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4. 안을 다스린 후 밖을 물리쳐
전체적인 계획
1927년 10월 장개석은 처음으로 직책에서 물러난 후 일본을 방문했다. 23일 동경에서 《일본국민에게 알리는 편지(告日本國民書)》를 발표했다.
“사리에 밝은 귀국의 조야(朝野) 인사들은 동아시아 백년대계에 대해 반드시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우리 중국 국민혁명의 장애를 배제하고 반드시 우리를 동정하고 더 이상 가로막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간절히 바라건대 같은 문화 같은 인종인 7천만 일본 민족이 우리 중국의 혁명운동에 대해 철저히 이해하고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원해주기 바랍니다. 이는 또한 우리 두 나라의 근본적인 친선을 위한 좋은 계책이 될 것입니다.”
11월 5일 장개석은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당시 일본 수상을 만나 3가지 충고를 제안했다. 즉, 중국을 노예로 만들지 말고, 북벌에 간섭하지 말아야 하며, 중국에 대한 무력정책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다나카의 태도는 냉담했다.
회견 후 장개석은 주변사람들에게 말했다.
“오늘 다나카와 나눈 담화 결과를 종합해보면 전혀 성의가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의 합작 가능성은 전혀 없으며 또한 저들은 분명 나의 혁명성공을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앞으로 우리 혁명군의 북벌행동을 반드시 방해하고 중국의 통일을 저지할 것임이 더욱 분명히 볼 수 있다.”
(《장개석문집(蔣介石文集)》〈동경에서 일본 수상 다나카와의 담화〉)
반년 후 1928년, 장개석이 군사를 이끈 제2차 북벌에서 제남(濟南)을 지날 때 일본은 피비린내 나는 ‘제남 5.3참안(慘案)’을 도발해 중화민국 외교관 장공시(蔡公時)를 비롯해 4천명에 가까운 민간인을 학살하며 북벌을 저지하려 했다. 장공은 일본의 심기를 꿰뚫어보고, 중일의 군사실력과 경제상황 및 전란에서 회복할 시간이 필요한 점 등을 근거로 현실적으로 일본과 전쟁을 치르기에는 시기가 성숙하지 못한 것을 고려해 일본군과의 충돌을 피해 이 지역을 우회해서 북벌을 계속하라는 엄령을 내렸다.
그는 이날 쓴 일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내가 받은 치욕은 오늘 5.3이 첫 번째이며 지금부터 왜구는 중화민족과 풀 수 없는 원한을 맺었다.”
5월 10일 장공은 일기 첫머리에 ‘설치(雪恥 치욕을 설욕한다는 의미)’라는 두 글자를 적었다. 이때부터 장공의 일기 첫머리에는 늘 ‘설치’ 두 글자가 기록되었다. 1972년 7월 21일 마지막 일기까지 무려 44년간 매일같이 이렇게 썼다. 그가 일본과의 조기 전쟁을 피한 것은 결과적으로 중국에 소중한 ‘10년 황금기’를 가져다주었다. 이 시기에 중국은 경제가 되살아나고 군정(軍政)이 날로 상승했으며 이후 일본과의 격렬한 전투에서 최후에 일본을 물리칠 수 있는 양호한 기초를 다져주었다.
이때 중국은 내란이 더 심해졌다. 중원대전(中原大戰)이 막 끝났을 때 국민정부가 실제로 다스린 지역은 호북, 강소, 절강, 안휘, 하남 등 몇몇 성에 불과했고 중앙군 역시 60만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중서부, 서북부, 화북과 동북의 각 성은 모두 지역 군벌들이 통제하면서 중앙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장개석은 이때 ‘안을 다스린 후 밖을 물리친다’는 안내양외(安內攘外) 정책을 과감하게 제안했다. “그러므로 국내의 공산 비적(匪賊)을 먼저 소멸해 민족의 원기를 회복하지 않고서는 외국의 침략을 막아낼 수 없으며, 월(越 광동)의 역도들을 먼저 평정해 통일을 완성하지 않고서는 외적을 물리칠 수 없다.”(《전국동포들에게 고하는 일치단결해 안을 다스리고 밖을 물리치자는 글(告全國同胞一致安內攘外書)》)
중화민국 외교관 장정불(蔣廷黻)은 1933년 《아직 잃지 않은 영토가 우리의 출로(未失的疆土是我們的出路)》라는 글에서 안내양외 정책을 지지했다.
“명나라 때 하윤이(夏允彝)는 ‘나의 병력으로 왜구를 토벌할 때 왜구가 급하면 주변병력으로 왜구를 정벌했고 동이(東夷 만주족)가 급하면 또 왜구 토벌을 멈추고 병력을 옮겨 동이를 방어했다. 졸지에 두 우환이 날로 심해지면 국력이 고갈되어 일을 이룰 수 없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지금의 정세는 명나라 말기와 아주 흡사하다! 지금 공산당 세력이 널리 만연한 것이 명말 왜구와 같지만 조직이 있고 계획이 있고 또 이념이 있다는 점에서 왜구보다 더 심각하다.”
