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저우이슈(周怡秀)
동양인들은 수련(修煉)이란 단어에 대하여 그리 낯설지 않으며 기본적으로 그것을 “사람이 자신을 완벽하게 만드는 방법을 통해 사람에서 승화되어 고층생명의 경지로 이르는 과정”으로 본다. 수련의 최종목적을 도가(都家)의 말로 하자만 “득도(得道)”하여 “신선이 되고” “진인(眞人)”으로 수련성취하는 것이며, 불가(佛家)의 말로 하자면 “원만(圓滿)”하여 “정과(正果)를 얻는” 것으로 다시 말해 소위 열반에 이른다는 것이다.
서양에는 비록 동양에서와 같은 그런 명확한 수련의 개념은 없지만 서양종교 중에서도 “사람이 신(神)을 믿고 신의 가르침에 따라 하면 정화(淨化)되어 천국에 들어가 신과 같이 살 수 있으며 영생을 얻을 수 있다”라고 본다. 이것은 신에 대한 신앙(信仰)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승화시키는 과정으로 다시 말해서 곧 수련이다. 수련의 최종목적은 모두 생명의 가장 아름다운 귀착을 얻어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종교는 수련의 한 가지 형식이지만 수련이 곧 종교인 것은 아니다.
물론 사람이 고층경지에 도달하거나 혹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으며 가늠하는 표준이 있다. 우리는 동서양의 신앙과 수련방법 중에서 많은 공통원칙을 찾을 수 있다.
동서양 수련의 유사점
1. 미혹 중에서 수련
동서양의 종교 또는 수련에서는 모두 다음과 같이 본다. 사람이 생존하는 현실세계는 단지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는 가상에 불과하며 아울러 우주의 진실한 면모가 아니다. 그러므로 세인들에게 “미혹[迷]”속에 있지 말고 세속 중의 표상(表象)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며 미혹에 빠져 깨닫지 못하면 우주의 진상을 인식하고 수련성취하기 어렵다고 경계하였다.
가령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자신의 저서 『국가』에서 생생한 비유를 들고 있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생존하는 “감각세계”는 마치 동굴과도 같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 속에 속박되어 한쪽 벽밖에 볼 수 없는 죄수처럼 동굴 밖의 세상을 모르며 등 뒤에 있는 불빛에 의해 벽에 반사된 그림자만을 보면서 이 그림자야말로 세상의 일체라고 믿는 것과 같다. 어느 하루 한 죄수가 족쇄를 풀고 고개를 돌려 빛을 보니 벽에서 본 것은 가상에 불과하며 빛이야말로 그런 그림자를 조성한 원인임을 알게 되었다. 그가 다시 동굴을 나와 태양이 지상에 널리 비추는 것을 보았을 때에야 비로소 그는 진실한 세계의 모습이 풍부하고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그가 세계의 환경에 적응한 후에 또 다시 이 진실한 세계의 밤낮과 사계절의 변화 규칙을 주재하는 태양에서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플라톤은 동굴에서 지상으로 나와 진상을 보는 과정을 영혼이 감각의 세계에서 이데아(Idea)의 세계로 승화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데아의 세계에서 최후에 보게 되는 광원(光源)인 태양은 바로 선(善)의 이데아이며 이것이야말로 진리와 이성의 원천이다. 철학자란 바로 이데아의 세계에서 진리를 볼 수 있는 사람이며 그는 어두운 동굴 속으로 돌아가 벽에 비친 그림자라는 미혹에 집착하는 죄수들을 이끌고 데려나올 책임이 있다. 그러나 동굴 속의 죄수들은 믿지 않고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비웃거나 심지어 그를 박해할 것이다.
여기에서 개인적으로 나는 플라톤이 말한 “지상세계의 진리를 인식하게된 철학가”는 수련을 통해 깨달은 각자(覺者)나 혹은 선지자(先知者)와 아주 유사하다고 본다. 이것과 동굴의 비유는 “미혹 속에서 수련하여 깨닫는 과정”과 아주 흡사하다.
