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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전설: 모씨 집안 장문인 이야기

글/ 대법제자 정리

【정견망】

모씨 가문(牟家)은 한때 (산동성) 서하(棲霞)현의 명문이었는데 청나라 말기에 정상에 이르렀다. 당시 현에 사는 사람들의 반이 일가였다. 특히 모가 장원(莊園)은 더욱이 국내에서 최고였다. 모가가 이 정도로 부유하게 된 까닭은 모씨 집안 장문인의 행동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모가는 사실 대가족의 총칭이다. 이 가족을 관장하는 사람이 바로 장문인(掌門人)이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사장이나 CEO와 별 차이가 없는데 결코 폄하하는 의미가 아니다.

나의 친구는 서하현 사람인데 현지인들이 보기에 모가는 어떤 모습일까? 친구는 내게 그 가문의 한 장문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 아침에 분뇨를 버리다

모가의 장문인(여기서는 전부가 아니라 그중 한 사람을 말함) 아침 4~5시 경에 일어나 낡은 옷을 입고(겨울에는 떨어진 솜옷) 바구니를 등에 지고 현성에 가서 분뇨를 버렸다. 옛날 중국의 운송수단은 소나 말 등 가축에 의지했다. 그들은 거리에서 변을 봤다. 모가 장문인은 매일 아침 길에 분뇨를 버리고 8~9시에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었다. 그 후 집에서 가족의 크고 작은 일을 처리했다.

장문인은 네 아들과 며느리가 있었는데 모두 4, 5시면 일어난다. 아들은 밭에서 일을 하고 장사하는 사람도 있다. 며느리는 머슴과 식구들의 식사 준비에 참여한다. 그들 가족이 먹는 것은 머슴들의 음식과 약간 차이는 있지만 별반 다르지 않다. 아마 일부 사람들은 믿지 않겠지만 텔레비전에서 보면 주인은 호의호식하는데 모가는 왜 이럴까 하고 생각할 것이다. 내 생각에 그건 대부분 사람이 지어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람들은 모가는 모두 구두쇠일 것이라고 생각할 텐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2. 무료 죽 급식소

모가에는 전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죽을 무료로 배포하는 장소가 있었다. 모두 좋은 쌀로 만든 것이다. 모가에는 죽 급식소 뿐 아니라 일부 잠시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쌀을 좀 더 넣어 주거나 또는 외상으로 곡식을 빌려주곤 했는데 이자율이 아주 낮았다. 우리는 요즘 서양 부자들이 많은 재물을 공익적으로 기부하여 곤란한 사람들을 돕는 것을 알고 있다. 사실은 이미 중국 고대에 이런 일이 완비되어 있었다.

모가는 비록 집에 수만 관의 돈이 있었지만 아주 근검절약했다. 그것은 우리가 늘 하는 말로 “근본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중국인에게 “부자는 삼대를 가지 못한다”는 말이 있는데 일반적인 가족에서 줄곧 부유하기란 드물다. 하지만 모가는 수백 년간 창성할 수 있었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근검절약하고 사회에 보답하는 가풍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런 사례는 고대에도 존재했다. 가령 북송의 명재상 범중엄(範仲淹 989~1052) 일가는 무려 8백년을 창성했는데 이 역시 이런 근검절약하고 사회에 보답하는 가풍 때문일 것이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58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