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육문
【정견망】
《/span>요재지이(聊齋志異)>의 작가 포송령은 중국에서 아주 유명하다. 하지만 포송령의 전생과 내세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오늘 독자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청나라 때의 문장가 포송령(蒲松齡)은 자가 유선(留仙), 호는 유천(柳泉)으로세칭 “지이선생”이라 했다. 산동성 치현 사람으로 명나라 숭정 13년(서기 1640년)에 태어났다. 청나라 강희 18년(1679년) 40세 때 민간 전설을 수집하고 기이한 소문들을 모아서 책으로 펴냈다. 이름을 《/span>요재지이라고 했다. 그 서문에서 그는 자신에 관한 기이한 일을 서술하였다.
포송령이 출생할 때 그 부친은 꿈에 병들고 비쩍 마른 인도 승려를 만났다. 승려는 오른쪽 어깨가 드러난 옷을 입고 집으로 들어왔다. 동전 크기의 고약이 젖꼭지 옆에 붙어 있었다. 부친이 놀라워하는 그때 마침 포송령이 태어났다. 젖꼭지 옆에 과연 검은 점이 있었다. 꿈속에 스님이 고약을 붙인 곳과 완전히 일치했다. 부친은 이에 아들이 전생에 고행하던 스님이라 여겨 자를 ‘유선(留仙)’이라 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도 포송령의 부친이 꿈에 본대로 스님이 전세한 것이라고 여겼다. 포송령 자신도 감탄했다. “과연 내가 스님이 전생한 사람인가?”
요즘 일부 사람이 포송령을 연구할 때 무신론의 관점에서 생각한다. 즉 이것은 포송령이 과거에 떨어져 마르고 병든 승려는 벼슬길이 어려움을 상징하며 불우한 일생에 대한 일종의 울분이라고 본다. 자세히 분석해보자. 옛사람은 효도를 말하는데 포송령이 이 글을 썼을 때 겨우 40세였으므로 장년의 나이였다. 하지만 역사 기록에 따르면 포송령은 63세에도 과거에 참가했다고 한다. 어떻게 20년 전에 스스로 자기의 벼슬길이 어렵다고 선포할 수 있는가? 물론 포송령은 재주를 펴지 못한 불운한 인물이다. 그의 문장에는 확실히 감개 비분 탄식 불만 등이 발산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본문의 토론의 범주가 아니다. 나는 단지 포송령이 출생할 때 기이한 꿈이 절대 지어낸 것이 아니며 무신론의 관점에서 옛사람을 보는 것은 역사의 진상을 벗어난 것이라는 점이다.
포송령이 전생에 병든 스님이었다는 것보다 더 유명한 것은 포송령이 문인 서곤(徐昆)으로 환생했다는 기록이다. 서곤은 《/span>유애외편柳崖外編우화대전기雨花台傳奇유애시초柳崖詩鈔등의 책을 지었다. 《/span>유애외편에는 왕우량, 이금지 두 사람이 지은 두 편의 서문이 있다. 그들 모두 작자 서곤을 “포유선(송령)의 후신”이라고 적고 있다. 이 두 편의 서문에 신기한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다.
포송령이 세상을 떠난 후 어느 해 포송령의 집에서 백리 떨어진 제남성 밖 김가장(金家莊)에서 산서성 임분(臨汾) 출신의 상인 서경헌의 집에 아이가 하나 태어났다. 이 아이가 돌이 되었을 때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돌이 되는 날 비가 내렸고 서가에서는 자리를 크게 깔았다. 대문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하던 서경헌이 갑자기 어느 젊은 서생이 비를 맞으며 길을 걸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측은한 마음에 이 서생에게 집안으로 들어와 비를 피하라고 권했다. 서생은 마당에 돗자리가 깔린 것을 보고 무슨 까닭이냐고 물었다. 서경헌이 “아들의 돌날입니다.”라고 하며 아이를 안고 나와 보여주었다. 본래 앵앵 울며 그치지 않던 어린아이가 서생을 보자 그만 입을 벌리고 미소를 지었다. 서생이 얼른 물었다 “이 마을 이름이 무엇입니까?” “김가장(金家莊)입니다” 서생은 그 말에 울다 웃다했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당신의 아들이 바로 나의 스승님이 전세한 것입니다!” 서경헌이 놀라 그 이유를 물었다.
서생은 “제 스승은 포유산(송령)이며 재작년 오늘 돌아가셨습니다. 임종 전에 남기신 말씀이 ‘속세에 다시 오는 곳은 김향이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아무리 찾아도 그곳을 찾을 수 없었는데 뜻밖에도 오늘 여기서 만났군요.” 서경헌은 이 때 재작년 그 때의 신기한 꿈이 생각나며 문득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서경헌은 여러 해 장사를 해 가업을 일으켰으나 슬하에 아들이 없었다. 재작년 그가 소아미산에 가서 아들을 달라고 기도했고 꿈을 하나 꾸었는데 꿈속에서 어느 지방에 갔다. 어느 경계인지 모르겠는데 그저 버들이 우거지고 맑은 샘이 있었다. 어느 늙은 유생이 버들부채(蒲扇)를 들고 그곳에 오며 미소를 지었는데 말이 없었다. 서경헌은 홀연 어떤 음성을 들었다 “이것이 네 아들이다” 깨어난 후 아무리 생각해도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얼마 후 부인 노씨가 아들을 가졌다. 서경헌은 꿈에서 본 노유생의 생김새를 상세히 말하자 서생이 말했다 “당신이 본 것은 확실히 제 스승인 포송령 선생입니다.”
