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석방행(石方行)
【정견망】
이 시리즈는 지역의 각도에서 다양한 신의 자손들이 이번 차례 중화 문명에서 초기부터 현재까지 부동한 시기에 법을 찾은 실제 기록을 쓴 것으로 윤회기실 시리즈의 일종이다.
세계적으로 각각의 큰 민족에는 모두 신이 자신의 모습을 따라 사람을 만들었다는 기록과 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회가 갈수록 물질화된 오늘날, 특히 소위 현대과학의 충격을 받아서, 사람들은 신이 자신을 만들었다는 이 사실을 정말로 잘 믿지 않는다.
허나 신은 오히려 사람을 포기하지 않았다. 매우 오랜 시간 이래 신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신이 존재한다고 알려왔다. 소위 과학이란 매우 얕은 것으로 제한성이 매우 크다. 신은 각종 방식으로 신의 흔적을 드러냈다.(가장 흔히 보는 것으로 한바탕 홍수가 지나간 후 어수선한 토지 위에 불교 사찰이나 불상은 오히려 하나도 다치지 않은 것이다). 또는 사람들이 고고학적 방식으로 고대에 일찍이 발생했던 일을 인식하게 한다.(사전문명의 유적을 발견하거나 이번 차례 문명의 고대에 나타난 각종 불가사의한 일과 수수께끼들). 또는 자연계와 생물계 등 부동한 분야에서 사람들이 현대 과학으로 해석할 수 없는 수수께끼가 연달아 나타나는 것 등이다.
이런 수수께끼에 대해 완전히 물질화된 소위 현대 과학의 한계에 대해 머리가 있는 많은 사람들이 반성하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대체 신이 있는가 없는가? 사람은 신이 만든 것이 아닌가? 끊임없는 과학 발전과 동서양 문화의 교류가 깊어짐에 따라 갈수록 많은 서양인들이 동방의 전통문화에 있는 그런 불가사의한 것들이 마치 생명과 물질세계의 여러 수수께끼를 풀어줄 열쇠라고 느낀다. 그래서 갈수록 많은 서양인들이 동양의 전통문화에 관심을 기울여 연구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19세기와 20세기 전반에 외국의 무력에 의한 충격과 문화의 쇠락을 겪은 후 1960~70년대부터 무협 소설과 기공, 전통 문예(評書 대사와 노래 등으로 역사나 소설을 이야기 하는 전통문예형식), 희곡이 홍콩과 대만 및 대륙에서 흥행해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오랫동안 먼지로 덮여 있었던 그 기억들을 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에는 인생의 의의는 대체 어디 있는지 아직 명확한 답안이 없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파룬따파(法輪大法)가 중국 동북 장춘에서 전해져 나오자 사람들은 비로소 원래 사람은 정말 신이 만든 것이며 생명의 의의는 천상의 아름다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알았다.
사람이 인간 세상에 왔을 때 이미 일찍이 법을 얻어 돌아갈 종자를 심어놓았다. 때문에 기회와 인연이 일단 닿기만 하면 사람들은 단번에 마치 꿈에서 깬 것과 같다. 그래서 불과 몇 년의 시간에 1억이 넘는 사람들이 대법 수련에 참가하도록 흡인했다. 설사 나중에 중공 사당의 무리한 탄압을 받았음에도 각성하여 회귀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현재 전 세계에 더 많은 사람들이 진상을 알고 이때부터 파룬따파 수련의 행렬로 들어오고 있다.
법을 얻은 후의 사람들은 생명의 진정한 목적을 알기 때문에 명리를 담담하게 보고 다시는 일시적인 득실을 쟁탈하기 위해 고뇌하지 않으며 더 성실하고 선량하며 너그럽게 타인을 대한다. 그들은 고난 앞에서 더 낙관적이고 남에게 더 겸손하며 예의 바르고 어떤 일에 종사할지라도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
인간 세상에서 우리는 객관적으로 ‘사람’ 이 한 층차 중의 생명을 말하자면 수가 너무 많고 민족도 많아서 한 신이 만들기는 불가능하며 또 모두 동일한 경지에서 내원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내려온 층차와 경지가 얼마나 많고 서로 다르든지 상관없이 만약 우리가 온 그 경지에서 본다면 인간세상은 정말 “천애(天涯 하늘 끝)”에 있으며 천상의 고향에서 아주 멀고도 멀리 떨어져 있다.
