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간발의 차이
처음 두 차례 중공 위초(圍剿 포위토벌)는 국군 주력부대가 개입하지 않았다. 1931년 제3차 위초부터 국군의 주력이 개입해 적지 않은 성과를 거뒀으나 9.18사변으로 중단되었다. 제4차 위초는 열하(熱河)에서 일본의 침략을 막아야 했기 때문에 진행한 지 한 달도 못되어 역시 중단되었다.
5차 위초는 장개석이 직접 지휘에 나섰다. 그는 5차 위초에 대해 “군사적인 포위토벌뿐 아니라 경제, 교통 및 문화적인 포위토벌”이라고 간주했다. 당시 그가 지휘하던 남창(南昌) 행영(行營 야전사령부)의 권력이 미치는 범위는 민월상공절(閩粵湘贛浙 복건 광동 광서 강서 절강) 5개성으로 확대되었다. 장개석은 강서성 여산(廬山)에서 여러 차례 ‘여산 군관훈련단(軍官訓練團)’을 개최해 전문적으로 공비토벌을 위한 장교 훈련을 실시했고 독일 군사고문단의 협조 하에 토치카(돌이나 콘크리트로 만든 튼튼한 벙커)를 만들어 중공군의 약점을 공략하게 했다.
장개석은 여산 군관훈련단에서 훈련받는 장교들에게 이전의 낡은 전술을 바꿔야 한다면서 “낡은 전술이 수비위주라면 새로운 전술은 공격위주다. 낡은 전술은 대부분 밀집대형을 사용하지만 새로운 전술은 병력을 분산시키는데 중점을 둔다. 낡은 전술은 종심(縱深)배치를 많이 사용한다면 새로운 전술은 정면(正面) 배치를 중점으로 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공비토벌은 공격과 수비를 모두 중시해야 한다. 만약 공격을 위주로 한다면 수비를 위주로 하는 것만 못하다. 공수의 운용에 관한 나의 최근 연구를 두 마디 말로 하면 바로 전술적으로는 수세를 취하면서 수비를 공격으로 삼고 전략상으로는 공세를 취해 공격을 수비로 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5차 위초는 큰 성공을 거뒀고 중공 군대는 1년이 넘는 전투 중 적어도 십만 명의 병력이 감소했고 1934년 당시 소비에트가 영향력을 가진 지역은 35개 현에서 일곱 개 현으로 위축되었다. 이제 중공 군대의 전멸은 사실상 시간문제였다. 이에 공산 비적들은 마침내 소위 ‘장정(長征)’을 시작했다.
장개석은 중공 잔군(殘軍)들이 장정하는 기회를 이용해 이전에 지방 군벌이나 중공 통제 하에 있었던 강서, 복건, 광동, 호남, 귀주, 사천, 섬서, 감숙 등 8개성을 수복했고 그 외 지방군벌에 소속된 70만이 넘는 병력을 재편했다.
중앙 정부의 역량은 이때 비로소 서남지역에 정식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장개석은 또 현지 군벌들에게 “일본군이 조만간 우리를 침략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대후방(大後方)을 건립해야 하며 제때에 장강하류의 공업을 서남부로 이전하는 한편 지방을 번영시켜야 한다.”
(《장위국이 구술한 자서전》)
“작년에 이르러서야 국군은 비로소 최대의 노력으로 강서의 비적 소굴을 근본적으로 소탕했다. 공산 비적들은 광서에서 귀주, 귀주에서 운남으로 쫓겨났고 최후에는 사천으로 들어갔다. 나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끊임없이 추적하며 섬멸했으며, 비적 섬멸과 함께 지금껏 통일되지 못했던 사천, 운남, 귀주 세 성을 하나로 통일해 우리나라 생명의 터전을 다졌고 이는 민족이 부흥할 수 있는 마지막 근거지가 되었다.”
