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질투 때문에 세기의 박해” 제3절 제4절
【정견뉴스】
지금부터 14년 전, 《장쩌민의 실체(真實的江澤民)》가 처음으로 독자들과 만났다. 14년이 지난 지금, 장쩌민은 이미 죽었지만 그가 남긴 정치적 독소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 중국의 많은 혼란과 위기는 모두 장쩌민 집권 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부패로 국가를 다스리고, 법치(法治)를 짓밟으며, 도덕을 파괴하고, 파룬궁을 박해하는 한편, 그로 인해 팽창된 중공의 전제(專制) 및 폭력 기구는 중국에 끝없는 환란을 남겼다. 오늘날의 중공을 똑똑히 보고, 중국이 어찌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려면 《장쩌민의 실체》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에 에포크타임스에서는 본문을 다시 게재한다.
제3절 질투에 불타다
1998년에 장강(長江)에 큰 홍수가 발생하자, 정부는 대중에게 기부를 호소했고 텔레비전에 기부자의 이름을 내보냈다. 많은 파룬궁 수련생들이 이름을 적지 않고 오직 ‘파룬궁 수련생[法輪功學員]’이라는 이름만 사용했다. 장쩌민의 측근들은, 장쩌민이 텔레비전 화면에서 ‘파룬궁 수련생’이라는 글자를 보자 얼굴이 잿빛으로 몹시 어두워지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 장쩌민이 수해 현장을 시찰하러 가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방재 작업을 하는 것을 보았을 때, 장은 수행원을 시켜 그들에게 다가가 공산당원인지 물어보라고 시켰다. 결과 원래 그들은 파룬궁 수련생들이었다. 장쩌민은 이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곧바로 잿빛으로 어두워지며 매우 불쾌해했고, 곁에 있던 사람들도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당황하게 만들었다. 장의 이러한 고약한 버릇에 익숙한 측근들은 그의 오랜 버릇이 또 도졌음을 알고 주변 사람들에게 소리를 내지 말라고 눈짓했다. 이때 장쩌민의 마음속은 거센 파도가 치는 듯했고, 대중 앞에서 발작할 수도 없어 온갖 감정이 교차했는데 결코 편안하진 않았다.
이미 1993년에 ‘리 대사(李大師)’의 이름은 베이징에 널리 퍼졌다. 장쩌민은 다른 사람들이 파룬궁 창시인 리훙쯔 선생을 칭찬하는 말을 자주 듣곤 했다. 장은 자기 앞에서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말을 들을 수 없었기에, 마음속으로 이미 언짢아했다. 나중에 부인인 왕예핑(王冶坪)도 1994년에 다른 사람을 따라 파룬궁을 수련한 적이 있었고,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 가족 중에도 파룬궁을 수련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걸 도저히 참아낼 수 없었던, 장쩌민은 아내에게 더 이상 연마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의 주장은 이러했다. “내 마누라조차 리훙쯔를 믿는데, 그 누가 총서기인 나를 믿겠는가!” 그러나 파룬궁을 수련하면 놀라운 효과가 있기 때문에 수련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고, 이는 질투심이 극도로 강한 장쩌민을 점점 더 화나게 만들었다.