동서고금의 얼마나 많은 지자, 선현들이 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으려 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유감스럽게도 다음 차례의 윤회로 들어갔다. 반대로 말하면 아마 바로 당초에 찾으려고 뼈를 깎는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간다는” 이 기억이 시종 가슴 깊이 새겨지게 된 것인지 모른다. 물론 이 속에는 또 창세주의 의도적인 안배와 조화가 있다.
하늘 끝이 먼지 아닌지는 그건 우리가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오로지 돌아가는 길을 찾기만 하면 “하늘 끝”은 지척에 있어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만약 우리가 이때 완전히 물질화 된 것이나 중공 사당이 주입한 거짓말에 본성이 매몰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기회를 잃어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것이자 가장 유감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바로 “지척(咫尺)”이 “천애(天涯)”로 변해버리면 아득해져서 희망을 볼 수 없게 된다.
또 특별히 설명해야할 것은 집으로 돌아가는 기회와 인연은 극히 제한적이며 수시로 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물질 환경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본 계열의 시작에 나는 “지척천애-매우 가까이 있으면서도 하늘 끝에 있는 것처럼 만나기 어렵다는 뜻” 이런 제목을 삼았다.
(2)
사람들의 닫힌 기억을 더욱 잘 일깨우기 위해 본 시리즈는 중화 신전문화권의 범위부터 시작한다.
세계적으로 큰 민족들은 모두 대홍수의 전설이 전해져온다. 한결같은 내용은 인류가 원래 잘 살고 있었지만 나중에 도덕이 패괴하자 신이 대홍수를 일으켜 소멸시켜 버렸고 오직 소수의 사람과 동물이 남았다. 나중에 이 사람들이 또 다시 번영하기 시작했고 길고 긴 세월 중에 또 휘황한 문명을 창조했다.
아주 오랜 기간 사람들은 ‘대홍수’를 고대인들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의 전설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근래 고고학의 발견은 사전시기 대홍수의 존재를 인정한다.
위키백과에서 ‘대홍수’를 검색해보면 1922년 영국의 고고학자 레나드 울리(Sir Charles Leonard Woolley) 경이 바그다드와 페르시아 만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사막 지대에서 고고학 발굴을 진행해 수메르 고대 우루성 유적 왕족 무덤 아래에서 2 미터의 두터운 점토의 침적층을 발견했다. 점토를 분석 연구한 결과 이 깨끗한 점토층은 홍수로 침적된 흙이었다. 이때부터 울리는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전설과 성경에 기록된 대홍수가 실제로 발생했던 역사적 사건임을 설명하는 발견이라고 보았다.
파룬따파 창시인 리훙쯔(李洪志) 대사는 한 차례 해외 설법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련계의 사람은 모두 알고 있는바, 인류사회에는 단지 한 차례 문명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문명이 나타났다. 아득한 역사의 대하 속에서 인류의 도덕이 점차 쇠락으로 나아갈 때, 인류 또한 몰락으로 나아가게 된다. 흔히 모두 이러하다. 따라서 최후로 나아가면 물질의 변이와 정신의 퇴폐가 절정에 도달하며, 인류의 도덕관념이 크게 미끄럼질 치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인류는 몰락을 향해 나아가는 데, 인류에게는 여러 차례 이런 정황이 나타났다. 그러므로 인류 문명은 단지 한 차례가 아니며 여러 차례 문명이 나타났다. 사람이 말하는 이 석기(石器)시대도 단지 한 차례가 아니다. 인류에게 석기시대가 여러 차례 출현했다. 왜냐하면 인류에게 이런 문제가 나타날 때 인류의 일체 노동도구와 모든 지식도 다 훼멸되기 때문이다.”
