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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개지에 담긴 인생관

옥수(玉樹)

【정견망】

《홍루몽(紅樓夢)》에는 매우 음미할 만한 대목이 있다. 대관원(大觀園)의 여인들이 함께 버들개지(柳絮)를 소재로 시를 읊는 장면이다. 버들개지는 늦봄에 흔히 볼 수 있는데 가볍고 희며 나부끼다가, 바람을 따라 일어나고 바람을 따라 떨어진다. 그러나 똑같은 버들개지가 보는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로 나타난다.

임대옥(林黛玉)이 버들개지를 보면서 느낀 것은 떠돌아다님, 의지할 곳 없음, 기구한 운명[薄命]과 처량함이었다. 반면 설보차(薛寶釵)가 본 것은 힘을 빌림, 기세를 탐, 상승과 자제(自持)였다. 똑같은 한 뭉치의 버들개지가 이토록 두 가지의 인생관을 비추어 내고, 외계(外界)에 대한 사람 마음의 서로 다른 이해를 비추어 낸다.

임대옥의 《당다령·버들개지(唐多令·柳絮)》는 시작부터 쇠잔한 풍경을 그린다.

“백화주(百花洲)에 떨어진 꽃잎,
연자루(燕子樓)에 남은 향기.”

粉墮百花洲,香殘燕子樓。

꽃가루는 이미 떨어졌고 향기는 이미 쓸쓸해졌으니, 본래 봄에 속했던 아름다움이 순식간에 다해가는 사물로 묘사된다. 버들개지는 본래 가볍고 사랑스럽게 쓸 수도 있었건만, 대옥은 기어이 생명의 시듦과 무상(無常)함을 보았다.

그녀는 이어서 적었다.

“둥글게 뭉쳐 공이 되었네.
떠도는 신세는 박명한 삶,
그리움도 풍류도 다 헛일.”

一團團逐對成毬。
飄泊亦如人命薄,
空繾綣,說風流。

버들개지가 한 뭉치씩 바람을 따라 구르는 것은 겉보기에는 쌍을 이룬 듯하나 실은 뿌리가 없고 방향이 없으며, 그저 바람에 이리저리 불려 다닐 뿐이다. 남들은 혹 이 정경이 풍류 있고 운치가 있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대옥은 그 속에서 ‘박명(命薄)’을 보았다. 그리움과 풍류도 한낱 헛일에 불과하며, 아름다움 뒤에는 의탁할 곳 없는 또돎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임대옥의 민감함과 깨어있음이다. 그녀는 버들개지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 뒤에 숨어 있는 슬픔을 본 것이다. 그녀는 모든 번성한 정경이 결국에는 흩어질 것이고, 모든 만남은 결국 헤어질 것이며, 모든 가벼움 뒤에는 뿌리 없는 아픔이 있음을 보았다. 그래서 그녀는 노래한다.

“풀이라도 슬픔은 아는 듯,
푸른 청춘은 백발이 되었네!”

草木也知愁,韶華竟白頭!

그녀의 눈에 버들개지의 희디흰 빛깔은 순수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청춘이 아직 남아있지만 이미 백발의 탄식을 자아내는 것처럼 보였다.

가장 깊은 애상은 “버들개지의 생 그 누가 거두는지(歎今生誰舍誰收)?”라는 구절에 있다. 이는 버들개지의 질문이자 사실 대옥 자신의 질문이기도 하다. 부모를 여의고 가부(賈府)에 기탁해 사는 한 여인이 겉으로는 번화함 속에 몸을 두고 있으나, 마음속에는 늘 귀의할 곳 없다는 느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결국 어디로 귀착될지 알지 못했고, 이 세상에 과연 누가 진정으로 자신을 거두어주고 알아주며 아껴줄지 몰랐다.

마지막 구절

“춘풍에 맡긴 몸 봄조차 아랑곳 않고,
그대 뜻대로 가는 길 잡아두긴 어려워라.”

(嫁與東風春不管,憑爾去,忍淹留)

에서는 무력함을 극치로 표현했다. 버들개지를 춘풍에 맡겼으나 책임지지 않고, 봄이 그것을 잉태했으나 봄 역시 그것의 귀숙(歸宿)을 상관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바람을 따라 가야만 할 뿐 머무를 수 없다. 여기서 ‘춘풍’은 자연의 바람이자 운명의 바람이다. 대옥이 본 것은 생명이 운명에 밀려 흘러가며, 인간 스스로는 주재할 힘이 없는 처량함이다.