파룬궁 수련자 중구이춘(鍾桂春)은 일찍이 베이징 공안 계통에서 근무했으며, 자신이 직접 본 것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사실 장쩌민은 파룬궁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아주 익숙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잘 알았냐 하면, 장쩌민은 심지어 자신의 일부 동작이나 말투, 걷는 모습까지 모두 파룬궁 사부이신 리 대사에게 배운 것이었습니다. 1992년 그가 베이징 공안 경찰들을 접견할 때 우리는 모두 대강당에서 회의를 열고 있었습니다. 모든 경찰들은 그가 안에서 걸어 나오는 첫 번째 동작, 즉 걷는 자세를 지켜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올 때는 행동이 정상적인데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박수를 칠 때 손가락 다섯 개가 쫙 벌어져 있었고 배는 내밀고 있었으며, 모두 이렇게 허옇게 드러나는 그런 자세로 걸어 나왔습니다. 당시에 우리는 매우 이상하게 느꼈습니다. 그의 손은 모두 쫙 펼쳐져 있었고 신체가 이런 식이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찰 심지어 일부 백성들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이렇게 ‘저 사람 두꺼비네.’라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연상해 보니 과연 그 동작이었습니다. 다섯 손가락이 쫙 벌어져 있고, 다른 사람들이 박수를 칠 때는 다섯 손가락이 다 모이는데 그의 손은 쫙 벌어져 있었습니다. 지금은 더 이상 이런 동작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소문이 그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자신의 동작이 품위가 없고 보기에 좋지 않다고 스스로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곁의 실무 직원들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현재 전 중국에서 누가 제일 유명한가?’ 그러자 옆에 있던 실무 직원이 파룬궁 리(李) 대사라고 알려주었습니다. 파룬궁의 리 대사가 가장 유명하며, 리 대사의 동작이 가장 우수하고 가장 우아하며, 리 대사는 다들 이런 식이라고 했습니다(동작을 보여줌). 그래서 그 이후로부터 장쩌민은 리 대사를 흉내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이렇게 고쳤습니다(동작을 흉내 내며). 이런 식으로요. 이런 것들은 모두 리 대사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그의 말하는 방식과 걷는 모습을 포함해 모두 리 대사를 흉내 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부 소식입니다.”
“흉내를 내도 비슷하게 내지도 못하면서, 그는 한편으로는 리 대사를 흉내 내면서 한편으로는 또 리 대사를 질투했습니다. 곁의 실무 직원들이 그에게 리 대사는 한 곳에 서서 거침없이 몇 시간이고 원고도 없이 강의를 할 수 있고, 나오면 바로 책을 엮어낼 수 있다고 말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파룬궁 수련인들이 가서 배우고 그대로 따라 행하는 것은 곧 옹호하는 것이고 존경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리 대사가 1억이 넘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다는 말을 들은 장쩌민은 듣고 나서 견딜 수 없어 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며 ‘그렇다면 왜 그는 리 사부님을 흉내 내는가?’ 하고 묻습니다. 그는 질투하면서 흉내 낸 것입니다.”
중공 지도자들은 모두 어떤 이론을 만들어 자신의 위신을 세우는 데 열중한다. 예를 들어 마오쩌둥에게는 ‘마오쩌둥 사상’이 있고 덩샤오핑에게는 ‘덩샤오핑 이론’이 있어, 전국 인민들에게 모두 와서 배우라고 호소한다. 장쩌민도 1995년에 이른바 ‘삼강(三講)’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학습을 이야기하고, 정치를 이야기하며, 정기를 이야기한다(講學習、講政治、講正氣)”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중에 이른바 ‘삼개대표(三个代表)’의 전신이다. 2년 동안 벌였어도 아무런 명목도 만들어내지 못하자 장쩌민은 이러한 냉대를 견딜 수 없었고, 그리하여 1998년 11월부터 3년의 시간을 들여 전국 현급(縣級) 이상 당정(黨政) 지도 간부진과 지도 간부들 속에서 정풍(整風) 정신으로 ‘삼강’ 교육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진지하게 형식만 채우는 공산당의 이런 물건은 진심으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사회 기풍을 개선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심지어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이에 비해 파룬궁은 어떠한 권력도 추구하지 않으며, 모두 수련인들이 자발적으로 수련하는 것으로서 인생의 참뜻을 깨달은 후에 ‘진·선·인(真·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려는 자발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1994년 이후 파룬궁이 일부 직능 부서의 소란을 겪은 이래로, 수련인들은 직접 겪은 경험을 가지고 관련 부서에 질병 치료와 건강 증진, 그리고 도덕 회복의 상황을 반영했다. 바로 이것이 장쩌민의 그 민감한 신경을 정확히 건드렸다. 왜 마음이 선(善)을 향하는 이러한 좋은 일의 공로가 ‘삼강’에 돌아가지 않고 파룬따파에 돌아가는가? 파룬궁 창시인에 대한 장쩌민의 질투는 그야말로 갈수록 더욱 맹렬해졌다.
