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천외객(天外客)
【정견망】
등산도(登山圖),수묵천강산수(水墨淺絳山水) 가로 55.3cm 세로 85.8cm. 2019년 12월 창작.
이 그림을 창작하게 된 동기는 우연히 사존의 《홍음-迷(미혹)》 중에서 “수행은 사닥다리 오르기와 같구나(修行如蹬梯)”라는 구절을 읽고 나서다. 바로 이 그림을 구상했고 ‘등산’을 수행에 비유했다. 구상이 아주 명확했기 때문에 창작 과정 역시 아주 순조로웠다.
‘등산’으로 수행을 비유하니 수련의 복잡한 과정을 간단한 형상 사유로 전환시켰고 또 중국화의 창작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산수화의 직관적인 표현형식을 이용하니 다양한 장소와 스토리를 묘사할 수 있고 그 사이의 내함(內涵)을 입체적으로 펼쳐 보여주면서도 함축을 잃지 않는다. 나는 이 산수화 창작이 일정 정도 시범성을 띠며 중국화를 그리는 화가들이나 애호가들을 곤혹스럽게 했던 아주 오래된 문제에 대해 간접적이나마 해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것은 바로 어떻게 중국화의 형식을 사용해서 직접적으로 내함을 펼쳐내면서도 중국화의 운치를 잃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산수화 또는 화조화(花鳥畵)의 형식으로 초연한 내함을 표현해내기란 비교적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이런 창작형식에는 단순히 기술적인 제한성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각기 다른 시기에 다져 내려온 운치가 작품 속에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창작 구상에 마치 무형의 족쇄를 채운 것과도 같다. 창작 중에 두 가지 곤경에 처하는데 내함을 직접적으로 펼쳐보이면 중국화의 운치를 잃게 되고 반대로 전통적인 표현방식만으로 창작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보고도 내함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전통 중국문화의 특징은 비교적 함축과 은회(隱晦 역주: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 것)를 중시하기 때문에 많은 것들을 표현할 때 직설적으로 하지 않았다. 보는 사람이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추측함에 의지하는데 중국화의 창작에도 이런 특징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과거에는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내 생각에는 중국화의 이런 특징도 앞으로는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희미한 사다리
이 그림의 구상은 수련의 내함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도에서 험한 경치를 만들어냈다. 아주 가파른 산 절벽은 수련에서 위로 올라가기가 어려움을 상징하는 동시에 수련과정 중의 각기 다른 층차를 체현해야 하기에 거의 수직에 가까운 구도를 채택했다. 산허리에 걸린 운무(雲霧)는 수련의 두 큰 층차를 가르는 경계가 되는 동시에 운무 자체가 ‘미혹’을 상징한다. 운무 아래에 표현한 것은 쓰젠파(世間法) 수련이고 운무 위로는 추쓰젠파(出世間法) 수련을 표현한다.
바위를 그릴 때 사용한 기법은 북방 산수화에서 많이 사용하는 부벽준(斧劈皴 역주: 산수화에서 도끼로 찍은 듯한 자국을 남겨 표현하는 동양화 준법)과 괄철준(刮鐵皴 역주: 칼로 철판을 긁어낸 듯이 표현하는 동양화의 준법)을 응용했다. 이런 기법의 표현은 단지 바위의 단단한 질감을 표현해 산 전체가 기가 통하고 텅 비게 만들 뿐 아니라 형상적으로도 수련과정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왜냐하면 산 자체가 사람의 집착을 상징하기 때문인데 산 정상에 오르려면 끊임없이 집착을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산허리 운무 주변의 수련인
“여러분 알다시피, 많은 것과 많은 집착심이 왜 그렇게 제거하려고 해도 제거되지 않는가? 왜 그렇게도 어려운가? 내가 여러분에게 줄곧 말했듯이, 입자는 미시적인 데서부터 줄곧 표면물질에까지 층층이 조합된다. 만약 극히 미시적인 데서 여러분이 본다면, 사상 중에서 집착하는 그런 것이 형성된 물질은 무엇인가? 산이고, 거대한 산인데, 마치 화강암같이 견고한 돌덩이로서, 일단 형성되면 사람은 그것을 전혀 움직일 수 없다.”《2004년 시카고법회 설법》
사부님의 이 설법 속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수련 중의 어려움은 자신의 집착이 만들어낸 업력(業力)으로 조성된 것으로 오직 대법 속에서 자신을 단련하고 집착을 잘라 버려야만 최종적으로 이 거대한 산을 뚫어낼 수 있다고 이해했다. 그러므로 창작 중에서 부벽준과 같은 이런 기법을 채용하면 집착을 제거하는 과정을 형상적으로 아주 잘 체현할 수 있다. 붓이 가는 곳이 의기가 도달하는 곳인 동시에 수수하고 고풍스런 산수화의 운치를 체현할 수 있어 가히 일거양득이라 할 수 있다.
