짐승의 인기에서 벗어나 즐거워했다. 나는 그녀가 새로운 우주에 진입할 것이며 대법을 수련할 기회가 있으리란 것을 알고 있다. 세상에 있을 때 그녀와 이야기할 때 법에 대해 문화수준에 걸맞지 않는 비범한 이해가 있어서 늘 놀라웠다.

“관무변(觀無邊)”은 내 아들인데 어려서부터 요즘 글을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의 이런 환경에서 훌륭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법리에 대해서는 점화해주면 즉시 깨달았기 때문에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파룬궁이 박해를 받는 동안에 그는 지혜롭게 전 반 학생들에게 “정치주제”에 관한 것은 모두 잘못된 것으로 여기도록 이끌었다. 대법 음악을 세인들의 강연에 성공적으로 도입했고 내가 인터넷을 돌파할 수 있도록 돕는 등, 그는 세인들 중 내가 마난에 직면했을 때 가장 확실한 지지자였다. 삼퇴 조류 중에서는 “죽지 못해 안달이 났군”이라는 말로 다른 사람이 사당에 가입하려는 생각을 없애버렸다. 오늘 비록 아직 대법제자가 되진 못했지만 조건이 성숙되면 조만간 스스로 대법 수련의 길로 들어설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다.

“무승(無勝)”은 내 남편인데 무승이란 그의 금생을 묘사하는 동시에 또 그가 전생에서 과위를 증득한 방식이기도 하다. 무명의 미혹 중에서 그는 일찍이 법을 망각하고 나를 떠났다(전생). 그러나 사람 중에서는 줄곧 뛰어난 인물이었다. 7.20 이래 층층이 가해지는 박해는 그를 한걸음씩 회귀하게 했고 우주의 조류를 따라 움직이게 했다. 그는 폭력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진상을 알리는 중에도 있었으며 역경 속에서 그의 “은혜와 사랑”은 세인들이 미담으로 여기게 했고 경찰도 그의 과감한 행동에 탄복했다. 나는 그가 만년의 기다림을 저버리지 않고 잃어버린 천기를 되찾을 날이 올 것임을 보았다.

나는 일찍이 “초절륜(超絕倫)”이라는 이름이 있었는데 나는 나한(羅漢)의 법은 불법(佛法)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이전의 과위는 말하고 싶지 않다. 우리가 일찍이 서약한 것은 인간으로 돌아와 나한으로 수련 성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나한으로 성취된 것은 단지 2천5백년 동안 우리가 인간세상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받은 “수기” 중 하나이다. 2천5백년 전의 고상한 “인연”은 “둘둘이 온다”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같은 길을 걷도록 했다. “극히 낮은 층차”(구 우주의 생명이 眞善忍 법리에 대한 이해를 말함)의 우리가 윤회전생의 고난 중에 체험한 “사회는 발전하고 있고 인류의 사상 역시 갈수록 더 복잡해진” 생명의 길이었고, 생명이 발생하면서부터 타락해질 때까지 전 과정을 체험하고, 우주 특성이 매우 소중함을 체험했기 때문에 우리는 “화산(華山)의 한 길”이 아니면 생명윤회의 절망상태를 뛰어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우리의 회귀는 반드시 생명의 최고경지이며 불생불멸(不生不滅)하며 영원히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홍궁(洪穹) 천체이며 우리가 자신을 씻어 무사무아의 목표에 도달해야 한다.

우리는 “돛 하나 오르자 억 만 돛이 날리는” 인도 하에 이미 세인들(우리 가족 포함)에게 부동한 정도로 무엇이 수련인지, 어떤 것이 바른 믿음이며 바른 수련인지 알게 했다. 게다가 보다 많은 인연 있는 중생이 자신들의 경력을 내려놓고 그들이 이후 수련할 근기를 세우고 바른 깨달음과 승화가 필연이 되게 했으며, 사람이 신이 되는 길이 막힘없이 잘 통하게 했다. 반복적으로 진상을 알리는 중에 더 많은 생명이 인연이 있어 신세기로 진입하게 했다.