두 사람은 또 깨달았다. 꿈속의 버들이 우거지고 맑은 샘은 바로 그의 호인 유천(柳泉)이고 손에 버들부채를 쥔 것은 그의 성이 포(蒲) 임을 의미한다는 것을. 서경헌은 매우 기뻐 아들에게 곤(昆)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자는 ‘후산(後山)’,호를 ‘유애(柳崖)’라고 지었다. [포송령의 호는 柳泉인데 泉은 물이다. 따라서 ‘昆(곤륜산)’, ‘後山(뒷산)’, ‘柳崖(절벽)’ 모두 산이 있다는 뜻이며 산수가 서로 상대하니 전세와 금생이 서로 어울린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일을 전하여 기이한 일로 전해졌으며 아직 강보에 싸인 서곤은 곧 기인이 되었다.
정말 신기한 것은 서곤이란 이 아이가 보통이 아니었다. 세 살에 글자를 알아보고 한두번만 보면 곧 외웠다. 15세 무렵 이미 소년 천재였으며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그를 방문했다. 당시 문단의 태두였던 전대흔, 주균 등도 그에 대해 매우 높이 평가했다. 전대흔은 그의 책을 칭찬하기를 “후산이 말한 것을 읽으면 사람들은 저절로 얻는 것이 있다.”라고 했다. 주균은 그를 “산 오른쪽의 유명인, 포유선의 후신이다”라고 했다.
포송령이 전세하여 서곤이 되었다는 설은 민간에 갈수록 널리 알려졌다. 서곤 본인도 윤회를 깊이 믿었다. 포송령의 《/span>요재지이는 당시 베스트셀러였다. 그래서 그 아류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애석하게도 아류 중에는 별로 볼만한 게 없을 뿐 아니라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서곤은 포송령의 후신으로서 스스로 진정한 유재지이의 속편을 쓸 책임이 있다고 느꼈다. “전생의 일을 기억해 대작을 짓는다.”고 하여 신기하고 초상적인 일을 수집해 소재로 삼아 많은 노력 끝에 마침내 《/span>유애외편柳崖外編을 엮었다.
《/span>유애외편은 전체 16권 292편으로 건륭 46년(1781년)에 8권까지 완성했고 12년 후 나머지 8권을 또 완성했다.
《/span>유애외편과 《/span>요재지이를 비교하면 품격이 완전히 같진 않다. 하지만 문장이 유창하고 호방하며 인물 묘사가 마찬가지로 상세하다. 때문에 세상에 나오자마자 《/span>요재가 다시 세상에 나왔다는 찬사를 받았다. 당시 유명한 학자 전대흔은 그를 위해 시를 지어주며 칭찬했다.
그밖에 서곤의 혼인 역시 신기했다. 서곤은 소년시절 부모의 명을 따라 산서 고향에서 유씨의 여섯째 딸을 아내로 맞았다. 얼마 안 되어 병사했는데 임종 전 시어머니에게 말했다. “제 유골을 잘 묻어주세요, 저는 내세에 다시 이 집에 올 것입니다.” 서곤의 부모는 그 말에 유씨를 연꽃이 핀 곳에 묻어주었다. 나중에 서곤은 고씨를 후처로 맞았다.
건륭 26년(1761년) 서곤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임분에 돌아가 전원생활을 했다. 그는 글 쓰는데 온 정력을 투입했고 책을 새겨 인쇄하는데 몰두했다. 《/span>유애외편의 대부분은 바로 여기서 완성한 것이다. 그가 쓴 희곡 《/span>우화대전기(雨花台傳奇)>는 당시 가장 유행하는 극본이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어느 날 이웃 현인 양릉(지금의산서성 양분현)에서 마침 서곤이 연출한 《/span>우화대전기를 공연하고 있었다. 유육랑의 모친이 구경을 하다가 우연히 연기하는 여인의 모습이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딸과 너무 흡사한 것을 보았다. 발걸음을 멈추고 내막을 알아보았다. 그녀 역시 빈번히 노부인을 주시했다. 연극이 끝난 후 노부인은 그녀를 따라 집에 갔다. 그녀의 손을 잡고는 울며 말했다. “너는 내 딸이 아닌데 어찌 그리도 모습이 딸과 같으냐?” 여자아이는 그 말에 눈물을 뚝뚝 흘렸다. 여자의 이름은 이요(李窈)이며 나이는 이제 14세였다. 바로 육랑이 전세한 것이었다. 그녀는 전생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늘 혼자 탄식했다. “여섯째야, 여섯째야, 금생에는 어떻게 살까?”
