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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유라시아 교류를 확대한 통일 왕조 원조(元朝) (2)

(1206년—1368년)

심연(心緣)

【정견망】

오구데이 통치 시기

칭기스칸이 죽은 이듬해 그의 셋째 아들인 오구데이가 즉위하여 몽골국의 제2대 대칸이 되었으니 곧 원 태종(太宗)이다. 오구데이는 칭기스칸의 여러 아들 중에서 가장 지혜로웠다. 그는 아버지와 같은 판단력과 안정감을 지니고 있었고 성품이 소탈하며 사람을 대함에 매우 관대하고 너그러웠다. 그는 줄곧 칭기스칸을 따라 정벌에 나섰고 전공이 혁혁했다. 1219년 칭기스칸의 서정(西征) 전에 대칸의 계승자로 확정되었다.

계속 대외 팽창을 추진한 오구데이

오구데이는 아버지의 유언을 준수해 계속 남하했다. 그는 남송에 길을 빌려줄 것을 청하고 금나라의 수도였던 개봉을 포위했다. 1230년 몽골은 두 갈래로 병력을 보냈는데, 한 갈래는 섬서(陝西)로부터 흥원(興源, 지금의 한중漢中)을 거쳐 균주(均州, 지금의 하남 우현禹縣)에서 금나라 군사를 대파했다. 다른 한 갈래는 산서(山西) 포주(蒲州)로부터 황화를 건너 1233년에 개봉을 함락시켰고 금나라 황제는 채주(蔡州)로 달아났다. 몽골은 또 남송과 연합해 채주를 포위했다. 금 애종(哀宗)은 남송 이종(理宗)에게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며 “금나라가 멸망하면 다음 차례는 송나라가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와 연합한다면 금과 송 두 나라 모두에 이롭습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송 이종은 그에게 아랑곳하지 않았고 금 애종은 도망칠 곳이 없어 결국 자살했다.

1234년 금나라는 몽골과 송나라 두 군사의 협공 아래 멸망했다. 금나라는 아골타가 건국한 때부터 망국에 이르기까지 120년(1115년~1234년)을 지속했다.

금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해인 즉 1235년 오구데이는 쿠릴타이를 소집해 제2차 서정을 결정했다. 즉, 오늘날의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및 이 일대의 정복되지 않은 모든 국가들을 원정하는 것으로, 칭기스칸의 장자 주치의 아들 바투를 총사령관으로 삼고 오구데이의 장자 구육과 툴루이의 장자 뭉케가 군사를 이끌고 종군했다.

이번 서정으로 몽골 군대는 1236년 볼가강 유역의 여러 부족 및 모르도바국을 정복했고, 1238년 모스크바성과 키예프를 함락시켰으며, 1241년 폴란드와 헝가리를 공격하여 폴란드-독일 연합군을 격파했다. 같은 해 오구데이가 사망했다. 1242년 바투가 군사를 이끌고 철수하여 볼가강 하류에 주둔했고 그곳에 킵차크 칸국을 건립했다. 러시아 연대기는 킵차크 칸국을 금장 칸국(골든 호르데)이라 칭했으며 이 명칭은 문헌 속에서 줄곧 이어져 사용되었다. 후에 바투가 사망한 후 그의 동생이 즉위했다. 비록 킵차크 칸국은 명의상으로는 여전히 몽골 대칸에게 번신(藩臣)이라 칭했으나 실제적으로는 이미 독립된 국가가 되었다.

오구데이 통치 시기에 몽골인들은 중국 북부, 페르시아 및 남러시아 지역에 대한 정복을 완수했다.

오구데이의 몽골 통치

오구데이는 카라코룸에 주둔했다. 비록 일찍이 칭기스칸 통치 기간 중에, 적어도 1220년부터 카라코룸 혹은 그 부근의 어떤 곳이 이상적인 도읍으로 선정되었을 수는 있짐만 오구데이가 1235년에 카라코룸 주위에 방호벽을 축조함으로써 비로소 제국의 진정한 도읍이 되었다.

오구데이 통치 시기에 그는 한화(漢化)된 거란인 야율초재(耶律楚材)를 중용하고 그의 많은 건의를 채택했다. 예컨대 몽골 중서성(中書省) 기구 내에 중국, 탕구트, 위구르, 페르시아 등의 국(局)을 설치했다 [위구르인들은 장기간 중요한 역할을 발휘했다].

예컨대 몽골인들이 군사적 필요에 적응하는 전령(傳令) 제도를 장기간 사용했기 때문에 야율초재는 이러한 도로들을 따라 일정한 거리마다 식량 창고를 설치하라고 명했다. 이 외에도 야율초재는 고정된 예산을 제정해 이것을 근거로 하여 중국인들은 호(戶)에 따라 은, 비단, 곡물로 세금을 납부하게 하였고 몽골인들은 말, 소, 양의 10%를 납부하게 했다. 1230년에는 정복된 지역을 10로(路)로 나누어 각 로마다 몽골 관료와 중국 문인으로 구성된 행정 관리 인원이 관리하게 했다. 야율초재는 또 북경과 평양(平陽 지금의 산서 임분)에 학교를 세워 젊은 몽골 봉건주들에게 유가 교육을 실시했다. 동시에 많은 중국인을 몽골 민정 기구로 끌어들였다. 그는 오구데이에게 천하를 비록 말 위에서 얻었을지라도 말 위에서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라 하였다.