이와 대비해보면 설보차의 《임강선·버들개지(臨江仙·柳絮)》는 완전히 다른 기상을 보여준다.

그녀는 첫머리에 이렇게 적었다.

“백옥당 앞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니,
봄바람에 휘감겨 골고루 퍼지누나.”

白玉堂前春解舞,東風卷得均勻

똑같이 바람에 따라 날리는 버들개지건만 보차가 본 것은 떠돌아다님이 아니라 춤추는 것이었고, 어지러운 것이 아니라 골고루 감김이었다. 그녀의 눈에 봄바람은 무정한 존재가 아니라 빌려 쓸 수 있는 하나의 힘이었다. 버들개지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 봄바람 속에서 자태를 펼치고 있다.

이어서 그녀는 “벌과 나비처럼 어지러워라. 물 따라 흐르기도 하지만, 먼지처럼 가라앉지도 않네(蜂團蝶陣亂紛紛。幾曾隨逝水,豈必委芳塵)”라고 적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버들개지를 보면 꽃이 지고 물이 흐르며 땅에 떨어져 먼지가 되는 것을 연상하기 쉬우나, 보차는 일부러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녀는 버들개지가 꼭 물을 따라 사라지는 것도 아니요, 반드시 먼지 속으로 떨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여기에는 매우 강한 자아 긍정이 담겨 있다. 설령 몸이 버들개지와 같을지라도, 자신을 오직 시들어 사라질 존재로만 단정 지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하편(下片)은 보차의 인생 태도를 더욱 극명히 드러낸다.

“천 갈래 만 갈래 한결 같아서,
뭉치고 흩어지고 멋대로라네.”

버들솜이 비록 모이고 흩어짐이 무상할지라도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외적인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인정이 어떻게 이합(離合)하든, 운명이 어떻게 안배되든 간에 자신의 내재적 본질을 쉽게 바꾸지 않는 것이다. 이는 보차의 성격 중 가장 두드러진 면모인 중후함, 지킴[持守], 원융(圓融)함이며 외계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다.

“뿌리 없다 비웃지 말라(韶華休笑本無根)”는 구절은 특히 힘이 있다. 버들개지는 뿌리가 없어 본래 사람들에게 가볍게 여겨지기 쉽고, 봉건사회에서 청춘의 여인이 의지할 곳 없으면 운명에 좌우되기 쉽다. 그러나 보차는 자신을 가련하게 여김에 빠지지 않고, 도리어 ‘무근(無根)’을 다른 가능성으로 전환했다. 뿌리가 없으니 바람을 타고 일어날 수 있고, 가벼우니 기세를 타고 상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지막으로 이 사(詞)에서 가장 기백 있는 두 구절을 적어냈다.

“좋은 바람에 힘을 얻어서,
청운(青雲)의 높은 하늘로 날아오르리!”

好風頻借力,送我上青雲!

똑같은 바람이건만 대옥이 느낀 것은 바람에 팽개쳐지는 것이었고, 보차가 생각한 것은 바람을 타고 오르는 것이었다. 똑같은 버들개지건만 대옥이 본 것은 명이 기구하여 돌아갈 곳 없음이었고, 보차가 본 것은 기세를 타서 높이 날아오름이었다.

이 두 편의 사(詞)는 표면적으로는 버들개지를 읊은 것이나 실은 인생관을 적은 것이다.

사람이 세상을 바라볼 때는 흔히 단순히 외물(外物) 자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심경, 경험, 성정을 외물에 투사한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 처량함이 있다면 봄바람도 무정한 운명처럼 느껴질 것이고, 마음속에 정력(定力)이 있다면 뿌리없이 떠도는 것도 상승의 계기로 변할 수 있다. 똑같은 일을 만나도 어떤 이는 상실을 보고 어떤 이는 전기(轉機)를 보며, 어떤 이는 무근(無根)을 보고 어떤 이는 자유를 본다. 또한 어떤 이는 운명에 휘둘림을 보고 어떤 이는 기세를 타고 행할 수 있음을 본다.

