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진순천(秦順天)
충현(忠賢)이 되기로 맹세하다
문천상(文天祥)이란 이름의 내원은 그의 부친이 일찍이 한 아이가 보라색 구름을 타고 내려왔다가 잠시 후 다시 올라갔기 때문에 생겼다. 나중에 아들을 낳자 이름을 운손(雲孫)이라 했고 자(字)를 천상(天祥 역주: 하늘의 상서로운 징조란 의미) 또 이선(履善)이라 했다.
그의 조적(祖籍 조상의 본적)은 성도(成都)였지만 1236년 강서(江西) 길수(吉水 지금의 길안시 청원구青原區 부전향富田鄉 문가촌文家村)의 한 부유한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 문의(文儀)는 현지의 유명한 선비로 장서(藏書)가 아주 풍부했다. 또 온갖 방법을 동원해 유명한 스승들을 초빙해 천상과 동생 형제를 가르쳐 밤낮으로 학문을 다그치게 했다. 모친 증덕자(曾德慈)는 학자 집안 출신으로 자식 교육에 요령이 있었다.
당시 여릉(廬陵)에 역병이 유행해 많은 이들이 병으로 죽었다. 문 씨 집안에는 본래 집을 새로 짓기 위해 많은 목재를 준비해놓았는데 거리에 갑자기 사망해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시신이 늘어났다. 문의는 즉각 준비해둔 목재들로 관을 만들어 가난한 이들에게 무료로 나누어주었다. 또 문 씨 집안의 땅을 소작하던 한 농민이 흉년으로 수확이 부족해지자 문의는 “차마 관아에 알려 책임을 묻지 않았다.”
이렇게 후덕한 가풍의 영향을 받은 문천상은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읽었고 또 재주가 많았다. 그는 늘 성현(聖賢)의 책을 읽고 충신(忠臣)들의 전기를 애독하곤 했다. 그는 부친이 늘 예불하고 참선하는 것을 본데다 또 여릉의 청원산(靑原山)은 선종(禪宗)의 성지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불가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한번은 여릉학궁에 놀러갔다가 사당 안에 조정에서 ‘충(忠)’의 시호를 내린 세 분의 향현(鄉賢 같은 향 출신의 현인) 즉, 구양수(歐陽修), 양방(楊邦), 호전(胡銓)을 모신 것을 보았다. 소년 문천상은 마음으로 이들을 사모해 장래 만약 이런 영웅이 되지 못한다면 진정한 사내대장부라 할 수 없다고 맹세했다.
스물에 장원급제
18세 때 문천상은 여릉 향교 시험에서 일등을 했다. 나중에 백로주(白鷺洲)서원에 들어가 공부를 했는데 공사(貢士 회시 합격자)에 선발되었다. 뒤이어 부친을 따라 임안(臨安 남송의 수도로 지금의 항주)에 가서 전시(殿試 황제 앞에서 치르는 과거의 최종시험)를 보았다.
전시에서 문천상은 ‘하늘을 본받아 쉬지 않는다(法天不息)’는 논술 주제에 대한 대책을 내놓았다. 만여 자에 달하는 문장을 초고도 없이 역사를 거울로 삼아 일필휘지로 완성했다. 이 대책에서 그는 세상을 경륜하고 나라를 구제할 포부를 드러내며 “군주에 대한 충성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철석(鐵石)처럼 굳건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주고관(主考官 과거 주관자)는 나라에 인재를 얻었다고 축하했다. 송나라 이종(理宗) 황제가 직접 문천상을 601명 진사 급제자 중 1등인 장원으로 선발했다. 당시 그의 나이 겨우 스물이었다. 이종은 그의 이름을 보고는 일찍이 “이 하늘의 길상(天祥)은 바로 송나라의 상서로움(宋瑞)이로다.”라고 했다. 이때부터 문천상에게는 또 송서(宋瑞)라는 자(字)가 생겼다.
그러나 얼마 후 불행히 부친이 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문천상은 고향에 돌아와 삼년상을 치러야했다.
관직에서 부침하다 장년에 은거
삼년상을 마치고 돌아온 문천상은 영해군(寧海君 지금의 산동 연태시) 절도판관(節度判官)에 임명되었다. 당시 국운이 점차 쇠약해져 몽골군의 핍박이 심해지자 환관 동송신(董宋臣)이 천도할 것을 제안했다. 백관들이 모두 감히 나서서 반대하지 못했는데 오직 문천상만이 상서를 올려 “동송신을 참살해 인심을 통일하시길 청하옵니다.”라고 했다. 당시 조정에서 이 상서를 받아들이지 않자 몇 차례나 올렸음에도 답변이 없었다. 문천상은 이에 자청해서 한직(閑職)으로 옮겨줄 것을 청했다.
