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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화창작: 호법도(護法圖)

글 그림/ 천외객

【정견망】


 호법도(護法圖)》,종이에 수묵중채(水墨重彩), 149.7cm*79cm2018년 여름 창작.

이 그림과 글은 이성적인 창작에서 종종 구상이 앞서고 필묵의 배치가 뒤따르는 것을 보여준다. 원래 동기는 한 폭의 동적이며 힘과 긴장감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창작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중국화의 역사에서 이런 유형의 작품은 별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서방 회화에서는 아주 흔히 볼 수 있고 특히 종교화에서 신(神)과 천국을 표현한 작품에서 더욱 그렇다. 세부적인 스토리로 가득한 구도 및 배경 속에 층층의 풍부한 선염(渲染 역주: 화면에 물을 칠하고 마르기 전에 붓을 대 몽롱하고 침중한 묘미를 나타내는 동양화의 기법)을 드러내 작품의 외재적인 표현력이 아주 강하고 시각효과도 아주 사실적으로 보이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표면에 충격을 주기 쉽고 더 나아가 사람의 내심까지도 건드릴 수 있다.

하지만 중국화의 표현은 대개 사람의 표면 감각을 지나치게 자극하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다. 표현하려는 물상(物象)의 절반은 ‘사의(寫意 역주: 동양화에서 그림의 실제 형태나 풍경보다는 뜻이나 내함의 표현을 중시하는 것)’에 있고 의경(意境)마저도 아주 완곡하고 내함 역시 몹시 함축적이다. 그러므로 이런 작품을 감상하려면 자연히 천천히 음미할 필요가 있으며 내함의 전개 역시 감상자의 사상과 심경의 변화에 따라 점차적으로 드러난다. 동시에 중국화는 창작에서 배경의 선염(渲染)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 이 역시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력에서 서양화처럼 그렇게 직접적이고 사람의 표면을 움직일 수 있는 것에는 미치지 못하게 한다.

달리 말하자면 중국화의 표현형식은 작품 감상자에 대한 요구가 서양화에 비해 높은데 감상자는 적어도 중국화의 이런 특징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즉 감상자가 재능이 있어야 하고 자발적으로 중국화가 전개되는 배후의 내함을 받아들이려 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중국화의 표현이 시각효과 면에서 서양화처럼 하면서도 중국화만의 특징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션윈음악(神韻音樂)》의 계발을 받아 나는 어떻게 전통중국화의 운치를 기초로 하고 서방회화의 배경선염이 만드는 표현력을 결합시키고, 여기에 정법수련 중의 홍대한 내함을 덧붙일 수 있다면 사람의 마음에 큰 감동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상의 초보적인 구상을 세운 후 남은 것은 바로 소재 선택의 문제였다. 나는 줄곧 한 폭의 정사대전(正邪大戰)이란 격렬한 화면을 표현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현재 중국대륙의 환경에서는 직접적으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때문에 완곡한 방식의 구상으로 내함을 표현하고자 했다. 사악의 역할에 대한 소재선택에서 가장 먼저 떠올린 형상이 적룡(赤龍)인데 다른 공간에서 낮은 층차에서 중공의 모습이 바로 적룡 형상이기 때문이다. 반면 대붕조(大鵬雕)는 바로 용과 뱀의 천적으로 불교이야기 중에서도 여래부처의 호법으로 등장한다. 이는 오늘날 대법제자들이 인간세상에서 호법한다는 내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에 대붕이 적룡을 공격하는 구도가 서서히 형성되었다.

한 폭의 그림을 창작하려면 구도가 아주 중요하며, 이는 작품의 성패와도 관련이 있고 또 작가의 창작 능력을 반영할 수 있다. 주제의 내함을 아주 두드러지게 표현하자면 작품 중에서 주인공이나 주된 물체의 위치를 잘 경영해야 한다. 이 작품에서는 정과 사가 위치를 정한다는 착상에 근거해 당연히 정면적인 역할을 하는 주인공을 화면의 가장 두드러지는 위치에 놓아 감상자로 하여금 첫눈에 대붕을 볼 수 있게 했다. 대붕은 신(神)으로부터 오는 정의의 힘을 대표하는데 이렇게 해야만 주인공을 더 뚜렷하게 부각시킬 수 있다. 또 표면 구도에서부터 내함의 전개까지 관통시킬 수 있다.