3. 부부의 인연

99년 초 어느 날의 일이다. 이 날은 마침 내 생일이었다. 전에 나와 잘 지내지 못하던 동료의 근심을 풀기 위해 노력하다가 오히려 식구들의 화를 돋궈 남편이 집을 나가 며칠간 돌아오지 않았으며 정말로 나와 이혼하려 했다. 나는 『전법륜』을 들고 며칠 저녁 읽으면서 자아를 내려놓고 그를 위해 생각하며 편지를 썼다. “헤어지자는 말은 쉽게 하지 말아요. 모든 불쾌한 일은 과거이고 당신이 우리 가족을 위해 감당한 일체는 절대 헛고생이 아니랍니다. 나와 아들은 모두 당신의 자랑거리이고 … 저는 다른 선택이 없어요, 아들을 잘 돌볼 것이며 당신이 언제 들어오더라도 가정은 모두 당신 것이고 내 평생 오직 한 명의 남편, 아들뿐인데 변하지 않을 겁니다.”

또한 말했다. “진정하게 좋은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다 잘해줍니다. 단지 자기 가족에게만 잘하는 것이 아니며 미운 사람을 보복하는데 흥미가 없으며 나는 마음속에 원한이 없기 때문에 천하에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편지를 다 쓰고 나자 다음날 아침 사부님께서는 나에게 그와 있었 과거의 은원관계와 혼인의 인연을 보여주셨다.

아주 오래고 오랜 옛날, 그는 환관의 후예였고 아주 총명했다. 상관의 총애와 부친의 압력때문에 그는 상사의 바보같은 딸을 “아내”로 맞았는데 명목만 부부였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충실하고 선량한 아들로서 사리 분별을 못하는 아내를 원망하지 않고 잘 대해주었다. 나중에 나를 맞이했는데 우리는 함께 그녀를 보살폈다. 우리는 매우 화해롭고 즐겁게 생활했는데 나는 내 몫은 있었으나 이름은 없었다.

또 한 생에서는 우리는 명분이 있었으나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았다. 그 일생에 우리는 서로 좋아하지 않아 헤어졌다.

또 한 생에 나는 다른 사람의 첩이 되었다. 고통 속에서 나는 생명 깊은 곳에서 외쳤다. “당신은 어디 있나요?”

우리는 마침내 함께 길을 걸었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은 세세생생 천 갈래 만 갈래 얽혀있었고 서로 즐겁게 지내기도 하고 은원이 얽혀있기도 했다. 부모형제, 자매뿐 아니라 친척 친구 모두 얽혀 있었다. 매 일생이 변했지만 오직 부부의 선만은 끊기 어려웠다.

나는 일찍이 칼을 들고 사랑을 빼앗은 적도 있다. 자연히 요 며칠간 떨어져 있는데 그와 그녀는 인연은 있으나 명분이 없어 자연히 결혼은 할 수 없었다. 마땅히 당신 것이면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고 당신 것이 아니면 구한다고 해도 어렵다. 세인의 근심은 마음속으로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며 수련인은 “버리는 것이 수련의 승화”이며 “모두 버려야 누락이 없는 것”이다.

그는 편지를 보고 다시는 집을 떠나지 않았다. 7.20 이후 박해에 대해 그는 정의의 편에 서서 말했다. “그녀는 집에서는 좋은 아내, 좋은 어머니요. 우리 아버님은 늘 그녀가 좋은 며느리라고 하고 직장에서도 좋은지 아닌지 당신들이 제일 잘 알잖소. 어떻게 양심을 숨기고 좋은 사람을 괴롭힌단 말이요?” 경찰에 대해서도 그는 늠름하게 말했다. “나는 아내에게 연공하게 합니다.” 내가 잡혀 폭력을 당할 때도 그는 여러 차례 항의 편지를 썼다. 많은 변란 중에 사악 앞에서도 위풍당당하고 늠름했으니 정말로 세간의 호법신이었다.