1259년부터 1274년까지 15년간 문천상은 서주지부(瑞州知府), 강서제형(江西提刑 제형은 형벌을 관장하는 직책), 안휘영국지부(安徽寧國知府), 호남제형(湖南提刑) 등의 직책을 맡았다. 하지만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한데다 직간을 잘해 5차례나 관직에서 쫓겨났고 두 번이나 고향인 문산(文山)으로 물러났다.
장년(壯年)이 되어 고향에 돌아온 후 문천상은 은거할 산장을 세우고 자연에 묻혀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공명과 부귀는 지나가는 바람으로 여기고(以功名富貴爲飄風)” 마음을 가라앉히고 도를 닦으며 스스로 세속에서 멀어졌다.
당시 문천상은 재능과 시문(詩文)으로 널리 알려졌고 또 외모마저 위풍당당했다. 《송사(宋史)》에선 “외모가 당당하면서도 피부가 옥처럼 희고 눈썹이 아름답고 눈이 길어서 바라보면 빛이 났다.”고 표현했다. 일개 서생의 몸이었지만 문천상은 또 무예를 습득해 체력과 기백도 뛰어났다. 특히 수영을 잘했고 장기는 눈을 감고도 둘 정도였다.
하지만 국난이 닥치자 소탈하고 한적한 그의 생활에도 변화가 발생했다.
서생은 본래 약해도 나라가 망하면 강해져
1275년 원나라 군사들이 침입하자 송나라 군의 방어선이 무너졌다. 다듭해진 조정에서는 각지에 조서를 내려 군사를 조직해 왕실을 구원하게 했다. 국난이 닥치자 당시 오직 장세걸(張世傑)과 39세의 문천상만이 호응했다. 어떤 사람이 문천상에게 “양과 범의 싸움”이라며 승산이 없다고 중단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문천상은 나라가 위급한데 누구도 수도를 지키려 들어가지 않는다면 심히 유감이며 가슴 아픈 일이라면서, 자신은 역량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침으로써 천하의 의로운 인사들이 이를 계기로 떨쳐 일어나게 하려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때 국사를 언급할 때마다 문천상은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남의 즐거움을 즐겁게 여기는 사람은 그가 근심하는 일을 근심해야 하며, 남이 준 옷과 음식에 의지해 사는 사람은 마땅히 그를 위해 일하며 죽음도 불사해야 한다.”고 비분강개하여 말했다.
문천상은 자신이 평소 사치했던 것을 자책하며 전 재산을 털어 군자금에 보탰다. 또 원나라에 항거하는 의군(義軍) 3만 여 명을 모집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 모친 증 씨는 대의를 깊이 알고 아들의 행동을 지지해주었으며 또한 아들을 따라다니며 곳곳을 전전했다. 문천상은 나라를 구하는 것은 부모를 구하는 것과 같다고 여겼다. 부모에게 병이 있으면 설사 치료가 어려울지라도 아들로서는 전력을 다해 구해야 한다!
원나라 병사들이 수도인 임안(臨安)에 이르자 문무관원들이 앞을 다퉈 도망쳤다. 문천상은 우승상(右丞相) 겸 추밀사(樞密使)에 임명되어 협상을 위해 원나라 진영으로 파견되었다. 하지만 원나라 장수 바얀(伯顏)과 담판하러 적진에 들어갔다가 그곳에 억류되었다. 대세가 이미 기운 것을 본 황실의 사(謝) 태황태후는 다섯 살 어린 황제 공제(恭帝)를 안고 성문을 나와 원군에 투항했다.
바얀은 문천상에게 투항할 것을 권했지만 그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굽히려 하지 않았다. 바얀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북방으로 압송하게 했다. 가는 길에 문천상은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했고 온갖 고생을 겪으며 곳곳을 전전하다 복주(福州)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새로 옹립된 어린 황제 송 단종(端宗)에 의해 우승상에 임명되었다. 그는 장세걸, 육수부(陸秀夫)와 함께 항원(抗元)투쟁을 견지했다. 이들 세 사람은 나중에 ‘송말 삼걸(三傑)’로 불리게 된다.
1277년 문천상은 강서 남부에서 원나라 군대를 크게 물리쳐 14개 주현(州縣)을 수복했다. 이때는 이미 남송이 원에 투항한 지 2년이 되었다.
전투에 패해 포로가 되다
나중에 단종도 병으로 죽자 육수부 등은 다시 여섯 살 어린 황제를 다시 옹립하고 문천상을 신국공(信國公)에 봉했다. 쿠빌라이는 원나라 장수 장홍범(張弘範)에게 남송의 작은 조정을 정벌하게 했다.
1278년 12월 문천상의 의군은 중과부적으로 오파령(五坡嶺 지금의 광동 해풍)에서 적에게 패했다. 문천상은 미리 혀 밑에 준비해둔 빙편(氷片)을 먹고 자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포로가 되었다. 원나라 병사들은 문천상을 포박해 장홍범의 군영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문천상을 창으로 위협하며 장홍범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했다. 하지만 문천상은 거절하며 절을 하지 않았다. 장홍범은 그의 강직하고 아첨하지 않는 성품을 보고 수하들에게 문천상을 풀어주게 하고 손님의 예로 대우했다.