“지금의 일본은 말할 필요도 없이 기본세력이 강력하고 야심이 크며 무기의 정밀하다는 점에서 모두 3백 년 전 만주족의 청나라를 훨씬 뛰어넘는다.”
“먼저 토비를 제거하고 나중에 항일하는 이는 당연한 것이다.”
1932년 1월 일본은 제1차 상해사변을 일으켜 해군육전대가 갑북(閘北 상해의 지명)을 침입했다. 중국 19로군이 강력한 항전에 나서자 ‘1.28 상해항전’이 발발했다. 장개석은 평민 신분으로 전국 각지에 전보를 보내 항일을 옹호하면서 “나 중정(中正)은 여러 동지들과 함께 오랫동안 환난을 같이해왔고 지금 비록 재야에 있는 몸이지만 제장(諸將)들과 함께 생사를 같이하고자 합니다.”(《장총통비록(蔣總統秘錄)》)
장개석이 사직한 후 불과 한달 만에 임삼(林森 국민정부 주석)과 손과(孫科 행정원장)가 주관하던 국민정부는 큰 위기에 빠져버렸다. 어쩔 수 없는 상황 하에서 손과, 왕정위 등은 장개석에게 남경정부로 복귀할 것을 간청했다.
장개석은 “내가 남경에 들어가지 않으면 정부는 분명 성급히 일본과 단교하고 전체적인 계획 없이 일시적인 혈기에 따라 멋대로 도박해 나라가 멸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것을 고려하지 않고 단호하게 남경에 들어가 임(林) 주석을 도와 위기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며 나의 양심에 따라 나의 천직(天職)을 다할 것이다.”(《장중정총통당안(蔣中正總統檔案)》)라고 표시했다.
1932년 3월 1일 일본은 ‘만주국(滿洲國)’이란 괴뢰정부를 수립해 중국 영토의 13%를 차지하고 동북 4성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삼았다.
3월 8일 장개석은 다시 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국가 최고영수가 되었고 민족을 멸망에서 구하기 위한 대업을 이끌었다. 이 때 장개석이 두 번째 사직한 기간은 석 달이 못 되었다. 한편 소련의 만주국 승인을 막기 위해 장공은 이해 12월 5년간 단절되어 있었던 소련과의 외교를 회복하게 했다.
1934년부터 1937년까지 장개석은 일본과 중화민국 사이의 일시적인 평화기를 이용해 안을 다스리는 정책을 추진했다. 다시 말해 중공을 포위토벌하고 지방 군벌을 재편성했다.
치욕을 참고 중임을 맡다
장공은 물러나는 것이 전진하는 것이요 부드러움으로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다고 여기면서 일본이 전면적으로 진군하기 전에 전력을 다해 내란을 평정해 시간을 벌고자 했다.
“우리 혁명의 목적은 나라를 구하고 민족을 부흥하는 것으로 이는 조금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일체의 정략(政略)과 전략은 시세에 적응하는 것이 중요하며 오직 효과적으로 목적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전진하거나 물러날 수도 있고 굽히거나 펼칠 수도 있으며 강하게 나가거나 부드럽게 대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한 후에야 임기응변으로 시의적절 하게 대처할 수 있다. 국가의 일은 몹시 중대하고 관련되는 방면 역시 아주 복잡하기 때문에 결코 멋대로 직선적으로 한다고 해서 성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반드시 우리의 이지(理智)를 잘 사용해야 하며 우리의 기백을 발휘해 수많은 우여곡절과 곤란을 거친 후에야 성공할 수 있다.”
“천하의 사물은 반드시 잘 물러난 후에야 전진할 수 있고, 굽힘을 알아야 펼칠 수 있으며, 부드러운 후에야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다. 가장 거친 사례를 들자면 가령 우리가 주먹을 휘둘러 사람을 때리자면 반드시 먼저 손을 회수한 후 다시 주먹을 쥐고 내뻗어야 기세가 있고 힘이 있어 적을 공격할 수 있다. 개인의 자위(自衛)도 이와 같고 한 나라의 정책과 전략의 운용 역시 이와 같다.
모종의 장소에서는 비록 표면적으로는 물러나지만 실제상 물러나는 것이 전진하는 것이고 표면적으로 굽히지만 실제로는 먼저 굽힌 후 나중에 펼치려는 것이다. 또 표면적으로는 부드럽지만 실제로는 부드러움으로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정부가 적에게 양보하면서 치욕을 참거나 또는 좀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보고 곧장 실패로 여겨서는 안 된다. 또한 남이 우리에게 군대를 뻗치는 것을 보고 우리가 그를 두려워한다고 보지 말아야 한다. 작년에 화북(華北)에서 병력을 철수한 사건의 사정을 보면 곧 이 도리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정부와 인민이 공동으로 나라를 구하는 중요한 도리》 1936년)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關東軍 만주국에 주재하던 일본군)이 심양(瀋陽)에서 사단을 일으켜 일본군이 공개적으로 동북 삼성을 침략했다. 장학량(張學良)은 중앙의 명령을 어기고 싸우지 않고 물러났다.
9월 19일 장개석은 일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왜구가 광동의 역도들이 반란을 일으켜 내부가 분열된 시기를 틈타 우리 동북 삼성을 침략해왔다! 오호라! 마음이 아프구나!”
