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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재: 청사에 붉은 마음 남긴 문천상

【정견망】

편집자 주: 중국전통문화를 널리 알리고 사당(邪黨)문화의 영향을 깨끗이 제거하기 위해 교육부문 대법제자들이 대법 중에서 닦아낸 정견(正見)을 활용해 한 세트 중국전통문화 교재 편찬 작업에 착수했다. 이제 막 시작단계라 부족한 점을 피하기 어려우니 세계 각 지역 대법제자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특히 교육부문 대법제자들의 참여와 질정을 바란다. 우리는 이 교재를 사용하는 동수들이 장차 수업 중에서 부딪친 문제들 및 교재의 장단점을 우리에게 반영해주길 희밍한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지속적으로 원고를 수정해 교재를 더 충실하고 완전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교재편집에 참여하고자 하는 보다 많은 동수들이 새로 동참해 공동으로 교재를 완성하는 것을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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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가(正氣歌) 및 서문

내가 북정(北庭)에 갇혀 어느 흙집에 앉아 있었다. 폭이 여덟 자에 깊이는 네 발쯤 되는데, 낮고 작은 문짝에 햇빛이 들어오는 틈도 작아 더럽고 어두컴컴한 곳이었다. 여름이 되면 온갖 기운이 모여들었다. 장마에 빗물이 사방에서 모여 침상이 둥둥 떠다닐 때는 물 기운(水氣)이요, 진흙이 반쯤 말라 찔 듯이 끓어오를 때는 흙 기운(土氣)이요, 해가 나면 몹시 뜨거워져 사방에 바람 길이 막힐 때는 해의 기운(日氣)이요, 처마 밑에 밥을 짓기 위해 불을 때 더위를 조장하는 것은 불 기운(火氣)이요, 쌓인 곡식이 썩어 냄새가 사람을 못 견디게 하는 것은 쌀 기운(米氣)이요, 어깨를 서로 비비며 비좁은 데서 비린내 누린내 땀내 때 냄새를 서로 피우는 것은 사람 기운(人氣)이요, 혹은 소대변 혹은 시체 혹은 쥐 썩은 것 등 각종 나쁜 기운이 섞여서 나오는 때는 더러운 기운(穢氣)이다. 이런 여러 기운이 겹쳐오니 당하는 이는 병이 나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게다가 나는 본래 체질이 가냘프고 약한데 그 사이에서 지낸 지 이제 이년이 되었으나 다행히 별 탈이 없었으니 무언가 기르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기르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맹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我善養吾浩然之氣)’고 하셨다. 저 기운이 일곱이면 내 기운은 하나다. 하나로 일곱을 막아내니 걱정할 게 무엇이 있겠는가? 하물며 그 호연이란 것은 바로 천지의 바른 기운이 아니겠는가? 이에 ‘정기가’(正氣歌) 한 수를 짓는다.

予囚北庭,坐一土室,室廣八尺,深可四尋,單扉低小,白間短窄,汙下而幽暗。當此夏日,諸氣萃然:雨潦四集,浮動床幾,時則爲水氣;塗泥半朝,蒸漚曆瀾,時則爲土氣;乍晴暴熱,風道四塞,時則爲日氣;簷陰薪爨,助長炎虐,時則爲火氣;倉腐寄頓,陳陳逼人,時則爲米氣;駢肩雜逐,腥臊汙垢,時則爲人氣;或圊溷、或毀屍、或腐鼠,惡氣雜出,時則爲穢氣,疊是數氣,當之者鮮不爲厲。而予以孱弱,俯仰其間,於茲二年矣,幸而無恙,是殆有養致然。然爾亦安知所養何哉?孟子曰:“我善養吾浩然之氣。”彼氣有七,吾氣有一,以一敵七,吾何患焉。況浩然者,乃天地之正氣也。作《正氣歌》一首。

천지에는 올바른 기운이 있어엇섞여 유동적인 형체에 부여되더니땅에서는 강과 산이 되고하늘에서는 해와 별이 됐구나.사람에게 있어서는 호연지기(浩然之氣)라고 불리고아주 많아지면 푸른 하늘을 가득 메운다.왕도가 맑고 안정되어 있을 때는조화로움 머금고 밝은 조정에 펼쳐지나,시절이 곤궁할 땐 절개를 보여하나하나 역사에 드리워진다.

제(齊)나라에서는 태사의 죽간이 되고진(晉)나라에서는 동호의 붓이 됐네.진(秦)나라에서는 장량의 철퇴가 되고한(漢)나라에서는 소무의 부절(符節)이 됐네.장군 엄안의 머리가 되고시중 혜소의 피가 되기도 했고휴양을 지키던 장순의 이빨이 되고상산 태수 안고경의 혀가 되기도 했네.어떤 때는 요동에 관녕의 모자가 되어맑은 지조는 얼음이나 눈보다 매서웠네.어떤 때는 제갈량의 출사표가 되어귀신도 장렬함에 울어댔네.어떤 때는 조적의 강 건너 삿대가 되니강개함이 오랑캐를 삼킬만했고어떤 때는 역적을 치는 단수실의 홀이 되어역적의 머리를 깨뜨렸네.