불가의 경전인 『금강경』에서는 “무릇 모든 相은 다 허망한 것이다”라고 하여 인간 세상의 일체는 일시적인 가상에 불과하므로 집착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예수도 제자들에게 인간세상에서 돈과 재물에 집착하지 말며 천국에 재산을 축적하라고 알려주었다. 서양종교에서는 “神은 실험을 통해 증명할 수 없다.”고 하며 오직 일부 수련인이나 혹은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만이 우연히 신의 자취를 볼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수련은 마치 정답을 모르는 시험과도 같은데 만약 사람에게 神佛세계와 인과(因果)의 진실한 펼침을 보게 한다면 이는 천기(天機)를 누설하고 답안을 누설하는 것과 같아서 시험으로 인정할 수 없다. 답안을 모르면서도 옳게 답하는 그것이야말로 진귀한 것이다. 우주의 진상을 볼 수 없는 상태 하에서 대다수의 세인(世人)들은 믿지 않거나 혹은 반신반의한다. 그러므로 불경에서는 석가모니가 오탁악세(五濁惡世)에 세인들을 위하여 온 세상에 믿기 어려운 법을 설했다고 말한다. 기독교에서도 예수 생전에 그를 믿고 끝까지 따라갈 수 있었던 사람은 역시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사람이 신과 천국, 지옥의 존재를 믿고 선악에는 보응이 있음을 믿으며 수련하려 하며 끝까지 수련하려는 소원이 있는 것을 특별히 진귀하게 본다. 또한 이것은 수련의 첫째조건이기도 하다.
그림1: 작자미상. 사람이 세속에 미혹됨은 마치 잠에 빠진 것과 같다. 신은 사자(使者)나 혹은 선지자를 파견하여 사람들에게 神性(佛性)을 일깨워 그들에게 천상에 있는 진정 아름다운 귀착을 알려준다.
2. 회개 : 고생을 겪어 죄업을 갚음
○수련인을 위한 神佛의 감당
○수련자 자신의 감당
동서양의 종교에서는 모두, 사람은 세상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업을 짓는 것을 피하기 어려우며 수련인이 천국으로 승화해 올라가려면 반드시 업의 빚을 갚아야 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수련 중에서 고생을 겪고 업을 갚아야 한다. 그러나 사람을 제도하는 각자는 자비심에서 진심으로 수련하려는 사람에 대해 통상적으로 그가 제거할 죄업의 일부분을 갚는 것을 도와준다. 불교에서는 “중한 응보를 가볍게 받도록 한다(重報輕受)”는 설법이 있는데 역시 이런 것이다. 인간세상에서 개오한 각자 역시 사람의 몸이 존재하기에 심지어 직접 자신의 제자나 구도한 중생들을 위해 죄업을 대신 감당하기도 한다(예수의 受難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설령 神佛이 소업을 돕는다고는 해도 수련인 역시 스스로 일부분을 상환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러므로 여전히 마난(磨難)이 존재한다. 한편으로는 심성(心性)을 고험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업력을 제거한다.
3. 높은 경지로 승화할 것을 요구
일반적으로 고층공간(또는 天國)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다. 광명하고 아름다우며 아무런 고난이 없고 생명 사이에도 자비만이 있을 뿐 원한이나 질투, 기만 등이 없다. 사람이 천국이나 혹은 선계(仙界)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그곳의 요구에 부합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수련과정 중에서 자신의 행동을 요구해야 하며 자신의 사상을 순수하고 깨끗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동서양의 정통 신앙에서는 수련인에 대하여 모두 엄격한 요구가 있었다.
(1) 도덕방면: 청심과욕(淸心寡慾)과 세간의 이익과 시비를 담담하게 볼 것을 요구한다.
(2) 심성제고에 있어서는 자비롭고 이기적이지 않으며 성실하고 인내심이 있으며 관용과 침착을 요구한다.
(3)신앙방면에 있어서는
○어떠한 정황 하에서든 굳게 믿고 끝까지 견지할 것을 요구한다.(미혹 속에서 깨달음).
