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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무춘풍(天韻舞春風): 당나라 왕유의 《조명간(鳥鳴澗)》

【정견뉴스】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감상할 작품은 널리 인구에 회자되는 당나라 왕유가 지은 ‘조명간(鳥鳴澗)–골짜기에서 새가 울다’입니다.

왕유는 당나라 측천무후 장안(長安) 원년에 태어나 현종 개원(開元) 연간에 진사에 급제했는데 당시 나이가 21세에 불과했다. 만년에는 관직이 상서우승(尙書右丞)에 이르렀다. 왕유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 어린 나이에 뜻을 이뤘고 벼슬길도 상당히 순조로운 편이었다. 하지만 안사(安史)의 난 기간에 강요에 의해 억지로 반란군의 관직을 맡았다는 이유로 반란이 평정된 후 징계를 받아야 했다. 이때부터 번민하고 뜻을 펴지 못하다 만년에는 섬서에 있는 망천(輞川)별장에 은거했다.

왕유는 당나라 오언시(五言詩)의 대표자로 특히 산수전원시(山水田園詩)에 뛰어났으며 서화(書畫)와 음악에도 정통해 ‘문장은 당대의 으뜸이고 그림은 천고의 제일’이란 찬사를 받았다. 이름이 유(維)고 자(字)가 마힐(摩詰)이니 둘을 합하면 유마힐(維摩詰)이 된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정했던 유명한 불교 거사(居士)로 불경 중에 《유마힐경》이 있다. 그 내용은 유마힐 거사가 석가모니의 제자들과 불법에 대해 토론하는 내용이다.

왕유 자신이 이런 이름을 지은 것으로 보아 유마힐을 얼마나 존경했는지 알 수 있다. 때문에 왕유는 또 역사적으로 ‘시불’(詩佛)로 불리는데 이 역시 그가 불교 중에서 수행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왕유는 서른 살쯤 아내를 잃은 후 평생 재혼하지 않았고 30년을 혼자 살았다. 나중에 자신의 집을 기증해 사찰로 만들었고 매일 조정에서 물러난 후 홀로 앉아 경전을 외우며 반(半)은거 상태로 살았다. 불법(佛法)에 대한 이해가 날로 깊어짐에 따라 그의 전원산수시도 자연스레 고도의 맑고 그윽하면서도 조용한 경계(境界)를 띠게 되었고 독자들에게 보다 많은 음미할 공간을 주게 되었다.

이번에 감상할 작품은 왕유의 명작 조명간(鳥鳴澗)이다.

골짜기에서 새가 울다(鳥鳴澗)

사람이 한가하니 계수나무 꽃 떨어지는데
고요한 밤이 되니 봄 산이 텅 비었네
달이 뜨니 산새가 놀랐는지
봄 골짜기 속에서 수시로 우는구나

人閑桂花落
夜靜春山空
月出驚山鳥
時鳴春澗中

첫 번째 구절 “사람이 한가하니 계수나무 꽃 떨어지는데(人閑桂花落)”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람이 한가하다’는 것은 산속에 사는 시인의 내심이 한적하고 조용하다는 것으로 조금의 번뇌나 근심도 없다는 의미다. “계수나무 꽃 떨어지는데”는 그의 마음이 너무나 조용해서 심지어 산속에 있는 아주 작은 계수나무 꽃이 고요한 밤에 떨어지는 소리와 공기 속에서 암암리에 퍼져나가는 맑은 향기마저 모두 관찰하고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고요한 밤이 되니 봄 산이 텅 비었네(夜靜春山空)”은 한밤에 봄 산의 평온하고 공적함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달이 뜨니 산새가 놀랐는지 봄 골짜기 속에서 수시로 우는구나(月出驚山鳥 時鳴春澗中)”은 고요한 봄 산에서 온갖 소리가 고요하고 적막한 가운데 밝은 달이 서서히 올라오며 소리 없이 봄 산을 환히 비춘다. 이에 숲속에 있던 새들이 놀라서 분분히 날아오르며 산골짜기 속에서 이리저리 다니며 수시로 울어대며 깊은 적막을 깨뜨린다.

달이 뜨고 새가 울며 꽃이 지는 이런 ‘움직이는’ 장면은 온 천지가 생생하게 살아 있고 고독하지 않게 한다. “월출경산조(月出驚山鳥)”에서 놀랄 ‘경(驚)’자가 하나가 단번에 봄 산의 고요함을 깨뜨린다.

새가 울고 나면 또 한동안 고요한 적막(寂靜)이 찾아오지만 도리어 “새가 울어 산이 더욱 그윽한(鳥鳴山更幽)” 특징을 드러낸다. 움직이는 화면에서 시작해 고요한 층차로 이끌어 들이니 한밤중 봄 산의 고요한 분위기가 극치에 달한다. 이 시에 사용된 언어는 정련되어 함축성이 아주 강하고 기운이 생생히 살아 있어서 아주 풍부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표현한다. 그렇다면 이 역시 왕유의 내재 경계(境界)를 체현한 것이다!

