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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소설: 중생 모래폭풍 (15)

【정견망】

제15회 모래폭풍

청하현 모든 학습반은 일찍이 끝나야 했다. 이것도 그곳 책임자의 생각이었다. 선량한 백성을 자꾸 괴롭혀서 뭐하게? 강택민 일당이 아니라면 누가 이런 좋은 사람을 진압하고 싶겠는가?

왜 끝이 나지 않는가 하면 상부의 검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상부에서 마침내 책임자가 왔다. 그중에서도 팀장은 610간부였는데 사실상 절대 권력을 가졌다. 그가 누구를 노교소에 보내라고 하면 바로 노교소에 보내야 하고 감옥에 보내라고 하면 감옥에 가야 했으며 그것도 즉시 집행해야 했다. 무엇이 법률인가? 바로 이것이 법이다! 무엇이 효율인가? 바로 이것이 효율이다!

이들은 지방의 사사로운 정을 봐주지 않는다. 기타 구성원은 주로 우리 성의 일부 유명 수련생들로 전부 전향된 사람이었다.

이들이 와서 첫 번째 한 일이 우선 소위 “견정”한 수련생을 간수소에 보내는 것인데 오자마자 본때를 보여주는 것으로 거대한 압력을 가했으며 또 전향된 수련생들이 권했다.

남아서 시달림을 받은 수련생은 견딜 수 없었다. 일부분은 타협을 선택했고 일부분은 새로운 “스톡홀름증후군” 환자가 되어 자유의지를 잃었다.

이날 아침에 청하현에는 전대미문의 모래 폭풍이 일어나 온통 암흑천지가 되었다.

학습반이 해산되었고 수련생은 심정은 각각 다 달랐다. 타협한 수련생은 고통과 치욕이 가슴을 눌렀고 자유의지를 잃은 수련생은 진압한 자와 함께 즐거워했다.

그들이 학습반을 나가자 바깥에 있던 민중들이 조용히 변한 것을 발견했다.

소수의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나 진상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이 그들을 동정하고 관심을 보이는 외에 나머지 사람들은 분분히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는데 어떤 사람은 얕보거나 조소하거나 긴장하고 얼른 피하기도 했다. 많은 민중들은 일찍이 “문화혁명” 식의 선전 중에 악당을 믿었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았으나 감히 접촉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검은 다섯 부류-문혁 당시 비판받던 계층, 지주, 부농, 지식인, 우파 등등”로서 누기 자기들 몸에 불이 옮겨 붙기를 원하겠는가!

류성음 등 조용히 살던 사람들이 일시에 유명인이 되었고 모두들 접촉하기 꺼려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중공의 음모와 독계(毒計)다. 당신과 민중을 고립시키고 인성의 악한 면을 이용하여 선동하고 민중들이 협동하여 선량한 사람을 박해한다. 장기적으로 무신론, 계급론과 진화론으로 교육하며, 민중은 신에 대한 믿음이 매우 낮으므로 신앙에 대한 이해는 바로 아편이라고 한다. 게다가 중공이라는 도적이 더해졌으니 많은 민중들의 이런 태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들 중 정식으로 직장에 근무하던 사람들은 더욱 곤란해졌다. 회사 책임자들은 당연히 다른 눈빛으로 그들을 대했다. 동료들도 경계심을 품고 있는데 이런 것은 십여 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았다. 중공은 하루라도 있으면 그들은 그 동안 두렵다. 폭정은 공포정치를 유지해야 하는데 이것도 중공이 선량한 사람을 진압하는 주요 원인이다.

사실은 설사 타협한 사람도 오랫동안 평안을 가져오지 못했다. 이 후의 몇 년간 정부에서 몇 차례 학습반을 열어 박해했으며 민감한 날이 지나서야 집으로 돌려보냈다.

타협한 수련생들은 본래 진정으로 수련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으나 그들에게 많은 고통을 가져왔다. 사부님과 대법에 부끄럽고 자기의 수련의 길에 먹칠을 했다. 그들은 끊임없는 법공부, 밍후이왕, 정견망 등의 자료를 보고 점점 명백해져서 엄정성명을 발표하여 자기가 이 스승과 대법에 불리한 말을 한 것을 폐기하고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그러나 소위 전향한 사람들은 비록 내심 깊은 곳에 아직 대법과 스승을 숭상하지만 자유의지를 잃고 중공의 의지에 통제되기 때문에 비교적 책보기를 배척한다. 친구들과 친척들의 권고로 책을 보더라도 왜곡된 이론의 영향을 받아 깨어나기 매우 어렵다. 이런 증상을 만든 공포의 환경이 없어지지 않았기에 되돌아 온 사람이 비교적 적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만일 그들이 당초에 진정으로 착실히 스승님의 책을 읽고 진정하게 수련했더라면 이 마난 중에서 미혹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봉의 남편은 노교소에서 1년 후 나와 역시 “스톡홀름” 증세를 얻어 수련을 포기했다. 드디어 남쪽으로 가서 일을 하다다 일년 후 폐암을 얻었는데 이것은 노교소에서 육체와 정신적으로 시달림을 얻은 결과였다. 수련생들은 분분히 계속 수련하기를 권했으나 중공의 높은 압력과 노교소에서 들은 거짓말의 영향이 있어서 다시 수련을 시작하지 못하고 불행히 세상을 떠나 아내와 딸에게 영원한 고통을 주었다.