가령 성경 중에 <욥기(Job)>나 아브라함이 자식을 바친 일화 또는 티베트 불교에 나오는 “밀레르빠”가 산 위에 집을 지은 일화 등은 모두 극히 불합리하거나 혹은 불공평한 상황에서 수련인이나 혹은 신도(信徒)가 믿는가 믿지 않는가 수련을 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를 보는 것이다. 특히 생사의 갈림길에서 선택할 때, 수련자가 여전히 끝까지 견지할 수 있는지 없는 지를 본다.
예를 들면 역사상 많은 성도(聖徒)들이 도를 위해 순교한 이야기가 있으며 지금 현재 중국 대륙에서 파룬궁 수련자들이 받고 있는 준엄한 박해는 세인들이 깊이 생각해보고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있다.
예수가 부활하자 어떤 사람은 “듣자마자” 바로 믿었으며 어떤 사람은 “보고나서야” 비로소 믿었다. 예수는 “듣자마자” 믿은 사람을 찬양하였다.
○ 전일(專一)한 수련과 불이법문(不二法門)
여호와는 그 신도들에게 “다른 신을 모실 수 없다.”고 요구하였다. 예수 역시 유사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불교 중에서 말하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의 원래 의미 역시 전일하게 한 법문에서 수련하라는 의미였으나 근대인들이 다른 함의로 곡해한 것이다.
○ 입정력[定力]―수련 경지의 체현
수련자의 도덕과 신앙의 견정함은 상보상성(相補相成)하는 것으로 자신의 집착과 사심(私心)을 완전히 내려놓은 사람만이 중대한 이해관계와 생사의 고험을 통과하여 초범입성(超凡入聖)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 어떤 비정상적인 정경에 임해서도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고 냉정하며 마음이 평화로울 수 있어야 한다. 고인(古人)들은 “갑자기 닥쳐도 놀라지 않고 까닭 없이 가해져도 화내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런 종류의 입정력은 수련의 층차를 체현한 것이다.
불교 중 《아미타경》에서는 극락세계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 염불을 할 것을 요구한다. “만약 7일 동안 일심불란하고 마음이 혼란하지 않으면, 사망에 임해서도 아무런 두려움이나 걸림이 없고 잡념이 없다.”라고 했다. 이것은 또한 견신(堅信)과 전일(專一) 및 생사를 내려놓은 결과이기도 하다.
4. 수련과정 중의 시련(試煉)―원만할 수 있는가를 검증
수련 중에 부딪히는 일체 좋고 나쁜 일들은 모두 우연이 아니다. 마치 李洪志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한 수련자로서 속인 중에서 만나게 되는 일체고뇌는 모두 관(關)을 넘는 것이며 만나게 되는 일체 찬양은 모두 고험이다.”
수련의 성과를 검증할 때면 종종 보다 큰 고험이 있게 된다. 석가모니와 예수가 세상에 있을 때도 마(魔)의 시련을 겪었다. 가장 전형적인 고험에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위협으로 고난으로 의지를 꺽고 수련을 포기하게 하거나 신념을 잃게 하는 것으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인 곤란과 마난(磨難, 고생을 겪고 업을 갚는 등등)이다.
둘째는 이익으로 유혹하는 것으로 세속의 이익을 통해 수련자를 유혹하여 수련의 도덕표준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가령 명리(名利)와 색정(色情)의 유혹을 들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신으로 승화하는 것은 곤란하고도 희유(稀有)하다.
이상 여러 가지 요구와 고험으로 보건대, 원만하여 천국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확실히 어렵다. 그러므로 예수는 “진리의 길은 평탄하지 않으며 생명의 문은 좁지만 훼멸로 통하는 문은 넓다.”고 했다. 천국에 초청받은 사람은 많지만 그중에서 선발되는 사람은 적다.