이러한 정기 온 세상에 가득하여늠름하고 장렬함이 만고에 전해진다.이러한 정기 해와 달을 꿰뚫으니살고 죽음 따위 어찌 논하리오?땅을 묶는 밧줄은 이에 의지해 우뚝 서고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은 이에 힘입어 높여진다.삼강이 실로 이로써 맥을 유지하고도의가 이를 뿌리로 삼아 뻗어간다.

아아! 나는 재난을 만났건만천한 몸은 실로 힘이 없구나.초의 죄수처럼 관을 머리에 묶고서수레에 실려 황량한 북으로 끌려가네.가마솥에 삶겨죽는 벌도 엿처럼 달게 받으련만원한들 그리 될 수 없었네.어두운 감방은 귀신불만 적막하고봄날 정원은 시커먼 하늘에 갇혀 있구나.소와 천리마가 마구간을 같이 쓰고닭과 봉황이 같이 깃들어 먹다가도하루아침 안개와 이슬이 내리면제각기 도랑 속 시체가 되리라.이처럼 추위와 더위를 두 번 보냈지만온갖 나쁜 기운들이 절로 피해가네.아 슬프도다! 낮고 음습한 이 땅이나의 안식처가 되었단 말인가?어찌 달리 기묘한 방법이 있어음양의 기운이 나를 해칠 수 없었나?이 몸 돌아보니 밝은 기운 있어서 일 뿐고개 들어 올려다보니 구름은 희기만 하여라.아득하고도 아득하여 내 마음 슬프나푸른 하늘 어찌 끝이 있겠는가?훌륭한 이들 떠난 지 이미 오래건만남겨진 모범은 여전하구나.바람 부는 처마 밑에서 책을 펼쳐 읽노라니옛 성현의 도리가 나의 얼굴 비추어 주네.

天地有正氣 천지유정기雜然賦流形 잡연부류형下則為河岳 하즉위하악上則為日星 상즉위일성於人曰浩然 어인왈호연沛乎塞蒼冥 패호색창명皇路當清夷 황로당청이含和吐明庭 함화토명정時窮節乃見 시궁절내현一一垂丹青 일일수단청

在齊太史簡 재제태사간在晉董狐筆 재진동호필在秦張良椎 재진장량추在漢蘇武節 재한소무절為嚴將軍頭 위엄장군두為嵇侍中血 위혜시중혈為張睢陽齒 위장수양치為顏常山舌 위안상산설或為遼東帽 혹위요동모清操厲冰雪 청조려빙설或為出師表 혹위출사표鬼神泣壯烈 귀신읍장렬或為渡江楫 혹위도강즙慷慨吞胡羯 강개탄호갈或為擊賊笏 혹위격적홀逆豎頭破裂 역수두파열

是氣所旁礡 시기소방박凜烈萬古存 늠렬만고존當其貫日月 당기관일월生死安足論 생사안족론地維賴以立 지유뇌이립天柱賴以尊 천주뇌이존三綱實系命 삼강실계명道義為之根 도의위지근嗟予遘陽九 차여구양구隸也實不力 예야실불력楚囚纓其冠 초수영기관傳車送窮北 전거송궁북鼎鑊甘如飴 정확감여이

求之不可得 구지불가득陰房闃鬼火 음방격귀화春院閟天黑 춘원비천흑牛驥同一皂 우기동일조雞棲鳳凰食 계서봉황식一朝蒙霧露 일조몽무로分作溝中瘠 분작구중척如此再寒暑 여차재한서百沴自闢易 백려자벽역嗟哉沮洳場 차재저여장為我安樂國 위아안락국豈有他繆巧 기유다무교陰陽不能賊 음양불능적顧此耿耿在 고차경경재仰視浮雲白 앙시부운백悠悠我心悲 유유아심비蒼天曷有極 창천갈유극哲人日已遠 철인일이원典刑在夙昔 전형재숙석風檐展書讀 풍첨전서독古道照顏色 고도조안색

[역주]:

1) 단청(丹靑): 한청(汗靑)을 뜻한다. 한청이란 옛날 종이가 없던 시절 대나무를 쪼개 불에 구운 후 기름을 빼고 그 위에 글을 썼다. 여기서 유래되어 흔히 역사(歷史)라는 뜻으로 쓰인다.

