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본선생
【정견망】
그날 요진이 홍추(紅貙)를 처단한 이후, 그녀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축하 연회가 열리고 화려한 저택이 지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통천교주와 적우(赤尤)는 질투로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통천이 적우를 위해 냈던 계책이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큰 손실까지 입자, 적우는 막무가내로 통천을 몰아세우며 마족이 자리 잡을 새로운 방법을 내놓으라고 다그쳤다.
두 사람은 상의 끝에 결국 남섬부주의 인간 세상을 이용하기로 했다. 사악(邪惡)이 오래도록 편안히 자리잡으려면 인간 세상을 공략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에 통천은 적우를 하계(下界)로 전생시켜 때를 기다려 인간 세상을 통일하게끔 안배했다.
이번 전생의 대가로 치우는 마계에 마지막 남은 홍추 두 마리를 통천에게 넘겼다. 이로써 마계의 모든 홍추는 통천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왜 통천교주가 이토록 홍추에 집착하는지 궁금할 것이다. 도가(道家)에서는 연단(煉丹)을 중시하는데, 통천은 바로 이 홍추를 연단 재료로 쓰려 했다. 홍추는 사악한 기운이 충만하고 광포한 화기(火氣)를 지녔기에, 이것으로 만든 단약은 천지를 파멸시킬 수도 있는 강력한 폭약이나 다름없었다. 통천이 이런 위험한 물건을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사형인 원시천존에 대한 질투 때문이었다. 폭탄을 만들어 원시천존을 위협하고, 그가 자신보다 돋보이지 못하게 하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정작 원시천존은 그와 다툴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오직 천명에 따를 뿐이었는데도 늘 통천보다 앞서나가는 형국이었다.
같은 홍균노조(鴻鈞老祖)의 제자임에도 두 사람의 심성 차이가 이토록 큰 이유는 무엇일까? 여전히 이 우주의 법칙인 정신(正神)과 부신(負神)이 상생상극하는 이치 때문이자 또는 매 한 생명이 그 속에서 자신을 선택한 결과이기도 했다.
홍균노조에게는 또 다른 도제가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느 날, 청허(靑虛)는 호숫가에서 노부부들이 밭을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농부들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흐르는 것을 보자 그는 다가가 도와주겠다고 청했다. 청허는 농부에게서 괭이를 건네받아 김을 매며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하늘에서 학 한 마리가 나타나 청허를 향해 세 번 길게 울었다. 사부님이 부르신다는 신호임을 알아챈 청허는 농부에게 괭이를 돌려주고 대라천(大羅天)으로 향했다.
홍균노조가 기거하는 동굴에 도착하니 노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얘야, 내가 준 법술 비급은 다 읽었느냐?” 홍균이 물었다.
청허가 답했다. “다 보았습니다. 사부님”
홍균이 말했다.
“네가 다 보았다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오늘 너를 부른 것은 마왕 적우가 하계에 내려가 황제(黃帝)와 대적하려 하기 때문이다. 네가 가서 황제를 돕거라. 다만, 동승신주와 북구로주는 남주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니 직접 나서기는 곤란하구나. 그러니 동주왕(東洲王)이라는 신분을 숨기고 이름을 가명으로 바꾸어 적절한 ‘출처’ 만들어 가도록 해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동자가 보고했다.
“통천교주가 뵙기를 청합니다.”
홍균이 허허 웃으며 청허에게 말했다.
“허허, 네 ‘출처’가 제 발로 찾아왔구나.” 그러고는 동자에게 그를 들여보내라 일렀다.
홍균노조는 청허에게 엄중히 당부했다.
“잘 기억하거라. 이번 전쟁에서 너는 오직 패하기만 해야 하며, 절대 이겨서는 안 된다. 꼭 명심하거라!”
청허는 영문을 몰라 잠시 생각에 잠겼으나 묻지 않고 답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사부님.”
사부가 어떤 무리한 일을 맡겨도 이유를 묻지 않고 묵묵히 해내는 것이 청허의 스타일이었다.
이때 통천교주가 들어와 무릎을 꿇고 하소연했다.
“사부님, 이번에 마왕 적우가 하계에서 악행을 일삼기에 제자가 본래 당신의 도손(徒孫)들인 제 제자들을 보내 수련시키려 했습니다. 그런데 사형께서 또 선수 쳐서 자기 제자들을 보내려 합니다. 사형은 어찌 그리 피곤하게 사는지, 왜 그렇게 돋보이고 싶어 안달인지 모르겠습니다…….”
홍균이 웃으며 말했다.
“청평(靑萍, 통천의 자)아! 일어나거라. 너무 돋보이려 하는 것은 좋지 않으니 내가 네 사형을 타이르마. 대신 내가 천제에게 서신을 써줄 테니 네 제자들도 전쟁에 참여할 수 있게 하거라.”
통천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 사부님, 그건 뭔가 구걸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싫습니다!”
홍균이 웃으며 “그럼 어쩌고 싶으냐?”라고 물었다.