심성이 제위치에 도달하면 사부님께서는 당신으로 하여금 법리에 대한 이성적 감각에서부터 상승해 숙명통을 볼 수 있도록 해주시는데 구체적인 사건의 결과 및 사실을 직접 겪는 것처럼 보게 하신다. “신(神) 역시 사람이 견정한가 견정하지 않은가를 보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사상 염두의 기인(起因)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사람의 행위야 말로 사람의 가장 준확(準確)한 표시이다.”(『미국 서부국제법회 설법』)

사람에서 뛰쳐나가지 못하면 곧 그 한 층의 불법(佛法)을 볼 수 없다. 보지 못하면 못할수록 더욱 믿지 않는데 곧 쉽게 악성순환을 이뤄 미혹 속에서 떨어지고 훼멸된다.

4. 인과응보

우리는 수련과정 중 많은 마난을 만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만약 이 일이 정법시기에 발생한 것이 아니고 박해한 것은 속인이라면, 그럼 이 악한 경찰이 죽은 다음 또 환생했고 이 시기에 법을 얻고 대법제자가 되었다고 하자. 그럼 그 시기 맞아 죽은 사람이 그더러 목숨을 갚으라고 할 것이 아닌가?”(『2003 정월 대보름날 설법』).

99년 초, 나는 모 동수 주변의 곳곳이 해골인 것을 보았는데 동시에 “한사람이 공을 이루면 만개의 뼈가 시든다”를 반복해서 말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생명을 내놓으라고 했다. 나는 웃옷을 입혀주며 “이름을 숨기고 도피하세요”라고 했다. 당시에 그는 정말로 믿지 않았는데 금생에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이 어찌 생명을 빚질 수 있는가? 하면서 이해하지 못했다. 2000년 신년 초 그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는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

이 해에 그는 북경에 가서 상방했기 때문에 전국에 지명수배 되었고 나중에 체포되어 불법적으로 7년 형을 판결 받았다. 나는 사부님께서 내 입을 빌어 그에게 전생에 마도를 닦아 생명의 빚을 진 것에 대해 알려주게 하셨음을 알았다. 그는 금생에도 많은 유명한 기공사들을 찾아다니며 많은 공법을 연마했으며 대법을 수련하기 전에는 24시간 내내 단전이 뜨거웠다. 그는 그때 기를 내보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없애준 적도 있다. 한 때는 출가하여 스님이 되고자 했었고 자기 아들까지도 절로 보낼 생각을 하다가 우연히 법을 얻어 그 동안 이리저리 구하던 것을 그치게 되었다.

그 자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지만 사부의 요구에 따라 끝까지 가려고 한다. 내가 보기에 그는 대근기의 제자이다. 나는 그가 이 일을 상기할 것이고 그의 생명과정을 이해하고 어떠한 환경 중에서도 잘 걸어갈 것을 알고 있다.

빚진 것은 갚아야 하는데 나 역시 마주친 적이 있다. 내가 붙잡혀 폭력, 고문, 수갑 차기 등의 심문을 당할 때 나는 오히려 나를 학대하던 경찰을 연민했다. 나 자신마저도 왜 그런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 일이 지나간 후 사부님께서는 내게 보여주셨다. “과거 어느 한 생에 나는 현령(縣令)이었는데 금생에 악경들을 지휘하던 사람은 지난 생의 범인으로 내 손에 붙잡혔다. 나는 또 그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이실직고하라”고 했다.

“속인중의 일은 불가에 의하면 모두 인연관계가 있는 것이다.”