장홍범은 또 문천상에게 장세걸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편지를 써달라고 했다.
문천상이 대답했다.
“내가 부모를 보호할 수 없다고 하여 설마 다른 사람에게도 부모를 배반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장홍범이 거듭 강요하자 문천상은 마침내 《과영정양(過零丁洋)》을 지어 그에게 주었다. 읽어보니 “인생에 자고로 죽지 않는 이 누가 있으랴? 한가닥 단심을 남겨 청사에 바치고자 하노라(人生自古誰無死? 留取丹心照汗青).”까지 읽은 장홍범은 그의 충의(忠義)와 시재(詩才)에 감탄해 더 이상 핍박하지 않았다.
1279년 2월 장홍범은 송나라 저항군들이 남아 있던 애산(崖山)에 총공격을 발동했다. 이때 장세걸은 미리 황실 및 전체 군사와 백성들을 이미 천 척의 배에 옮겨 타게 했다. 해전(海戰)은 참혹하고 격렬했다. 마지막 절체절명의 순간 육수부는 적에게 항복하는 대신 국새를 허리에 매고 등에는 어린 황제를 업고 바다로 뛰어들어 순국했다. 다른 궁인들과 대신(大臣) 및 장군 등 10만 명이 앞을 다퉈 물에 뛰어들어 함께 순국했다. 결국 송나라군은 전멸했고 며칠 후 바다 위로 수만에 달하는 시체가 떠올랐다. 장세궐은 가까스로 적의 포위를 돌파했지만 나중에 태풍을 만나 역시 바다에 빠져 죽었다. 이에 이르러 건국 3백여 년이 지난 대송(大宋)은 완전히 멸망했다.
당시 원나라 군선(軍船)에 끌려와 멀리서 이 광경을 직접 목격했던 문천상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는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 함께 바다에 뛰어들어 죽으려 했다. 하지만 원나라 군사들이 저지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남쪽을 바라보며 통곡만 할 뿐이었다. 항원(抗元) 삼걸 중 이제 남은 것은 포로가 된 문천상뿐이었다.
장홍범은 주연을 베풀어 부하들의 공을 치하하는 자리에서 문천상에게 술을 권하며 말했다.
“이제 송나라는 이미 망했소. 신하로서 당신은 이미 충과 효를 다했으니 마땅히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오. 누가 또 당신에 대해 기록할 수 있겠소? 당신이 만약 원나라 조정에서 일을 하고 싶다면 원나라 조정의 재상 자리는 당신 말고 누가 감당할 수 있겠소?”
문천상이 대답했다.
“나라가 망하는 데도 구하지 못했으니 신하된 몸으로서 죽어도 죄가 남을 것이오. 그러니 어찌 두 마음을 품고 구차하게 삶을 도모 하겠습니까? 상(商)나라가 멸망할 때 백이와 숙제는 의리상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았고 나라가 망했다고 해서 그 의리를 바꾸진 않았소이다. 신하된 몸으로 나는 자신의 노력을 다했으니 무슨 기록하고 말고를 논한단 말입니까?”
장홍범은 감동어린 표정을 지으며 그의 인의(仁義)에 감동해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감탄했다.
이때부터 장홍범은 문천상의 생활에 편의를 봐주었다. 또 쿠빌라이에게 직접 편지를 올려 문천상을 죽일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를 상세히 밝혔다. 쿠빌라이도 감동해서 “어느 집인들 충신이 없겠는가?”라고 하면서 문천상을 예로 대우하게 하고 대도(大都 원의 수도로 지금의 북경)로 압송하게 했다.
몇 달 후 장홍범은 사람을 시켜 문천상을 대도로 호송하게 했다. 출발 전에 그는 부하들에게 절대 문천상에게 굴욕을 주지 못하도록 단단히 훈계했다.
강서 지역에 들어왔을 때 문천상은 단식을 시작했다. 그의 계획은 굶어서 순국해 고향에 뼈를 묻는 것이었다. 이 기간에 문천상은 음식물 주입을 강요당했지만 단호히 거부하고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단식 8일 후에도 그의 몸은 쇠약해지지 않았고 배는 이미 노릉(盧陵)을 지났다. 고향 땅에서 죽을 수 없게 된 것을 안 문천상은 결국 단식을 포기했다.
투항하란 압박을 받다
10월 초 만 리를 돌고 돌아 대도에 도착한 문천상은 손님을 접대하는 ‘회동관(會同館)’에서 ‘상빈(上賓)의 예로 대접을 받았다.’ 문천상의 굽힐 줄 모르는 기개는 쿠빌라이를 감동시켰고 그는 문천상의 항복을 원했다.