파룬궁 창시인은 평민 출신인데, 설법할 때면 각계의 교수, 전문가, 유학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많은 박사, 석사들이 심지어 만 리 길을 마다않고 날아가 법을 들었다. 장은 평소에 늘 사람들 앞에서 외국어를 두어 마디 내뱉거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목청껏 노래를 불러 자신의 능력이 대단함을 과시하곤 했으나, 입만 열면 책이 되게 하는 것은 아무리 해도 할 방법이 없었다. 이것은 허영심과 질투심이 많고 흉금이 좁은 장쩌민으로서는 참아낼 수 없는 일이었다.
중국인들은 모두 출신을 중시해서 전생과 금생에 어떤 내력이 있는지 본다. 장쩌민을 가장 미치게 만든 것은, 그는 늘 자신의 내력을 듣고 싶어 했지만, 다른 정치국 상무위원들은 다 괜찮은 집안 배경을 지닌 반면, 그는 정확한 이름 하나 있는 것이 다가 아니던가? 그 ‘쩌민(澤民)’, 즉 늪 속의 생물 말이다. 그의 질투의 불길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타올랐다.
1997년 덩샤오핑이 사망한 후 장쩌민은 꼭두각시 황제 노릇을 하던 때가 끝났음을 느꼈고, 더 조급하게 자신의 개인적 권위를 세우고자 했다. 수천만 명의 파룬궁 수련인들이 파룬궁 스승에게 보내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존경심을 보자, 장쩌민은 참으로 질투심에 불타올라 더는 억누를 수가 없었다.
‘4·25’ 상방(上訪 청원) 당일, 오후 3시가 넘었을 때 장쩌민은 짙은 유리로 된 방탄차를 타고 중난하이를 한 바퀴 돌며 상방 인원들의 상황을 관찰했다. 장쩌민은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고, 더욱이 파룬궁 수련자들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든 것은, 그가 뜻밖에도 어깨에 군 계급장을 단 수십 명의 군인을 보았다는 점이다. 이 군인들이 뜻밖에도 군사위원회 주석인 자신을 따르지 않고 파룬궁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장쩌민은 한 통의 편지를 썼다. 장쩌민은 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이 발생한 후, 서구 언론들은 즉각 보도를 하고 이를 선전·선동했다. (파룬궁이) 과연 해외와, 서구와 연계가 있는지 없는지, 막후에 기획하고 지휘하는 어떤 ‘고수’가 있는가? 이것은 새로운 신호이며, 우리는 반드시 고도의 중시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민감기가 이미 도래했으니, 반드시 가능한 한 빨리 강력한 조치를 취해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는 것을 엄밀히 막아야 한다.”
장쩌민은 말했다. “파룬궁과 같은 이런 조직에 대해, 종교적 색채를 띤 호소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관련 부문은 반드시 연구를 강화하고 방비 조치를 제정해야 한다. 파룬궁 본부가 국외에 있으므로 이번 행동은 이 조직이 국외의 배경을 가졌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어찌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지닌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신봉하는 유물론·무신론이 파룬궁이 선전하는 그 일련의 것들을 이겨내지 못하겠는가?”
2006년에 대륙에서 출판된 《장쩌민 문선》 제2권에는 장의 이 편지가 수록되었으며, 제목은 ‘ 한 가지 새로운 신호’이다. ‘문선’에 수록할 때 특별히 글 뒤에 한 줄의 설명을 덧붙였다 — “이것은 장쩌민 동지가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및 기타 관련 지도자 동지들에게 쓴 편지이다.” 이것은 장쩌민이 파룬궁 탄압을 발동한 확실한 물증을 기록한 것이다.
