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淸風)
【정견망】
인기척 없는 산에 새로 비 온 뒤
날은 저물어 늦가을 기운 도네
밝은 달은 소나무 사이로 비치고
맑은 샘물은 돌 위로 흐르네
댓잎 시끄러우니 빨래하는 여자는 돌아가고
연꽃이 움직이니 고기 잡는 배 내려가네
멋대로 봄꽃은 지지만
왕손은 스스로 머물 수 있네
空山新雨後,天氣晚來秋。
明月松間照,清泉石上流。
竹喧歸浣女,蓮動下漁舟。
隨意春芳歇,王孫自可留。
왕유는 시불(詩佛)이라 불린다. 그의 시는 줄곧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는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畫 畫中有詩)’로 유명하다. 이 시는 바로 그 좋은 예다. 이 시는 문자가 평이하면서도 묘사가 섬세하며, 화면감과 현장감이 매우 강하다. 역대로 해석된 내용도 많으므로 여기서는 중복하지 않고, 다른 각도에서 이 시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 시를 자세히 읽어보면, 마음을 조금만 고요히(靜) 가라앉혀도 이것이 정말로 입체적으로 움직이는 한 폭의 화권(畵卷 두루마기 그림)임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마치 그 속에 있는 것 같아, 그림 속에서 전해지는 비할 바 없이 신선한 공기를 실제로 호흡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빨래하는 여인들과 아래로 내려가는 고기잡이배를 보며, 저 밝은 달과 맑은 샘물을 보고, 여인들의 즐거운 웃음소리와 샘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는 듯하다. 그 모든 것이 마치 눈앞에 있는 것만 같다. 사실 이러한 경치들은 드문 것이 아니고 또 특별한 점도 없다. 그런데 왜 사람들에게 이토록 강렬한 느낌을 주는 것일까? 그것은 왕유 본인이 부처 수련을 한 사람인 데다 문자적인 공력 또한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산수를 쓴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의 심경(心境), 즉 명예와 이익을 내려놓은 후 심령의 대자재(大自在)를 쓴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자재는 우리 생명 본원의 불성(佛性)과 고도로 부합한다.
이 시는 왕유가 종남산에 은거하던 시기에 지어졌다. 산중의 은거 생활은 매우 청고(淸苦)해서, 진정으로 명리를 내려놓고 높은 층차까지 수련한 사람이 아니면 견디기 어렵다. 산중의 경치를 감상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왕유의 수련 층차는 상당히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시의 앞부분은 경치를 쓴 것이자 심경을 쓴 것이며, 마지막의 “멋대로 봄꽃은 지지만 왕손은 스스로 머물 수 있네”야말로 이 시의 진정한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이것은 우리의 심령을 향해 내보내는 부름이다. 즉, 명리정(名利情)에 대한 천만 가지 집착을 내려놓고 반본귀진(返本歸眞)해야 하며, 진정으로 그렇게 해낼 수 있다면, 새로 온 비, 밝은 달, 맑은 샘물 등 더욱더 많은 아름다움과 일체의 대자재가 어디에나 있고 언제든 존재한다는 것이다.
왕유에게는 《송별(送別)》이란 시가 있다.
산중에서 그대 보내고 난 뒤
날 저물어 사립문을 닫네.
봄풀은 해마다 푸르련만
그대 돌아올는지 못 올는지.
山中相送罷
日暮掩柴扉
春草明年綠
王孫歸不歸
겉으로는 친구와의 이별을 쓰는 듯하나, 사실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같은 뜻이다. 다만 방식이 매우 은밀할 뿐이다. 그는 친구가 속세의 명리정에 미혹되거나 갇히지 않기를 희망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돌아온다 해도 논하는 것이 모두 속인의 명리정일 것이며, 정신적으로 서로 감지하거나 마음과 마음이 통할 수 없을 것이니, 이런 돌아옴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