“과거 상고(上古)시기 중국 종족의 중심지역은 현재의 황하유역이 아니라 신장(新疆) 이 일대였다. 이 민족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 역시 이 일대에서였다. 왜냐하면 쿤룬산(崑崙山)이 이 일대 가까이에 있어 주위의 지표면이 비교적 높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그 한 차례 홍수는 수위(水高)가 2천 미터에 달했으며 지구 전반이 수몰되게 했다. 많은 사람이 홍수가 넘쳐날 때 쿤룬산으로 대피하여 살아남았고 상고시기의 일부 문화를 남겼다.”
(《/span>각지설법싱가포르 불학회 성립 법회에서 인용)
우리가 지도를 펼쳐보면 청장고원 북쪽이 신강(新疆)이며 청해 이쪽은 곤륜산맥이 있는 곳이다. 또한 곤륜산은 파미르 고원과 천산산맥 등으로 이어져 있다. 천산산맥의 서부는 이미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국경안으로 들어간다.
현재 고고학에서는 4만 년 전 청장 고원에 문명이 존재했음을 발견했다. 비록 현대인들이 말하는 구석기 시대에 속하지만 필경 문명은 이미 시작되었다. “2018년 11월 30일 《/span>사이언스 Science> 잡지에 발표된 한 연구는 우리에게 티베트 역사의 수수께끼를 파헤칠 단서를 하나 제공한다. 논문에서는 중국 과학원의 연구팀이 티베트 니아목저(尼阿木底 NwyaDevu) 구석기 시대 유적지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을 진행했다. 이 연구팀은 4만 년 전 청장 고원에 이미 인류가 출현했음을 발견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니아목저 유적지는 티베트 북쪽 신찰현(申紮縣) 니아목저 산 서북 산기슭으로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소금호수 색림착(色林錯)과 티베트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 착악호(錯鄂湖)에 인접해있다. 이 유적지는 고도가 해발 4,600미터로 사방은 광활한 들판과 언덕이다.
청장고원에는 또 백공산(白公山)이라는 지역이 있다. 백공산은 청해성 해서 몽고 장족 자치주 수도인 득령하(得令哈) 시 서남쪽으로 40여 킬로미터 떨어진 회두타랍향(懷頭他拉鄉)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 있는 유래가 불분명한 합금 철관이 과학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사전 시기의 문명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외계 문명의 산물이라고 한다. (자세한 것은 《고금의 신비현상 전체 기록(古今神秘現象全記錄)(고고편)》을 보라) 더 재미있는 것은 이 책에 감숙과 신강 경계에 있는 마총산(馬鬃山) 지구에 한덩이 기암괴석이 있는데 이 기암에 포함된 길이 6센티미터의 원추형 금속봉이 있다. 금속봉에는 분명하게 가공한 나선무늬 흔적이 있다. 이 기이한 돌의 내력에 대해 역시 사전 문명의 산물이라는 설과 외계 운석이라는 등등의 설이 있다.
인터넷 뉴스에 따르면 신강 온천현(溫泉縣)의 카자흐스탄 부근에서 호사탑(呼斯塔) 유적을 발견했다고 한다. “2013년부터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에서 ‘온천현 보어타라(博爾塔拉 신강 서북부에 위치한 위구르 내에 몽고 자치주) 하류 청동기 시대 고고학 조사’를 했다. 그 결과 온천현 동북부에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아라타산 자락의 후시타 초원에서 광대한 규모의 초기 청동기 시대 유적지를 발견했는데 이를 후시타 유적지라 한다. 그 면적은 12평방킬로미터이며 이는 현재 온천현성 면적보다 3배가량 크다. 온천현 경내에서 발견한 최대 규모의 청동기 시대 유적으로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3,600여 년 전이다.”
이 유적이 흥미로운 것은 지도에서 보면 아라타 산을 넘어가면 바로 카자흐스탄 땅이다. 인근에 유명한 사이람(Sayram) 호가 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이곳을 서왕모가 살던 곳이라 한다. 사실 이 지구에는 상고시기 유적이 매우 많다. 이곳은 그저 몇 가지 예를 든 것뿐이다.