“죄를 당하는 것은 업을 갚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그것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으며 바꾼다면 빚을 지고도 갚지 않는 것과 같다; 또한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나쁜 짓을 하는 것과 같다”(『전법륜』-제 1강)

나의 집착 (남들이 나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하는 버릇)은 구세력으로 하여금 구실을 잡게해 마난에 직면하게 했다. 사부님께서도 할 말이 없으셨고 단지 내가 업을 갚는 것만을 바로보실 뿐이었다. 업을 갚는 중에 집착을 아직 내려놓지 않았고 특히 폭력을 지휘하는 경찰의 우두머리가 팔의 상처를 보게 되어 결과적으로 21일(정공할 때 보았다)의 겁수가 31일로 연장되었다.(자세한 것은 『내가 절실히 체험한 법무정법(法無定法)』이란 문장을 볼 것)

숙명통의 단편적인 사색과 현실 속의 사태 변화, 숙명통에서 본 영상이 다시 한번 여러 번 실증되었고 나로 하여금 주변 사람들과의 과거 은원을 정확히 반추할 수 있게 했다. 이로써 윤회와 인과응보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한 번의 찡그림, 웃음, 화냄, 원한이 모두 여기서 유래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 빚졌기 때문이며 당신이 원망하는 것은 그가 당신에게 빚을 졌기 때문이다.(사람은 이익이 상반되는 일에 부딪치면 모두 원망이 있는데 이런 원망이 아니라 아무런 이유 없이 오는 원망을 지칭하는데 그것은 당신 생명의 깊은 곳에 있다)

일체 인연을 선해(善解)해야만 비로소 수련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 중 낡은 안배를 부정하려면 확실히 쉽지 않다. 법리에 명백하고 사전에 결과를 미리 보고도 항상 업력의 끌림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바로 수련이며 99번 잘못해도 백 번 째는 반드시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당신이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하고자 하는 것은 누구도 상관하지 않는데 이는 이 우주의 이치이다”(『전법륜』)

사부님께서는 당신의 이 마음을 보시고 낡은 안배를 극복하고 빚을 갚을 수 있게 하신다. 당신의 아름다운 장래를 위하여 한 사람으로서 당신의 일언일행을 잘 파악해야 한다.

나는 나중에 폭력을 지휘한 경찰에게 인연관계를 알려주며 물었다. “내가 보응을 받는다면 당신은 보응을 받지 않겠는가?” 경찰은 “받지, 받아. 당신은 우리에게 혈채가 가득한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말했다 “당신이 보라. 어떻게 보충할 것인가? “악인방(惡人榜)”은 사람을 구하는 것이지 해치려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잘못을 알고 고치려는 마음을 보려는 것이다.” 그들은 “악인방”에 오르는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로부터 “악인방”이 중생을 구도하는 위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악인이 선한 사람으로 변하는데 좋지 않은가?

반박해(反迫害)의 목적은 중생의 양지-즉, 동정, 정의-를 환기시켜 고층생명이 이를 보고 이 사람이 그 한 층의 표준에 부합하는지 판단해 그들에게 새로운 홍궁천체로 진입할 희망이 있게 하려는 것이지 사람과 사람이 싸우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희망이 있는지 없는지는 구세력의 안배이지만 또 자신의 선택이 있다. 수련인은 그들에 대해 비록 사람의 칠정(희로애락 등)을 이용해 표현하지만 오히려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구별은 없다. 인연이 있으면 자연히 들을 수 있으니 좋고, 반대로 듣지 않아도 역시 정상에 속하는데 사람마다 모두 갈 수 있다. 아무도 가려하지 않으면 인연에 따른다.

반쯤 썩은 사과는 도려내야 하며 나쁜 것을 남길 수 없다. 사람 역시 개미 한 마리의 생사에 관심을 두진 않을 것이다. “9평”과 “심판” “혹형전” 등 일체는 모두 사람을 구하는 이 주제를 둘러싸고 있다. 하지만 공산당은 단지 인류 역사의 한 과정에서 나쁜 쪽으로 간 것에 불과하며 사람의 의지는 만류할 수 없는 것이다. 고층 생명은 단지 이 과정을 빌려 우주의 법을 바로잡으며 매 생명은 모두 그중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하고 있다.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따를지 다른 사람을 원망해선 안 된다.

