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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지 전투와 패튼의 기적

글/ 앙악(仰岳)

조지 패튼 장군

1944년 겨울은 2차 대전에 참전한 미군 입장에서 가장 힘겨운 날들이었다. 비록 나치 독일은 이미 점차 패망으로 기울어지고 있었지만 이 시기 미군이 직면한 것은 유럽 대륙에서 수십 년 만의 가장 심한 한파로 한걸음 전진하는 것조차 몹시 어려웠다.

12월 히틀러는 마지막 승부를 걸어 30개 사단을 집결시킨 벌지 전투를 발동시켰다. 예상치 못한 적의 대규모 기습으로 전쟁 초기 미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며 사망자 수만 약 2만 명에 달했다. 이는 2차 대전 역사상 미군이 겪은 가장 치열한 전투 중의 하나였다. 말하자면 승리의 여명이 밝아오기 직전 가장 어두운 시기였다.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경계에 위치한 아르덴 숲은 그 길이만 130킬로미터에 달하는 ‘유령전선’이었다. 이곳은 지형이 워낙 복잡한데다 날씨변화마저 심한 곳이었다. 2차 대전 때 연합군과 독일군은 이곳에서 두 달이 넘게 대치했고 쌍방 모두 전진하기 어려웠다. 1944년 11월 히틀러는 30개 사단을 동원해 이곳에서 강력한 반격에 나섰다. 이곳에 있던 연합군 4개 군단을 몰살해 협상 테이블로 끌고 나오는 것이 목표였다. 만약 이 작전이 성공했더라면 히틀러는 전력을 다해 동부전선에서 소련을 상대할 수 있었다.

당시 연합군 사령부는 보편적으로 독일군이 이미 더 이상의 공격능력이 없을 거라고 보았다. 비록 영국군 정보기관이 일찍이 위험을 경고한 적이 있었지만 연합군 사령부는 이를 주목하지 않았다. 1944년 12월 초 조지 스미스 패튼 장군(George Smith Patton, Jr. 1885—1945)이 이끄는 미 3군이 이미 부근에 도착해 있었다. 그는 솔선해서 독일군의 이상 징후를 발견해 사령부에 경고신호를 보냈지만 그의 의견은 묵살당했다.

12월 16일 새벽 25만의 독일군 정예부대가 마치 밀물처럼 아르덴 숲에서 밀려나왔고 슈네 아이펠(Schnee Eifel) 지역에 있던 미군부대를 공격했다. 별다른 준비가 없었던 전투 초기 미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106보병 사단 2개 연대 약 8천명이 할 수 없이 적에게 항복했다. 유럽 전구(戰區) 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은 긴급히 101 공수부대를 이 지역 교통요지인 바스토뉴로 이동시켜 방어하게 했다. 독일군은 이 소식을 듣고 7개 사단 병력을 대거 집중시켜 포위 공격에 나섰다. 독일군에 비해 연합군은 숫자상으로 5대 1의 약세였고 당시 큰 눈이 내려 항공지원마저 어려워지자 상황이 몹시 위급해졌다.

패튼장군은 마치 이런 상황을 이미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3군단을 몇 개 전술단위로 나누고 휘하의 사단장들을 소집해 미리 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행군하라는 예비명령을 내렸다.

오래지 않아 그는 긴급회의를 소집하는 전화를 받았고 12월 19일 오전 베르됭에 있던 회의장에 도착했다. 현장에서 적의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은 후 그는 깜짝 놀랐다! 독일군의 진격속도가 원래 그가 예상했던 속도를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독일군 선봉부대는 연합군의 주요 보급항인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을 위협하고 있었고 바스토뉴의 아군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회의 도중 여러 장군들의 안색이 어두웠고 회의장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아이젠하워가 분위기 전환을 위해 “현재 상황을 재앙이 아닌 하나의 기회로 여겨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언짢은 표정을 짓지 않길 바랍니다.”라고 말을 꺼냈다.

그러자 패튼이 처음으로 침묵을 깨면서 대답했다.

“젠장, 차라리 저들이 파리까지 가게 배짱 좋게 내버려둡시다. 그리고 저들을 정말로 잘게 씹어서 썰어버립시다. 독일군이 제아무리 하늘로 날고 쥐구멍으로 들어가는 재주가 있더라도 제가 다 잡아낼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마치자 회의에 참석한 장군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고 실내의 긴장된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아이젠하워가 또 말했다.

“현재 가장 큰 난제는 바스토뉴에 고립된 101 공수사단을 구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곳을 적에게 뺏긴다면 아주 성가실 겁니다. 여러분들 중 누가 이 임무를 맡을 수 있겠습니까?”