바로 이 편지 중에서 장쩌민은 공산당이 파룬궁을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처음으로 제기했다. 하지만 당시 중공 중앙 7명 상무위원 중 장쩌민을 제외한 나머지 6명의 상무위원은 모두 동의하지 않았다. 《미국 뉴스 앤 월드 리포트》 1999년 2월 한 문장에 따르면, 파룬궁의 질병 치료와 건강 증진 효과는 국가를 위해 많은 의료비를 절약해 주었으며, 당시 주룽지 총리는 “이에 대해 매우 기뻐하며 국가가 아껴 둔 그 돈으로 다른 일을 할 수 있다고 여겼다”고 한다. [4] 사실 파룬궁은 ‘6·4’ 이후 보급된 것으로, 몸을 튼튼하게 하고 도덕을 끌어올려 사회를 유력하게 안정시켰다. 적지 않은 수련인들이 간부였지만 탐욕스럽거나 부패하지 않아 공산당 관장(官場)에서 기이하다고 칭할 만했다. 또 어떤 수련인들은 실직 노동자들이었지만 실직 군중의 ‘소란’에 결코 참여하지 않았으니, 집권한 공산당에게 실로 유익하기만 하고 해는 없었으므로 오히려 고마워 마지않아야 할 텐데, 어찌하여 도리어 파룬궁을 향해 대대적으로 칼을 겨누고 기필코 없애버리려 한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다른 지도자들이 모두 파룬궁 탄압을 반대했던 이유이다.
‘4·25’ 다음 날,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회의를 열어 파룬궁 문제를 토론할 때 주룽지가 막 입을 떼었다. “그들이 가서 수련하도록 내버려둡시다……” 이 시기의 장쩌민은 끊임없이 팽창하는 질투심에 시달려 미칠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어떤 반대 의견도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고, 장은 즉각 벌떡 일어나 주룽지의 얼굴을 가리키며 “바보야! 바보냐고! 돌았어! 당을 망치고 나라를 망치잖아!”라고 고함쳤다. 주룽지는 속으로 빤히 알면서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미국의 소리(VOA)》는 2009년 9월 10일 홍콩 인권민운(人權民運)정보센터의 보고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주룽지는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두 차례 장쩌민과 논쟁을 벌였으며, 만약 파룬궁 문제를 신중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모순이 격화될 것이라고 여겼다. 장쩌민은 ‘6·4’ 10주년이 다가오는 매우 민감한 시기에 반드시 강경한 수단을 취하여 파룬궁에 대처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당이 망하고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여겼다.” 이 센터는 이 정보가 꽤나 신뢰할 만한 소식통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했다. 공산당의 일관된 투쟁 논리에 따라 어떻게든 운동 하나를 발동하여 위세를 떨치고 권위를 세우려 하였으니, “나를 따르면 흥하고 거역하면 망한다”였다.
장쩌민은 ‘진·선·인’을 신앙하며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을 먹어도 대꾸하지 않는 파룬궁을 진압 대상으로 선택했다. 장쩌민은 사안을 정치적으로 뻥튀기하여 “당이 망하고 나라가 망한다”는 말로 다른 이들을 위협해 굴복시켰다. 사악한 기운이 치밀어 오르자 그때의 장쩌민은 참으로 기세가 당당했고, “나는 공산당이 파룬궁을 싸워 이기지 못한다고는 믿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그는 이 말을 차라리 “나는 나 장쩌민이 파룬궁을 싸워 이기지 못한다고는 믿지 않는다”로 바꿔 말하고 싶어 했으며, 정치국 사람들까지 모두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여러 해 동안 사람들은 모두 물어왔다. 장쩌민은 도대체 왜 파룬궁을 탄압하려 하는가? 수련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인가? 대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진·선·인’을 수련하는 사람들이 비록 많다 하더라도 공산당 대다수 지도자들도 사회 안정에 유익하기만 하고 해는 없음을 보았으니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닌가. 장쩌민이 파룬궁을 탄압한 진정한 원인은 말해도 사람들은 감히 믿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의 그 질투심이었다.