첫 번째로 투항을 권유하러 온 사람은 문천상과 마찬가지로 장원 출신의 송나라 대신이었던 유몽염(留夢炎)이었다. 그는 남송에서 승상을 지냈지만 위급할 때 직위를 버리고 도주했다. 얼마 후 원나라에 투항해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있었다. 문천상은 그를 보자마자 큰 소리로 꾸짖었고 유몽염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그대로 물러났다.
두 번째는 원나라에 투항한 후 영국공(瀛國公)에 봉해진 어린 황제 공제(恭帝)가 원의 압력을 받아 투항을 권유하러 왔다. 어린 황제를 본 문천상은 신하로서의 예를 정중하게 올리고 북쪽을 향해 꿇어 앉은 후 땅에 엎드려 통곡했다. 그는 어린 황제를 대하고 그저 “성가(聖駕 어가)여 돌아오소서! 성가여 돌아오소서!”라고만 반복하며 자신의 순국할 결심을 드러냈다. 머쓱해진 공제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했다.
세 번째로는 원나라 평장정사(平章政事 승상 바로 아래 직위) 아흐마드(阿合馬 한자로는 아합마) 역시 문천상을 만나러 왔다. 문천상이 길게 읍만 하고 절을 올리지 않고 자리에 앉자 아흐마드가 소리를 질렀다.
“어째서 재상을 보고도 무릎을 꿇지 않느냐?”
그러자 문천상이 대답했다.
“남조(南朝 송)의 재상이 북조(北朝 원)의 재상을 만나는데 왜 무릎을 꿇어야 한단 말이오?”
나중에 아흐마드 역시 말없이 떠나갔다.
그러자 원나라 재상 발라(孛羅)가 직접 나섰다. 그는 먼저 문천상에게 감옥에 수감되는 고통을 맛보게 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문천상은 목에 칼을 차고 두 손이 결박당한 채 병마사(兵馬使) 감방에 수감되었다. 십여 일 후에야 수갑이 풀렸고 또 반달이 지난 후에야 목에 찬 칼을 풀어주었지만 목에는 여전히 쇠사슬이 묶여 있었다.
얼마 후 문천상은 추밀원(樞密院)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는 태연히 선 채 무릎을 꿇으려 하지 않았다. 발라가 좌우에 명령해 강제로 눌러 넘어뜨린 후에도 문천상은 기어이 앉고자 했고 무릎을 꿇으려 하지 않았다. 또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 억지로 그의 다리를 때려 강제로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문천상이 말했다.
“이제 죽음만이 있을 뿐인데 굳이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있겠소!”
발라가 소리를 질렀다.
“네가 죽고자해도 내가 너를 죽지 못하게 하고 옥에 가둬둘 것이다!”
문천상이 대답했다.
“나는 의리로 죽는 것이니 감금 따위가 두렵겠는가!”
결국 발라는 어쩔 수 없이 옥리에게 시켜 문천상을 데려가 감방에 가두게 했다.
감옥에서의 정기(正氣)
문천상은 일찍이 자신이 감옥에 있을 때 느낀 감수를 이렇게 기록했다.
“하필 지옥을 물을 게 뭐 있는가, 인간세상에서 야차를 보았네(地獄何須問,人間見夜叉)”
“승상이 어찌 옥리(獄吏)를 견디랴? 그 옛날 진(秦)나라의 동평후는 제후가 어찌 정원사가 되었을까?(丞相豈能堪獄吏,故侯安得作園人?)”
하지만 그는 감옥에 갇혀 굴욕을 겪으면서도 오히려 평소처럼 편안했다.
“아침이 담백하니 정신은 오히려 상쾌하고, 저녁 잠자리가 불편해도 꿈은 절로 편안하구나.(朝餐淡薄神還爽,夜睡崎嶇夢自安)”
병마사 감옥은 더럽기 그지없었다. 매번 많은 비가 내릴 때면 감방에 물이 차서 늪처럼 변했다. 침상마저 흙탕물에 잠기면 어쩔 수 없이 물속에 서서 지내야 했다. 벽속의 쥐구멍에도 물이 차서 쥐들이 서로 나오려고 다투다 물에 빠져죽었다. 그러다 해가 뜨면 감방은 마치 찜통처럼 푹푹 쪘고 공기 중에는 식량이 썩는 냄새와 변소의 더러운 냄새에 쥐의 사체가 썩는 냄새 등이 더해져 사람이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또 한 번은 큰 폭우가 내려 감방벽이 무너져 내렸다. 문천상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방으로 이송되었다. 수리된 후 다시 돌아온 감방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이전의 썩은 냄새와 뜨거운 증기는 여전히 남아 있구나. 내가 있던 곳을 돌아보니 역시 호연하게 홀로 존재하누나.”