한편 적룡은 자연스레 어두침침한 먹구름 속에 처리했다. 부면적인 요소가 놓이는 마당이 검기 때문이다. 적룡의 색깔은 또 창작 중에서 약화되었으며 붉은 색의 사용을 최소화했다. 왜냐하면 너무 산뜻하고 아름다운 붉은 색은 화면에서 두드러지기 쉬워 감상자의 주의를 적룡 쪽으로 흡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적룡이 주인공 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 그래서 적룡의 붉은 색은 의도적으로 약화시켰다. 이렇게 하자 적룡이 검은 구름이란 배경 속으로 잘 들어가고 주인공인 대붕조를 더 두드러지게 할 수 있다.

또 대붕의 역량이 적룡보다 뛰어남을 표현하기 위해 우선 크기에서 적룡보다 더 커야 하는데 사람들에게 시각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정의감을 주고 사악은 결코 바른 것을 이길 수 없다는 신심을 생기게 한다. 다시 말해 감상자의 마음속에 합리성을 줘야 한다. 예술은 생활에서 내원하지만 생활보다 높기 때문에 종종 표현하려는 내함을 위해 어느 정도 예술적인 가공이 있을 수 있다.

가령 대붕의 날카로운 발톱은 의도적으로 실제보다 과장되었다. 사실 현실 속 매의 발톱은 이 정도로 크진 않다. 이는 대붕이 적룡을 사지로 몰아넣는 그 순간을 표현하고 발톱에 압도적인 힘을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의도한 것이다. 비록 물리적으로는 불합리할지 모르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합리적인데 사람들은 본래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여긴다. 만약 경직된 사유로 실물과 대조한다면 이는 예술창작의 오묘한 부분을 표현해낼 수 없게 된다.

단지 물리적인 구조에서 이렇게 삭제하고 개조(물론 진실성이 사라질 만큼 지나친 개조는 할 수 없고 합리적인 범위에서 개조해야만 문제가 없다.)할 뿐 아니라 때로는 움직임에서도 일정 정도 표정을 보여주어 내심의 정서를 겉으로 표현해낼 수 있다.

바로 이 그림에서 표현한 것처럼 신조(神鳥)의 예리한 안광과 사로잡히는 순간 적룡의 두려운 눈빛은 모두 아주 생생한 느낌을 준다. 이 역시 작품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자 작가가 의도적으로 표현하려는 것이다. 이런 표현은 또 아주 드라마틱하다. 사실 ‘사의(寫意)’란 무엇인가? 그것의 한층 함의는 바로 그 생동감을 그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근대 이후의 간략해도 너무 간략한 소위 ‘대사의(大寫意)’는 아니다.

생동감이란 무엇인가? 솔직히 말하면 그림이 살아 있는 것으로 자연계 중의 동식물도 사람과 같은 정서를 묘사할 수 있다. 일부 물건의 표현이 생생한가 하지 않는가는 표면의 세밀함이나 거친 표현형식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확실히 표현의 ‘정확성(准確)’으로 현실화된다. 각기 다른 사물의 각기 다른 질감, 각기 다른 물성, 각기 다른 상태는 이렇게 ‘각기 다르게’ 정확하고 합리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이렇게 하자면 어느 정도 수준이 있어야 한다. 단지 붓을 사용하는 기교만 좋아서는 안 되고 심성의 경계도 높아야 한다. 과거 불교 중에서는 육도윤회(六道輪回)를 말했는데 사람, 동물, 식물 등의 진정한 생명은 원신(元神)으로 표면의 물질신체가 아니라고 한다. 만약 사람의 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표면의 신체는 바로 걸어 다니는 시체에 불과할 뿐이다. 사실 중국 전통회화에서는 줄곧 내함(內涵)을 강조하고 내재(內在)를 강조해왔는데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킨다.

중국화에서 말하는 소위 전신(傳神)이란 바로 한 생명의 내재적인 본질을 그려내는 것으로 그가 어떤 생명 형태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사물의 내재를 그려낼 수 있어야만 비로소 고명(高明)한 것이며 그렇게 하지 못하면 단지 표본을 만드는 화공(畫工 그림을 그리는 기술자)에 불과할 뿐이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아주 비슷하게 그렸을지 몰라도 총체적으로 늘 다르다는 느낌을 주고 또 이런 식으로 흐르면 기법의 표현이 형식화되기 쉽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518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