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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장개석(12): 항일전쟁 지연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항일전쟁 지연

1932년 장개석은 육군군관학교 연설에서 이렇게 예언했다.

“내 생각에 1936년, 그때쯤에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가능성이 있다.”

“이번에 대전이 일어나면 우리 중국은 생사존망이 고비가 될 것이다.”(《중국 부흥의 길(複興中國之道)》, 1932년)

북벌 이후 장개석은 국군의 군사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독일에서 군사고문을 초빙해 군대 훈련을 돕게 했다. 이들은 또 군수산업을 창립하고 국방전략을 제정하거나 심지어 전쟁에도 참여했다. 1928년부터 1938년까지 독일고문단은 중국에서 30만 명의 독일식 장비를 갖춘 부대를 훈련시켰다. 마지막 군사고문단장인 팔켄하우젠 상장(上將 역주: 우리나라 군대 편성으로 치면 중장이나 대장에 해당)은 어쩔 수 없이 중국을 떠나면서 마지막까지 장개석을 위해 항일전략을 만들어주었고 또 상해전투와 이후 태아장(台兒莊) 전투에 직접 참가했다.

북벌에서 항일에 이르기까지 ‘10년의 황금기’에 중국경제는 장족의 발전을 거듭했다.

장공은 《중국의 운명》에서 이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 10년 사이 국민정부는 울분을 삼키고 두려움에 떨어야 했는데, 아침에 저녁 일을 보장할 수 없는 험악한 환경에서도 국민경제를 발전시켰다. 소비재 수출은 점차 감소했고 기계공구 수출이 점점 늘어났으니 국내 산업이 진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현저한 성과는 특히 교통과 재정정책에 있었다.” “우리가 오늘날 대일 항전에서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불패(不敗)의 위치에 서게 된 것은 진실로 이에 의지한 것이다.”(장개석 《중국의 운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7년 당시 일본의 공업총생산량은 중국의 4.5배(60억 불 vs 14억 불), 강철생산량은 중국의 45배(580만 톤 vs 4만 톤), 석탄생산량은 4배(507만 톤 vs 126만 톤), 석유생산량은 130배(169만 톤 vs 31만 톤), 구리 생산량은 125배(8만 7천톤 vs 700톤)나 차이가 났다.

일본군은 또 매년 비행기 1580대, 중포(重砲) 744문, 탱크 330량, 차량 9천5백량을 생산할 수 있었고 아울러 47만 톤의 조선 건조능력과 6만 톤의 군함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반면 중국은 중무기를 생산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당시 미국 군사전문가의 추계에 따르면 일본 갑종(甲種)사단의 화력은 같은 수의 국군 중앙군의 3~4배 정도 되었고 지방 군벌의 잡종 부대에 비하면 적어도 6배 이상이었다.

일찍이 상해 전투에 참가했던 국군 장령 손원량(孫元良)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일본군 1개 사단에는 5천여 마리의 말과 5백량의 차량 및 개인당 1정의 소총을 지녔다. 반면 우리 국군은 1개 사단에 소총이 3800정 뿐이었고 탱크는 아예 없었다. 또 공군지원을 받지 못했고 대부분의 사단에 대포가 없었다. 우리 사병들은 종종 전장에서 적군의 탱크를 만난 후에야 세상에 이런 신식무기가 있음을 알았다. 또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현장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할 의사나 약이 전혀 없었다. 전국에서 동원된 병력이 3백에서 5백만에 이르렀지만 소총은 불과 1백만 정에 불과했다. 무기 공장에서 매월 생산하는 탄약도 원료 3백 톤을 미국 비행기의 공수에 의존해야 했으며 그나마 할당량도 기관총을 포함해서 병사 1인당 평균 4발에 불과했다.

미국의 스틸웰 장군은 중국 주재 무관으로 있던 1938년 강서 덕안(德安) 전투에서 참전한 한 여단을 참관한 적이 있다. 당시 여단 전체에 기관총은 겨우 4정(원래 편제에 따르면 100정이 있어야 한다)이 있었고 한 정당 할당된 총알이 2백발에 불과해 10분을 사격하고 나면 끝이었다. 이 여단이 일본군과 이틀 밤낮 격전을 벌인 후 사망자 6백 명에 부상자 5백 명이 발생했고 나머지 4백여 명만 명령에 따라 퇴각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나는 일본에서 다년간 무역에 종사하면서 일본군 관련 기록과 전쟁사를 본 적이 있는데 그들의 기록에 따르면 국군이 진지에 버리고 간 시신이 종종 일본군의 10배 이상이었다고 한다.”

일본의 영토확장 야욕에 대해 중국인들의 태도는 양극단으로 갈렸다.

“퇴폐적인 일방은 왜구의 치하에서 구차하게 편안을 구했고 싸우지 말 것을 제창했다. 반면 과격한 일방은 외교에 의지해 내홍을 수습하고 빨리 전쟁을 치르자고 주장했다. 전자는 송나라 말의 화의(和議)가 결국 나라와 민족을 위기와 멸망으로 몰아넣었음을 망각한 것이다. 후자는 명나라 말기의 전쟁 독촉이 국경 병력에 큰 피해를 주었고 결국 한번 패하자 더 이상 수습할 수 없는 망국의 참상을 빚었음을 망각한 것이다.”(장개석 《중국의 운명》)

장개석은 국민들을 이렇게 격려했다.

