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清風)
【정견망】
낙양(洛陽)성 동쪽의 복숭아꽃 오얏꽃, 날아다니다 뉘 집으로 떨어지는가?
낙양의 처녀는 제 고운 얼굴을 아끼어, 앉아서 지는 꽃을 보며 길게 탄식하네.
올해 꽃 지면 고운 얼굴도 변하거늘, 내년에 꽃 필 때 다시 그 누가 남아 있으랴?
소나무 측백나무 꺾여 땔나무 되는 것을 이미 보았고, 뽕나무밭이 변해 바다 된다는 소리도 다시 들었노라.
옛사람은 다시 낙양성 동쪽에 없건만, 지금 사람은 여전히 지는 꽃바람을 마주하고 있네.
해마다 피는 꽃은 서로 비슷하건만, 해마다 사람은 같지 않구나.
한창 전성기인 붉은 얼굴의 젊은이들에게 말을 전하노니, 모름지기 반쯤 죽어가는 흰머리 노인(白頭翁)을 가련히 여겨야 하리라.
이 노인의 흰머리가 참으로 가련하지만, 그 옛날에는 붉은 얼굴의 미소년이었다네.
꽃다운 나무 아래에서 공자(公子) 왕손(王孫)들과 어울려, 지는 꽃 앞에서 맑은 노래와 기묘한 춤을 추었지.
광록대부(光祿大夫)의 연못과 누대는 비단처럼 화려했고, 장군의 누각에는 신선이 그려져 있었네.
하루아침에 병들어 눕자 서로 아는 이 없어졌으니, 한봄날의 즐거운 놀음은 이제 누구 곁에 있는가?
곱고 아리따운 눈썹(蛾眉)인들 그 시간이 얼마나 가겠는가? 잠깐 사이에 학 같은 흰머리(鶴髮)가 실타래처럼 엉키거늘.
다만 예로부터 노래하고 춤추던 곳을 보아라, 오직 저무는 황혼 속에 새들만 슬피 울 뿐이네.
洛陽城東桃李花,飛來飛去落誰家?
洛陽女兒惜顏色,坐見落花長歎息。(惜顏色 一作:好顏色)
今年花落顏色改,明年花開複誰在?
已見松柏摧爲薪,更聞桑田變成海。
古人無複洛城東,今人還對落花風。
年年歲歲花相似,歲歲年年人不同。
寄言全盛紅顏子,應憐半死白頭翁。
此翁白頭真可憐,伊昔紅顏美少年。
公子王孫芳樹下,清歌妙舞落花前。
光祿池台文錦繡,將軍樓閣畫神仙。(文錦繡 一作:開錦繡)
一朝臥病無相識,三春行樂在誰邊?
宛轉蛾眉能幾時?須臾鶴發亂如絲。
但看古來歌舞地,惟有黃昏鳥雀悲。
유희이(劉希夷, 651년~약 680년)는 당조(唐朝) 시인이다. 일명 정지(庭芝)라고도 하며, 자는 연지(延之, 일설에는 庭芝)이다. 한족(漢族)으로 여주(汝州, 지금의 하남성 여주시) 사람이다. 고종(高宗) 상원(上元) 2년에 진사에 급제했으며, 비파를 잘 탔다. 그의 시는 가행(歌行) 체재에 장기를 보였으며, 주로 규방의 정한을 많이 노래하여 사조와 정취가 부드럽고 화려하면서도 감상적인 어조가 짙다.
유희이의 《대비백두옹》은 격조가 애상적이면서도, 글자는 얕고 쉬우며 품은 뜻은 심원하다. 시 중에서 가장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구절은 단연 다음과 같다.
“해마다 피는 꽃은 서로 비슷하건만, 해마다 사람은 같지 않구나.”
(年年歲歲花相似,歲歲年年人不同)
이 한 구절은 지극히 강렬한 예술적 감화력을 지니고 있다. 이는 아름다운 것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인간의 염원을 함축적으로 표상한다. 소년은 청춘이 영원히 머물기를 바라고, 소녀는 고운 얼굴이 늙지 않기를 바라며, 제왕은 강산이 천고에 이어지기를 바라고, 상인은 사업이 길이 번창하기를 바라며, 농부는 해마다 풍년이 들기를 바라고, 학자는 재기가 오래도록 머물기를 바란다…… 그러나 ‘성·주·괴·멸(成·住·壞·滅)’은 우주의 법칙이기에, 속인들은 이 법칙 앞에서 대개 무능력할 뿐이다. 세상만사는 무상하여, 모든 것이 자신들의 인연과 덕(德)과 업(業)에 따라 변화와 윤회 속에서 끊임없이 대체된다.
