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앙악(仰嶽)
찰랑이는 잔잔한 호수, 쌍쌍이 아름다운 배, 작고 작은 배들.구슬처럼 어여쁜 노래, 펄럭펄럭 화려한 춤, 이어지는 현악기 소리.산남과 산북을 노니니, 십리를 둘러봐도, 연꽃은 돌아올 줄 모르네.술병과 술잔을 들어도, 그 사람 취하지 않더니, 내게 시를 읊으라 하네.
灩灩平湖,雙雙畫槳,小小船兒。嫋嫋珠歌,翩翩翠舞,續續彈絲。山南山北遊嬉,看十里,荷花未歸。緩引壺觴,個人未醉,要我吟詩。
──왕원량(汪元量) 《류초청(柳梢青–버드나무 가지는 푸르러)》
이 노래는 남송 말기의 도인(道人) 왕원량(汪元量 호는 수운자水雲子)은 항주(杭州)와 전당(錢塘) 지역의 명사로 벗인 서설강(徐雪江)과 함께 서호(西湖)에 놀러갔다가 호수와 산색의 아름다움을 보며 배에서 가무를 즐기면서 금을 연주하며 부른 것이다. 화려하면서도 안하고 한가한 정취가 있어 제목을 류초청(柳梢青 버드나무 가지 푸르러)이라 했다.
왕원량은 거문고(琴) 연주와 가사에 정통해 일찍부터 먼 곳까지 명성이 퍼졌다. 때문에 남송 도종(度宗) 조기(趙禥 1240~1274년)의 부름을 받아 궁정악사가 되었고 사(謝) 태후와 여러 궁녀들에게 가야금 연주 및 시사(詩詞)를 가르쳤다. 왕원량은 단순히 음악적 재능만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대화에도 기지와 정취가 충만해 황제와 태후의 사랑을 받았다. 일찍이 도종 황제는 그에게 ‘천사영보(天賜永寶 하늘이 내린 영원한 보배라는 의미)’라는 4글자가 적힌 벼루를 하사한 적이 있다. 왕원량은 이 벼루를 지극한 보배로 여겨 늘 몸에 휴대하고 다녔다.
하지만 이때 북방에서는 몽골이 이미 굴기해 금(金)나라를 멸망시키고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면서 어디를 가도 적수가 없었다. 반면 남송의 국력은 이미 날로 쇠약해졌지만 도종은 간신 가사도(賈似道)만을 신뢰해 군국의 대권을 그에게 맡겼다. 함순(咸淳) 9년(1273년) 몽골의 대군이 수도 임안에 가까운 전략적 요지 양양(襄陽)을 무너뜨렸다. 도종은 이 소식을 들은 후 통곡하다가 기절했다. 깨어난 후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술로 시름을 달래다 이듬해 병으로 세상을 떴다. 이때 남송의 정세는 이미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1275년 몽골의 대군이 수도를 노리고 전면적인 남침해 오자 사태후(역주: 당시 황제가 너무 어려서 태황태후 사씨가 수렴첨정)는 사방에 비통한 조서를 내려 호걸들에게 의군을 일으켜 황실을 보위하도록 했다. 강서 제형관(江西提刑官)으로 있던 문천상이 이 소식을 듣고는 전 재산을 털어 3만의 의군을 조직해 임안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중과부적으로 결국 적에게 패했다. 사태후는 문천상의 충성심을 높이 사 우승상(右丞相) 겸 추밀사(樞密使)에 임명하고 몽골군 총수 바얀과 담판을 짓도록 했다.
하지만 당시 정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고 새로 등극한 어린 황제 공제(恭帝)와 왕원량 등의 궁인들은 모두 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갔다. 문천상 역시 북으로 호송되던 중 의사들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장세걸, 육수부 등과 더불어 계속해서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몽골 대군에 저항했다.
한편 북방으로 끌려가 대도(大都 지금의 북경)에서 살게 된 왕원량은 음악적인 재능뿐만 아니라 수도인(修道人)의 신분이라 원 세조 쿠빌라이로부터 예우를 받았다. 또 그가 궁인 왕청혜(王清惠)와 같이 만든 노래와 가사가 널리 퍼졌다. 왕원량은 또 남송의 황제였던 조습(趙㬎 1271~1323년 재위 1274~1276년)에게 시서를 가르치며 송조(宋朝)문화가 계속해서 세상에 남을 수 있게 했다.
1278년 겨울, 문천상은 해풍(海豐) 전투에서 패배해 포로가 되었다. 이듬해 애산(崖山)해전에서 송군이 크게 패하자 육수부는 적의 포위를 뚫을 가망이 없다고 보고 등에 소제(少帝 남송의 마지막 황제. 공제가 포로로 잡혀간 후 새로 옹립한 황제 1272~1278년)를 업고 바다로 뛰어들어 자진했다. 그를 뒤따라 10여만 명의 송나라 신하와 백성들도 바다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대송(大宋)과 함께 푸른 바다와 하늘 사이에서 사라졌고 역사의 무대에서 장렬히 내려왔다.