이때 회의장 분위기가 다시 조용해졌다. 오직 패튼 장군만이 즉각 나서며 대답했다.

“48시간 안에 3개 사단을 동원해 반격할 수 있습니다.”

패튼이 이 말을 꺼내자 회의장이 순식간에 술렁거렸다. 왜냐하면 모두들 이것은 아주 어려움이 큰 행군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잡한 지형 위에서 몇십 만에 달하는 방대한 부대의 전진방향을 90도로 조정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현재 기후가 몹시 열악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런 악조건에서 48시간 내에 백 킬로미터가 넘는 장거리를 주파한다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한 임무였다.

아이젠하워가 다시 대답했다.

“장군 농담하지 마시오, 이런 날씨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오.”

하지만 패튼은 속으로 다 생각이 있었고 반드시 가능하리라 여겼다. 그가 보충해서 말했다. “제게 3개 사단 병력만 있으면 충분히 현지 독일군을 기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 있게 나오자 아이젠하워도 그의 임무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스토뉴 전투의 기적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패튼장군은 곧장 전군에 진군 명령을 내렸다. 그는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때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한차례 위대한 성공을 하리라는 강한 믿음이 있소. 이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배치하신 전투라고 믿소.”

그러나 3군의 행군 길은 계속해서 짙은 안개와 폭설을 만나면서 모든 길이 다 얼어붙었다. 차량도 천천히 전진할 수밖에 없었고 하루 종일 겨우 10여 킬로미터를 전진하는데 그쳤다. 이날 밤 패튼이 앞으로 며칠간 일기예보를 확인해보디 계속해서 큰 눈이 온다고 했다. 이때 그의 부하 장교들은 앞을 다퉈 잠시 행군을 중단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패튼은 밤낮으로 중단하지 말고 전진해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아군 병사들이 지금 하나하나 죽어가고 있으니 우리는 더 기다릴 수 없다. 나는 야간행군으로 아침에 공격을 시작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럼 살아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패튼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공격을 시작하기 전날 밤 모두들 깊은 수심에 빠졌다. 하지만 나는 마치 새벽의 그 서광이 영원할 것 같았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 나는 영원히 그 빛이었다. 우리는 또 반드시 승리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길 바란다.”

나중에 그는 또 군종목사인 제임스 오닐 대령을 불러 신의 도움을 비는 기도문을 작성하게 했다. 당시 참모 마틴의 기록에 따르면 이날 저녁 패튼 장군이 각 부대를 순시했으며, 길을 걷다가 겸손하게 땅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며 신께 기도를 올렸다. 이 장면은 마치 고대 그리스의 영웅인 아킬레우스가 트로이 성벽 앞에서 주피터 신에게 맑은 날씨를 달라고 기도하자 짙은 안개가 흩어졌던 것과 같았다. 그의 기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전지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아버지, 우리와 싸우고 있는 이 무자비한 비를 그치게 해주십사 겸손하게 당신의 크나큰 선함을 간청 드립니다. 우리에게 전투하기에 적당한 날씨를 허락해주옵소서. 우리 군인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 주시고 주님의 권능으로 무장한 우리가 승리에서 승리로 나아가 원수들의 억압과 사악함을 무찌르고 사람과 국가 사이에서 주님의 정의를 확립할 수 있게 하소서. 아멘.”

이 기도문이 마음에 든 패튼은 오닐 대령에게 이 기도문을 카드로 대량 제작해 전군의 장병들에게 나눠주고 함께 기도하도록 했다. 그러자 이튿날 아침 기적적으로 날씨가 쾌청해졌고 패튼의 제3군은 계속 전진할 수 있었다.

1944년 12월 25일 저녁 제3군 제4기갑사단이 성공적으로 바스토뉴에 도착해 포위당한 미군을 구원할 보급로를 개척했다. 하루 동안 독일군과 격전을 치른 후 그들은 이미 시내로 들어가는 통로를 든든하게 확보했다. 또 계속해서 시내에 있던 부상자들을 밖으로 운반했다. 후속부대가 순조롭게 도달하면서 바스토뉴 방어는 확고해졌다.

한편 독일군은 이 소식을 들은 후 대군을 집결해 반격에 나섰다. 며칠에 걸쳐 17차례나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지만 모두 헛수고로 끝났다. 독일군 사령관 룬트슈테트(Rundstedt)는 패튼이 직접 전선에 나와 있다는 말을 듣고는 “모든 게 끝났구나!”라며 탄식했다.