산아래 부분도
그림의 구도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산자락 돌사다리 위의 사람들은 수련의 길에 오른 사람들을 대표한다. 때문에 화면 가장 아랫부분에 놓였다. 이곳의 환경 표현 역시 그리 위험하지 않고 길도 꽤 넓은 편이다. 때문에 사람들의 숫자도 비교적 많다. 돌계단 좌측 위 바위에는 ‘정진(精進)’이란 두 글자를 눈에 띠게 표현해 산속의 마애석각(摩崖石刻)으로 삼는 동시에 창작의 내함 중 하나를 확실히 고정시켰다. 이렇게 하면 그림의 창작 내함이 바로 수련의 의미에 달려있음이 확실해진다.
돌사다리 위의 사람들은 모두 각종 보따리를 들고 있으며 심지어 가족을 거느린 경우도 있다. 이것은 막 수련이 길에 들어선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지닌 각종 집착을 다양한 방식의 표현으로 우의적으로 드러낸다. 카메라를 든 사람은 호기심으로 수련에 들어온 것을 표시하고, 가는 길이 험한 지 길을 묻는 이도 있고, 곤란이 두려워 주저하면서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이도 있고 또 등반을 포기하고 짐보따리를 맨 채 되돌아오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수련인의 각종 상태를 대표한다.
한편 산허리 운무 아래에 있는 한 사람은 절벽에 달라붙어 험난한 길을 가고 있는데 이는 생사를 내려놓는 수련과정을 대표한다. 수련 속에서 오직 생사를 내려놓고 두려움이 없어야만 비로소 용감하게 나아갈 수 있고 비로소 떨어져 내려가지 않을 수 있다. 운무를 뚫고 오르면 또 다른 천지가 나타나고 신선이 거처하는 산굴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곳은 또 계속해서 위로 오르는 입구이기도 하다.
한편 운무 위 산 절벽에는 서로 손을 내밀어 끌어주는 두 사람이 보인다. 이들은 높은 경계 속에 있는 수련인의 사심(私心) 없는 고상한 행위를 표현한다. 눈앞 최후 미혹의 장애를 꿰뚫으면 굴곡진 길을 따라 산동의 동천 속으로 향할 수 있는데 그 속에는 누각과 신선의 자취가 어슴푸레하게 있어 선경(仙境)을 대표한다. 하지만 이 역시 수련의 종점은 아니다.
또 이 그림에서는 구도상 산 정상을 드러내지 않았다. 의도는 수련의 경계에 끝이 없음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다만 바위 사이에 희미하게 붉은 사다리를 드러냈지만 폭이 아주 좁다. 왜냐하면 보다 높은 층차로 갈수록 수련의 요구 역시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 외에 이상의 창작 중에서 구도의 전개는 오직 나 개인의 ‘수련’의 내함에 대한 이해에 불과하며 그림의 형식도 아주 간단하게 개괄적인 방식으로 표현했을 뿐임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수련’의 내함은 몹시 박대(博大 넓고 크다는 뜻)하며 개인의 이해와 작품의 표현은 다만 아주 작고 미세한 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566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