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고로 속세는 험악하고 세상사는 험난해 인생은 마치 꿈과 같다고 말해왔다. 마치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표현과 같다.
“그대는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
바다로 달려 들어가면 돌아오지 못함을 보지 못했는가
그대는 높은 집 거울 앞에 백발을 슬퍼하노니
아침의 검은 머리 저녁이 되면 눈처럼 희어진 것을.”
君不見黃河之水天上來
奔流到海不複回
君不見高堂明鏡悲白發
朝如青絲暮成雪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중국 민중들은 역대로 수련(修煉)을 높이 우러러 보았다.
위로는 삼황오제(三皇五帝)로부터 아래로는 진시황, 한무제, 당태종은 물론,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 혹은 도술(道術)을 편애한 사람들이 있었다. 역대의 전적과 문인들이 기록한 신선 이야기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고 또한 증거도 있다. 현대식으로 말한다면 당시에는 수련이 매우 유행했고 매우 고아(高雅)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후 변해버렸다. 교과서에는 무신론(無神論), 진화론(進化論), 계급투쟁 등이 가득 찼고 의심할 바 없는 진리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세뇌를 받은 중국 민중들은 생각이 사라지거나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류성음(柳成蔭)은 이런 교육을 받고 자랐다. 하지만 그의 부친은 당시 농촌에서 지식인이었고 명리(名利)에 대해서도 비교적 담담했다. 그의 모친은 자애롭고 부지런한 분이셨다.
중학생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류성음이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모친이 다친 제비 몇 마리를 안고 있었다. 알고 보니 제비들이 처마밑에 둥지를 틀었는데 위치가 좋지 않아 쥐의 습격으로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모친은 나뭇가지 천으로 싸서 새들을 먹여 키웠다. 시일이 지나자 이 녀석들은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았다.
류성음은 농촌의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자랐다. 때로는 참외를 서리하는 등의 장난도 했다. 그러나 그는 늘 운이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여러 번 훔쳐 먹어도 별 탈이 없었지만 그는 한번만 해도 곧 발각되었다. 그는 잘못을 후회하면서도 대체 왜 나는 늘 운이 없을까 하고 한탄하곤 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이는 하늘이 그를 아껴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도와준 것이다.
류성음은 착실하고 완고한 외에 그런대로 공부는 잘 했다. 하지만 그는 남모를 고민이 있었는데 공부시간이 조금만 길어져도 머리가 어지러워져 잠을 자야했다. 중학교에 들어간 후 이 현상이 더 심해져서 선생님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다행히 운이 좋아 그에게는 늘 의외의 일이 발생하곤 했다.
고3 때의 일이다. 당시는 책이 귀할 때였는데 누군가 그의 정치학 책을 훔쳐가 버려 어느 친척이 그에게 하나 주었는데 십여 일 후 또 잃어버렸다. 시험을 볼 때가 되어 그는 친구에게 한 권을 빌렸는데 다 보기도 전에 친구가 도로 가져가 버렸다. 그러나 시험 성적이 나왔는데 보니 자기 정치학 성적이 의외로 괜찮았다. 그 본인도 유명인물이 되어버렸다. 류성음은 공부도 좋아하지 않고 책도 잃어버렸지만 뜻밖에 대학에 진학했다!
이것은 1990년대의 일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대학에 진학하는 사람이 아주 적었기 때문에 그의 대학진학은 부모님의 체면을 크게 세워준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 류성음은 청하현(清河縣) 백마진(白馬鎮)의 국영기업에 기능직으로 들어갔다. 당시 기능직의 월급은 200여 위안에 불과해 생활이 곤란했다. 하지만 농촌 출신인 그가 엔지니어가 된 것을 모두들 부러워했다.
기술직은 매우 바쁘고 힘들었지만 그에게는 즐거움이었다. 왜냐하면 일이 고되다고는 해도 농사보다는 쉬웠고 그는 또 천성이 낙천적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일만 열심히 했지 상사의 비위를 맞춘다거나 선물을 한다든가 하는 쪽으로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어느 날 동료의 결혼식에 간 적이 있다. 피로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람들은 장기며 바둑 등을 두며 놀고 있었다. 당시 조상(趙常)이란 이름의 40대 엔지니어가 있었는데 주역애호가로 고사나 인과응보를 잘 말해주곤 했다. 류성음은 그의 말을 듣자 흥미가 생겨 여러 가지 질문을 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친한 지기가 되었다.
류성음은 중국에서 소위 ‘고등교육’을 받았고 교과서에서 인과응보는 ‘봉건미신’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배척하는 마음이 좀 있었다. 하지만 어릴 때 명리학에 정통한 친척이 있었고 그가 운명을 예측하는 것이 매우 정확한 것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암암리에 운명이 있음을 믿었다. 하지만 인과응보는 대체 무엇에 근거한단 말인가?
직장에서 집을 분배할 때의 일이다. 직장 상사들이 류성음에게 비교적 좋은 집을 분배해주었고 그는 당연히 기뻐했다. 그러나 직장의 어느 동료가 열쇠를 강제로 가져가 자신의 친척(동료)에게 주어버렸다. 류성음은 이 일에 대해 웃으면서 이게 뭐 어려운 일인가 하며 집을 동료에게 주게 했다. 이 일에 대해 어떤 사람은 그가 어리석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그가 성실하다고 했다.
새로 배정받은 집은 정말 형편없어서 여름에는 더워서 견딜 수 없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생활은 매우 고생스러워 제 때 먹지 못했고 점점 위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 그가 아파서 기계 선반 옆에 누웠는데 동료들이 병원에 보내어 난생 처음으로 혈당 주사를 맞았다. 퇴원 후 만성 위염은 여전했고 호전되지 않았다. 나중에 또 부스럼이 생겼는데 등 뒤에 다리미에 덴 것 같았다. 한달을 치료했지만 밤낮 괴로웠다.
이 상황에서 그는 또 가벼운 불면증이 시작되었다. 이런 병은 원래 고3때 시작되었는데 중국에서 이런 것은 가벼운 병에 속한다. 많은 학우들이 머리가 하얗게 세고 심한 불면증에 걸린 적이 있다. 요즘도 중국 학생들은 대입을 치르다 자살하거나 과로사 하기도 한다.
원래 날씬했던 그의 체중도 수 킬로그램이나 빠졌다. 이 기간에 또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이 발생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중매하여 처녀를 소개해주었는데 사람들이 알아보더니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다.
이런 상황에서 류성음의 사상에도 점차 변화가 생겼다. 인생의 엄숙한 문제에 대해 두뇌는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인생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가? 도대체 인생이란 무엇인가, 운명이란 있는 것인가? 인간은 어디로 가는가?
망망한 속세는 바다와 같으니 어느 곳이 대안인가
인생사 번잡하기 그지없으니 한가한 날이 얼마나 되랴
부귀와 가난은 모두 운명이 있나니
병마와 시름에 웃을 날이 드물구나
塵海茫茫何處岸
人生碌碌幾時閑
貧窮富貴無非命
災病情愁少笑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