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제3장 서안병변에 의연히 대처
1. 안팎이 결탁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래 일찍부터 대륙에 대한 북진(北進)정책과 남양(南洋)에 대한 남진(南進)정책의 대립이 있었다. 육군은 소련을 주적으로 보고 북진을 주장하며 “먼저 모든 병력을 동원해 소련을 굴복시켜야 한다”고 했다. 반면 해군은 남진을 주장하며 영국과 미국을 패자의 지위에서 몰아내고 나서 소련을 상대해야 한다고 했다. 서안사변이 발생하기 한 달 전인 1936년 11월 25일 일본은 독일과 베를린에서 ‘반공산국가 국제협정’을 체결해 칼끝을 소련에 겨냥했다.
서안사변이 발생하기 전 장학량은 중공 및 신변에 있던 공산당원들의 영향을 받아 중공에 가입신청서를 제출했다. 중공은 장학량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코민테른의 ‘연장항일(聯蔣抗日 장개석과 연대해 일본에 저항)’ 지시를 은폐했고 또 코민테른에는 장학량이 병변을 일으키려 한다는 의도를 숨겼다. 아무것도 모르던 장학량은 중공과 국내군벌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병변(兵變)을 발동했다. 다시 말해, 중국공산당에게 가장 큰 위협인 장개석을 조건으로 삼아 소련의 대대적인 원조를 얻어내면 서북의 패권을 차지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1936년 12월 12일 서북 비적토벌(剿匪) 부총사령관인 장학량과 국민혁명군 제17로군 총지휘관 양호성(楊虎城)이 서안에서 병력을 움직여 반란을 일으키고 국민정부 군사위원장이자 서북 비적토벌 총사령관 장개석을 구금했다.
장공(蔣公)은 서안사변이 일어난 후 “이 사변은 우리 국민혁명의 과정 중에서 하나의 큰 좌절이었다. 8년에 걸친 비적토벌의 성공이 2주(많아도 한 달 이내)면 도달할 수 있었는데 뜻밖에도 이 변란으로 하루아침에 거의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또 서북의 국방교통, 경제건설을 위해 국가와 사회가 수년간 들인 노력과 대규모 인프라 건설 작업도 이번 변란(變亂)으로 큰 손실을 당했다. 이곳의 질서와 경제 및 신용을 예전 규모로 회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건국(建國) 노정이 적어도 3년은 후퇴했으니 애통하기 그지없다! 병란의 주동자가 양지(良知)가 있다해도 만회할 수 없는 자신의 경망한 행동에 대해 분명 후회할 것이다.”(《서안 반달의 기록(西安半月記)》,1937년)
장개석은 줄곧 중공 당원들 역시 중국 사람이니 필경은 중국을 사랑할 것이며 함께 혁명과 구국을 위해 노력할 수 있다고 여겨왔다. 때문에 장개석은 마음속으로 선념(善念)을 품고 자신이 말한 구두 약속을 지켜 중공군대를 개편하고 공산당에 대한 토벌을 중지시켰다.
한편, 서안사변 이후 일본 정계와 군부는 중국이 내부적으로 통일되어 국민정부가 용공항일(容共抗日)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 큰 위협이라고 느꼈다. 이에 본국 정부의 전쟁준비를 기다리지도 않고 서둘러 노구교(盧溝橋)사건을 일으켜 중국 화북지방에 대한 병탄을 시작했다.
소련은 전력을 다해 서안사변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다. 스탈린은 오직 장개석만이 전 중국을 영도해 일본에 저항할 수 있으며, 소련의 절실한 이익을 위해, 소련에 대한 일본의 위협을 해소해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중공측에 절대 장개석을 죽이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고, 일본군이 단기간에 중국을 공격하게 만들어 나치 독일과 동서에서 소련을 협공하는 국면을 모면하려 했다.
당시 국군(國軍)에 의해 섬북(陝北)에 포위되어 있었던 중공은 서안사변으로 기사회생했다. 이후 8년의 시간 동안 중공은 모택동의 “1할은 항일하고 2할은 적당히 대처하며 7할은 발전한다”는 전략에 따라 급격히 세력을 확장시켰다.