문천상은 호연(浩然)한 정기로 역경 중에 감당하기 힘든 모든 것들을 막아냈다. 바로 이렇게 좁고 어둡고 더러운 감옥 안에서 그는 천고에 이름을 날린 ‘정기가(正氣歌)’를 완성했다.
천지에는 올바른 기운이 있어엇섞여 유동적인 형체에 부여되더니땅에서는 강과 산이 되고하늘에서는 해와 별이 됐구나.사람에게 있어서는 호연지기(浩然之氣)라고 불리고아주 많아지면 푸른 하늘을 가득 메운다.왕도가 맑고 안정되어 있을 때는조화로움 머금고 밝은 조정에 펼쳐지나,시절이 곤궁할 땐 절개를 보여하나하나 역사에 드리워진다.
…
이러한 정기 해와 달을 꿰뚫으니살고 죽음 따위 어찌 논하리오?땅을 묶는 밧줄은 이에 의지해 우뚝 서고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은 이에 힘입어 높여진다.삼강이 실로 이로써 맥을 유지하고도의가 이를 뿌리로 삼아 뻗어간다.
…
이 시에서 문천상은 12명의 역대 충신열사들을 열거하며 그들의 찬란하고 위대한 장거(壯舉)로 곤경에 처한 자신이 더 분발할 것을 격려했다. 감옥 속에서도 그의 노래는 그치지 않는다.
“모친께선 일찍이 내게 충을 가르치셨고 나는 모친의 뜻을 어기지 않았네(母親曾教我忠,我不違母志).”
“고요할 땐 방외의 배움을 전하고 밝을 땐 옥중에서 시를 쓰네(靜傳方外學,晴寫獄中詩)”
“곧은 줄은 갈고리처럼 굽힐 수 없고 자고로 성현들은 옥에 갇힌 적 많았네(直弦不似曲如鉤,自古聖賢多被囚).”
“자고로 곰발바닥과 물고기는 둘 다 얻을 수 없고 고니와 참새가 어찌 같은 일을 도모할 수 있으랴?(熊魚自古無雙得,鵠雀如何可共謀)”
이후 3년 2개월간 문천상은 시종일관 어려움 속에서도 절개를 고치지 않고 죽어도 항복하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가족 정의 고험
세상과 거의 단절된 채 적막하게 감옥에 갇힌 가운데 문천상은 또 “꿈속에 집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품었다. 그가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킨 이래 그의 가족들도 그를 따라 이리저리 전전해야 했다. 장남과 모친은 군중에 유행하던 돌림병으로 사망했고 처와 두 딸은 포로가 되었다. 나머지 딸들도 군중에서 병사하거나 전투 중에 죽었다. 포로가 된 차남은 이미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3년간 그의 아내와 딸에게선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조강지처 구양(歐陽)부인은 학자 집안 출신으로 문천상과는 금슬이 아주 좋았다. 그는 일찍이 시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삼강오륜을 지키기 위해몸이 있어도 돌볼 겨를이 없네.아내여 남편을 기대하지 말고자식이여 아비를 가대하지 마라.하늘과 땅처럼 길고 오래도록이 원한(恨) 천고에 남으리라.내생에 인연이 남아 있다면지금처럼 다시 모여 가족이 되자꾸나.
我爲綱常謀 아위강상모有身不得顧 유신부득고妻兮莫望夫 처혜막망부子兮莫望父 자혜막망부天長與地久 천장여지구此恨極千古 차한극천고來生業緣在 내생업연재骨肉當如此 골육당여차
1280년 봄 문천상은 딸 유랑(柳娘)이 보내온 편지를 받았고 부인과 두 딸이 모두 대도 궁궐 안에서 도복(道服)을 입고 도경(道經)을 읽으며 죄수처럼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문천상은 자신이 항복하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가족이 단란하게 모일 수 있음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변절할 순 없었다. 지척에 가족이 있어도 볼 수 없으니 그의 마음은 칼로 도려내는 듯 했고 눈물로 목이 매여 왔다. 누이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사람이라면 그 누가 처자식과 골육의 정이 없겠는가? 하지만 오늘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의리상 마땅히 죽는 것이 바로 내 명이다. 그러니 어이 하리? 어이 하리오?”라고 했다.
그는 누이에게 처자식을 잘 부탁한다면서 “이는 천명(天命)이니 원망하지 말라”고 부탁했고 딸에게는 “좋은 사람이 되라고” 당부했다.
나중에 쓴 시에서 그는 또 “얘야 금생 계획일랑 묻지 말아라, 내생에 끝내지 못한 인연 다시 심자꾸나.(癡兒莫問今生計,還種來生未了因)”라고 했다. 송나라 승상으로서 책임과 사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라에 몸을 바쳐야 했던 그는 딸에게 자신을 걱정하지 말고 금생의 인연은 이미 끝났으니 내생에 다시 가족의 인연을 이어가길 소망했다.
