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객(長袖客)
【정견망】

한여름의 꽃나무(花木) 중에서도 배롱나무꽃(紫薇)은 특별한 여유가 있다.
봄꽃들은 이미 다 지고 한여름의 햇살이 뜨거울 무렵, 배롱나무꽃은 송이송이 불타오르는 불꽃처럼 횃불을 밝히듯 뙤약볕 아래서 찬란하게 피어난다. 얇고 살짝 말린 꽃잎은 가장자리가 잔물결처럼 일렁이고, 꽃송이들이 가지마다 뭉쳐 멀리서 보면 마치 구름 노을 같으며, 가까이서 보면 세밀하고 복잡한 겹겹의 자태를 드러낸다.

그것은 단 하루 이틀 피고 지지 않는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꽃이 피고 지기를 거듭하며 한 그루 나무 위에서 늘 새로운 꽃들이 이어져 피어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백일홍(百日紅)’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 문화 속에서 배롱나무꽃의 아름다움은 비단 꽃 색깔이나 개화 기간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당대 시인 백거이(白居易)와 함께 의미심장한 만남을 역사 속에 남겼다.
당대 중서성(中書省)은 조령(詔令)의 초안을 담당하던 조정의 정무 중심지였다. 당 현종 개원 연간에 중서성은 한때 ‘배롱나무꽃성이란 뜻으로 마지성(紫微省)’으로 개칭되었고, 이 때문에 중서사인(中書舍人)에게도 ‘자미랑(紫微郎)’이라는 별호가 붙었다. 비록 나중에는 관서의 이름이 원래대로 돌아오긴 했지만, ‘자미랑’이라는 호칭은 그대로 전해 내려오게 되었다.
백거이가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재직할 당시, 그는 일찍이 《직중서성(直中書省)》이라는 시 한 수를 남겼다.
사윤각 아래 문서 적막하고,
종루의 시계 물시계는 더디게 흐르네.
홀로 앉은 황혼에 누구와 동무할까?
배롱나무꽃이 자미랑을 마주하고 있네.
絲綸閣下文書靜,
鍾鼓樓中刻漏長。
獨坐黃昏誰是伴?
紫薇花對紫微郎。
황혼이 점점 깊어지면서 중서성은 이미 고요해졌다. 책상 위의 문서는 잠시 제쳐두었고, 종루의 물시계는 눈금마다 시간을 조금씩 새겨가고 있다. 백거이는 관서에 홀로 앉아 고개를 들어 뜰 앞의 배롱나무꽃이 피어 있는 것을 바라본다.
한편에는 배롱나무꽃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자미랑이 있다.
꽃과 사람이 황혼을 사이에 두고 조용히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
어쩌면 사람이 볼 수 없는 공간 속에서, 그들은 말이 필요 없이 오직 사유(思惟)만으로 이미 서로를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꽃은 사람의 적막함을 알아주었고, 사람은 뙤약볕 아래에서도 의연하게 피어나는 꽃의 여유로움을 읽어냈다.
만물은 저마다 생명을 지니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그들의 무정한 마음의 소리를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의 마음이 진정으로 고요해질 때 비로소 형체와 언어를 뛰어넘어 다른 생명의 표현을 들을 수 있게 된다.
백거이의 시에 등장하는 ‘대(對)’ 자 하나에는 이로써 유난히 깊고 긴 여운이 깃들게 된다. 그 순간 그는 조정의 중서사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천지간에 홀로 앉은 한 사람이요, 배롱나무꽃 역시 더 이상 뜰 안의 한 그루 화목이 아니라 황혼 속에서 말없이 동행하는 지기(知己)가 된다.
중국인들이 꽃을 감상할 때는 대개 꽃 그 자체에만 머물지 않는다.
매화는 맑고 곧은 절개(淸貞)를 떠올리게 하고,
난초는 그윽하고 우아함을 연상시키며,
대나무는 속이 비고 마디가 있어 마음을 비우고 절개가 있음을 의미하며,
연꽃은 진흙 속에서도 물들지 않는 결백을 상징한다.