혼란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기우(杞憂)”이다. 고층생명이 사람을 혼란하게 하지 않으면 사람이 어떻게 혼란할 수 있겠는가? 자기 현실의 이익을 잃을까 두려워 감히 말하지 못하고 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고층생명이 가장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진선인(眞善忍)으로 자기를 판단해보라! 당신이 남아있을 가치가 있는가?

5. 천목

나는 철이 들 때부터 중심 시력(황반 주위 시력)을 피하고 혹은 속칭 “눈동자를 집중”해서 보는 것을 피하는데 한 미생물의 공간도 볼 수 있었다. 적당한 흰색 배경의 광선이면 가장 선명하다. 무수하고 조밀한 점, 작은 선, 호, 나선상의 작은 생명이 공간의 일정 규율에 따라 민첩하게 운동하고 있는데 마치 기타 같은 종류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는 것 같다. 그들의 분포는 매우 균일하며 조화롭다.

광선 속에서 그것들은 검은 색으로 나타나며 운동과정 중에 빛을 반사한다. 이 색은 나로서도 감히 단정할 수 없는데 아마도 근본적으로 무색인 것 같고 단지 운동 중에 광선이 반사하여 조성된 착시가 아닌가 한다. 현미경을 본 사람이라면 이 공간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저배율 현미경으로 본 공간이며 단지 현미경 아래 죽은 세균이 슬라이드에서 염색이 되어 국부적으로 고정된 최후의 장면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내가 보기에 공간은 없는 곳이 없고 같지 않은 속도로 각종 작은 것들이 활동하고 있다. 당시 나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기공을 접촉한 후에야 비로소 이것이 사람의 제 3의 눈임을 알았다. 즉, 만화영화 이랑신(二郞神 전설에 나오는 눈이 세 개 달린 신)의 그 중간 눈으로 진실하고 절실하게 미시적인 공간을 보는 눈이다. 심지어 속눈썹 틈새 중에 털이 하나 빠진 위치까지 뚜렷이 나타난다. 한번은 내가 이 특징을 나의 두 육안과 대조해 본적이 있는데 그것은 그 중의 하나–나 자신의 눈이었다. “그렇게도 큰 하나의 눈이 깜박깜박 거리면서 보는 것이 똑똑하다.”

이어서 제 2, 제 3의… 눈동자 중으로 뚫고 들어가 거울로 반사될 수 있는 렌즈로 들어갈 수록, 그 통로에서 끝없이 뚫고 나가는 경험을 했는데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다. 『전법륜』을 들고 제 2강 천목에 관한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놀라서 펄쩍 뛰었다. 나와 꼭 같은 눈을 본 사람이 있구나! 나는 한시도 지체할 수 없어 책을 읽어 내려갔다. 너무나 확실했다. 우매함을 뛰어넘은 나는 정말로 행운아였다! 나는 마침내 진정한 공부(功夫)를 얻었음을 확신했다!

나는 일찍이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만일 일종 생물 사진기가 있어 내가 본 장면을 찍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말이 필요없이 사람들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일체가 진실임을 믿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부님께서 만약 공중에 앉아 설법하신다면 더 좋지 않겠는가? 불법은 사람이 진심으로 체험하는 것이 필요하며 미혹 중에 깨달을 수 있어야만 비로소 진수(眞修)이다. 부처가 원하는 것은 사람의 이런 진심(眞心)이다! 가상 속에 진심이 드러난다.