양풍청은 전향된 후 경제적 압박에 못 이겨 역시 남쪽에 일하러 갔는데 몇 년 후 역시 암에 걸려 저축한 돈을 다 날리고 온데 빚만 잔뜩 졌다. 그의 부친 역시 수련인인데 매우 정진한다. 늘 그가 진상을 알기를 기대하고 늘 스승님의 서적을 보여주며 수련을 계속하기를 희망했으며 적어도 우선 목숨이라고 유지하기를 원했다. 우리가 이전에 말한 적이 있다. 우선 그는 이미 자유의지를 잃었다. 중공이라는 감옥을 벗어나지 않는 한 건강회복을 매우 힘들다. 둘째는 이때 만약 그가 책을 진심으로 본다면 건강을 회복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때 그도 교란을 받고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해를 받은 자들은 끊임없이 그에게 중공의 왜곡된 이론을 중복해서 말해주고 있었다.

피해자들을 민중들이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그들을 보통 민중과 무슨 구별을 하기 힘들다. 그들은 단지 독립적인 사고 능력을 잃었으며 중공이 하려는 일체를 다 옳다고 여기고 적극적으로 그들을 변호한다.

파룬궁 수련생은 중공에게 해를 입은 첫 번째 예가 아니다 중공이 매번 민중을 박해하는 운동을 할 때마다 이런 “스톡홀름” 환자가 생겼다. 비록 그들이 형성된 원인이 다 다르지만 중공은 그들의 자유의지를 대체했다.

바로 이런 공포는 지금까지 계속 존재하고 있으며 많은 환자들이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중공의 유명 작가인 정령(丁玲)같은 사람이다.

이 몇 명의 파룬궁 수련생은 “스톡홀름” 병 증세가 매우 심했으나 경제 방면에서는 매우 아끼지 않아 양풍청에게 의료비를 대주었다. (사실 그들은 속인 중에서는 선량한 사람이다)

양풍청도 매우 감격하여 자연히 그의 자유선택에 영향을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양풍청의 부친은 그가 계속 수련하기를 원했지만 죽음에 이르러 그의 의지는 돌아오지 못하고 가족에게 눈물만 남겼다.

류성음이 양풍청을 보았을 때 그는 이미 치료할 가치가 없었으며 집에서 죽음만 기다리고 있었다. 한때 키가 크고 건장하고 시원했던 사람이 마른 장작처럼 겨우 40킬로가 되었고 확산된 암은 이미 그의 기관지를 압박하여 말을 할 수 없었고 교류는 더욱 불가능했다. 그는 류성음을 보자 가볍게 목을 가리켰고 아내는 그가 스스로 말을 할 수 없다고 설명해주었다.

그의 아내는 사실 양풍청은 여태껏 수련을 포기하지 않았고 아직 사부님을 염려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구나! 그들은 사부님이 좋다는 것을 아는데 다만 인격이 이미 분열되어 자유의지를 잃었던 것이다.

그들의 인격이 분열되고, 인성은 폭력 하에 왜곡되었으니 이 각도에서 보면 그들의 정신세계는 시종 고통과 공포 중에서 살고 있다.

그의 동생 양풍비는 학습반에서 돌아온 후 비록 자기는 아직 수련하겠다고 하였지만 연공을 거의 잘 하지 않으며 법공부도 잘 하지 않는다. 이전의 각종 취미가 되살아났는데 도박, 음주 등등으로 하루 종일 빚을 지고 곤란에 처해있다.

아마 각종 감옥에서 받은 벌이 너무 많아 포기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지난 날의 청하현 파룬궁 보도소 소장 백애국은 노교소에서 석방된 후 심신에 시달림을 받아 각종 질병을 앓았으며 동시에 스톡홀름 증세를 얻었다. 가족들이 사방에 의사를 구했으나 결국 몇 년 후 세상을 떠났다.

유감(憾)

속세에서 법을 기다린지 몇 년이던가

온갖 풍상 겪기를 천만년에

하지만 악룡이 혼탁한 파도를 일으키니

작은 배는 연달아 뒤집어지네

紅塵等法幾多年

曆盡風霜苦萬千

可恨惡龍翻濁浪

小舟覆去水連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