이것은 단순히 대옥은 소극적이고 보차는 적극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옥의 비애 속에는 그녀의 진실함이 있다. 그녀는 인생을 장식하려 하지 않았고, 의지할 곳 없음을 자재(自在)함으로 말하거나 떠도는 것을 풍광(風光)으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너무나 맑았기에 인간 세상의 피하기 어려운 수많은 차가움을 보았던 것이다. 그녀의 상처는 병이 없으면서 신음하는 것이 아니라, 민감한 영혼이 생명의 무상함에 대해 느끼는 깊은 감수였다.

그리고 보차의 적극성 속에도 그녀의 지혜가 있다. 그녀는 인생이 단지 스스로 상처 입는 것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미 바람이 불어왔다면 바람을 원망하기보다 바람을 빌리는 편이 낫고, 모이고 흩어짐이 무상하다면 비탄하기보다 본심(本心)을 지키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그녀가 버들개지가 뿌리가 없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뿌리 없음’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게 내버려 두지 않으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옥과 보차의 다름은 단지 성격의 차이일 뿐만 아니라 인생관의 차이이기도 하다. 대옥은 맑은 물과 같아서 생명 속의 상처를 비추어 내고, 보차는 따뜻한 옥과 같아서 세상 인정을 받아내면서도 쉽게 부서지지 않는다. 한 사람은 가련하여 아끼게 만들고, 한 사람은 감탄하게 만든다. 한 사람은 인생의 비장함을 적었고, 한 사람은 처세의 강인함을 적었다.

사실 사람마다 세상을 볼 때는 모두 자신의 마음을 가지고 보는 것이다. 세상 자체는 어쩌면 그저 하나의 객관적인 존재일 뿐이겠지만, 사람의 눈에 이르면 서로 다른 색채로 물들게 마련이다. 비바람이 실의(失意)한 자의 눈에는 처량함일 수 있으나 뜻이 있는 자의 눈에는 세례일 수 있다. 지는 꽃이 봄을 아쉬워하는 자의 눈에는 소멸이겠으나 도(道)를 깨달은 자의 눈에는 귀근(歸根, 근본으로 돌아감)일 수 있다. 버들개지가 대옥의 눈에는 떠돎과 박명이었으나, 보차의 눈에는 도리어 좋은 바람이 청운으로 보내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똑같은 바람, 똑같은 변고, 똑같은 인생의 기복을 마주했을 때 과연 무엇을 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단지 자신이 밀려가는 것만을 보는가, 아니면 그 속에서 힘을 빌릴 수 있는 방향을 함께 보는가? 오직 뿌리 없는 비애만을 보는가, 아니면 내재된 변하지 않는 본질을 지켜낼 수 있는가? 외적인 경계가 자신의 마음을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는가, 아니면 외적인 경계 속에서 새롭게 위로 향하는 길을 찾아내는가?

《홍루몽》이 고명(高明)한 점은 바로 한 뭉치의 작은 버들개지를 통해 인간 마음의 만 가지 차별을 그려냈다는 데 있다. 버들개지는 본래 말이 없으나 대옥으로 인해 눈물을 머금게 되었고, 보차로 인해 뜻을 품게 되었다.

한 사람은 “그대 뜻대로 가는 길 잡아두긴 어려워라”를 적었고, 한 사람은 “좋은 바람에 힘을 얻어서, 청운(青雲)의 높은 하늘로 날아오르리!” 를 적었다. 두 구절이 서로 마주하는 것은 흡사 두 가지 인생의 축소판과 같다.

사람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어찌 바람에 따라 흔들릴 때가 없겠으며, 어찌 뜻대로 되지 않는 순간이 없겠는가? 그러나 똑같은 바람이라도 때로는 한 사람을 떨어뜨릴 수도 있고, 한 사람을 받쳐 올릴 수도 있다. 관건은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대하는가에 달려 있다.

대옥은 우리에게 인생의 진실한 처량함을 보게 하고, 보차는 우리에게 처세의 종용(從容, 침착하고 여유 있음)한 힘을 보게 한다. 만약 대옥의 청성함을 지녀 가상에 미혹되지 않으면서도, 보차의 정력(定力)을 지녀 비바람에 꺾이지 않을 수 있다면, 아마도 무상함 속에서 비로소 진정으로 청명하고 확고한 길을 걸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2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