2) 태사간(太史簡): 태사(太史)는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를 말한다. 간(簡)은 죽간에 기록했다는 뜻.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장공(莊公)이 대부 최저(崔抒)의 집을 드나들면서 그 아내와 사통하자 이를 분하게 여긴 최저가 기회를 엿보다 장공을 시해하고 경공을 세운 뒤 자신이 권력을 장악했다. 이에 제나라 태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최저가 그 군주를 시해했다(崔抒弑其君)”라고 기록했다.

최저가 이를 알고 화가 나서 태사를 죽였다. 그러자 그 동생이 다시 “최저가 그 군주를 시해했다(崔抒弑其君)”라고 썼다. 최저가 동생을 죽였다. 셋째 동생이 형들의 뒤를 이어 또 “최저가 그 군주를 시해했다”고 기록하자 최저도 더 이상은 죽이지 못했다. 즉 직필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용감한 행동을 말한다.

3) 동호필(董狐筆): 동호(董狐)는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사관이다. 당시 조돈(趙盾)이 정경으로 실권을 쥐고 있었는데, 조천(趙穿)이 그 임금을 시해했다. 이때 사관이 동호는 “조돈이 그 군주를 시해했다(趙盾弑其君)”고 기록했다. 조돈이 이를 알고 임금을 시해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천(穿)인데 왜 내가 했다고 썼느냐 책망하니 동호는 당신이 정경의 자리에 있을 때 그런 일이 발생했는데 사건에 대한 조사도 하지 않았고 그가 아직 국경 안에 있으니 당신의 책임이라고 대답했다.

‘좌전’에서 공자는 이 사건에 대해 “동호는 옛날의 훌륭한 사관이다. 법대로 기록하여 사실을 숨기지 않았으니. 조선자(조돈)는 옛날의 훌륭한 대부다. 사관의 법을 인정해 자신의 악명을 받아들였으니. 애석하구나, 국경을 넘었더라면 악명을 면했을 텐데!(董狐, 古之良史也. 書法不隱. 趙宣子, 古之良大夫也. 爲法受惡. 惜也, 越竟乃免!”라고 평가했다. 동호의 기록이 법에 따라 공평무사했기 때문에 조돈이 억울한 점이 있어도 그 기록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4) 장량추(張良椎): 진시황이 육국(六國)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얻자 한(韓)나라 공자였던 장량이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해 창해의 역사를 시켜 박랑사(博浪沙)에서 쇠몽둥이를 던져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장량은 나중에 황석공(黃石公)을 만나 도를 전수받고 마침내 유방을 도와 진나라를 멸망시킨다.

5) 소무의 절: 소무는 한무제 때 흉노에 파견된 사신이다. 흉노왕에게 강제로 억류되어 무려 19년간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도 한나라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지 않았다.

6) 엄장군의 머리: 엄장군은 삼국시대 엄안(嚴顔)을 말한다. 후한 촉군(蜀郡) 임강(臨江) 사람이다. 유장(劉璋)의 부장(部將)으로, 파군태수(巴郡太守)로 있었는데 싸움을 잘했다. 유비(劉備)가 익주(益州 지금의 사천성)으로 들어와 장비(張飛)를 보내 강주(江州)를 공격할 때 사로잡혔다. 장비가 그를 위협하기 위해 작두를 가져오게 했지만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나는 머리 없는 장군(斷頭將軍)는 들었어도 투항한 장군(降將軍)이 있단 말은 듣지 못했다”고 굴하지 않았다.

장비가 이를 장하게 여겨 풀어 주고 빈객(賓客)으로 예우했다. 나중에 유비가 익주목(益州牧)이 되고난 뒤 전장군(前將軍)으로 삼았다. 뒷날 황충(黃忠)을 도와 조조(曹操)의 대장 장합(張郃)과 싸워 공을 세웠다.

7) 혜시중의 피: 혜시중은 서진(西晉)의 혜소(嵇紹)를 말한다. 죽림칠현으로 유명한 혜강(嵇康, 223~262)의 아들이다. 자는 연조(延祖). 시호는 충목(忠穆). 비서랑(秘書郞)을 거쳐 시중(侍中)에 이르렀기 때문에 혜시중(嵇侍中)이라 칭한다. 진혜제 영흥(永興 304년~306년)초 하간왕(河閒王) 사마옹 등의 반란으로 혜제(惠帝)가 몽진할 때 황제를 호위하다 적의 화살에 맞아 황제가 보는 앞에서 사망했다. 당시 그의 피가 용포를 물들이자 혜제가 몹시 애도했다. 반란이 평정된 뒤, 궁으로 돌아온 혜제에게 여러 신하들이 피 묻은 옷을 벌어 빨도록 청하자 혜제는 “이것은 혜시중의 피니 없애지 말라”고 했다. 이후 충신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졌다.