전쟁이 끝난 후 언론매체는 끊임없이 패튼이 바스토뉴를 해방시킨 전투성과에 대해 보도했고 그가 이끈 제3군이야말로 미군 역사상 최강 전력의 하나로 인정했다. 하지만 패튼은 개인적인 전공을 탐하지 않았다. 그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 사명을 완수하도록 도와주신 것이지 나는 개인적으로 말할 게 없다.”고 겸손해 하며 모든 공을 부하들에게 돌렸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분투

1945년 초 독일군이 전면적으로 퇴각하면서 벌지 전투는 끝났고 마침내 연합군의 최종 승리가 눈앞에 다가왔다. 그러나 패튼장군은 이때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여겼으며 사령부에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소련공산집단은 미래에 가장 큰 위협이 될 것이며 미래에 미소(美蘇) 사이에 반드시 전쟁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하기 전에 이 전쟁을 끝내야 합니다.”

하지만 연합군 수뇌부는 소련군에 의지해 나치 독일의 최후저항을 제거하고 그 대신 일부 병력을 태평양전쟁으로 이동시키려 했다. 패튼이 대담하게 몇 가지 진공계획을 제안했지만 모두 부결되었다. 나중에 그는 일기에서 떨리는 글씨로 미래 정세를 걱정했다.

“미국의 미래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세계의 운명은 장차 어찌 될 것인가?”

“내가 두 눈을 부릅뜨고 공산집단의 세력이 날로 확장되는 것을 보니 세상에 누가 있어 제지할 수 있는가?”

이 시기 패튼은 심정이 아주 복잡했다. 그가 쓴 일기와 가족에게 보낸 편지가 과거보다 더 많아졌다. 일기에서는 또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신께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알려달라고 청했다.

먼 앞을 내다본 패튼의 원대한 식견이 연합군 사령부의 중시를 받진 못했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소련 공산집단의 군대는 끊임없이 점령지역 내에서 살상과 약탈, 자원탈취를 자행하면서 또 끊임없이 나치당의 엘리트들을 공산당에 가입시켰다. 패튼장군은 군대에 점령 지역의 물자를 보호하게 했고 제3군을 개방해 전쟁 이후 정처 없이 떠돌던 난민들을 받아들이게 했다. 그러자 불과 몇 달 사이에 백만 명이 넘는 난민들을 구조했다.

그는 또 온갖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전직 나치당 엘리트인사들을 전후 정부 관직에 임명해 독일에 대한 코민테른의 침투를 막아냈다. 그는 마치 전투에서 적군을 상대로 작전하는 태도로 끝까지 분투했다. 1945년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해이자 그의 마지막 일 년이었다.

생의 마지막 해에 그는 프랑스에 가서 옛 전우였던 드골장군을 방문해 2개의 훈장을 받았고 또 명예 파리시민이란 호칭을 받았다. 드골 장군은 패튼 제3군이 거둔 성과에 대해 격찬했다. 왜냐하면 패튼이 프랑스 남부에서 독일군을 휩쓸어준 작전 때문에 드골이 순조롭게 파리에 입성해 조국을 해방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패튼은 이곳에서 베르사유 궁전을 방문하고 태양왕 루이 14세가 남긴 소중한 예술품들을 감상했다. 드골은 또 패튼을 앵발리드로 데려가 나폴레옹 묘지를 참배하게 했다.

나중에 패튼은 부대를 순시하면서 몇 차례 의외의 사건들을 만나게 된다. 그는 일기에서 자신이 앞으로 세상에서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걱정을 내비췄다. 당시에 그는 아마도 보다 큰 사명을 지닌 내생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의 개인 전기를 쓴 작가는 서문에서 그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가장 아름답게 정리했다.

“패튼은 탁월했으며 평생 한 가지 위대한 사명을 완성하려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바로 과거 기독교 성도(聖徒)들이 성배의 향방을 찾기 위해 그랬던 것처럼 전심전력을 다해 이 모든 것을 실천했다. 그는 줄곧 노력하면서 해이해지지 않았고 생명의 마지막까지 줄곧 자신에게 자만하지 말라고 수시로 일깨워주었다.”

참고자료:
《巴顿将军新传》马丁·布拉曼森 原著,黄文范 译,黎明文化事业公司,民国七十七年四月出版
《巴顿将军》雀尔斯·怀登 原著 朱大明 译 世新出版社印行
《巴顿将军私人日记》(法)包尔斯·劳伦 著 黄昱 译 时代文艺出版社@*#

(에포크타임스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0/11/11/n12541883.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