북송(北宋)의 대학자 소강절은 자신의 매화시에서 “탕탕하게 만고의 천문이 열릴 때 몇이나 돌아가고 몇이 올꼬?”라고 했듯이 역사상 수련성취한 사람은 아주 드물어 얼마 되지 않는다. 불가에서는 비록 널리 중생을 제도함을 말하며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사람마다 표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상 여러 차례 겁난이 있었으며 또한 엄혹한 검증이 있었다.
수련은 큰 파도가 모래를 이는 것과 같아서 남겨진 것이야말로 진짜 금이다.
서양회화 중 수련과 관련된 소재의 내원
1. 그리스로마 신화(원래는 종교신앙이었다)
2. 신약성경과 구약성경 및 관련된 기재
1. 기이한 현상―다른 공간의 현상
◇깨어있는 상태에서 천목으로 본 것, 혹은 꿈속에서 본 것.
◇신령(神靈)의 천명 즉 신의 계시를 받거나 혹은 신의 고무와 격려를 받은 것
◇예:라파엘(1483-1520) – 《이스겔이 본 기이한 현상》(그림2)(하느님이 이스겔에게 현현하여 어떻게 하라고 지시함)
◇ 무리요 (Murillo 1617 ━ 1682) ─《천사가 성연을 준비하다 》(그림 3)(1646)
(생활이 검소하고 고생스런 수도사가 어느 날 갑자기 많은 천사들이 내려와 그들을 위해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모습을 본다. 수도사들의 정진수행을 격려하는 의미가 있다.)
◇리바다(利巴达, 1565-1628)─《그리스도를 포옹하는 성베드로》(사진4)(예수가 수도사를 격려하고 있다.)
좌: 그림 5:카라바조 《성 토마의 회의(懷疑)》 중: 그림 6 :카라바조《이삭의 희생》우: 그림 6 (부분도)
2. 수련중의 고험
모든 신도 혹은 수련자가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볼 수 없거나 불합리하거나 불공정한 대우를 받을 때에도 신앙을 견지할 수 있는가를 본다.
◇카라바조 (1573-1610) ─ 《성 토마의 회의》(1601 – 02)(그림5)성토마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예수가 그를 찾아 상처를 시험하게 하면서 “의심을 버리고 믿어야한다”며 그를 책망하였다.
◇카라바조 (1573-1610) ─《이삭의 희생》(1601 – 02)(그림 6)여호와가 아브람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희생으로 바칠 것을 요구하자 아브라함은 그 지시가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따랐다. 그러자 관건적인 시기에 천사가 나타나 그를 제지하고 어린 양을 보내 대신 제물로 삼게 하였다.
3.순교―진리와 생명을 모두 보존할 수 없을 때의 선택.
이 신성한 순교자들은 문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혹형(酷刑)을 감당하였다.
◇스티븐이 원만의 표준에 도달했다는 것은 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 견정한 신앙으로 생사를 내려놓았다
━ 아무런 원한과 공포심이 없었다
━ 대자비심으로 자신을 상해한 자들에게 죄를 돌리지 않았다
━ 수난을 통해 최후의 죄업을 깨끗이 씻었다.
◇ 니콜라 푸생(1594 – 1665)─ 《성 에라스무스의 순교》(1624)(그림 8)로마박해시기에 에라스무스는 배를 가르는 고난을 당했으며 창자가 잡아당겨져 도르래에 휘감기는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푸생은 선명한 색채로 고문의 공포를 완화시키는 동시에 화면 위에 작은 천사가 화관과 황금종려를 가지고 천국으로 그를 영접하는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표상으로는 두려운 사망이지만 상계(上界)에서는 생명의 진정한 부활인 영생을 축하하고 있다.
◇카라바조 (1578 – 1635)─《성 마태의 순교》(그림 9)천사가 원만을 상징하는 종려 잎을 가지고 순교직전의 성 마태에게 주고 있다.(그림 10 부분도).
이 외에《성 세바스찬》(1525)이란 그림에서 세바스찬은 로마 황제의 근위병으로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중단할 것을 권하다가 온몸에 화살을 맞는 혹형을 당했다고 한다.