오늘 전생의 모친을 만났으니 어찌 격동하지 않겠는가. 유부인이 말했다. “너 이 《/span>우화대전기를 쓴 게 누군지 알지, 바로 전생에 네 남편이란다. 지금은 비록 다른 사람을 처로 맞았지만 고씨가 매우 현숙하다. 나는 네가 전생의 소원을 이뤄 서씨 가문에 돌아가 고씨와 언니 동생처럼 지냈으면 한다.” 하지만 이요의 당시 모친은 그걸 원치 않았다. 그러나 유부인은 천방백계로 사람들에게 부탁했다. 결국 이듬 해 15세의 이요는 서곤의 아내가 되었다. 이때 서곤은 이미 40대였다.
‘유순하고 재주가 많았던’ 이요는 서곤 모친의 사랑을 깊이 느꼈고 고씨와도 사이가 매우 좋았다. 어느 청명절 성묘를 가는데 길에서 유육랑의 묘를 지나게 되었다. 이요는 눈물을 흘리며 고씨에게 말했다. “이것이 제 전생입니다. 꽃이 지니(落花-땅콩이라는 뜻도 있음) 흙으로 돌아간 것이지요.” 말을 하고는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고씨는 그녀에게 왜 그리 슬퍼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기억에 제가 저승에서 이승으로 전세해 나올 때 소매에 대나무 표가 20여 매가 있었는데 그중 9매는 합환죽(合歡竹 결혼을 의미)이었습니다. 저와 서랑(서곤)의 혼인은 아마 9년밖에 안될 것 같습니다.”
고씨는 그저 이런 말로 위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건 믿을 게 못되네.” 건륭 35년 (1770년) 서곤은 향시 25명에 붙었다. 얼마 안되어 그는 식구들을 데리고 경성으로 갔다.
2년 후 이요는 경성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24세였다. 서곤과는 딱 9년만 부부가 된 것이다. 서곤은 비통해마지 않았으며 그녀를 북경 교외 도연정 호반에 장사지냈다. 서곤의 친구들은 묘비를 만들고 그림을 그렸는데 이요의 초상화를 그리고 주위에 오얏나무, 버드나무, 합환(合歡 자귀나무), 낙화(落花-땅콩)로 둘렀다. 게다가 묘비 제목을 “꽃은 떨어져도 향기가 남는다”라고 했다. 두 생에 걸쳐 자신에게 사랑을 바친 여자를 기념하기 위해 서곤은 극본 《/span>합환죽전기편을 썼다.
역사의 이런 기록을 보면 포송령, 서곤 이런 유명인사의 윤회 경험은 확실히 사람에게 윤회가 있음을 설명한다. 원신은 죽지 않는다. 서곤의 부인 이요는 전생의 기억이 있었으며 다시 이 세상에 올 때 소매에 대나무 명패 20여 매가 있었다. 그중 9매는 합환죽(결혼을 의미)이었으며 결과 정말 24세까지 살았고 서곤과는 단지 9년간 혼인 생활을 했다. 그러니 수명이나 혼인은 모두 정황에 따라 안배하는 것으로 암암리에 다 정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일체는 누가 안배하는가? 바로 사람보다 더 고급적인 생명, 다시 말해 신이 안배한 것이다. 이로 볼 때 무신론은 큰 착오이다. 충심으로 모든 사람이 바쁜 중에도 시간을 내어 생명의 근본 문제를 한번 생각해보기 바라며 물욕 중에서 길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일단 대전제가 잘못되면 중간에 추론하는 과정은 아무리 정밀하고 복잡하더라도 도출되는 결과가 틀린다. 무신론이 틀렸다면 이를 전제로 한 공산당 학설도 잘못인 것이다. 또 여기에 기초한 사회적 실천 역시 실패하게끔 정해져 있다. 또한 반드시 죄악으로 인해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되어 있는데 가장 뚜렷한 표현은 역대에 사람을 해친 운동과 오늘 중공 치하의 관원들에게 부패가 횡행하게 되고 사회에 신앙이 없어 믿음을 상실하며 도덕이 붕괴된 것이다.
공산당의 수명이 끝에 도달했을 때 신은 반드시 청산하고 장부를 결산할 것이다. 역사상 이요가 전생에 유육랑으로서 내세에 서가에 오겠다고 맹세했다. 그 결과 정말 서가로 다시 왔고 전세의 혼인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로 볼 때 사람의 맹세는 작용을 일으킬 수 있어서 신이 듣고 있으며 마침내 실현된다.
현재 중국공산당, 단, 대에 가입한 사람들은 그것을 위해 일체를 희생하겠다는 독한 맹세를 한 적이 있다. 그것이 정말 실현된다면 중공과 함께 멸망해 순장되지 않겠는가. 바로 그렇다! 이런 비극을 피하려면 공산당, 단, 대의 탈퇴성명을 해야만 독한 맹세를 타파할 수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38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