“많은 사람이 깨달음 중에 수련하며 모두 그에게 나타내 준다면 사람들은 보고 진짜이므로 모두 와서 수련하는데 십악불사한 사람도 모두 와서 수련하는데 그러면 안 된다.” (『전법륜』 제 1강)

사람이 “보는 것”에 집착하면 사람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보면 믿고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 이것은 하사의 견해이다. 사람은 미혹 중에 조성한 업이 매우 크고 미혹 중에 어찌 본성이 볼 수 있겠는가. 깨달음이 먼저이고 보는 것이 나중이다, 업을 닦아 버리고 본성이 나오면 바로 볼 수 있다.” (『정진요지』 「왜 보이지 않는가」).

보이지 않음으로 인해 자신을 망친다면 애석하기 그지없다.

대법에 들어오기 전 나는 이미 “흰빛이 몸을 비추는 것”(시드니 설법), “꽃이 뒤집히는 것”, “통로 열기” 등을 경험했고 늘 태극을 보았다. 한 때는 잠시 표피투시, 인체투시, 요시 등 육안통, 천안통의 일부도 보았다. 대법에 들어온 후 혜안통 이하는 더 이상 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미시적인 공간을 보는 일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나는 일찍이 “인식론의 비약”에서 말한 미시적인 입자와 입자류(粒子流)를 보았다. 내가 불법으로 감금된 세뇌반에서 전당강(절강성에 있는 큰 강 이름)의 “소용돌이”(전당강의 소용돌이가 유명함)의 형성이 전문가가 말한 성계 입자의 흐름이 만자(卍字) 부호와 같은 운행 상태임을 이용하여-우주는 큰 데서 작은 데에 이르기까지(대입자, 소립자) 도리는 상통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들에게 “우주와 인간”이란 과학교육영화로 파룬궁을 공격하는 것이 매우 가소롭다고 했고 사실을 이용해 이 영화의 내용에 허점이 많다고 알려주었다. 과학계에서 말하는 태양풍은 단지 우리가 본 전자풍의 한 면이며 태양의 전자풍은 지구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전 방위적이고 내보낼 뿐 만 아니라 동시에 받아들이기도 한다. 특정한 층차에서 천목으로 보면 눈이 어지러울 정도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확실히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당시 CCTV “백가논단”중 이정도(李政道) 박사가 말한, 빛이 굽어서 휘어서 진행한다는 것은 사실 광속 중 입자류가 회전하는 상태라고 말해주었다. 그때 마침 “고체 격속수(激束水)”와 “유액류(類液流)”에 관해 보도가 나와, 나는 자신이 보고 이해한 분자층이 본원적으로 고체수와 유사함을 설명해 주었다. 고체 중의 흐름은 규칙적인 배열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치 표면 장력과 비슷하다. 일본에서는 의념이 얼음 결정에 미치는 연구가 나온 적이 있는데 그것과 비유할 수 있다. 진상을 이야기하는 중에 신의 도움을 느꼈다. 만사만물은 내가 쓰기 위한 것이고 자유롭게 할 수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 “천목이 열리면 물건을 크게 확대하여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본능인데 현재는 특이공능이라고 한다. 특이공능이 나오려면 반본 귀진해야 하고 돌아서 수련해야 한다” (『전법륜』 제 1강) 말씀하신 것은 절대 확실하다!

수련이 깊어짐에 따라 『전법륜』에서 언급하신 천목의 부동한 층차를 빈번히 체험하고 주통로, 부통로 “한눈으로는 저쪽을 보고 한눈으로는 이쪽을 보는”, 복안, 부동한 층차의 종횡의 공간, 동시에 같은 곳에 존재하는 여러 공간을 단번에 보았다. “오른쪽 눈 아래에 부통로가 없는” 문제는 나로 하여금 한동안 미혹하게 했다. 왜냐하면 내게는 이 통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사부님께서는 설법에서 이 문제를 말씀하신 적이 있다.