야율초재 외에도 오구데이는 네스토리우스교(경교) 신도이자 케레이트 부족 진해(鎮海) 등을 신임했다. 몽골국은 계속 강성한 기세로 앞으로 발전해 나갔다.

뭉케 통치 시기

오구데이가 제2차 서정 중에서 병사한 후, 1246년 그의 장자 구육이 제3대 대칸으로 추대되었으니 곧 정종(定宗)이다. 1248년 구육은 바투를 토벌하러 서행하던 도중에 죽었다. 1251년 칭기스칸의 막내아들 툴루이의 장자 뭉케가 무공(武功)과 바투의 지지에 힘입어 대칸 지위를 계승하여 몽골의 제4대 대칸이 되었으니 곧 헌종(憲宗)이다.

뭉케는 오구데이가 사망한 후 거의 중단되다시피 했던 몽골의 정복 전쟁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첫째로, 1253년 오논강 발원지에서 소집된 쿠릴타이에서 뭉케는 동생인 훌라구(旭烈兀)를 보내 바그다드와 메소포타미아의 칼리프 왕조를 정복하게 함으로써 페르시아 정복을 완수하고 이어서 계속 시리아를 정복하게 하겠다고 결정했다. 둘째로 뭉케 본인과 그의 또 다른 동생 쿠빌라이가 다시금 남송을 향한 공세를 발동하기 시작했다.

훌라구의 제3차 서정

1256년 훌라구는 이스마일파(木剌夷國)를 멸망시켰다. 이어서 또 아바스 칼리프의 바그다드를 함락시켰다. 1259년 시리아의 도성 다마스쿠스로 진군했다. 술탄 나시르(納昔兒)는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그러나 이집트 원군의 반격을 받아 몽골 군대는 다시 시리아 경내에서 철수했다. 훌라구는 테브리즈에 머물며 일 칸국을 수립했다.

이에 이르러 칭기스칸이 건립한 몽골국은 세 차례의 서정을 거치고 울루스의 기초 위에 킵차크 칸국, 차가타이 칸국, 오구데이 칸국 및 일 칸국을 형성했다. 4대 칸국의 칸들은 본래 중앙에서 분봉해 나간 4명의 최고 군정 사령관으로 중앙과 번속(藩屬) 관계를 유지하며 대칸에게 직접 책임을 졌다. 그러나 나중에 대칸의 지위를 다투기 위하여 각 칸국의 칸들 간의 모순이 격화되었고, 각 칸국 간에 필요하고도 유력한 경제적 연계가 부족했던 탓에 이 느슨한 연합체는 날로 와해되어 갔다. 그중 킵차크 칸국과 일 칸국은 독립했고 오구데이 칸국은 오구데이(태종)와 그의 아들 구육(정종)이 잇달아 대칸으로 선출되었기에 그 영지가 줄곧 중앙의 관할에 속하여 실제적으로는 독립된 칸국을 형성하지 않았다.

몽케의 남송 정벌

몽골과 남송이 1234년에 연합하여 금나라를 멸망시킨 후 양측은 정면 충돌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오구데이 시기 몽골 주력은 주로 서정 방면에 놓여 있었다. 남송에 대해서는 비록 일찍이 병사를 내어 양양(襄陽)과 사천 북부를 공격하기도 했으나 모두 송 군사에게 격퇴당했다.

뭉케가 대칸의 자리에 오른 후 동생인 훌라구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서정할 것을 명했을 뿐만 아니라 쿠빌라이에게 계속 남진할 것을 명했다. 몽케 군사는 남송을 진공하는 전쟁 중에서 비록 남송 조정의 군주는 연약하고 대신들은 무능했으나 남송 군대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고, 몽골 통치자들은 남송을 멸망시키는 것이 결코 손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인구가 촘촘한 남방에서는 강과 산맥이 종횡으로 교차하고 도시 지역에는 인구가 밀집해 있어 유일하게 가능한 전쟁은 포위 공격전이었기 때문이다. 포위 공격전에서 초원 출신의 유목민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만약 중국 남방에서 승리를 거두려면 대규모의 보병과 일련의 ‘화포’ 설비가 있어야만 했다.