당시 국민정부의 정책은 설령 정세가 아무리 위급하고, 적이 아무리 가로막고 압박하더라도 오로지 참고 견디며 반드시 천전검(川滇黔 사천 운남 귀주)의 통일을 완수한 후에야 우리 정부와 국민이 외적의 침입을 막고 부흥할 수 있는 근거지가 있게 되며 국가와 민족이 생존할 수 있는 마지막 보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중공 패잔군들의 병력은 출발 당시 10만 명에서 7천여 명으로 쪼그라들었고 모든 화포와 중(重) 기관총을 상실했다. 90% 이상의 역량이 손실된 중공 패잔군은 어쩔 수 없이 척박하고 황량한 섬북(陝北)으로 들어가야 했고, 이를 전후로 세 방향에서 포위를 돌파하는 작전을 펼쳤으나 모두 실패했다. 서안사변이 발생하기 전 장국도(張國燾)가 이끌던 8만여 명의 공산 비적이 분열되어 남하하다 마가군(馬家軍 감숙 청해 지역 지방군벌), 진군(晉軍 산서성 지방군벌), 천군(川軍 사천성 지방군벌) 등 지방군벌들에게 포위되었고 그 외곽에 중앙군에게 포위되면서 하마터면 전멸 위기에 처해 있었다!
1936년 섬북의 중공군은 2만 명도 되지 않았고 국민정부는 서북에서만 33만 명을 동원해 공산군을 토벌했다. 장공(蔣公)의 배치에 따라 중공을 섬멸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당시 중공은 이미 소멸 직전의 위태로운 상태에 처해 있었고 항일은커녕 자신의 생존마저 지키기 힘들었다. 항일구호는 단지 시선을 전이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중공의 구실에 불과했다.
1936년 8월 21일 모택동 등 중공 중앙이 코민테른에 올린 보고서에는 “현재 섬북 소비에트는 이미 크게 축소되었고 홍군(紅軍)의 재정과 식량은 이미 아주 곤란한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현재 근거지를 보존하기 위해 홍군 주력은 반드시 감숙 서부의 영하(寧夏)와 수원(綏遠) 일대를 점령해야 하며 홍군의 현재조건에서 이 지역을 얻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동남쪽으로 진출해야 합니다. …즉 항일의 방향이 아니라 내전의 방향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이 지역은 홍군의 현재 기술조건으로 극복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견고한 성곽과 보루가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소련 측에서 제때 우리를 대신해 비행기와 대포 2가지 주요한 기술문제를 해결해주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사탄의 유혹
장개석이 장학량을 서북토비토벌 부총사령관에 임명한 후 장학량은 적극적으로 공비토벌에 나섰고 섬북에서 중공과 몇 차례 교전했다.
하지만 동북군은 사기도 떨어지고 전투력도 부족해 단기간에 4차례나 중공군에 패했다. 2개 사단과 1개 여단의 병력이 손실되었고 사단장 2명이 사망했으며 8천 정의 소청과 수백 정의 기관총 및 수십 문의 대포와 수십만 발의 탄약 및 대량의 군수품이 중공군의 손에 떨어졌다.
전세가 불리해진데다 주변에 잠복한 공산당의 암약 하에 장학량은 중공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1936년 4월 9일 밤 주은래는 연안(延安)에서 장학량을 만났다. 장학량은 처음으로 주은래와 만나 중공측에 반장(反蔣 장개석 반대) 입장을 바꿔 국민정부와 합작할 것을 희망했다. 장학량은 중공과 평화적인 국면을 유지하고 서로 공격하지 않으면서 동북군의 실력을 보존하려 했다. 당시 장학량은 주은래에게 속아 중공과 소련이 동북군과 합작해 항일에 나설 것이라 믿었다.
장학량은 이에 중공과 합작하기로 결정하고 동북군과 중공군이 서로 공격하지 않고 중공군이 동북군과 거짓으로 싸우는 척하면 중공의 무기 구입을 도와주고 탄알이나 전자부품 및 각종 설비와 의료용품을 제공하기로 했다.