민국시기 중국 역사학의 거장 여사면(呂思勉 뤼스몐) 선생은 《/span>중국통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곤륜산은 한족의 근거지라고 할 수 있다. … 오늘날 전하(闐河) 상류 일대. 분명 한족의 고대 근거지였다.” “아무다리 유역은 거의 평지이며 고대 한족의 주거지였다. 즉 한족은 고대에 지금의 파미르 고원 일대에 거주했던 것 같다. 이 지방은 인류학적 조사에 따르면 원래 여러 큰 인종이 기원한 곳이다. 한족이 중원에 들어올 때 거쳐간 길은 대략 오늘날 신강에서 감숙까지의 길이다.” (중국 화교 출판사 2011년판 p2~3) 이처럼 역사학자들의 설명과 고고학 발견은 모두 파룬궁 창시인이 하신 말씀이 진실임을 증명한다.
나는 지도를 보고 또 역사 지식을 결합해서 전에 우리가 쉽게 홀시했던 중요한 요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큰 산이 하류(河流 강물 흐름)를 생육하는 진정한 의의이다.
많은 학자들은 다 큰 강과 비옥한 토지가 문명을 육성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다양한 고고학 실천을 통해 얻은 결론이다. (청장고원 남쪽 기슭에서 발원한 큰 강이 고대 인도문명을 육성했고 중국에서는 황하와 장강이 대표하는 중화문명을 키웠다. 만일 운귀고원을 친다면 중남-인도차이나 반도 문명의 발전에도 막대한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기타 국내와 경계 산맥이 그곳 문명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이 있었다) 사실 사람들은 흔히 큰 산의 작용을 소홀히 한다.
큰 산이 없다면 하류는 내원을 잃는다. 사람들은 늘 문명을 만든 강을 가리켜 “어머니 강”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큰 산은 아버지와 같아서 웅대하고 우뚝 서 있으며 묵묵히 그곳에 서 있다. 억만년의 풍우를 거쳐도 여전히 창생을 수용하고 하류의 원천을 준다. 그래서 나는 중화 문화권 주위의 산천은 화하(華夏)문명의 비밀 혹은 창세주의 자비로운 호소가 고산융수(高山融水 눈 녹은 물)를 전달매체로 사방으로 흘러 이역으로 널리 퍼져갔다고 말한다. 이때 높은 산천과 고원은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의지처가 되었다. 실천이 증명하다시피 천백년래 사람들은 내심으로 확실히 이러했다. 사람들의 산과 물에 대한 고금의 전설은 이 점을 설명한다.
수많은 전설에서 산봉우리는 원래 신선이 변화한 것으로 요마(妖魔)와 싸워 이기고 인간세상에 안녕을 가져다주기 위한 것이라 한다. 하지만 지리 환경에서 우리가 늘 발견하는 것은 모 산봉우리를 특정한 각도에서 보면 신이나 혹은 와불(臥佛)과 같다. (예를 들면 하남의 만선산이나 사천의 낙산)
동서고금에 세계 각지의 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기 위해 심산으로 들어가 수행한 적이 있다. 그들은 어느 산의 특정 부위가 수행하기 가장 좋은 장소임을 발견했다. 그래서 수행인은 우리 범위 내에서 늘 어느 산이나 동굴이 수행에 적합하다는 전설이 있다. 사실 수행인이 말하는 것은 표면 현상이며 실질적으로 그 산의 동굴은 수행자를 돕고 자신의 소우주와 외계 대우주와 소통하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 (혹은 물질에너지장이라고 한다) 이것은 신이 지구를 만들 때 일찍이 계통적으로 안배해놓은 것이다. 동시에 다양한 종류의 수많은 신들도 산속에 은거해 인연 있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거나 혹은 묵묵히 이 한 곳의 물과 땅을 지키고 있다. 물론 이런 것들은 모두 극히 간단히 서술한 것이며 실제 정황은 이보다 천만배나 복잡하다.