“왜구의 야심이 이미 폭발했으니 다시 거두기는 어려울 것이다. 동아시아는 지금부터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을 것이다!”(《장총통비록(蔣總統秘錄)》 제8장 ‘전국통일’)
9월 28일 그는 또 일기에 이렇게 썼다.
“심양, 장춘(長春), 영구(營口)가 왜구에게 강점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나는 심신이 편치 못해 마치 부모를 잃은 것 같다. 우리 조종(祖宗)의 자손이 되어 동북을 되찾지 못한다면 영원히 인격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때 만약 중국이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필부(匹夫)의 오기로 맞섰더라면 필경 나라가 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장개석의 국민정부는 치욕을 참고 생존하기로 결심을 내리는 동시에 러시아, 미국, 영국, 독일 등의 강대국들과 외교를 강화해 일본을 제약하려 했다.
한편 중공은 국난을 이용해 학생운동을 선동하면서 정부 측에 대일본 선전포고를 하도록 강요했다. 9월 28일에는 시위 학생들이 외교부에 난입해 외교부장 왕정정(王正廷)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장공은 이날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오늘 중앙대학 학생이 외교부를 공격하고 장관을 구타했다. 상해 학생들의 청원도 끊이지 않는데 이는 반드시 반동파(反動派)가 사주한 것으로 정치적인 역할이 분명하다. 시국이 이미 아주 엄중한데다 내우외환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인심이 흩어지고 어지러워져 나라가 망할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 제갈공명은 일찍이 ‘나라를 위해 온 힘을 다하되 죽은 후에야 멈출 것이다(鞠躬盡瘁,死而後已)’라고 했다. 지금의 나 역시 이렇게 할 뿐이다. 마지막까지 부모님의 아들이자 총리(總理 손문)의 제자로서 부끄럽지 않을 뿐이다. 만약 예기치 못한 불행한 일이 발생해 내 생명이 위험에 처한다면 특별히 이 글을 유언으로 삼게 하라. 원수에게 복수할 뜻을 지니되 서둘러서 치욕을 설욕하려는 객기를 부리지 말아야 한다. 내부가 다투면 외부에서 우리를 무시하고 침략할 것이다. 나는 동포들과 일치단결해 중국 국민당의 영도와 지휘 아래 각고의 고생을 참으며 인구를 늘리고 군사력을 강화하며 질서를 엄밀하게 지키고 기율에 복종한다면 10년 안에 오늘의 이 치욕을 깨끗이 씻고 국민혁명의 대업을 완수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것이 장중정의 유언이다.”(《장개석의 유언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蔣介石遺囑知多少)》,진홍민(陳紅民),2010년)
장공의 이 유언은 지금까지 공개하지 않았고 다만 일기 속에만 남아 있다가 나중에 일기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1931년 9월 28일 장개석은 학생대표들과 만나 대화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항일의 정세에 대해 만약 본인이 전 국민이 나를 추대하게 하려고 생각한다면 이는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대일선전포고만 하면 전 국민이 반드시 나를 칭찬할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이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일반인들이 내가 저항하지 않는다고 의심하게 하는가? 이는 나의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국가의 명맥(命脈)을 단절시킬 수 없고 민족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고 민족의 앞길을 위해 생각해야만 한다. 개인의 명예를 위해 중국을 멸망하게 할 수는 없다. 설령 영구 멸망에는 이르지 않고 수십 년 또는 수백 년 멸망했다가 다시 부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지금 우리에게 나라가 망하지 않게 할 방법이 있고 중국이 수십 년 또는 수백 년간 망국의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가 왜 그런 방법을 채용하지 않는단 말인가? 왜 거꾸로 수십 년 또는 수백 년의 고통을 무릅쓰려 하는가?”
12월 북경과 천진 두 지역 학생들이 ‘남하항일구국시위단(南下抗日救國示威團)’을 조직해 남경으로 와서 중화민국 원로 채원배(蔡元培) 등을 때려 부상을 입혔다. 12월 12일 장개석은 학생 청원단을 접견하고 추운 날씨임에도 학생들과 두 시간 가량 서서 대화를 나눴다. 이날 일기에서 그는 “여러 번 모욕을 받았다”고 썼다. 14일에는 또 “청원학생 대표들에게 가급적 상세한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청년들 중에는 이성적인 사람이 다수였지만 소수 무뢰한 자들이 거리낌 없이 멋대로 행동하며 예의를 모르니 나라를 생각하면 비통한 일이다.”[원정화(袁定華),《항일영수 장개석(抗日領袖蔣介石)》]
국가의 장기적인 안정을 지켜내기 위해 장공은 안팎으로 수모와 치욕을 참아야 했고 심지어 유언을 남기까지 했으니 당시 정세가 얼마나 힘겨웠고 그가 심적으로 얼마나 시달렸을지 볼 수 있다. 이해 12월 15일 장개석은 왕정위 등의 압력을 받고 국민정부 주석과 행정원장 및 육해공군 총사령관 직에서 물러났다. 이것은 장공의 두 번째 사직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