파룬궁과 파룬궁 창시인에 대한 장쩌민의 질투는 1999년 7월 20일 파룬궁에 대한 질투에서 악의적인 살기(殺氣)를 묻어두었으며, 이것은 또한 장쩌민이 발동한 이 전쟁이 매우 개인적인 성격을 띠도록 결정지었다. 역대 공산당의 정치 운동에서 공산당 최고 지도자는 보통 막후에서 조종했으며, 중공 당 두목이 증오를 선동하는 소책자를 직접 가지고 다니다가 외국 대통령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러나 장쩌민은 이렇게 추한 짓을 저질렀으니 가히 박해 파룬궁의 최전선에 직접 뛰어들었다고 할 만하다.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가? 이 역시 이번 박해가 온전히 장쩌민이 질투심 때문에 발동한 개인적인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제4절 개인적인 전쟁
2011년 2월, 중국 대륙 정계의 내부 소식을 자주 보도하는 홍콩 《전초(前哨)》 잡지는 기고문을 실었는데, 부제목은 ‘장쩌민이 평생 후회하는 두 가지 사건’이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각각 미국이 주유고슬라비아 중국 대사관을 ‘오폭’한 것과 파룬궁을 박해한 것이다. 전자는 장쩌민이 중국 인민에게 미국에 대한 증오를 부추겼다. 후자에 대해 《전초》 잡지의 묘사는 매우 구체적이다. “파룬궁을 봉쇄하기로 한 결정은 애초부터 정치국 상무위원회 내부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주룽지, 리루이환은 일종의 ‘공법(功)’에 대해 이토록 엄청난 야단법석을 떨 필요가 없으며, 더욱이 거창한 대중운동으로 만들 필요는 더더욱 없다고 여겼다. 정치국 상무위원 외에도 장쩌민은 자신의 집안에서도 반대에 부딪혔는데, 왜냐하면 그의 아내 왕예핑, 손자 장즈청(江志成)도 모두 일찍이 파룬궁을 수련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쩌민은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며 정치국이 파룬궁 단속 결의를 통과시키도록 강제로 밀어붙였다.” [5]
공식 박해 전, 오직 장의 세 가지 문서만이 비밀리에 박해를 준비하고 있었다.
비록 유사한 소문이 민간에 널리 퍼져 있고 내부 소식통이 있다고 여겨지는 출판물에 실리기도 했으나 《전초》 잡지의 묘사는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그 글 내용 중에서 설명해야 할 점은, 지금까지도 1999년 7월 20일 이전에는 정치국이 일찍이 ‘파룬궁 단속 결의’를 통과시켰다는 그 어떤 증거도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산당의 관례에 따라 모든 정치 운동에 발동이나 중요 지도 역할을 하는 정치국 결의는 문화대혁명 시작 때의 ‘5·16 통지’처럼 어떤 형식으로든 사회에 공표되었을 것이다.[6]
반면 현존하는 모든 증거들은 1999년 4월 25일 파룬궁의 1만 명 상방부터 7월 20일 국내에서 전면적인 박해가 발동되기까지, 각종 경로를 통해 드러난 것은 오직 중국 공산당 중앙판공청이 당내 성(省)·부(部)급 이상 부문과 관료들에게 발송한 세 건의 중앙 문서뿐임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들은 각각 장쩌민의 편지, 지시 및 연설을 하달한 것이다. 장쩌민의 이런 사적인 물건들은 당시 모두 절대 비밀의 방식으로 전달되었고 공개적으로 발표되지 않았다. 이 문서들 중 어느 하나도 중국 공산당 정치국이나 정치국 상무위원의 결의가 아니었고, 정치국 다른 상무위원들로부터 나온 것도 아니었으며, 하물며 헌법이 규정한 최고 권력 기관인 전국인민대표대회나 그 상무위원회에서 나온 것은 더욱 아니었다.
4월 27일, 중공 중앙판공청은 중판발(中辦發) 14호 문서로 《장쩌민 동지가 정치국 상무위원회 및 기타 관련 지도 동지들에게 보낸 편지의 인쇄·배포에 관한 통지》를 발송해 4월 25일, 즉 파룬궁 대상방 당일 밤에 장쩌민이 쓴 이 편지를 학습할 것을 요구했으며, 학습하여 중앙에 관철·보고할 것을 요구했다.