또 네팔 남부에서 출생한 석가모니는 히말라야 산 남쪽 기슭의 네팔 동굴 속에서 득도하고 개오하여 중생을 널리 제도했다. 인도의 인더스 강은 직접 고대 인도문명을 생육했다. 청장 고원에서 나서 자란 웬시(聞喜 즉 나중에 티베트 백교 시조가 되는 밀레르빠 부처)는 히말라야 산 부근에서 무수한 고난을 겪어 일세에 수련 성취했다. 중국인이 모여 사는 곳에 널리 믿는 관세음보살은 서역 흥림국(興林國)에서 수련 성취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은 모두 현재 동아시아 내지 세계적으로 상당히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다.
현재 우리가 늘 말하는 ‘대중화문화권(大中華文化圈)’ 혹은 ‘유가(儒家) 문화권’을 알기 쉽게 말하자면 바로 역사상 중화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을 말한다. 이는 중국 본토를 훨씬 초월하는 개념이다. 현재 중국 본토와 인접국가들을 포함해야 한다. 그들은 지난 몇천 년 간 모두 중화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심지어 일부 국가에서는 일찍이 직접적으로 한자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하나 범위 내에서 중화문화는 수천 년 발전과정 중, 창세주의 보호 하에서, 신의 자손의 전승하에서, 무수한 비바람을 지나오면서 또 휘황한 문명을 건립했다.
문화적으로 보면 헌원황제가 염제와 치우를 싸워 이긴 후 부락의 통일과 융합을 실현하였다. 이들 부락과 사람들이 이후 수천년 간 어디로 이주하고 어떤 민족을 형성했던지 그들은 대부분 염황(炎黃 신농과 황제)의 후예, 용의 후예임을 인정한다. 주나라의 무왕이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紂)를 정벌한 후 상나라의 후예들은 이주민들을 데리고 한반도로 들어갔다. 또 어떤 설에 따르면 상나라 군대의 일부가 아메리카 대륙까지 들어갔다고도 한다. 진시황 시대에 서복은 5백명의 동남동녀와 장인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들어갔다. 동남아의 많은 국가들도 한때 중원 제국의 번속(藩屬)이었다.
한나라의 소무(蘇武)는 흉노에 의해 북해(지금의 바이칼호)에 억류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랜 기간 양을 키웠어도 한나라 사람의 기질과 본색은 바꾸지 않았다. 한 무제 때 장건(張騫)은 서역에 사신으로 가서 한나라 문화를 서역으로 확대하는 영향을 끼쳤다. 또 나중에 당나라 때 현장법사가 서천으로 경을 얻으러 간 일과 감진(鑒真) 화상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불법(佛法)의 전파에 공헌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나라 시인 이백의 고향은 중아시아의 쑤이예(碎葉)라는 곳이다. 당 현종 때 발해에서 국서(國書)를 보냈는데 신하들 중에서 이를 제대로 해석하는 사람이 없자 이백을 불러 들였다. 궁궐에 들어가 과거에서 자신을 떨어뜨린 간신 고력사에게 신발을 벗기게 하고 양귀비에게 먹을 갈게 시켰다. 송원(宋元) 시기 이후 동남아로 간 것은 강남 사람들이 해외로 나가 생을 도모하는 방식이 되었다. 이것은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군도 인도네시아의 개발을 대대적으로 강화한 것이다.
이런 것들을 써서 필자가 말하려는 것은 신이 여기에서 이런 산천지리와 사회문화를 만든 근본 목적이 바로 장래 사람들이 구도 받을 수 있는 대법을 얻어 돌아갈 지리와 인문환경을 갖게 하려는 것이다.
물론 이들 지역 중 많은 부분은 나중에 이민족의 통치를 받았고 일부는 다른 종교 문화에 동화되었다. 하지만 그 지방의 수토(水土 물과 땅)가 전달하는 법과 진리를 찾으려는 정신은 닳아 없어지지 않았다. 신의 눈에는 그들의 자손들이 한때 그 지방의 수토에서 생활했으며 천상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진정으로 찾아보았다는 것이다. 동시에 신전문화를 널리 알리기 위해 응분의 노력을 한 적이 있는데 이것이면 족하다.