만약 서안사변이 없었고 중국이 대일항전을 조금만 더 미룰 수 있었더라면 일본이 북진해서 소련을 먼저 공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진주만을 기습하는 일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2차 대전과 전후 세계 역사 역시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동북의 청년 사령관
장학량(張學良)은 봉천계 동북군벌 장작림의 후계자다. 장학량은 어려서부터 뜻을 이뤘다. 19세 때 동북 강무당(講武堂 초급군관을 양성하는 군사학교)에 들어가 1년 후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여단장에 임명되었고 상교(上校 대령과 중령 사이) 직책을 받았다. 북벌기간에 봉천계가 패하자 장작림이 서둘러 심양으로 돌아가던 길에 황가둔에서 폭탄이 터져 사망했다. 장학량은 이때 능력을 발휘해 권력을 장악한 후 ‘결코 통일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전문’을 발표했다. 국민정부에 대한 충성을 선포하고 동북의 기치를 바꿔 중국 국가형식의 통일을 실현한 것이다.
장학량은 전에 중동(中東)철도 문제로 소련과 전쟁을 치른 적이 있다. 동북에서 기치를 바꿔 국민당 중앙정부를 옹립하고 중원대전에 참가하면서, 장학량은 동북 4성과 화북 4성을 통제하는 중화민국의 주요인물로 부상했다. 하지만 동북에 있던 주력부대를 화북으로 진입시키자 동북삼성을 지키는 병력이 부실해졌고 일본 관동군(關東軍)은 이 기회를 이용해 ‘9.18사변(만주사변 역주: 만주사변은 중일전쟁의 시작이지만 아직까지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변이라 한다)’사변을 일으켰다.
서안사변이 있기 전에 장학량은 잘 훈련된 수십만의 동북군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북대영(北大營 봉천 북쪽에 위치한 동북군 본부)부터 시작해 첫 번째는 심양(瀋陽)을 잃었고 두 번째 금주(錦州)를 잃었으며 세 번째 동북을 잃었고 네 번째로 열하(熱河 열하성을 말함)를 잃었다. 1932년 1월 2일 동북군은 관내(關內 산해관 안쪽)로 완전히 철수했다. 일본이 9.18사변을 일으킨 후 장학량을 동북삼성에서 완전히 몰아낼 때까지 장학량은 단 한 차례도 전투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9.18사변이 발생한 당일 저녁 장학량은 2차례나 저항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대가 북대영을 공격할 때 동북군 참모장 영진(榮臻)이 장학량에게 지시를 내려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전화로 이렇게 말했다. “국제평화를 존중한다는 취지에 따라서 충돌을 피하라.”
1990년 장학량이 일본 NHK 방송과 가진 인터뷰 및 만년에 구술한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우리 동북군은 스스로 비저항을 선택했다. 나는 당시 일본사람들이 중국 전체를 점령하려 하지는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나는 그들의 침략의도를 똑똑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급적 일본인들을 자극해 전쟁을 확대하는 구실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9.18사변에 대해 나의 판단 착오였다.”라고 했다.
1931년 12월 8일 장개석은 장학량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부터 금주(錦州)군대를 절대 후퇴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튿날 장개석은 또 항공1대를 먼저 보내 전투를 돕게 했다.
또 12월 29일 국민당 중앙정치회의(당시는 장개석이 하야한 상태라 손과가 집정하고 있었다)는 “만약 침범을 당하면 저지하라.”고 명령했다. 국민정부는 이 회의결과를 장학량에게 전화로 통보했다. 하지만 장학량은 “강약의 차이가 너무 현저해 우리가 아무리 분발한들 분명 요행은 없을 것이다.”라며 명령을 무시했다.