5월 8일, 장쩌민은 중앙정치국, 서기처 및 군사위원회 멤버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해당 지시는 나중에 중공 중앙판공청에 의해 중판발 [1999] 19호 문서로 각지에 하달되었다. 5월 하순, 각지 성위원회는 상무위원회 회의를 열어 전달하고 각 성위원회에서 상응하는 문서를 만들어 하달했으며 6월 상순에는 시(市) 급까지 전달되어 상응하는 시위원회 문서를 만들었다. 문서의 내용은 비밀리에 파룬궁 탄압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7]
6월 7일, 장쩌민은 중앙정치국 회의에서 ‘파룬궁’ 문제를 다급히 처리하고 해결하는 것에 관한 연설을 했다. 이 연설 역시 마찬가지로 중공 중앙판공청 문서 형식으로 하달되어 학습하고 관철할 것을 요구했다. 이 연설의 직접적인 결과는 바로 3일 후에 성립된 ‘중공 파룬궁 문제 처리 영도소조’ 및 그 판공실(辦公室)이었는데, 후자는 그 성립된 시간에 의해 간하여 ‘610 판공실’로 약칭되었다. 이 연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룬궁’ 문제는 깊은 정치 사회적 배경과 심지어 복잡한 국제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1989년 당시 정치 풍파 이래로 가장 심각한 한 차례 사건이다. 우리는 반드시 진지하게 대하고, 깊이 연구하며, 강력한 대책을 취해야 한다.” 중국에서 ‘정치적 배경’과 ‘국제적 배경’이라는 지목과 그것을 1989년의 ‘6·4’와 나란히 견주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대규모 정치 박해의 선언이었다.
6월 13일, 중국공산당 중앙판공청은 중판발전(中辦發電) [1999] 30호 문서로 《장쩌민 동지가 중앙정치국 회의에서 ‘파룬궁’ 문제를 다급히 처리하고 해결하는 것에 관한 연설을 인쇄·배포하는 것에 관한 통지》를 발송했다.
6월 상순, 각지에서 경찰이 파룬궁 수련생들과 연공장을 소란스럽게 하는 일이 많이 나타났고, 사회적으로도 당국이 공격을 가하려 한다는 소문들이 많이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99년 6월 14일, 즉 ‘610 판공실’이 성립된 지 4일째 되는 날, 중국의 주요 매체들은 ‘중판(中辦)·국판(國辦) 신방국(信訪局) 책임자가 일부 파룬궁 상방 인원을 접견한 담화 요점'(양판 담화)을 보도하며 탄압에 대한 소문을 부인했고, 4월 25일 파룬궁 대표를 접견했을 때의 연설 정신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즉, “각종 정상적인 연공과 건강 증진 활동에 대해 각급 정부는 일찍이 금지한 적이 없다; 사람들은 특정 공법을 믿고 연마할 자유도 있고 특정 공법을 믿지 않을 자유도 있다; 서로 다른 견해나 의견은 모두 정상적인 것이며, 정상적인 채널과 방식을 통해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장쩌민의 비밀 문서가 당과 정부의 공개 정책(양판 담화)을 부인했거나, 아니면 양판 담화 자체가 음모의 일환으로서 바야흐로 긴밀히 진행 중인 대규모 박해 준비를 은폐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었다. 양판 담화를 부인했든 아니면 양판 담화를 은폐 도구로 삼은 것이든, 오직 최고 권력을 장악한 사람만이 그것을 해낼 수 있었으며, 이는 곧 이것이 공산당 우두머리 장쩌민이 음모로 기획한 정치 운동임을 증명한다.
상술한 상황으로부터 사람들은 중공 중앙정치국 멤버들이 애초부터 파룬궁 탄압 문제에 있어서 장쩌민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고 장쩌민이 강제로 결정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고위층 분열의 시작이었다.
비록 공개적인 박해는 1999년 7월 22일의 두 개 부문 문서를 그 표지로 삼고 국내외적으로 모두 이보다 이틀 전인 전국적으로 각지 파룬궁 연락인에 대한 대규모 체포를 7월 20일을 박해의 기점으로 삼지만, 그 전날인 19일 밤, 중공 중앙은 각 성(省) 당위원회 주요 지도자 회의를 소집했고 장쩌민 본인이 회의에서 연설하며 동원했는데, 제목은 ‘성·자치구·직할시 당위원회 책임자 동지 회의에서의 연설’이었다. [8] 당 두목이 대규모 정치 박해 전야에 직접 나서서 동원하고 힘을 실어주는 것은 심지어 공산당 역사 속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직접 나서서 박해를 위한 국제 홍보
국제 관계는 일반적으로 외교부의 업무이지만, 파룬궁 문제에 있어서는 통상적인 국제 예의가 내던져졌다.
