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그림/ 천외객(天外客)
【정견망】
이 작품 《회귀(歸)》는 앞서 발표한 두 폭의 그림 《각성》과 《근원(源)》에 이은 세 번째 창작으로 의미상에서 완정한 ‘삼부곡’을 구성한다. 사실 작품을 창작할 때 나는 나중 작품이 이전 작품과 어떤 연계가 있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작품마다 내함(內涵)이 전부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작을 끝내고 보니 그들 사이에 서로 교묘한 관계가 있음을 발견했다. 만약 암암리에 사부님의 지시가 없었다면 어찌 이렇게 오묘한 우연의 일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림의 제목은 창작을 끝낸 후에 생각하기 마련인데 이 작품을 보고나서 나는 자신도 모르게 션윈(神韻) 공연에서 사부님께서 창작하신 가곡 《홍음 3》〈속세는 바다와 같네(紅塵似海)〉가 떠올라 작품 제목을 《회귀(歸)》로 했다.
이 그림이 채택한 창작기법은 북송(北宋)시기 수묵법(水墨法)에서 기원한다. 순전히 붓과 먹물만으로 그림을 완성한 후 전체적으로 옅은 한 층의 청색(靑色)을 씌웠다. 이것 역시 중국화에서 가장 정통적인 표현수법의 하나로 북송의 대화가 범관(範寬)의 필법이다. 범관은 사람됨이 중정(中正)해서 그가 창작한 산수화도 기세가 아주 웅장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가 산의 정신을 잘 표현한다고 했는데 수법은 비교적 사실(寫實)적이다.
북송 산수화는 중국 산수화의 최고봉이다. 북송시기 화가들은 주로 전경(全景)을 창작했는데 기상이 박대(博大)했다. 범관은 바로 이런 최고수준을 대표하는 인물의 하나다. 때문에 나 역시 이 점을 계승해 큰 산의 기세를 체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고인(古人)과의 차이점은 대법 법리(法理)의 지도하에 선경(仙境)을 많이 그리고 그 속에 수련의 내함을 담아 가급적 범속한 속세의 풍경은 피하고자 했다. 이렇게 하면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순선(純善)순미(純美)한 시각적 감수를 준다.
법 학습을 통해 나는 신성(神性)이 충만한 그림은 에너지가 강대해 사람들에게 정확한 심미관(審美觀)을 가져다줄 수 있으며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고 인심(人心)을 정화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현재의 화단(畫壇)은 명리(名利)에 이끌리고 변이된 관념으로 부식(腐蝕 부패하고 좀먹다)되어 많은 학생들이 해독을 입었다. 한 세대 한 세대 빗나가고 한 세대 한세대 변이가 더 심해져서,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사상 역시 선념(善念)과 진솔한 미추관(美醜觀)을 잃어버렸다. 매번 이런 일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몹시 아프다.
정통적인 회화기교를 장악한 스승은 실로 너무나 적고 세파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도 아주 드물다. 눈을 들어 화단을 보아도 이 속에서 뛰쳐나와 남달리 뛰어난 인물은 한 명도 없다. 사실 공산당 당문화(黨文化)의 파괴 아래 이런 상황이 나타난 것 역시 이상할 게 없고 일체가 다 말법(末法)으로 향하고 있다. 하지만 대법 수련자로서 일체 부정확한 상태를 바로잡아야 한다.
생각해보니 한명의 대법제자인 동시에 이 항목의 기능을 구비했으니 나는 분명 사명을 지닌 것으로 이 방면에서 조사정법(助師正法)해야 한다. 어쩌면 내가 자신의 사명을 깨달은 후 사부님께서 비로소 지혜를 주시고 나의 정념을 가지해 이 한걸음을 내딛게 하셨을 것이다. 정통(正統)으로 회귀해야 하는데 오직 사람이 진정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하고 이를 통해 사람 마음속 본연의 선량함을 일깨워야만 비로소 생명이 회귀할 희망을 얻을 수 있다.
나의 창작에서 션윈은 아주 큰 도움을 주었다. 션윈의 위대함은 줄곧 나의 예술에서 모범이 되었고 매번 의지(意志)가 소침해질 때마다 션윈을 보면 늘 새롭게 분발할 수 있었다. 또한 션윈은 내게 아주 많은 영감을 주었고 나로 하여금 매 물체마다 모두 그것의 생명과 의미가 부여되었음을 알게 했다. 이제 내 작품 역시 더 이상 죽은 것이 아니며 생명의 의미로 충만한 것이다.
그림 속에서 높은 곳의 주산(主山)은 높고 크며 위의(威儀)가 있고 정면에 드러나는데 이는 창세(創世)의 주존(主尊)을 의미한다. 그 나머지 여러 산들이 마치 조정에서 신하들이 임금을 배알하듯이 늘어서서 주산(主山)을 향해 조아린 것은 대법제자들을 의미한다. 이 부분은 실제상 다른 공간에 담긴 뜻을 펼쳐낸 것이다.
화면 아랫부분으로는 하천 하나가 구불구불 멀리 흐르는데 작은 배 위에는 한 명의 뱃사공과 세 명의 대법제자들이 법을 공부하고 있다. 봉투에 가득 찬 것은 대법자료인데 이 부분은 인간세간의 표현을 대표한다. 대법제자는 중생이 구원받을 희망으로 대법제자가 가는 곳마다 모두 그 지역에 복전(福田)을 가져다준다. 구불구불한 하천을 따라 빽빽이 늘어선 숲이 멀리까지 이어진 것은 생명의 신생(新生)과 장구(長久)함을 대표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진상(眞相)을 알면서부터 시작되며 진상을 알아야만 비로소 회귀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고 생명이 불멸하는 영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 단단한 산의 바위는 대법제자의 반석처럼 굳은 의지를 대표하며 바위 아래 거꾸로 걸린 푸른 소나무는 강인하여 굴하지 않는 생명의 높은 절개를 대표한다. 산 정상의 장엄한 보탑(寶塔)은 수련회귀(修煉回歸)의 신성함을 상징한다.
원문위치 : https://www.zhengjian.org/node/148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