8) 안고경(顔杲卿)의 혀: 안고경은 당나라 사람으로 ‘안씨가훈’을 지은 안지추(顔之推)의 5대손이자 서예가로 유명한 안진경(顔眞卿)의 종형(從兄)이다. 원래 안녹산(安祿山) 밑에 있다가 하북성 상산군(常山郡) 태수(太守)로 발탁되었다. 755년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종제(從弟)인 안진경과 호응해 현종(玄宗)을 위한 의병을 일으켜 반란군의 배후를 위협했다. 이듬해 사사명(史思明)에게 포위되어 고전 끝에 체포된 후, 안녹산 앞에 끌려나온 그는 끝까지 굴하지 않고 안녹산의 반역을 힐난하다가 처형되었다. 당시 화가 난 안록산이 그의 혀를 잡아 뽑게 했는데 혀가 뽑혀도 비난을 그치지 않았다. 이때부터 안고경의 혀는 충신의 곧은 절개를 상징하게 되었다.

9) 관녕(管寧)의 모자: 관녕은 삼국 시대 위(魏)나라 북해(北海)사람으로 자는 유안(幼安)이다. 어려서 고아로 자라 어렵게 공부해 인근에 명성이 있었다.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이 있었지만 끝내 나가지 않았다. 화흠(華歆), 병원(邴原) 등과 가깝게 지냈다. 젊을 때 화흠과 같이 공부할 때 고관대작의 수레가 지나가자 화흠이 책을 덮고 바라보는 것을 보고 세상의 부귀영화(富貴榮華)에 뜻을 주었다고 하여 같이 쓰던 방석을 갈라 절교했다는 관녕할석(管寧割席) 이야기가 유명하다.

후한 말 전란을 피해 요동(遼東) 땅에 가서 30여 년을 살았는데, 평상에 꿇어앉아 글을 읽어 무릎에 닿은 상(床)의 바닥이 뚫어졌다고 한다.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위문제(魏文帝) 황초(黃初) 중에 태중대부(太中大夫)로 불리고, 명제(明帝) 때는 광록훈(光祿勳)으로 불렸지만, 모두 나가지 않았다. 관녕의 모자는 농민이 쓰는 삿갓으로 벼슬이나 부귀영화에 연연하지 않는 선비의 기개를 상징한다.

10) 장순(張巡)의 이: 장순은 당(唐) 나라 때의 사람(709~757)이다.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이 일어나자 허원(許遠)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수양성(睢陽城)을 지키며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들을 맞아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그러나 포위된 지 여러 달이 지나자 식량이 떨어졌고 결국 적의 포로가 되었다. 평소 반군과 싸울 때 분을 참지 못하고 이를 부득부득 갈아서 이가 다 부스러졌다고 한다. 항복하라 권해도 따르지 않자 안록산이 화를 내며 “네가 싸울 때 이를 너무 갈아 이가 없다는데 어디 보자”면서 칼로 입을 도려내고 보니 정말로 이빨이 몇 개 남지 않았다고 한다.

11) 조적(祖逖)의 노: 조적은 동진(東晉) 범양(范陽) 주현(遒縣) 사람이다. 자는 사치(士稚)로, 조납(祖納)의 동생이다. 평소 성품이 강직해서 절조를 숭상했다. 서진(西晉) 말에 경사(京師)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친당(親黨) 수백 가구를 이끌고 남쪽으로 옮겼다. 진원제(晉元帝) 때 예주자사(豫州刺史)가 되어 북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건흥(建興) 원년(313) 부하들을 이끌고 도강(渡江)하다가 물 가운데서 노를 치면서[이를 중류격즙(中流擊楫)이라 한다] 반드시 중원(中原)을 회복하겠다고 맹세했다. 옹구(雍丘)에 주둔하면서 그 남쪽 땅을 모두 진나라의 영토로 만들었다. 나중에 황실이 내분으로 어지러워지면서 여왕(慮王) 돈(敦)이 내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고 죽었다.

12) 단수실(段秀實)의 홀: 단수실은 당나라 농주(隴州) 견양(汧陽) 사람으로 자는 성공(成公)이다. 당(唐)나라 중기의 명장(名將)으로 어려서부터 경사(經史)를 읽었고 성장한 후로는 무예를 익혔다. 언행이 겸손하고 소박하면서도 장중했다. 당 덕종(德宗) 때 주차(朱泚)가 모반을 일으킨 후 단수실을 불러 상의하려 하자 손에 들고 있던 홀(笏)로 주차를 내리쳤다. 비록 주차를 죽이지 못해 피살당하긴 했지만 그의 충성심과 기개를 잘 보여준다. 이후 ‘격적홀(擊賊笏 적을 격타한 호)’은 충정(忠貞)과 정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0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