이를 위하여 뭉케는 쿠빌라이에게 우회 포위하는 전략을 취할 것을 명했다. 1252년 10월 쿠빌라이는 대장군 수부타이의 아들 우랑카다이와 함께 섬서를 떠나 사천을 거쳐 운남으로 진입했다. 운남은 당시 아직 중국에 속하지 않았으며 8세기 이후로 하나의 독립된 왕국, 즉 남조(南詔) 혹은 대리(大理)를 형성하여 로로인 혹은 타이인이 거주하는 중국이 아닌 국가였다. 지세가 복잡한 산악 지역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남조는 늘 완전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쿠빌라이가 그 도성인 대리(大理)와 선천(善闡, 운남부 평정향으로 추정)을 공략하자 중국인들로부터 단흥지(段興智)라 불린 대리왕은 선천에서 피난했다(1253년).

쿠빌라이는 대리왕이 ‘마하로사(摩訶羅嵯 위대한 왕이란 의미)’로서 계속 왕위를 유지하는 것을 허락했으나 그의 곁에 몽골에 항복한 중국인 유시중(劉時中)을 몽골 행정관으로 배치했다. 비록 옛 왕조는 보존되었으나 운남은 여러 개의 몽골 군사 관할 구역으로 쪼개졌다. 이어서 우랑카다이는 티베트를 공격해 그들로 하여금 – 적어도 운남과 인접한 티베트인들로 하여금 – 몽골의 종주권을 승인하도록 했다. 대리국은 22대를 전해 내려 총 316년을 유지했다.

1257년 말, 우랑카다이는 안남국(도성 하노이)을 공격했다. 우랑카다이는 운남에서 남하해 동경(東京)평원에 이르러 하노이성을 약탈했고 1258년 3월 안남왕 진태종(陳太宗)은 몽골에 신속할 것을 인정했다.

1258년 9월 뭉케가 직접 남하해 남송을 정벌하기로 결정했다. 10월 그는 몽골 주력을 이끌고 섬서에서 사천으로 진입하여 보녕(保寧)을 빼앗았다. 그 뒤를 이어 전략 요충지 합주(合州 지금의 중경 합천구)를 포위 공격할 때 뭉케는 이질에 걸려 1259년 8월 11일 그 성 부근에서 병사했다.

뭉케가 사망할 때 쿠빌라이는 마침 또 다른 몽골 군대를 이끌고 하북에서 남하하여 장강 중류 호북 한구(漢口) 맞은편의 악주(鄂州, 지금의 무창)를 포위하고 있었다. 동시에 우랑카다이(그는 1257년 말에 안남에서 운남으로 돌아와 있었음)는 운남을 떠나 광서로 향해 그곳에서 계림(桂林)을 공격했고 이어서 또 호남으로 가서 장사(長沙)를 공격했다.

이처럼 몽케가 서거할 때 남송은 이미 북, 서, 남 삼면이 동시에 포위되어 있었다. 그러나 뭉케의 서거는 남송에 잠시 숨 돌릴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대칸 자리를 다투기 위하여 쿠빌라이는 남송에 대한 공격을 잠시 멈추고 남송의 대신 가사도(賈似道)와 화친해 정전 협정을 체결했으니, 즉 장강을 두 제국의 공동 경계선으로 삼는 것이었다. 그 후 쿠빌라이는 군사를 이끌고 하북으로 돌아갔다.

뭉케의 통치

뭉케는 즉위할 때 나이가 43세였으며 칭기스칸 이후 가장 뛰어난 몽골 대칸이었다. 뭉케는 말이 없고 과묵했으며 사치와 방종, 폭음, 폭식을 좋아하지 않았고 유일한 낙은 사냥이었다. 그는 자사(劄撒)와 조상들의 계율이 원래의 엄격성을 회복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또 유능한 지도자이자 엄격하면서도 공정한 관리자였다(그는 선배들이 지불하지 않았던 대량의 어음을 지불했다). 물론 그는 더욱이 머리가 냉철하고 이지적인 정치가였다. 그리하여 그는 칭기스칸이 건립했던 강력한 국가를 완전히 회복시켰다. 그는 행정 관리 기구를 강화하여 몽골 제국을 정규적인 대국으로 만들었다.

비록 뭉케 통치 초기에 바투에 대한 은혜를 갚기 위해(바투가 그가 대칸이 되도록 도와주었기 때문) 바투가 발하시호 서쪽 지역에서 독자적인 통치를 실시하는 것을 묵인하긴 했지만 1255년 바투가 사망한 후 뭉케는 칭기스칸의 여러 봉지에서 칸들이 몽골 제국을 분열시키는 행위를 금지했다. 예컨대 면세권을 누리거나 중앙 정권의 대리인과 함께 국가의 세수를 나누어 가지는 것 등을 허락하지 않았다.

뭉케는 네스토리우스교를 믿는 어머니 소르칵타니 베키의 양육을 받고 자랐기에 네스토리우스교를 믿었다. 그는 케레이트 부족의 네스토리우스교 신도인 볼로간(孛魯合)을 승상으로 발탁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불교와 도교에도 경도되었다.

뭉케 통치 시기 몽골 제국은 칭기스칸 시기의 강대함을 회복하였으며 대외 팽창은 원나라의 강대함과 유라시아 간 교류의 확대를 위해 한층 더 기초를 다져주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