통천은 생각에 잠겼으나 별다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무리 영민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사부님 앞에서는 마치 아이와 같아서 시샘을 부리기도 하고 투덜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역시 대단히 총명한 자는 아니었기에, 평소 부리던 잔꾀가 홍균의 정기장(正氣場) 아래에서는 무색해져서 한순간 어떤 왜문사도(歪門邪道)도 떠올리지 못했다.
홍균이 다시 제안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용맹한 장수 한 명을 네게 붙여주마. 아택(阿澤)! 이리 와서 통천교주께 인사드려라.”
옆에 서 있던 청허는 사부가 자신을 부르는 것임을 알고 통천 앞으로 나아가 예를 갖추었다. “아택, 통천교주님을 뵙습니다.”
통천은 그의 내력을 모른 채 소박한 옷차림과 평범한 외모를 보고는 그저 홍균노조를 모시는 시종이라 생각하여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홍균이 말했다.
“이 아택과 네 제자들을 데리고 옥경산으로 가서 사형을 돕겠다고 말하면 될 것이다.”
통천은 생각했다. ‘사부님께서 나더러 이 어린 장수를 데리고 사형을 찾아가 돕게 하신다면, 옥두와 다보도 자연스럽게 합류할 수 있겠구나. 사형을 돕는 형식이니 내 체면도 서고 전쟁에도 참여할 수 있으니 역시 사부님은 생각이 깊으시구나.’
통천은 흔쾌히 승낙하고 아택과 함께 돌아갔다. 청허는 사부가 준 비급을 챙겨오지 않았기에 도도와 묵묵에게 비급을 자운산으로 가져오라고 전했다.
비급을 가져온 도도와 묵묵은 주인이 전쟁터에 나간다는 말을 듣고 자신들도 따라가겠다며 청허 곁에 남았다.
통천은 돌아간 후 옥두와 다보 등에게 아택과 함께 옥경산으로 가서 차출을 기다릴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떠나기 전 통천은 청허를 잠시 물리고 자신의 제자들에게 당부했다.
“전투를 잘 치르도록 해라. 마계의 마지막 홍추 두 마리는 내가 이미 손에 넣었으니 더이상 적우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다. 나를 위해 기개를 떨쳐 보이고, 저 요진만 계속 돋보이게 두지 마라! 알겠느냐!”
제자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명을 받듭니다!”
그 후 통천은 다시 청허를 앞으로 불러 말했다.
“아택아, 나는 함께 가지 않겠다. 내가 서신 한 통을 써서 다보에게 들려 원시천존에게 전할 것이니, 그도 네가 노조께서 내게 보내신 사람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어 아택의 귓가에 다가가 웃으며 속삭였다.
“너는 노조께서 내게 보내신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우리 집 형제들을 좀 잘 보살펴 주거라.”
청허가 듣고 속으로 통천의 이런 수법이 아주 우스웠지만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엄숙하게 “아택이 명을 받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아택은 옥두와 다보 등과 함께 옥경산으로 향했다.
도중에 도도와 묵묵은 수다를 떨었다. 도도가 웃으며 말했다.
“묵묵아, 지난번에 우리 주인님 부인을 찾아주자고 했잖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 주인님께 어울리는 여신선은 딱 한 분뿐이야!”
묵묵이 무심하게 물었다. “누군데?“
도도가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당연히 사주 제일 미인인 옥탁선자(玉琢仙子)지!”
묵묵이 대꾸했다.
“사주 제일 미인인 건 맞지만, 우리 주인님하고는 접점이 전혀 없는데 가능하겠어? 주인님이 원해도 그쪽에서 싫다 할걸.”
도도가 장담했다.
“방법이 있지! 오늘이 8월 15일이잖아. 일 년 중 달빛이 가장 좋은 날, 옥탁선자는 늘 곤륜산 약수(弱水) 가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보며 춤을 춘대!”
묵묵이 눈을 반짝이며 무언가 떠올린 듯 말했다.
“약수라고? 약수에 신기한 공능이 있다고 들었어. 약수에 빠진 남자 신선은 물 밖으로 나와 처음 본 여자 신선에게 무조건 반하게 된다며? 그때 여신선도 남자를 쳐다보면 두 사람 사이에 연정의 뿌리가 내려져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된다고 하던데! 정말이야”
도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늘이 저물어가고 앞이 바로 곤륜산 지계(地界)야…….”
두 사람은 주인의 평생대사를 위해 또 한 가지 꾀를 냈다.
도도의 말은 허언이 아니고 실제로 곤륜산 약수에는 그런 신비한 힘이 있었다. 옥탁선자는 매년 8월 15일이면 그곳에서 춤을 추었다.
해질녘 곤륜산의 밤빛은 몽롱하고, 달은 살며시 나뭇가지 끝에 걸려 있었다. 약수는 거울처럼 맑은 달을 비추고 있었으며, 옥탁선자가 훨훨 날아와 마침 약수 옆 오동나무 가지 위에 내려앉아 춤을 추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저녁을 먹고 산책 중이던 요진이 약수 가에 다다랐다. 물속에 비친 옥탁선자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춤사위에 넋을 잃고 감상했다.
요진은 자신도 모르게 춤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이때 아택 일행이 마침 구름을 타고 약수 상공을 지나가고 있었다. 도도가 갑자기 소리쳤다.