이 시의 전반부는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묘사하며 청춘이 쉽게 흘러가 버리는 것에 대한 탄식을 이끌어 내고, 후반부는 백두옹(흰머리 노인)의 일생을 서술한다. 덧붙여 설명할 점은, 이것이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문학적 상상력이 아니라, 작가가 지극히 청정(清靜)한 상태 속에서 백두옹의 일생을 마치 영화를 상영하듯 참으로 생생하게 목격한 것과 같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짧은 한순간에 그가 붉은 얼굴의 소년에서 흰머리로 쇠락해 가는 전 과정을 다 들여다보았다.
말하자면, 작가가 이 시를 쓸 당시의 심경은 매우 고요(靜)했으며, 선정에서 나온 후에 단숨에 매끄럽게 써 내려가 완성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시인은 낙양 처녀의 입을 빌려, 꽃이 피고 지는 현상과 백두옹 인생의 대조를 통해 세상만사의 무상함에 대한 깊은 감회를 토로했다. 그리고 이러한 감회는 사실 우리 생명의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다.
우리 생명이 탄생한 고층 공간은 더없이 아름답다. 비록 그곳도 절대적인 영원은 아닐지라도, 그것이 지속되는 시간은 인류가 속한 이 층차의 공간과 비교하면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길다. 사람은 인간 세상에 올 때 대부분의 기억을 지우지만, 여전히 심층의 느낌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누구나 일생 동안 다소간은 ‘물건은 그대로인데 사람은 바뀌었다(物是人非)’는 감회를 품게 된다. 사실 이러한 감회는 바로 생명이 진정한 본래의 고향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은연한 체현이며, ‘반본귀진(返本歸真)’이 속인이란 이 가장 낮은 층차에서 나타나는 표현이기도 하다.
《홍루몽》에도 이와 유사한 서술이 존재한다.
누추한 방과 텅 빈 대청, 당년에는 홀(笏)이 침상에 가득했거늘,
시든 풀과 마른 버드나무, 예전에는 노래하고 춤추던 마당이었네.
거미줄은 조각한 들보에 가득 엉켰고, 푸른 사창(紗窗)은 이제 또 봉창에 거칠게 발라졌구나.
연지 장분 한창 짙고 향기롭다 말한 지 얼마 지났다고, 어찌하여 두 관자놀이는 또 서리처럼 하얗게 변했는가?
어제는 황토 언덕 위에서 백골을 떠나보냈는데, 오늘 밤엔 붉은 등 장막 아래서 원앙이 누워있구나.
금이 상자에 가득하고 은이 상자에 가득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거지가 되어 사람들의 비방을 받네.
타인의 목숨이 길지 못함을 바야흐로 탄식하더니, 제 한 몸 돌아와 초상을 치르게 될 줄 어찌 알았으랴!
자식을 훈육함에 법도가 있었다 한들, 훗날 억센 도적이 되지 않으리라 장담하겠는가?
명문가(膏粱)를 골라 시집보냈거늘, 기생집(煙花巷)으로 흘러 들어갈 줄 그 누가 뜻했으랴!
벼슬아치 사모가 작다고 탓하더니, 마침내 칼을 쓰고 쇠사슬을 메게 되었구나.
어제는 찢어진 옷의 추위를 가련해 하더니, 오늘은 자색 관복 소매가 너무 길다고 싫어하네.
어수선하고 소란스럽게 네가 방금 노래를 마치자 내가 무대에 오르니, 도리어 타향을 고향이라 여기는구나.
참으로 황당하도다, 끝끝내 모두 타인을 위해 혼수 옷을 짓는 꼴이 되었으니!
자세히 음미해 보면, 이것이 《대비백두옹》과 서로 이곡동공(異曲同工, 다른 곡조이나 묘한 재주가 같음)을 이루지 않는가?
사실 반본귀진은 인간 내면 깊은 곳의 불성(佛性)이자, 사람이 세상에 온 진정한 목적이다. 과거의 수련 법문은 작아서 부원신(副元神)을 닦았으나, 오늘날 대법(大法)이 널리 전해지고 있으니 사람이 진심으로 착실히 수련할 수만 있다면, 생명 본연의 참된 고향으로 진짜로 돌아갈 희망이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30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