“아주 낮은 층차에서 수련할 때 여기에 통로가 없는 원인은 바로 사람이 총으로 죽일 때도 이 눈을 사용하고 화살을 쏠 때도 이 눈을 사용하는데 아무튼 이 눈은 늘 나쁜 일을 할 때마다 사용한다.” (『캐나다법회 설법』)

나는 비로소 명백해졌다. 하나도 우연한 일이 없다. 어떤 일을 잘 알지 못할 때는 바로 나의 심성을 보는데 인식하지 못한 일을 아직도 믿는가 믿지 않는가를 본다. 바로 믿는 과정 중에서 우리는 점차 층층 나타나는 법리를 보게 된다. 우리가 갈수록 미묘한 경치를 보면 볼수록 우리는 더욱 더 “공을 수련함에 길이 있거니 마음은 지름길 대법은 끝없는데 고생을 배를 삼으세”(『홍음』)를 체험하게 된다.

6. 회귀

“사람의 전반 수련과정은 바로 끊임없이 사람의 집찹심을 제거하는 과정이다”

집착심이 존재하기 때문에 육안으로 보이는 “가짜현실”을 끌어안고 놓지 않으며 생생세세 당신의 생명을 훼멸하는 “명리정”을 추구하며 이 때문에 “칠정육욕”에 빠져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는다—잃어버린 것을 후회하며, 얻으려고 한 것을 얻지 못하고, 눈앞의 것을 유지하지 못하며 손에 넣은 것을 놓지 못한다. 사람은 끝없는 추구 중에 노(老), 병(病), 사(死)로 향하고 있다. 끝나면 만사가 다 공이다. 인피라는 허울을 벗을지라도 업은 갚아야 하며 윤회의 보응은 한치의 차이도 없다.

그럼 왜 육안으로 보는 것이 “가짜 현실”인가?

그것이 “가짜”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은 시공이 짧기 때문이다. 바나나의 생명은 사과보다 짧다. 금강불괴지체의 수명은 육체로는 헤아릴 방법이 없다. 방금 하나의 물건이었지만 머리를 돌리면 잿더미가 되는데 그것이 존재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손에 넣어도 곧 사라질 물건이라면 있어도 없는 것과 같은데 없거나 가져서 무엇하겠는가? 인과응보의 일세(一世)는 꿈과 같은데 이것을 진짜로 여기고 생생세세 생명의 장하(長河)에서 도리어 가짜를 만들어 일세의 투쟁으로 생명의 긴 과정을 훼멸한다면 본말이 전도된 것이 아닌가? 생명을 위해서라면 이 “꿈”을 파악해야만 비로소 바른 길이다. “가짜”가 어찌 진짜가 될 수 있겠는가?

왜 미시적인 속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다른 각도에서 말하면 우리가 보는 물질이 클수록 운행속도도 느리다. 태양은 진정한 항성이 아닌데 그것의 운행속도가 너무 느려서 사람이 관찰할 수 없을 뿐이다. 물질의 본원을 거시적으로 보면 볼수록 더욱 미시적이다.(종향공간의 층차에서 말함)

예를 들어 개미 신체의 입자는 가장 미시적인 데서부터 거시적인 데까지 사람 인체의 입자와 비교되지 않는다. 사람과 부처를 비교하면 더욱 비교할 수 없다. 우리 신체의 분자와 마찬가지로 그의 체내에 별이 있다.(사람 신체의 가장 큰 층은 세포인데 세포 속에는 세포액과 세포핵이 있고 핵 속에는 염색체가 있으며 염색체 내에 유전자가 있고 …. 층이 아주 많다. 이것은 아직 분자층의 한층 분자 세포내의 작은 부분이다. 원자에서 작게는 쿼크, 중성미자에 이르러… 생명의 본원에 이르면? “크기로는 밖에 없고 작기로는 안이 없다”[석가모니불])

거시적으로 한 층이 더 있으면 미시적으로 한 층이 더 있다. 우리는 운행속도가 느릴수록 수명이 길다는 것을 안다. 예를 들어 별의 수명이 억년이라 하자. 하지만 산천하류의 생명은 천년이다. 하지만 당신은 산하에서 자라기에 그것의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 당신은 이미 늙어버린 것이다. 당신의 신체에 그런 거시적인 것이 없으면 미시적인 것도 없다. 당신도 산천하류나 별이 되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당신은 또 그리 오래 살지 못한다.