문천상의 친동생 문천벽(文天璧)은 당시 이미 원나라에 투항한 상태였다. 그는 동생과도 우애가 두터웠다. 하지만 사람마다 각자 뜻이 다르고 책임이 다름을 이해했다. 그는 “형제 하나는 죄수가 되고 다른 하나는 말을 탔으니 같은 부모 아래에 있어도 하늘은 다르구나(弟兄一囚一乘馬,同父同母不同天).”라고 탄식했다.
진정한 환난 속에서 문득 대광명을 깨닫다
문천상은 불교와 도교를 깊이 믿었고 여러 도사들과도 왕래가 있었다. 그는 일찍이 여러 편의 시에서 신선의 도를 구하려는 바람을 피력한 바 있다. 또 행군하거나 전투를 치를 때에도 늘 도경(道經)을 읽고 도사들과 함께 도교 비술(秘術)을 토론하곤 했다. 큰 아들은 ‘도생(道生)’ 작은 아들은 ‘불생(佛生)’이라 이름을 지었으니 그의 마음 씀이 어디로 향했는지 저절로 알 수 있다.
문천상은 일찍이 도가의 고인(高人) ‘영양자(靈陽子)’에게 그가 전수받은 도가 학문에 대해 언급했다.
《영양자를 만나 도를 담론하고 시를 증정하다(遇靈陽子談道贈以詩)》
내 일찍이 산수를 사랑해 조정 대신들과 이별하고 관직을 떠났네.청산 아래 움막을 엮으니 신선 사는 봉래와 영주가 지척이로다.지인은 만나지 못했는데 속세의 먼지는 홀연히 목을 휘감는구나.업의 바람이 큰 겁난 일으키니 달팽이 뿔 위에서 헛된 명성 다투누나.
우연히 위대한 여옹(呂翁 영양자를 지칭)을 만나니 마치 전세에 맹약을 맺은 것 같네.서로 나눈 대화 심오하고 넓으니 순식간에 온갖 생각 가벼워졌네.천지는 늙지 않음은 일월이 그 정화로 사귀기 때문이라.사람에게도 음양의 본성 있으니 본래 절로 장생할 수 있다네.
허무(虛無) 사이를 알려주어 나를 철저히 원명으로 돌아가도록 이끄셨네.한번의 가르침에 정수리까지 투철해지니 선풍도골이 자연히 이뤄졌네.내가 만약 되돌아가는 여행을 떠난다면 오랫동안 실천하고 싶었다네.스승의 이 오묘한 구결 들으니 주막 따위에 또 무슨 정이 있으리오?
昔我愛泉石 長揖離公卿 석아애천석 장읍리공경結屋青山下 咫尺蓬與瀛 결옥청산하 지척봉여영至人不可見 世塵忽相纓 지인불가견 세진홀상영業風吹浩劫 蝸角爭浮名 업풍취호겁 와각쟁부명
偶逢大呂翁 如有宿世盟 우봉대여옹 여유숙세맹相從語寥廓 俯仰萬念輕 상종어요확 부앙만념경天地不知老 日月交其精 천지부지로 일월교기정人一陰陽性 本來自長生 인일음양성 본래자장생
指點虛無間 引我歸員明 지점허무간 인아귀원명一針透頂門 道骨由天成 일침투정문 도골유천성我如一逆旅 久欲躡屩行 아여일역려 구욕섭교행聞師此妙訣 蘧廬復何情 문사차묘결 거려부하정
속세에서 명(名)이란 고삐와 이익(利)이란 자물쇠와 정(情)이란 그물은 사람을 얽어매 벗어나기 힘들게 한다. 또 생생세세 쌓은 업의 빚이 생명 중의 겁난(劫難)을 불러온다. 사람은 세간에서 ‘달팽이 뿔’과 같이 작고 미소한 땅 위에 살면서 부귀와 헛된 명성을 위해 서로 다투고 싸운다. 짧고 짧은 인생의 길에서 사람은 다만 총총히 지나가는 과객에 불과할 뿐이다. 우연히 선옹(仙翁)을 만나 가르침을 얻은 그는 생명의 의미란 선계(仙界)로 돌아가는 것만이 비로소 진정한 귀착임을 활연히 깨달았다.
감옥에서 문천상은 또 일찍이 ‘부휴도인(浮休道人)’이란 서명을 사용한 적이 있다. 이 단어는 《장자(莊子)》의 “삶은 떠도는 것과 같고 죽음은 쉬는 것과 같다(其生若浮,其死若休)”에서 따온 말로 자신이 깨달은 도를 분명히 표현했다.
문천상은 또 불가(佛家)와 관련된 여러 편의 시를 썼다. 포로가 된 후 감옥에서 또 이인(異人)을 만나 《대광명하고 바른 법을 지시하는 이인을 만나다(遇異人指示以大光明正法)》를 지었다.