1999년 8월 13일, 장쩌민은 다롄에서 중국을 방문한 타지키스탄 대통령 라흐모노프와 회담을 가질 때 자발적으로 손님에게 파룬궁 박해 상황을 소개했다. [9]
1999년 9월 뉴질랜드에서 개최된 APEC 회의에서 장쩌민은 매우 이례적이고 신분에 전혀 맞지 않는 거동을 했다. 각국 지도자들, 당시 미국 대통령 클린턴을 포함한 이들에게 파룬궁에 반대하는 소책자를 보내 회의에 참석한 각국 수뇌부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 것이다. [10]
1999년 10월 25일 장쩌민이 프랑스를 국빈 방문하기 전야에 프랑스 《피가로》 논설위원장 페레피트의 서면 인터뷰를 수락하였고, 공산당의 그 어떤 문서나 매체보다 앞서 파룬궁을 ‘사교(邪教)’라 칭하여, 장쩌민 개인이 탄압 결정을 내렸고 지속적으로 추진했음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2000년 9월, 장은 미국 CBS 텔레비전 ’60분’의 진행자 월리스와의 인터뷰에서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살며 파룬궁 창시인이 스스로 보살과 예수가 환생한 재림이라 자칭했고, 파룬궁이 이미 수천 명의 수련인을 자살하게 했다고 지어냈다. 파룬궁의 모든 책과 영상 작품들이 모두 공개되어 있음을 감안할 때, 파룬궁 서적과 강연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상술한 보살이나 예수와 같은 류의 그 어떤 말도 찾아볼 수 없으며, 게다가 터무니없이 지어낸 ‘수천 명의 수련인 자살’은 중공 나팔수 매체가 1999년에 지어낸 ‘1400례’ 사망자 수보다도 몇 배를 초과했으니, 장쩌민 본인이 바로 공산당이 파룬궁을 먹칠한 장본인임을 충분히 증명한다.
계통성, 전민성(全民性)과 은폐성
장쩌민은 파룬궁 박해를 한 차례의 개인적인 전쟁으로 삼아 발동했다. 그러나 개인적인 전쟁이라는 것이 이 전쟁의 규모가 개인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정반대로, 독재 전제(專制)의 사회 속에서 독재자가 개인적 동기 때문에 미쳐 날뛴 결과야말로 가장 참혹하기 짝이 없으며, 독재자는 모든 대가를 아끼지 않고 온 국력을 기울여 이 전쟁을 더욱 사악하고 잔인하며 한계가 없도록 만들 수 있다.
파룬궁에 대한 이번 박해는 범위가 넓고, 강도가 크며, 지속 기간이 오래고, 사악함이 극에 달해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일시적으로 그 전모를 똑똑히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만약 그 특징을 요약한다면 ‘계통성, 전민성과 은폐성’으로 개괄할 수 있다. ‘계통성’은 법률을 초월하는 ‘610 판공실’을 건립하고 모든 국가 기구를 총동원해 박해를 실시한 것으로 체현되며; ‘전민성(全民性)’은 장쩌민과 공산당이 문화혁명의 정치 운동 방식을 취하여 연좌제를 채택하고 사회 각 계층, 단위 및 가족을 전부 동원해 이 박해에 말려들게 한 것에 체현되어며; ‘은폐성’은 공산당이 대내적으로 파룬궁의 모든 정면(正面) 소식을 봉쇄하고, 대외적으로는 경제적 이익과 지정학으로 서구 국가들을 기만하여 이번 박해를 본척만척하게 한 것에 체현되며, 최근 몇 년 동안은 더욱이 박해를 공개에서 지하로 전환하고, 겉은 느슨하되 안으로는 조이며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다.
장쩌민의 개인적 전쟁은 전 인류로 하여금 모두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장쩌민의 실체》 공동 집필팀
2012년 5월 첫 발행
(에포크타임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