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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춘에서 한국에 온 미녀의 드라마틱한 인생 (2)

【정견뉴스】


찾고 또 찾다

섭란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전법륜(轉法輪)》책을 구할 수 있을까?’

1999년 이전에파룬궁은 중국 대륙을 풍미했다. 파룬궁 창시인 리훙쯔(李洪志) 선생님께서 세 차례나 요녕성 대련에 오셔서 학습반을 개최했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대련에서는 중공의 파룬궁 박해가 있기 전에 수십만 명의 사람이 수련했다. 대학, 고등학교에서 수 천 수 만이 수련했다. 하지만 중공이 탄압한 후 지난날 도처에서 볼 수 있었던 연공장은 진작에 종적을 감추었으니 어디 가서 이 책을찾을 것인가?

섭란은 대련에 아는 사람이라곤 오직 사촌 언니 한 명뿐이었는데 집에서 차로 2시간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하지만 사촌 언니도 대련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그곳의 상황을 잘 알지 못했다.

‘모르는 사람을 찾을 수밖에’ 섭란은 머릿속에서 찾아보았다. ‘어떻게모르는 사람에게 이 책을 찾을 수 있을까?’ 한 사람을 생각했다. 시장에갔을 때 늘 어느 아주머니에게서 채소를 샀다. “그분은 믿을 수 있을 거 같았어요. 사람이 순박해서. 매번 물건을 살 때 나도 잔돈을 많이 주었고 그녀도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녀가 시장에 가서 “아주머니, 파룬궁이라는 책을 알아요? 그 책을 좀 보고 싶은데.”

아주머니는 듣더니 입을 가리고 웃었다. “동생, 나는 네가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어. 내 시누이가 바로 이것을 연마하고있어.”

“좀 빌려볼 수 있어요?” 아주머니는 승낙했다.

다음 날 섭란이 아침 일찍 시장에 갔지만 아주머니는 책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섭란은실망하지 않고 생각했다. ‘(파룬궁에 대한) 평판이 이렇게 긴장되고 박해도 심하니 아마 아주머니가 나를 시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 날 섭란이 또 가자 아주머니는 책을 전해주었다. 책은 남색의 종이주머니에단단히 싸여져 있었다. 기억하기에 그날은 2012년 9월 13일이었다.

그날 오후 3시경 섭란은 집에 돌아와 책을 읽기 시작했다.

법을 얻은 희열

“책을 보다 보니 밤 한시반이 되었어요.” 그녀는 말했다. “삼화취정까지 보았는데 너무 묘하다고 생각했어요. 어쩜 이렇게 좋을까.”

“내가 수련할 수 있을까?”

“당시 한가지 생각이 있었는데 내가 이 명리정과 원한을 가지지 않고 이 가족과 얽히기를 원하지 않는다.”

책을 덮고 그녀는 다른 공간의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매우 미묘하고듣기 좋았는데 또 곡조가 있었어요, 나는 듣다가….”

“책을 본 7일간 나는 다른 꿈을 꾸었어요. 꿈에서 신선이 한폭의 그림에서 내려왔고 또 남색, 황색의 부동한색의 옷을 입은 선인들 십여 명이 바다 위에서 걷는 것을 보았어요.”

“책을 보고 사부님 사진을 보니 사부님의 눈동자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고 어떤 때는 미소를 짓는 것 같았어요.”

섭란의 집은 커서 140평방미터이다.거실을 걸어갈 때도 책을 가지고 갔고 주방을 가는데도 책을 거실 소파에 놓았고 이런 식으로 책을 보았다. 방안으로 돌아와야 하면 책을 가지고 방안에 두었다. “책을 들고이 책이 너무 진귀한 것임을 알았어요. 그래서 감히 손에서 놓지 못했죠.”

일주일 후 섭란은 어떻게 연공할까 고민했다. “어디 가서 배워야 하나. 누가 어떻게 연공을 가르칠까.”

결과적으로 신당인 TV가 마침 공법 비디오를 틀고 있었다.

“당시 저는 눈물을 흘릴 뻔했어요. 속으로 내가 무엇을 하고 싶으면어떻게든 그것을 하게 해주는구나.”