원나라 군함에 구금되어 이 모든 장면을 목격한 문천상은 남쪽을 향해 통곡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진(秦)나라가 장평전투에서 조나라 사람 40만 명을 생매장하자진나라 사람은 기뻐했지만 조나라 사람은 원망했었네.큰 바람이 모래를 날려 물이 흐르지 않자초나라는 즐거워하고 한나라는 슬퍼했네…
長平一坑四十萬秦人歡欣趙人怨大風揚沙水不流爲楚者樂爲漢愁
……
원 세조 쿠빌라이는 문천상의 기재와 재능에 탄복해 투항하길 원했다. 먼저 송나라 승상을 지낸 유몽염(留夢炎)을 보내 설득하려 했지만 욕만 먹고 쫓겨났다. 이에 송나라 황제였던 공제를 보내 투항을 권하려 했지만 문천상이 “어가여 돌아오소서!”라며 통곡하는 바람에 말을 꺼낼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나중에 원나라 승상 발라가 직접 그를 심문하고 핍박했지만 문천상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원 세조는 결국 당근과 채찍 어떤 방법으로도 그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는 감옥에 가둬두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 대도에 있던 왕원량이 수시로 감옥을 찾아가 문천상을 면회했다. 두 사람은 마치 오랜 벗을 만난 것처럼 서로를 알아보았다. 문천상은 그가 수도하는 사람임을 알고는 전에 도사 ‘영양자(靈陽子)’와 만났던 기이한 인연에 대해 들려주었다. 왕원량은 이를 알고 난 후 또 그 도법(道法)을 문천상에게 전수해주었다.
당시 감옥 안의 환경은 아주 열악해서 수감된 죄수들도 병에 걸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하지만 문천상은 오히려 기개와 정신이 한가롭고 목소리에도 힘이 넘쳐 옥졸(獄卒)들마저 그를 신기하게 여겼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몇 년이 지나갔고, 남송이 멸망한 후에도 각지에서 문 승상을 구원하자는 구호와 항원 의군(義軍)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이와 동시에 원나라 조정에서도 문천상의 신병처리를 두고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문천상은 쿠빌라이가 곧 자신을 불러 만나려한다는 것을 알고는 태연하게 종이와 먹을 준비해 저 유명한 ‘정기가(正氣歌)’를 썼다. 이때 익숙한 그림자가 그 옆에 나타났다. 고개를 들어보니 바로 왕원량이었다. 그가 거문고를 안고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찾아왔던 것이다. 평소처럼 한담을 나눈 후 왕원량은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득하면서도 부드럽고 아름다운 거문고 소리는 마치 시공을 초월해 한나라 시대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당시 채문희(蔡文姬)는 병란 중에 흉노로 끌려갔고 그곳에 억류되었고 강제로 좌현왕(左賢王 흉노의 관직)에게 시집가 두 아들을 낳았다. 나중에 위 무제 조조가 중원을 평정한 후 친구의 딸이었던 문희의 안타까운 소식을 알고는 거금을 들여 그녀를 귀국하게 했다. 하지만 흉노왕은 그녀의 귀국만 허락하고 아이들은 데려가지 못하게 했다. 이때 그녀가 지은 노래가 바로 ‘호가십팔박’이다. 영락하여 이리저리 떠도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동시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자식에 대한 애틋한 정을 표현한 곡이다.
연주가 계속되는 중에 문천상은 자신도 모르게 벗인 사방득(謝枋得 역주: 남송의 충신이자 문천상의 벗으로 원나라에 굴복하길 거부하고 굶어죽었다)이 선물한 민족 영웅 악비(岳飛)의 벼루를 들어 올리며 악비의 정충보국(精忠報國) 일화를 떠올렸다.
당시 악비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 종군(從軍)할 생각을 품었지만 모친의 연세가 이미 많아 주저하고 있었다. 자고로 충효(忠孝)를 둘 다 완벽하게 해내기란 어려운 법이라 악비가 주저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할 때 모친이 그를 불렀다. 그리고는 아들의 상의를 벗게 하고는 침으로 등에 정충보국(精忠報國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하라는 의미)이란 4글자를 새겨주었다. 즉 자신의 안위는 괘념치 말고 마음껏 종군해 강산을 되찾고 볼모로 잡혀간 두 황제를 구해오라는 뜻이었다.
악비가 악가군(岳家軍)을 이끌고 남겨놓은 ‘충(忠)’의 문화는 후세 애국지사들이 영원히 따르는 모범이 되었다. 문천상은 어려서부터 ‘독서에 분발해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의군을 조직해 몽골에 저항한다(發憤讀書考取狀元,組織義軍抵抗蒙古)’는 목표를 추구해왔다. 지금 이미 감옥에 갇힌 죄수의 몸이 되었으니 앞으로 몸을 보존해 장차 나라를 회복할 수 있을까? 문천상도 미망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거문고 소리가 세차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왕원량이 잠시 연주를 중단하고는 문득 말했다. “양재흥(楊再興) 장군님, 이제 당신께 알려줄 때가 되었군요.”
문천상은 이 말을 듣고 의혹에 빠졌다. 이때 왕원량은 이미 새로운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 곡은 의미심장하면서 아주 멀리까지 흘러갔는데 몹시 익숙했다. 두 사람은 마치 백여 년 전의 다른 공간에 들어간 것 같았다.
(대기원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7/8/17/n953947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