서안사변 이전부터 장학량의 주변에는 이미 공산당원들이 침투해 있었다. 1936년 장개석이 서안에서 석방되기 전 상해의 ‘신문보(新聞報)’는 연일 문장을 발표해 장학량 신변에 있던 여천재(黎天才)를 지목하고 사변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장학량)가 신임하는 여천재는 본래 공산당원으로 북경대학 재학 당시부터 공산당 활동분자였다. 장작림은 일찍이 그를 죽이려 했다. 하지만 장학량은 그가 총명하고 문장에 능통한 것을 알고는 옆에 두고 개인비서로 삼았다. 여천재는 장학량에게 투항한 이후로도 사상이 변하지 않았다. 외부인들은 모르지만 장학량이 군영(軍營) 주임으로 있을 때 여천재의 한 부하(원주—반문욱潘文旭을 가리킨다)가 공산당원으로 군기를 누설하다 총살당한 적이 있었다. 이 사건을 통해 보자면 여천재는 여전히 공산당과 왕래하면서 공산당을 위해 공작해 왔음이 확실하다. 다만 장학량이 위원장(장개석)에게 절대 복종했기 때문에 여천재로서는 장학량의 적화(赤化)를 권하지 못했을 뿐이다. 섬북에 온 후 여천재는 분명 장학량의 속마음을 간파하고 기회를 타서 말을 꺼냈을 것이며 장학량은 곧바로 그의 올가미에 걸려든 것이다. 아마 이것이 이번 반란사건의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주은래와 중공 특무들은 장학량 주변에 예전 공산당원들이 침투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주은래는 장학량을 만난 후 또 이극농(李克農)과 유정(劉鼎)의 동북군 관련 정보 보고를 들었다. 뒤이어 4월 11일 중공중앙에 올린 보고서에는 장학량에 대해 “그의 주변에 일부 파시즘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중에는 몇몇 공산당원들(당을 이탈한 반도)이 있다.”고 언급했다.
여기서 그가 언급한 몇몇 공산당원들은 분명 여천재 등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장학량 주변이라고 했고 또 당을 이탈한 반도(叛徒)라고 했는데, 여천재를 우두머리로 하는 구 공산당원들 중 대다수는 중공 6기 4중 전회 때 중공 정치국에서 숙청된 반대파인 ‘중앙비상위원회(中央非常委員會)’ 중요멤버들이기 때문이다.
북방에 남아 있던 ‘비상위원회’ 조직은 소수 공산당원들로 여천재, 오우명(吳雨銘), 이희일(李希逸)을 핵심으로 하며 나장룡(羅章龍)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여천재에 따르면 그들은 “곳곳에서 우리 당의 당시 정책을 돌아보았고” 장학량을 이끌어 마르크스와 레닌을 연구하게 하고 국제운동사 및 중국운동사를 설명하는 동시에 이들 수십만 대군과 합작할 기회를 잡고 장학량더러 서북 독립의 대세를 모색하도록 격려했다. 아울러 서안사변 발생 수개월 전에 행동방안을 제정했는데 이속에는 단기적인 병변계획과 서북독립정부에 대한 장기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 (《항일전쟁연구(抗日戰爭研究)》 2000년 3기)
한편 양호성은 1928년 일본에 도착해 풍윤장(馮潤章)을 통해 도쿄 중공시위원회에 2번째 입당원서를 제출해 두 번째 하룡(賀龍 역주: 중공 10대 원수의 한명. 원래 농민군 출신으로 1926년 손문 휘하의 국민당 군단장으로 있을 때 중공에 가입했다.)이 되려 했다. 중공 중앙은 도쿄 시 당위원회에 답장을 보내 양호성의 공산당 가입에 동의했다.
편지 원문은 다음과 같다.
“당신들의 편지를 받고 특별히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양호성은 중앙에서 이미 가입을 허락했다. 가입수속의 진행은 당신들에게 일임한다. 가입절차는 동지 세 명의 소개가 있어야 하며 후보기간은 반년이다. 그와 다시 한 번 더 대화를 하되 2가지 점을 명확히 하기 바란다. 하나는 현재 큰 임무는 주로 광대한 군중을 얻어 폭동을 준비하는 것이며 지금 당장 총폭동(總暴動)을 실시할 필요는 없다. 총폭동은 우리 당의 미래이며 현재는 아직 행동구호라기보다는 선전구호다. 특히 동지마다 가입과 동시에 폭동에 들어가도록 파견할 필요는 없다. 둘째는 매 당원마다 가입 후 공작이 필요할 때면 당은 여전히 그가 공작하는 곳에 가서 조정할 필요가 있다….”
양호성은 본처 나패란(羅佩蘭)이 사망한 지 2년 후 중공이 그의 부대에 파견한 부녀회 주임 사보진(謝葆真)과 결혼했다. 사보진은 서안출신이며 두 사람은 상급 공산당원인 오대봉(吳岱峰)의 소개로 만났고 둘의 결혼 역시 중공 하남성 위원회의 비준을 거쳤다. 나중에 양호성의 비서로 있던 인사의 회고에 따르면 사보진은 결혼 후 양호성의 부인 신분을 이용해 공산당 조직 활동에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고 한다. 당시 중공의 많은 비밀회의가 양호성의 집안에서 열렸고 양호성은 적당한 구실로 자리를 피해주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35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