누가 진짜 환난을 알랴홀연히 대광명을 깨달았네.구름에 해가 뜨니 모든 것이 조용한데바람이 잦아드니 물은 절로 평평하다.공명이 어찌 본성을 없애랴만충효로 큰 고생 겪었구나.천하에 오로지 호걸만이신선의 입지 이루었구나.
誰知真患難 수지진환난忽悟大光明 홀오대광명日出雲俱靜 일출운구정風消水自平 풍소수자평功名幾滅性 공명기멸성忠孝大勞生 충효대로생天下惟豪傑 천하유호걸神仙立地成 신선입지성
환난 속에서 목숨이 조석에 달려 있을 때 그는 문득 대광명한 정법(正法)을 깨달았다. 생사는 인연에 따르니 근심할 필요가 없고 몸과 마음에서 속세의 먼지가 떨어지자 더 이상 아무것도 걸릴게 없어졌다.
1281년 제야에 문천상은 이렇게 썼다.
除夜(제야)
건곤은 텅 비어 넓고도 드넓은데세월은 성큼성큼 빨리도 가는구나.막다른 길에서 비바람에 놀라고궁벽한 변방(대도)에서 눈서리 흠뻑 맞네.
저무는 해를 따라 내 명도 다하려니이 몸과 세상 모두 잊히리라.다시는 설날 도소주(屠蘇酒) 마시는 꿈꾸지 못하리니등잔 심지 돋우어도 밤은 아직 지지 않네.
乾坤空落落 건곤공락락歲月去堂堂 세월거당당末路驚風雨 말로경풍우窮辺飽雪霜 궁변포설상
命隨年欲盡 명수년욕진身與世俱忘 신여세구망無復屠蘇夢 무부도소몽挑燈夜未央 도등야미앙
이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맞이한 제석(除夕 섣달 그믐날 밤)이었다.
제석이 지난 지 얼마 후 문천상의 몸에 심한 종기가 생겨 고름이 터지고 고열이 났다. 스스로 “평생 이처럼 심한 고통 겪지 못했네”라고 할 정도로 힘들었다. 게다가 또 눈병까지 생겨 거의 실명할 뻔 했다.
봄이 되자 문천상은 유서를 쓰고 죽을 준비를 이미 끝냈다. 하지만 매일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장기 연구에 빠졌다.
쿠빌라이의 투항권고마저 거절
원나라는 이때까지 줄곧 문천상을 죽이지 않고 있었다. 주요 원인은 쿠빌라이를 포함한 원나라 황제와 신하들이 문천상의 충절을 모두 존경했기 때문이다. 장홍범은 여러 차례 쿠빌라이에게 문천상에 대한 선처를 요청했고 그의 병이 위중할 때에는 건강에 관심을 갖고 문천상은 충정(忠貞)한 선비이자 기재이니 죽이지 말아야 한다고 간언했다.
또 원에 투항한 송나라 대신들도 연명으로 쿠빌라이에게 문천상을 석방시켜 도관에 보내 도사로 삼자고 청했다. 하지만 유몽염만은 단호히 반대하며 “문천상이 나와 강남에서 다시 호소한다면 우리 열 사람은 어디에 두겠소.”라고 우려했다.
1282년 8월 원세조(元世祖 쿠빌라이)가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다.
“남방과 북방의 재상은 누가 능력이 있소?”
그러자 “북인(北人)으로는 야율초재(耶律楚材)만한 이가 없고 남인(南人)으로는 문천상만한 이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세조는 문천상에게 고위관직을 하사하려고 생각했다.
1293년 1월 8일 쿠빌라이가 문천상을 불러다 친히 투항을 권고했다. 섬돌 아래 죄수의 신분으로 불려온 문천상은 여전히 온아하고 겸손한 군자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길게 읍을 하며 예를 올렸는데 비굴하거나 교만하지 않았다. 좌우에 있던 무사들이 억지로 황제에 대해 무릎을 꿇는 예를 올리도록 그의 다친 무릎을 때렸지만 문천상은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쿠빌라이는 이 모습을 보고 억지로 무릎을 꿇리지 말라고 했다.
쿠빌라이는 그에게 고집을 피우지 말라면서 “그대가 이곳에서 한동안 시일을 보냈으니 만약 뜻을 바꿔 송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그런 마음으로 나에게 충성을 바친다면 내 그대를 승상으로 삼을 것이다.”라고 권유했다.
문천상은 “송나라의 은혜를 깊이 받았고 재상의 신분인 제가 어찌 두 성(姓)을 모실 수 있겠습니까? 나라가 멸망했으니 저는 다만 빨리 죽고 싶을 뿐이며 오래 사는 것은 가당치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럼 그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오?”
“정말 저를 위하신다면 죽음을 내려주신다면 만족하겠습니다.”
쿠빌라이는 끝내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을 알고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청을 허락했다. 문천상은 쿠빌라이가 자신을 도와 마지막까지 죽음으로 충성을 다할 수 있도록 허락해준 것에 대해 감사의 예를 올렸다.