옛사람들은 이처럼 풀과 나무를 관찰할 때 비단 그 색깔과 자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피어나는 시절과 자라나는 방식, 그리고 겪어낸 풍상 속에서 어떤 생명의 품격을 체험하곤 했다.
배롱나무꽃이 보여주는 것은 지속적이면서도 서두르지 않는 아름다움이다.
그것은 이른 봄의 꽃들처럼 따스한 바람과 고운 비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해 중에서 가장 무더운 시기를 골라 맹렬한 햇볕과 더위의 시련 속에서 송이송이 피어난다. 한 송이가 지면 다른 송이가 피어나고, 이 가지가 옅어지면 저 가지가 다시 불타오른다. 그것은 어느 날이 가장 눈부신지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 오직 자신의 순서에 따라 뙤약볕을 견디며 의연하게 피어나고 조용히 아름다움을 완성할 뿐이다.
백거이의 일생 역시 묘당(廟堂)과 강호(江湖) 사이를 전전했다. 그는 조정의 관리가 되기도 했고 좌천되어 유배를 가기도 했으며, 궁궐의 옛일을 쓰기도 했고 숯을 파는 늙은이의 고단함을 읊기도 했다. 인생 속의 풍상(風霜)이 어찌 또 다른 형태의 뙤약볕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그러한 인간 세상의 기복을 겪어보았기에, 그는 비로소 그 황혼녘에 뜰 앞의 배롱나무꽃을 진정으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은 시끄러운 소란 속에 있을 때는 대개 번화함만을 보지만, 마음이 가라앉아야 비로소 한 생명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그 한 그루의 꽃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가장 무더운 계절 속에서 자신의 피어남으로 무언가를 웅변하고 있었고, 백거이 역시 그것이 얼마나 화려한지 찬탄하지 않은 채 오직 ‘대(對)’ 자 하나만 남겨두어 꽃과 사람이 천 년 동안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게 했다.
이것이 어쩌면 만물이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산은 스스로 두터움을 말하지 않지만 천 년 동안 변치 않는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물은 스스로 겸허하다고 말하지 않지만 언제나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간다.
꽃은 무엇이 인내인지 입 밖에 내지 않지만 풍상과 뙤약볕 속에서 자신의 피어남을 온전히 완성한다.
창세주께서는 또 대도(大道)를 단순히 문자로 적어 사람들 앞에 걸어두신 것이 아니라 만사만물(萬事萬物) 속에 그것을 불어넣어 모든 생명이 자신의 존재로 그것을 표현하게 하셨다.
다만 사람이 만약 꽃의 색깔만 본다면 듣는 것은 오직 꽃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것이 어떻게 자라며, 어떻게 견뎌내며, 어떻게 자신의 자리에서 이 생애를 완성하는지 볼 수 있다면, 어쩌면 한 송이 꽃에서 꽃보다 더 큰 그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천 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그날 백거이가 어떤 조서의 초안을 작성했는지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여전히 이것만큼은 기억하고 있다.
“배롱나무꽃이 자미랑을 마주하고 있네”
관직은 이미 지나간 옛일이 되었고 궁궐의 종고(鍾鼓) 또한 오래전에 적막해졌으나, 오직 저 한 그루의 배롱나무꽃만이 여전히 시 속에서 피어나고 있다.
한 송이 꽃이 뙤약볕 아래서 자신의 피어남을 완성하고, 한 사람이 기복 속에서 내면의 청명(淸明)을 지켜낸다. 어쩌면 바로 그 황혼에 두 생명은 형체와 언어를 뛰어넘어 서로를 바라보고 또 서로 감응했을 것이다.
“배롱나무꽃이 자미랑을 마주하고 있네”
그것은 번화와 부귀의 마주함이 아니라 두 생명이 적막 속에서 나눈 소리 없는 상지(相知 서로를 알아줌)였다.
하늘은 말이 없으시되 대도(大道)를 만물 속에 새겨두셨다.
사람이 만약 마음을 고요히 한다면 한 송이 꽃, 한 그루 나무마저도 모두 말이 있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