나는 단지 이것을 빌어 당신에게 알려주는데 그것들이 허리를 펴면 당신은 이미 그림자도 없을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생명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미시적으로 수련하면 (거시적으로 수련하는 것은 당신이 해내지 못한다) 당신의 신체는 크게 자랄 것이다. (하지만 육안과 사람의 생각으로 헤아리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들은 너무나 부족하다)

어떻게 돌아가는가?

미시적인 물질일수록 질량이 가볍고 불순물을 제거해야만 생명이 비로소 승화되어 미시적으로 진입할 수 있다. 심성수련으로 불순물을 제거하면 혼탁한 생명이 다시 가벼워지는데 공을 연화해야 당신이 온 곳으로 회귀한다. 과거를 생각해보면 “사심(私心)”으로 인해 한 걸음 한 걸음 속세에 떨어졌고 신체는 갈수록 작아져 입자도 거칠게 되었으며 질량도 갈수록 무거워졌다. 생명의 등급이 갈수록 낮아져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을 보는 시방(十方) 관찰 방법으로 보면 최종적으로 “사람”이란 가장 낮은 층차에 떨어진다. 이곳은 “가장 중간, 가장 표면, 가장 표면에 있다”(『정진요지』)

나의 이해는 인류 신체의 크기는 대소입자의 가장 중간에 있고 전반 입자의 가장 표면에 있으며(무수한 층차의 크고 작은 입자 전체에서) 총체적으로 생명의 최외층-외각이다. (범위 내에는 무량무제한 대소 생명이 있다.) 인류를 “점”으로 그리면 입체의 표면과 같은데 단면의 끝과 “두터운” 정도(혹은 높이라고 할 수 있다)의 양극은 하나는 “거시적(洪)”이고 다른 하나는 “미시적(微)”이다.

돌아가고자 한다면 사람의 이치는 아무 소용이 없다. 과거 황제(黃帝), 노자의 도가 이론이든 불가의 이론이든 생생세세 모두 배워도 그것들은 우리 부원신이 수련하여 삼계를 벗어난 일정한 층차에 있게 할 뿐이지 다시 떨어지는 것을 막진 못한다. 또한 우리 이 층차의 진신(眞身)이 윤회를 벗어나게 제도하지 못한다. 불교는 더욱이 육신조차 유지하지 못한다. 사부님께서는 이 한 갈래 길을 분명히 지적하셨다. “고층차 중의 법을 모르면 수련할 법이 없으며, 안으로 수련하지 않고 心性(씬씽)을 수련하지 않으면 공이 자라지 못한다.”(『전법륜』 제 1강). 사부님께서는 이미 완성된 법을 우리 문 앞에 갖다 놓으셨으며, 우리가 얼마나 “마음”을 쓰는가, 누락 없이 자아를 버리고 무사무아(無私無我) 할 수 있는가 하는 것만을 보신다.

지난 11년 동안 사부님께서 내게 주신 두터운 은혜에 대해 나는 부끄럽기 그지없다. 나는 그동안 애매모호하게 두 걸음 나아갔다 한 걸음 후퇴하는 식으로 했는데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우주 정법의 노정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정법이 없다면 우리 역시 그렇게 높이 돌아갈 수 없다. 내려오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올라가는 것은 더욱 어렵다. 모두 자신을 위해 수련하고 있는데 “흥정하는 것”은 수련이 아니며 정말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 글은 여러분들에게 써주는 것이자 나 자신에게도 쓰는 것이다. 우리 공동 정진하여 함께 집으로 돌아갑시다!

이상은 현재 느낀 작은 체험에 불과하니 부족한 곳은 자비로 지적해주기 바란다.

발표시간:2006년 12월 5일
정견문장 :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6/12/5/4124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