“앗! 주인님! 큰일 났어요! 사조(師祖)께서 주신 신통 비급을 구름 아래로 떨어뜨린 것 같아요!”
아택이 듣고 놀라 “어디로 떨어졌느냐?”라고 물었다.
묵묵이 “제가 보니 방금 물속으로 무언가 떨어진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
청허는 다급히 물 아래로 내려갔다.
도도와 묵묵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이제 주인님이 옥탁선자와 사랑에 빠질 거라 확신했다.
이때 약수 옆에서는 또 재미있는 광경이 벌어졌는데, 옥탁선자가 한창 춤을 추다가 약수에 비친 그림자 속에서 또 다른 그림자를 발견한 것이다. 그 그림자도 그녀를 따라 춤을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옥탁선자가 강가 쪽을 바라보니,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여인이 있었는데 춤사위가 무척이나 뻣뻣하고 조금도 아름답지 않았다. 이에 옥탁선자는 춤을 멈추고 더는 추지 않았다.
요진은 이 달빛 아래 깊이 취해 있다가 무심결에 힐끗 보니 수면의 그림자가 더 이상 추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오동나무를 돌아보며 왜 추지 않느냐고 막 물으려던 찰나, 뜻밖에도 저 옥탁선자가 경멸과 비웃음이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 보더니 아는 체도 하지 않고 날아가 버렸다. 요진은 그 자리에 남겨져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마침 아택이 약수 그곳으로 내려왔다. 그 책이 물속에 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여 기운차게 약수 속으로 뛰어들었다.
물보라 소리를 들은 요진은 그제야 방금 상황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상대방이 자신을 동시효빈(東施效顰 동시가 미인 서시를 흉내내 인상을 찡그리는 모습이 보기 흉했다는 이야기)이라며 멸시한 것이다.
요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 춤이 그렇게 보기 흉한가?’
물속에서 책을 찾지 못한 아택이 밖의 소리를 듣고 도도와 묵묵인 줄 알고 물 밖으로 나왔다.
막 물 위로 올라온 아택은 한눈에 요진을 보게 되었다. 요진은 그곳에서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춤사위가 못내 우스워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옥탁선자가 자신 때문에 춤을 포기했다는 생각에, 자신이 다른 사람의 광대 노릇을 한 셈이니 정말로 우스웠던 모양이다. 그녀는 약수 옆에 앉아 눈물이 나올 정도로 웃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요진은 아택의 눈에 하늘 끝닿을 만큼 아름다워 보였다. 아택은 여태껏 한 여인이 이토록 밝고 유쾌한 웃음소리를 내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뭐랄까, 비록 아택이 약수에 빠졌기에 요진에게 큰 호감을 느낀 것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남에게 추하다는 멸시를 당하고도 이토록 크게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여인은 아마 이 사주(四洲)를 통틀어 오직 요진 여선 한 사람뿐일 것이다.
달빛이 쏟아지는 곳에서 순진하고 영롱한 얼굴이 드러났고, 인중에는 매화 한 송이가 은은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단 한 번의 눈길이었으나 그것은 아택의 마음속에 정(情)의 뿌리를 깊이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안타깝게도 요진은 아택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바탕 웃고 난 뒤, 자기 혼자 망신당한 것으로는 부족했는지 이 재미있는 일을 청란과 희화에게도 알려주고 싶어 서둘러 돌아가 버렸다.
아택은 구름 위로 돌아왔다. 뺨이 붉게 달아오르고 넋이 나간 듯한 주인의 모습에 도도는 계획이 성공했음을 확신했다. 그러고는 “책 여기 있어요, 안 떨어뜨렸나 봐요!”라며 품에서 책을 꺼내 놓았다. 아택은 “다행이구나”라고 말하며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일행은 원시천존의 옥경산에 도착했다. 내력을 설명하자 천존은 동굴에서 쉬라 일렀다.
아택은 도도, 묵묵과 같은 동굴에 머물렀다. 두 동자는 주인님이 물에서 나온 뒤로 웃음을 머금다가도 괴로운 듯 미간을 짚는 모습을 보며 물었다.
“주인님, 왜 그러세요?”
아택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머리를 세게 흔들어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도도가 조심스레 물었다.
“주인님, 혹시 물가에서 춤추는 선자를 보셨나요?”
아택이 “그게 무슨 말이냐?”라고 묻자 도도는 “아뇨, 그냥 8월 15일에 춤추는 선자가 나타난다고 들어서요”라고 얼버무렸다.
아택이 나직이 말했다.
“춤추는 선녀는 보지 못했지만, 어떤 처녀가 웃는 모습은 보았다. 아주 아름답게 웃더구나.” 말을 뱉고는 아차 싶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
묵묵이 속삭였다.
“망했다, 사람을 잘못 본 거 아닐까?”
그때 한 동자가 차를 내오며 말했다. “택 장군님, 내일 진시(辰時)에 평남원수가 군대를 이끌고 이곳으로 와 합류할 예정입니다. 그때 함께 출발하시면 됩니다.”
아택은 “알았다”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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