왕유 시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그의 명 구절 “월출경산조(月出驚山鳥) 시명춘간중(時鳴春澗中)”,“공산불견인(空山不見人) 단문인어향(但聞人語響)”,“명월송간조(明月松間照) 청천석상류(清泉石上流) 죽훤귀완녀(竹喧歸浣女) 연동하어주(蓮動下漁舟)” 등에서 모두 움직임이나 소리를 사용해 한편의 고요하고 아름다운 의경(意境)을 그려낸다.

이렇게 시사(詩詞), 미술, 음악 등 여러 방면의 예술을 종합함으로써 그의 작품은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는” 고도의 미학 경계에 도달했다.

특히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은 중국 전통예술 특히 시와 그림에서는 ‘전신’(傳神 역주: 생생하고 핍진함)과 ‘이형사신’(以形寫神 역주: 겉으로 드러난 형상을 통해 내면의 정신을 표현하는 것)을 강조해왔다는 점이다. 이는 서양 예술과 비교할 때 중국 전통예술이 ‘신운(神韻)과 내함(內涵)’에 더 치중한다는 뜻인데 다시 말해 ‘의(意)’를 표현한 것이다.

왕유는 그의 전원시 중에서 대부분 단순하고 담담하게 경물(景物)을 언급하면서 심원하고 무궁한 의미를 담아냈다. 얼핏 보면 제멋대로 지은 것 같지만 사실은 정교하고 깊은 함축이 담겨 있다. 마치 이 작품에서 “사람이 한가하니 계수나무 꽃 떨어지는데 고요한 밤이 되니 봄 산이 텅 비었네”의 내함을 이용해 사람과 자연이 천인합일(天人合一)하는 조화를 전달한 것과 같다.

왕유는 이처럼 다재다능한 재주꾼으로 청년시절부터 이미 경사(京師 장안)에서 이름을 날렸고 많은 왕공과 귀족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시들은 대부분 노래로 만들어졌고 천하에 널리 전해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은 바로 《안서로 출사하는 원이를 보내며(送元二使安西)》로 이 시는 성당시기 절구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안서로 출사하는 원이를 보내며 (送元二使安西)

위성의 아침 비 가벼이 날리는 티끌을 적시고
객사에는 파릇한 버들 색이 새로운데
권하노니 그대 다시 술 한 잔 드시게
서쪽으로 양관 나서면 더는 벗이 없으리니

渭城朝雨裛輕塵
客舍青青柳色新
勸君更盡一杯酒
西出陽關無故人

이 시는 가곡으로 만들어진 후 지금까지도 송별할 때면 반드시 빠지지 않고 불리는 노래가 되었다.

그렇다면 왕유는 음악에 대해 대체 어느 정도 조예가 있었던 것일까? 전설에 따르면 한번은 그가 낙양에서 화려한 색채의 벽화 《안악도(按樂圖)》를 감상한 적이 있는데 마침 악공들이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을 그렸다. 이 그림을 보던 왕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칭찬했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봤는지 묻자 그는 대단한 작품이라며 그림 속에서 단지 악공들이 어떤 음악을 연주하는 지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몇 번째 악장 몇 번째 곡인지도 볼 수 있노라고 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는 다투어 자세히 관찰해봤지만 아무도 보아내지 못했다. 왕유는 “이 그림에서 악공들이 연주하는 곡은 바로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 제3악장 첫 번째 곡입니다.”라고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에 어떤 호사가가 한 팀의 악단을 청해 현장에서 《예상우의곡》을 연주하게 했는데 과연 제3악장 제1곡을 연주할 때 광경을 그림과 비교해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악공들의 손짓이나 손가락 움직임까지 모두 그림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이때 여러 사람들이 감탄을 연발하며 왕유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유는 또 그림에도 뛰어난 재주가 있었는데 특히 수묵산수화를 잘 그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이 바로 《망천도(輞川圖)》였다. 만당(晩唐)시기 민간에서는 심지어 자신의 몸에 이 그림 전체를 바늘로 수놓고 ‘침사(針史)’라 했을 정도로 이 그림의 인기는 대단했다.

한번은 북송(北宋) 시기 유명한 시인 진관(秦觀)이 오랜 병으로 고통이 아주 심했다고 한다. 어느 날 그의 친구 고부중(高符仲)이 《망천도》를 지니고 병 문안을 가자 진관이 몹시 기뻐하며 이 그림을 본 후 정신이 돌아와 병세가 호전되었다고 한다. 아울러 자신이 겪은 이 경험을 제사(題辭)와 발문(跋文)을 적어 그림 위에 남겨놓았다.

그때로부터 천년이 지난 지금 오리지널 《망천도》는 일찌감치 사라졌다. 오직 왕유의 망천별장 옛터에 그가 손수 심었다는 은행나무 한그루만 남아, 매년 봄이면 새싹을 틔워 보는 이로 하여금 성당(盛唐)시기를 상상할 수 있게 할 뿐이다. 이처럼 다양한 재주를 지녔던 왕유는 탁월한 예술적 재능으로 중화 5천년 문화를 풍부하고 다채롭게 만들었으며 후세에 아주 깊은 영향을 끼쳤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068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