물론 중화문화권 범위 내의 부동한 지역에도 모두 본지에서 내원한 문화와 종족들이 있다. 예컨대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아청시阿城(흑룡강) 경계의 구석기 시대 초기 동굴 유적은 지금으로부터 17.5만 년 전이다.” “지금으로부터 6천 내지 5천 년 전은 중원의 ‘전설시대’에 해당하는데 흑룡강 지구의 고대 선조들의 족적은 거의 각지에 분포되어 우리에게 수많은 문화 유적을 남겨놓았다.” (《/span>흑룡강사화에서 인용) 생각해보면 전국에 많은 성(省)이 있으니 이런 예는 매우 많을 것이다.
이런 것 역시 부동한 신이 신전문화를 풍부하게 하고 그들의 조화와 능력을 나타내려고 개창하고 육성한 것이다. 다만 이런 지역 문화들은 나중에 모두 염황을 대표로 하는 화하 문화의 영향을 받거나 심지어 동화되었다. 혹은 화하문화 역시 각지의 본토문화를 흡수하여 종합적인 성격이 아주 강한 일종의 포용문화가 되었다.
이상의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는 늘 청장고원은 세계의 지붕이며 최고(最高)의 고원,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라고들 한다. 다시 말해 중화문화권의 판도에서 출현한 이 고원은 신이 인간들에게 일깨워주는 곳이다. 즉 이쪽 산맥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물이 생육한 문명이야 말로 신이 인간에게 만들어 준 것으로 최종적으로 사람을 회귀하도록 이끄는 문화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곳이야말로 신의 자손의 진정한 집과의 거리가 가장 가깝다! 신이 세인들에게 회귀하도록 전하는 대법이 바로 중토에 있다!
지질학의 각도에서 권위자가 쓴 글을 인용하여 문제를 더 잘 설명할 수 있다. 이 글은 《/span>중국인은 어디서 왔는가(中國人從哪裏來)> 하는 것인데 《/span>중국과학원 청장고원 연구소와 성구 연구소가 연합제작(中國科學院青藏高原研究所與星球研究所聯合制作)>한 것이다. 문장 중에서 저자는 말한다. “6500만 년 전 인도판과 유라시아판이 충돌했는데 빠른 충격속도와 강력한 에너지는 ‘신속하고 맹렬’했다고 표현할 수 있다.” 이어서 저자들은 당시 충격으로 청장고원을 형성했을 뿐 아니라 직접 중국대륙의 세 계단형 지형 특징과 강남이 안개가 무성하고 내륙이 건조하며 비가 적은 기후와 오늘의 수계(水系)를 형성했다. (흥미 있는 독자들은 인터넷으로 이 글을 찾아보면 더 상세히 알 수 있다) 이 일련의 극히 교묘한 ‘자연의 힘’을 보면 우리는 이 일체는 단지 ‘우연’일 뿐이라고는 정말 믿기 어렵다.
유라시아판과 인도판이 부딪혀 비로소 청장고원 지구가 큰 바다에서 밀려 고원이 되었다. 그럼 무엇 때문에 단지 이곳만 밀려서 세계에 가장 높은 고원이 되었는가? 또 고원의 남부와 북부에서 세상을 구원할 대각자가 출현했는가? 천하에 어디 우연한 일이 있는가? 수련인의 눈에 이 일체에는 모두 창세주의 육성과 안배가 있다. 단지 인간의 표현을 통해 나왔을 뿐이다. 모두 신의 역량 덕분이다.
필자는 ‘대중화문화권’의 역사작용과 진귀한 의의에 느낀 바가 있다. 동시에 이 기회를 빌려 신의 자손들이 이곳에서 지낸 수천 년의 역사 중에서 법을 찾고 법을 구한 간난신고의 과정과 또 오늘날 비로소 법을 얻고 진상을 알았는지 써보려 한다.
이것은 윤회의 각도에서 각 지역에 일찍이 나타났던 법을 구하고 법을 찾는 경험을 쓰는 것이자 아울러 부대적으로 각 지역의 일부 문화풍속을 써 본다. 왜냐하면 이런 문화와 풍속 자체도 모두 신이 의도적으로 오늘날 사람들이 법을 찾고 법을 인식할 수 있도록 안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서문을 대신한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50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