1932년 8월 6일 왕정위(汪精衛)는 연속으로 5차례나 장학량에게 전화를 걸어 “작년에는 심양을 포기했고 다시 금주를 잃는 바람에 삼천만 국민과 수십 만 제곱킬로미터의 땅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또 적을 더 오만하게 만들었고 상해까지 연루되게 했다”며 책망했다.
그는 또 “지금껏 병력을 출동시켜 공격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고 저항을 구실로 세금만 거둬들였다.”라고 비판했다. 8월 8일 왕정위는 기자회견을 열어 “지금 열하가 위급함을 알려왔고 평진(平津 북경과 천진)이 위태로운데도 장학량은 병력을 끌어안고 나서려 하지 않는다. 민족의 멸망이 머지않았으니 나라를 구하려면 오직 군벌을 제거하고 내정을 통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당시 장학량은 이미 마약중독이 심각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열하회전(熱河會戰)이 발생하기 전 송자문(宋子文)이 장학량과 함께 차를 타고 전선을 순찰할 때 목격한 바에 따르면 그는 40km를 갈 때마다 차를 세우고 몰핀 주사를 맞아야만 했다.
1933년에서 1934년까지 장학량은 마약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유럽으로 떠났다. 그가 귀국한 후 장개석은 그를 악예환(鄂豫皖 호북 하남 안휘 3성) 지역 비적토벌 부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장학량은 10만의 동북군을 이끌고 3천의 홍군을 대적했음에도 크게 패했다.
1935년 장개석은 장학량을 서북지역 비적토벌 부총사령관에 임명하고 20만 동북군을 이끌고 섬서와 감숙으로 들어가게 했다. 섬서는 당시 군벌 양호성이 통제하고 있었는데 그는 원래 소규모 토비 두목 출신으로 나중에 섬서성 군벌이 되었다.
나라 속의 ‘나라’
중공은 북벌에 올라타 중앙정부와 지방군벌이 격전을 벌일 때 발전할 기회를 얻었다. 중공은 1921년 설립된 후 제1차 국공합작을 경험했다. 장개석이 국민당을 청리한 후 1927년부터 남창(南昌)에서 봉기해 나라 속의 나라로 자립해 공개적으로 국민정부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중공은 불과 1만여 명에서 정규군 30만에 지방 민병대 수십만의 규모로 발전했고 공민(贛閔)소비에트, 절공(浙贛) 소비에트, 상공(湘贛) 소비에트, 상악서(湘鄂西) 소비에트, 악예환(鄂豫皖) 소비에트, 섬북(陝北) 소비에트 등 중국 여러 성에 걸쳐 6개의 큰 소비에트 구역을 통제했다. 그 기반이 확대되어 공산당이 통제하는 구역은 60개 현에 인구 430만 명, 면적은 8만여 제곱킬로미터에 달했다.
1930년 연말에서 1931년 초까지 중공은 제1차 반위초전쟁(反圍剿戰爭 국군의 포위토벌에 맞선 전쟁)에서 승리했다. 국민정부는 이 전투 이후 중공이 목숨을 걸고 확장하면 국군이 일개 성(省)의 병력만으로는 제거할 수 없음을 인식했다.
1931년 9.18사변이 발생한 지 한 달 후 중국공산당은 외적의 침입과 군벌할거 및 중앙정부가 약해진 틈을 이용하고, 코민테른의 자금원조와 직접적인 통제하에 소련 국경절인 11월 7일 강서 서금(瑞金)에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설립했다.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중화민국 국경 안에 설립되었고 중화민국 수도 남경과의 거리도 비교적 가까웠다. 장개석의 말로 표현하자면 조금만 조심하지 않으면 남경까지 무너질 수 있었다.
중공은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 포고’에서 이렇게 밝혔다.
“지금부터 중국 영토 내에 서로 다른 두 나라가 존재한다. 하나는 제국주의의 도구인 중화민국이고, 다른 하나는 중화소비에트 공화국인데, 착취당하고 압박받는 광대한 노동자 농민의 나라로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지주계급을 소멸한다는 깃발을 들고 국민당 군벌정부를 타도해 전 중국에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한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