“현재 지구상에서 독립의 자격을 갖춘 국가는 다만 3개뿐이다. 하나는 바로 우리 중국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이며 세 번째가 러시아다. …그러나 이 세 나라 중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것은 바로 우리 중국이다. 때문에 우리 중국이 스스로 통일을 이루고 부강해질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나라도 중국을 침략할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어떤 나라도 중국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1932년 군사학교 총리기념주간 강연》)

1934년 장개석은 여산(廬山) 군관(軍官) 훈련단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일본에 있을 때 종종 일본의 군관들과 국제정치문제에 대해 담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들은 내게 조약이란 종잇장에 불과하며 찢어버리면 그만이라고 솔직히 말했다. 이를 통해 보건대 그들은 앞으로도 신의를 중시하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조약이든 다 소용이 없고, 앞으로 강권(强權)을 주장하고 무력을 숭상하며 수시로 그들의 적에 대한 작전을 준비할 것임을 알 수 있다.”

“내가 민국 15년(1927년) 시기를 회상해보면 다나카 기이치 대장은 우리 국민혁명군이 반년 내에 서로 살육하며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일본인들은 “시종 우리 중국 군인에게는 장래가 없을 거라고 예상해 왔다.”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중화민족 동포로 황제(黃帝 헌원)의 자손이며 특별히 우수한 자질을 지니고 있기에 그 어떤 곤란이나 위험을 막론하고 아무리 심각한 곤란이 닥칠지라도 아무리 강력한 적일지라도 우리에겐 반드시 그를 타파할 방법이 있다.”(《외적의 침입을 막고 민족을 부흥(抵禦外侮與複興民族)》,1934년)

1936년 1월 장개석은 남경 여지사(勵志社) 강연에서 일본의 전략을 폭로했다.

“일본인들 내부에서는 거리낌 없이 공개적으로 장개석을 타도하고 국민당을 소멸시키면 중국은 반드시 사분오열되어 혼란에 빠질 거라고들 말한다.” “일본은 왜 국민당과 나 장개석을 이렇게 눈엣가시로 여기게 되었는가? 핵심적인 원인은 바로 일본에겐 중국을 침략하는 전통정책이 있다면 우리 중국 국민당 역시 중국을 구원할 전통정책이 있어 피차간에 전통정책이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반드시 충돌하기 때문이다.”

“저들은 중국인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으며 중국을 나라로 여기지도 않는다. 저들은 중국에 비록 4억의 인구가 있지만 사실상 사람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임을 간파했다. 저들은 혁명당은 절대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고, 북벌은 그야말로 우스갯소리라고 여겼다. 나중에 우리 혁명군이 무한에 이르고 남경과 상해를 점령하자 깜짝 놀라 광동에서 다 쓰러져가던 혁명당이 왜 이렇게 갑자기 장강유역까지 차지할 수 있게 되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정부와 인민이 공동으로 나라를 구하는 중요한 도리》 1936년)

“작년(역주: 1935년) 6월 이전 우리나라는 기초라고는 전혀 없었고 아침에 저녁 일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일본은 한달 안에 우리 중국을 완전히 멸망시킬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작년 6월 이후 우리는 이미 사천, 운남, 귀주, 세 성(省)을 통일해 국가생존을 위한 마지막 기초를 안정시켰다!”(《정부와 인민이 공동으로 나라를 구하는 중요한 도리》 1936년)

장개석은 국민들에게 서남부 지역이야말로 중국이 결사항전하고 적을 이길 수 있는 소중한 곳이라고 했다. 나중의 역사는 그의 말이 완전히 사실이었음을 입증했다.

1935년 8월 21일 일기에서 장개석은 중일관계의 전망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다.

“첫째, 중국에 대해 싸우지 않아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여긴다.

둘째, 중국에 대해서는 다만 협박으로 분열시켜 토비와 한간(漢奸 중국의 매국노)을 만들어 교란하기만 하면 진짜 무력은 사용할 필요가 없다.

셋째, 최후에 병력을 동원해 공격한다.

넷째, 중국이 저항한다.

다섯째, 국제적인 간섭을 받아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여섯째, 왜국에서 내란과 혁명이 일어난다.

일곱째, 10년 안에 왜구가 패망할 것이다.”

여기서 여섯 번째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적중했다.

1935년 11월 장공은 국민당 제5회 전국대표대회에서 이렇게 선포했다.

“평화가 아예 절망적인 시기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결코 평화를 포기하지 않고, 희생이 최후의 고비에 이르지 않았다면 결코 가볍게 희생을 논하지 않을 것이다.”

장개석의 목표는 전쟁의 개전을 지연시켜 시간을 벌고 최후 고비가 도래하길 준비하는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