이 그림에서는 그가 몸으로 난을 당하면서 고개를 들어 왕관을 가져오는 천사를 향해 하늘을 보라보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이 그림은 선(善)과 악(惡)의 대비를 잘 표현했으며 수련자의 선량하고 평온함 및 박해자의 사악과 잔혹함을 잘 표현하고 있다.
4. 부동한 층차의 동시 현현―천상, 인간, 지옥의 인과관계
어떠한 사람이든 세상에서 생명이 결속되는 날이 모두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생명이 결속되면 어디로 가는가? 동양인들은 윤회(輪回)를 믿는다. 서양종교에서는 비록 윤회를 강조하지는 않지만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과 생명이 최종적으로 공평한 심판을 받아 갈 곳이 결정된다고 믿는다. 신의 뜻을 따르는 착한 사람은 선택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반면 악을 저지른 사람은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는다.
이 그림은 세인들에게 다음의 몇 가지 진리를 보여준다.
(1) 선악에는 반드시 보응이 있다. 선에는 상이 주어지고 악에는 징벌이 따른다.
(2) 어떠한 생명도 우주진리의 심판을 벗어날 수는 없다.
(3) 연옥(煉獄)의 고통을 통해 죄업을 씻으면 장래에 다시 승천할 기회가 있다.
5. 부활과 승천
아돌프가 1527년 그린 《승천하는 그리스도》(그림12). 예수는 수난을 당한 후 3일 만에 부활한다고 예언하였다. 3일 후 과연 천지가 흔들리고 묘비석이 열리면서 예수의 유체(遺體)가 실종되어 묘를 지키던 병사들이 깜짝 놀랐다. 예수의 부활은 단지 인간육체의 부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진정한 부활인 영생을 상징한다.
◇코레지오가 1525년에 그린《성모(聖母) 승천도》(그림13):성모가 승천할 때 천계(天界)에서 환호하는 광경을 표현.
6. 도덕으로 세상을 권함
◇보스《건초마차》(1485-90)(그림15):건초(乾草)는 인간세상의 명리(名利)와 욕망이 짧고 부패하기 쉬우며 가치가 없음을 상징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도리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그것을 추구한다. 물욕(物慾)에 대한 사람의 추구는 바로 마귀(魔鬼)가 이용하는 것으로 사람들을 죄악의 깊은 늪 속으로 이끌고 들어간다.
◇앙골로 브론지노(Agnolo Bronzino)《애정과 시간의 비유》─시간과 진리의 신(神)이 사람들에게 한 가지 진리를 펼쳐 보인다.
“애정은 일시적이며 불안정한 것으로 표면적으로는 즐겁지만 위기를 감추고 있다. 예를 들면 질투, 허위, 무지 등등이다.”
고야의 《이성의 깊은 잠이 마장(魔障)을 만든다》(그림 17)은 사람이 이지(理智)를 상실하거나 혹은 주의식(主意識)을 느슨히 할 때 마가 틈을 타고 들어와 사람의 정념(正念)을 교란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결론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련의 문화는 인류문명 중에서 줄곧 가장 중요한 지위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몇 천 년 동안 사람들의 도덕관념과 생활방식에 깊은 영향을 끼쳐왔다. 사람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으며 장차 어디로 가는가? 아마 오직 수련을 통해서만이 가장 정확한 답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서양회화로부터 우리는 또 서양문명의 철학, 지혜를 볼 수 있었으며 서양문명은 사실상 신의 가르침을 따라왔음을 볼 수 있었다. 단지 오늘날에 이르러 협애(狹隘)한 실증과학이 늘 쉽사리 종교와 수련을 부정하고 있을 따름인데 이는 사실상 인류문명의 가장 진귀하고 가장 정화(精華)로운 부분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필자는 본문을 통해 현대인의 선입견과 관념을 타파하고 동서양 문화경험을 종합하여 실증과학의 “미혹” 속에서 인류문명 미래 발전의 바른 길을 찾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문장발표 : 2004년 5월 28일
문장분류 : 문명신견
원문위치 :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4/5/28/2734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