《/span>전법륜을 다 보고 나서 섭란은 자기의 하늘이 활짝 열리는 것을 느꼈다 “회색에서 남색으로 변했어요.” 베란다로 걸어가서 보니 느낌은 와, 알고 보니 지구가 이렇게 작구나.

그녀의 마음을 누르던 남편 시어머니와의 원한은 멀리 떠나버린 느낌이었다.

그녀는 사람이 변한 것처럼 집에서 걸어 다니며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고 하하 웃었다.

하지만 대륙에서 박해가 이렇게 심하니 내가 파룬궁을 자유로이 수련하려면 국내에서는 오래할 수 없다는 것을 섭란은알았다.

한국으로 돌아오다

아이가 한 살 반 정도 되었을 때 섭란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는데 남편이 직장을 잃은 것이다.

섭란의 남편은 원래 보수가 높은 자리여서 생활에 여유가 있었다. 호화아파트 17층에 살았다. 현재는 고층에서 지하 일층으로 내려왔으니심리적인 충격이 매우 컸다. 남편은 아주 의기소침해져서 집에서 게임이나 하고 직장 찾을 생각도 하지않았다.

할 수 없이 섭란은 스스로 직장과 일거리를 찾기로 했다. “안해 본일이 없었어요. 가게청소, 건물청소, 화장실 청소… 다 해보았어요.”

이런 일은 대개 섭란의 남편이 구해준 것이었다.

“남편은 나를 특별히 단속했으므로 내가 밖에 나가서 좋은 일을 찾으면 도망갈까 봐 겁을 냈어요.”

섭란의 남편은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그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섭란은이런 힘든 일을 하며 따랐다.

한번은 일을 하는데 해물 국수집에서 설거지를 했다.

원래 이것은 그녀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었다. 결혼 전 섭란은집안의 막내로서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녀가 대련에서 아이를 낳으려고 기다릴 때도 남편은 사치스럽게돈을 썼으며 그녀는 지금까지 돈이 부족할 때가 없었다.

하지만 섭란은 현재 파룬궁을 수련하니 만난 일을 모두 《/span>전법륜에서 말한 진선인의 표준으로 가늠해야 했다.

이 국수집에서 섭란은 설거지뿐 아니라 다른 무슨 일이든 기본적으로 다했다. 다른사람이 하기 싫어하는 힘든 일도 그녀는 다 했다.

“떼어 낸 해산물 껍데기 쓰레기 한 포대가 최소 20킬로그램인데 하루에8-10개 씩 나왔어요. 저는 자발적으로 그 쓰레기봉투를버렸죠.”

섭란은 일을 하는 한편 기억나는 《/span>전법륜중의 한 단락을 외웠다.

“나중에 저는 피곤함을 느끼지 않았어요.”

그런데 국수집의 남자 매니저는 그녀에 대해 매우 까다롭게 굴었다.

막걸리 통을 놓는 것은 여자가 기본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며 이것은 남자 직원의 일이다. 하지만 매니저는 섭란더러 하라고 했다. 한번은 그녀가 거절했다. “당시 막 생리할 때였는데 그는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고 화를 냈어요.”

“사장님은 나를 키우려고 생각하여 국수를 삶도록 하고 주방장 보조가 되게 했어요.”하지만 섭란은 남자 매니저가 자기를 배제시키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걸 알고 떠났어요.”

이 3개월 일하는 동안 섭란은 500여만원의 돈을 벌었다,

혼자서 아이를 데리고 생활

섭란의 남편은 심리적으로 풀이 많이 죽어 청주의 여동생에게 이사를 가기로 결정했다. 섭란은 이렇게 다른 사람에 의지하여 생활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자기는 이곳에 계속 남아 일을하고 동시에 혼자서 아이를 키우기로 했다.

생활은 매우 힘들었다. 섭란은 세를 들어 살기 시작했으며 나중에 끊임없이이사를 갔다. 중간에 전전하며 5곳을 돌아다녔다. 2년간의 겨울에 섭란과 아이는 솜옷을 입고 난방이 없는 집에서 겨울을 지냈다.

“남편은 두 번 찾아왔어요. 처음 왔을 때는 집에 쌀이 없었어요. 남편은 당시 참을 수 없어 눈물이 나려고 했어요. 나는 오히려 담담했지요.”