태연히 죽음을 맞다
이튿날인 1월 9일 문천상은 감옥에서 끌려나왔다. 그는 아주 태연하게 옥리에게 말했다.
“내 일은 모두 끝냈다.”
형장은 시시(柴市 땔나무 시장. 지금의 북경 동성구 교도구交道口)입구에 설치되었다.
형 집행을 감독하러 나온 관원이 물었다.
“승상께서 아직 하실 말씀이 계십니까?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죽음을 면할 수 있습니다.”
문천상이 일갈하며 말했다.
“죽으면 죽는 것이지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인가?”
감금된 지 오래되어 문천상은 이미 방향을 가릴 수 없었다. 그는 좌우에 있던 사람에게 어느 쪽이 남쪽인지 물었다. 옆에 있던 사람이 방향을 알려주자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던 문천상이 의관을 단정히 하고 장중하게 남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나라에 대한 신의 충성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리고는 목을 내밀고 죽음을 기다렸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얼마 후 쿠빌라이는 사자를 파견해 사형집행을 중지하고 그를 살려주라는 조서를 내렸지만 문천상의 머리는 이미 몸에서 분리된 뒤였다. 향년 47세였다. 쿠빌라이는 나중에 후회하며 말했다.
“훌륭한 남아인데, 애석하게도 짐을 위해 쓰이지 못했구나!”
며칠 후 문천상의 아내 구양씨가 시신을 수습하는데 그의 얼굴에 전혀 변화가 없었고 생생해서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았다. 옷에는 절필사(絕筆辭 죽기 직전에 남긴 글)가 남겨 있었다.
공자는 살신성인하라 하셨고 맹자는 사생취의하라 하셨네.오직 의를 다해야만 인이 지극해지기 때문이로다.성현의 글을 배웠으니 어떤 일을 하라고 배웠는가?오늘 이후로 거의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孔曰成仁 孟云取義 공왈성인 맹운취의惟其義盡 所以仁至 유기의진 소이인지讀聖賢書 所學何事 독성현서 소학하사而今而後 庶幾無愧 이금이후 서기무괴
사형을 집행하던 당일 광풍이 불고 모래가 날리면서 대낮에 천지가 어두워져서 지척지간도 분간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이후 며칠간 경성(京城)에서는 연달아 날이 흐리고 어두웠으며 황궁에서는 대낮에도 촛불을 켜야 했다. 후회 막급했던 원 세조는 뒤늦게나마 문천상을 태보(太保)‧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 겸 노릉군공(盧陵郡公)에 추증하고 제단을 설치해 제사를 지내게 했다.
승상 발라가 예를 행할 때 갑자기 천지가 어두워지더니 돌과 모래가 날렸다. 문천상의 위패가 광풍에 휘말려 하늘로 날아가고 공중에서 은은한 벼락소리가 들려왔다. 원 세조는 곧 영령(英靈)이 원나라가 주는 벼슬을 받으려하지 않음을 알았다. 이에 문천상의 남송 관직인 전(前) 송(宋) 소보(少保)‧신국공(信國公)으로 바꾸자 하늘이 다시 밝아졌다.
명나라 태조 홍무(洪武) 9년 전에 문천상이 수감되어 있던 곳에 문승사사(文丞相祠 지금의 북경 동성구 부학府學 호동)를 세웠다. 이곳의 대추나무 한 그루는 문천상이 손수 심었다고 전해지는데 가지가 모두 남쪽으로 기울어 마치 문천상의 충의로운 절개에 호응하는 것 같다.
“신하의 마음 자침석과 같아 남방을 가리키지 않으면 멈추지 않노라(臣心一片磁針石,不指南方不肯休).”
문천상은 비록 두 왕조의 황제가 친히 나서 투항을 권했음에도 뜻을 꺾을 수 없었다. 일찍이 세계의 절반을 정복했던 대원(大元)의 철기부대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40여개 나라 700여개 민족을 정복했지만 강경책과 온건책 은혜와 위협 등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음에도 끝내 한 서생을 굴복시키진 못했다. 이것이 바로 옛 선비의 기개다!
문천상은 살아서는 배신하지 않았고 죽어서도 부끄러움이 없었으니 백번 꺾여도 후회가 없었다. 그야말로 “도가 있는 곳이라면 비록 천만인이 반대할지라도 나는 가리라(道之所在,雖千萬人,吾往矣)”였다.
참고자료:
《堯山堂外紀-卷六十三‧宋》
《指南錄》
《宋少保右丞相兼樞密使信國公文山先生紀年錄》
《宋史‧文天祥傳》
《文山先生全集》
《筆記小說大觀》
《宋人軼事彙編》卷十九
《古今筆記精華錄 文文山遇仙》
《南宋末雜事》卷七《夢占類考》
대기원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9/12/21/n11737607.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