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망】
제11회 학습반
수련생들은 ‘정치보석금’을 어느 정도 내고 잠시 집으로 돌아갔다. 일반적으로 천위안 이상이었고 그마저도 지인을 통해 봐준 금액이 이 정도다. 공직에 있던 사람들은 일찍이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으며 회개서를 쓰지 않으면 출근을 할 수 없었다.
이는 중국에서는 매우 정상적이다. 하늘 땅을 뒤 덮는 거짓과 모함의 선전을 마주하여 연공인들은 이미 “요마”가 되고 “이상한 부류”가 되어 버렸다. 설사 일부 민중이 이해한다 하더라도 직장의 상급자들은 자기 상사들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사실 출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수련생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를 핍박하여 본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출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나라의 유지와 안정에 대해서도 불리하다.
게다가 지방정부로서는 (자기 부서에) 청원하러 간 사람이 없으면 공이 큰 것이다. 물론 일부 직장의 상사들은 매우 악독하여 사적인 이익을 위해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떨어뜨린다. 이런 복잡한 국면에서 적지 않은 수련생은 직장을 다녔다. 하지만 비교적 이전보다 못한 자리나 직장으로 갔고 일부는 짤렸다.
류성음도 공장을 옮겼는데 조건이 원래보다 못했다.
이렇게 몇 달은 평온하게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정부 관원이 왔다. 그에게 파룬궁에 대한 태도를 물었으며 그가 여전히 견정한 것을 보고는 설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차를 끌고 갔다.
차에서 내릴 때가 되어 그는 알았다. 바로 진(鎮)에서 학습반(사실은 강제 세뇌반)을 열었던 것이다. 본 현(縣)에는 3개 반을 열었는데 이름하여 “법제(法制)학습반”이라고 했다. 백마진, 흑룡진과 현에서 각 하나씩 열었다. 학습반에 도착하자 그는 비로소 사람들이 대부분 다 속거나 불법으로 잡혀서 온 것임을 알았다. 어떤 이는 온 집안 식구가 다 잡혀 들어왔으며 대다수는 올 때 정상적으로 일하는 중이었다.
바로 이즈음 강택민 정권은 “공출미-일종의 세금”에 항거하는 농민들에 대한 탄압을 확대했을 때였다. 이에 각급 정부는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한바탕 농민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운동이 다시 한 번 개시되었다. 진(鎮) 정부에서는 한 무리의 부랑자들을 조직하여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서 “공출미”를 거두어 들였다. 알아야 할 것은 많은 빈곤한 사람들은 확실히 견딜 수 없었는데 그들의 식량은 문제였다.
또 일부분은 한때 촌에서 일한 적이 있어서 빚진 돈을 갚지 않고 이것으로 빚을 변제하려 했다. 이 때문에 공산당에서는 한 가지 구호를 제창했는데 “물소는 황소 빚을 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정부건 촌 위원회건 당신에게 돈을 빚졌다 하더라도 당신은 그것으로 변제할 수 없고 순순히 “양곡”을 바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역시 공산당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이론이다. 당신이 따르지 않으면 “철권”을 얻어맞아야 한다.
그들은 공비와 마찬가지로 멋대로 집을 침입해 소나 돼지를 끌고 갔으며 문짝까지도 다 뜯어갔다. 반항하는 경우는 독하게 두들겨 패는데 얻어맞은 농민은 울며불며 아버지 어머니를 외치며 무릎 꿇고 용서를 빌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일부 농민도 학습반에 들어왔는데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돈을 바쳐야한다. 이런 사람들도 수련생과 함께 잡혀있었다. 부랑자와 간부만이 배부르게 먹고 때렸다. 강택민의 잔혹한 정책 때문에 각지에서는 맞아죽은 농민이 제법 있었다. 하지만 누가 그걸 따지겠는가?
지금도 농민들은 이 이야기를 하면 눈물을 금치 못한다.
파룬궁 수련생 그들은 무슨 “정부미”를 빚진 것이 없다. 또 무슨 잘못한 일도 없으며 하물며 어떤 이는 이전에 시내의 부랑자들었다. 그런 건달들은 여전히 꺼리는 사람이어서 간부들도 감히 마음대로 때리지 못했다.
백마진의 당서기 기청운(記青雲)은 매우 고민했다. 왜냐하면 중국에서 어떤 사람이 청원하러 가서 위에서 해결하지 못하면 하급직에게 질책을 받고 처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학습반에 가서 소위 “국가정책”이란 것을 한바탕 선전하며 겁을 주고 위협을 했는데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정말 안 되면 때려야지! 그럼 어떻게 할껀데?
오후에 술을 잔뜩 마신 후 그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학습반에 도착했다. 그가 먼저 손을 들어 사람을 때렸다. 다른 사람이 보더니 따라서 순식간에 마구 때렸다. 이때부터 더 말할 것 없이 그들은 술이 취하기만 하면 사람을 때리는 일이 심심풀이가 되어버렸다. 한번은 부진장(副鎮長) 이풍(李諷)이 수련생들을 위협했다. “당신들이 믿거나 말거나 때려죽이면 자살로 처리한다고 했다!”
어느 날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데 수련생을 도처에 끌고 가서 때리고 욕했다. 어떤 수련생은 환갑이 넘었는데도 마찬가지로 두들겨 맞았다. 더욱 천인공노할 일은 어떤 하수인들은 밤을 틈타 여자 수련생들을 희롱했다. 이는 수련생들의 가족에게도 해가 매우 컸다.
하지만 이런 일은 나중에 전 현에 폭로되었고 민중들의 압력에 못 이겨 그들은 이 일을 중지했다.
폭력(暴)
하늘의 때가 나라에 이롭지 못해 난이 성하여
해를 가리고 까마귀가 종묘에 올라가네
백성들의 울음 눈물 공중에 가득하니
진시황은 오히려 저리가라 할 정도였네
天時不利國難昌
遮日烏鴉上廟堂
百姓泣空眼中淚
秦王猶恨少三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