섭란의 남편과 시어머니가 두 번째 왔을 때 밥을 먹지 못했다. “제가이렇게 맨바닥 같이 누추한 곳에 사는 것을 보았지요. 우리 네 명은 맨 바닥에서 잠을 잤어요.”

“그는 나의 상황을 보고 내가 변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아내가 줄곧 아이를 데리고 산 것은 자기가 원래 상상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원래 아내가 다른 사람을 만나 잘 지내리라고 생각했었다. 섭란의 남편은 이에 큰 감동을 받았다.

당시 자기가 실업자가 된 것 외에 미국에 있던 이모도 세상을 떠났다. 섭란은“남편이 당시 매우 감개하며 말했는데 인생무상이라 했어요.”

한국 두부가게에서 일하다

나중에 섭란은 수제 두부 공장에서 일했다. 여사장은 50세 정도였는데 이혼했고 딸이 하나 있었다.

섭란은 사장에게 말했다.

“우리 남편은 아이 고모 집에 있는데 내가 이곳에 한동안 일하고 돌아가야 합니다.”

섭란의 처지를 보고 사장은 매우 도우려고 하여 쉬운 일을 주었다. 그녀의일은 반찬을 반찬접시에 나누어 놓고 접시를 가지런히 두는 것이었다. 손님이 오면 자리 배정한 후 반찬을가져다주는 일이었다.

“저는 다른 사람의 일을 도왔고 다른 사람을 이끌고 적극적으로 일했어요. 사장님도안심했죠.” “때로는 제게 주어지지 않은 일도 했어요. 사람들이마음 편하도록.”

“어떤 때는 손님이 돈을 안주고 떠난 일도 있었는데 저는 스스로 찾아보았어요, 나쁜마음이 없는지.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길까?” 파룬궁은수련자에게 끊임없이 경지를 올릴 것을 요구하는데 모순을 만나도 안으로 자기를 향해 찾아야 한다. 섭란은그것을 발견하고 엄격히 파룬궁의 요구에 따라 자기의 부족을 찾을 때에 도망치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 시간이 길어지자 사람들은 모두 섭란과 친해졌다. 어떤동료는 중국의 조선족이었다. 섭란은 그들에게 파룬궁 진상을 말해주고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탈당 조류를말해주며 ‘삼퇴’하도록 했다. 요리사 한 명과 두 명의 서비스 직원이 모두 삼퇴했다.

2004년 대기원에서사설 평 공산당을 발표하여 중국인이 중공의당단대를 퇴출하는 대 조류를 폭발시켰는데 지금까지 3억 명 이상이 퇴출했다.

사장과 지배인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지배인도 섭란을 매우 좋아했다.

“그녀가 내게 무엇을 부탁하든 다 들어줬어요. 눈에 보이기만 하면 즉시일을 했고 매우 근면했어요.”

“먹을 것이 생기면 사장님이 계시면 먼저 사장님께 드렸고 사장님이 없으면 지배인에게 먼저 드립니다. 그리고 다른 동료를 챙깁니다. 층층이 그들에게 공평하게 나눕니다.”

신년을 지냈는데 동료들은 중국 만두가 맛있는 것을 알기에 섭란은 그들에게 밀가루를 반죽하고 소를 만들고 만두를빚어주었다.

보통은 식당의 전면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은 주방에 들어오게 하지 않는데 섭란은 예외였다. “몇몇 요리사들이 모두 저의 조수가 되었어요. 나는 그곳에서 계란을굽고 생선 만두를 만드는데 사용할 새우, 부추, 소를 만들었어요.”

만두 빚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했고 모두 와서 빚었다. 한국사람들도 배웠다. 삶을 때 아주머니도 와서 삶았다. 다 삶자만두가 뜨끈뜨끈해졌고 한 접시씩 받쳐 나왔다.

사람들 모두 매우 기뻐했는데 특히 조선족들이 기뻐했다. 한국에 온 지오래되는데 이런 본고장 만두를 먹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인도 먹었고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

그날 다 합해서 500여 개의 만두를 빚었고 300여 개를 삶았다. 남은 것은 섭란이 사장, 주방장에게 천천히 먹으라고 남겨놓았다.

“저는 그저 사람들에게 기념으로 남겨주려고 했어요.”

섭란은 이미 그곳을 떠나기로 계획했다.

장춘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그녀, 섭란 인생의 다음 정거장은 어디일까?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48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