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상하오천년〗 유라시아 교류를 확대한 통일 왕조 원조(元朝) (1)

(1206년—1368년)

심연(心緣)

【정견망】

남송이 강남에서 명맥을 유지하던 시기, 북쪽의 소수민족인 몽골 키야트 귀족 출신 테무진(鐵木真)의 세력이 강대해지기 시작하여 점차 막북(漠北) 초원을 통일하고, 이어서 초원 제국인 ‘대몽골국’을 건립했다. 신흥 몽골국은 강렬한 팽창 욕구에 사로잡혀 세 차례에 걸쳐 서정(西征)을 단행함으로써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렀고, 심지어 오늘날의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일대까지 도달해 전 유럽을 진동시켰다. 그 후 본국으로 회군한 몽골 군대는 대칸 쿠빌라이(忽必烈)의 지휘 아래 남하하여 서하(西夏), 금(金), 남송(南宋)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1271년 정식으로 원조(元朝)를 건립했으며 대도(大都, 지금의 북경 대흥)에 도읍을 정했다. 중국 역사 무대에서 송조가 내려간 후, 다시금 한 왕조가 통치하는 국면을 맞이하였고, 낯익은 비희극(悲喜劇)들이 계속해서 상연되었다.

비록 원조의 통치자들이 일부 사학자들의 눈에 미개한 야만족으로 비치기도 했으나, 사실 그들은 역대 중원 왕조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중국을 다스리는 데 있어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원조의 창시자인 쿠빌라이는 한(漢) 문화에 열성적이었으며 대칸의 지위에 오른 후 몽골의 구 제도를 개혁하고 한법(漢法)을 시행하며 한인(漢人)을 등용하여 한족 문화의 유익한 점들을 흡수했다. 이로 인해 중국 문화는 원조에 이르러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었으며, 문학 형식에서는 원곡(元曲)으로 명성을 떨쳐 당시(唐詩) 송사(宋詞)와 나란히 후세의 칭송을 받았고, 회화 예술은 송조의 기초 위에 또 하나의 정점 시기에 달했다.

게다가 몽골의 세 차례 서정으로 인해 동쪽으로는 태평양, 서쪽으로는 발트해, 남쪽으로는 페르시아만에 이르기까지 몽골 대칸의 금패(金牌)가 각 지역에 직접 도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전에 가로막혀 통하지 않던 도로들이 개척되어 유라시아 대륙 간의 교류는 원조 시기 한층 더 강화되었으니 그야말로 극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교류는 한편으로는 페르시아와 아랍의 천문역법, 수학, 의학 등의 서적이 대량으로 중국에 유입되는 것으로 나타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화약과 각종 공예 기술, 비단 등의 상품이 대량으로 유럽으로 진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교류는 동서양이 과학기술 등의 방면에서 서로를 거울삼아 참고하게 함으로써 동서양 문화의 교류와 발전을 한층 더 촉진시켰다. 또한 바로 이러한 교류 덕분에 유럽에 중국을 가장 체계적으로 소개한 최초의 책인 《마르코 폴로 여행기(우리나라에서는 동방견문록으로 번역)》가 나올 수 있었다. 책에서는 원나라의 대도(大都) 및 기타 도시들의 풍토인정을 소개했을뿐더러, 유럽인들에게 원조의 풍부한 물산, 발달한 상공업과 교통, 종교, 과학기술 및 각종 완비된 제도들을 소개하여 유럽의 발전에 많은 계시를 주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동서양 교류의 증가로 인해 인종의 혼잡 또한 점차 늘어났다. 그로 인해 발생한 결과는 이러한 혼잡 인종의 후손들이 점점 자신들의 뿌리를 찾아볼 수 없게 만들었고, 사람들이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방향을 잃어버리게 만들기도 했다.

<추배도>와 <매화시>에 나타난 원조 건립에 관한 예언

《추배도(推背圖)》 제25상은 원조의 건립 및 원나라 전체의 기수를 예언했다. 그림 속에는 철도끼 하나가 그려져 있는데 도끼 자루가 열 마디로 나뉘어 있어 그 함의가 매우 농축되어 있다. 대략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도끼머리는 철(鐵), 도끼자루는 목(木)을 의미하며, 이는 암시적으로 원 태조의 이름이 테무진(鐵木真)임을 가리킨다. 도끼 자루가 열 마디로 나뉘었다는 것은 앞으로 원나라에 열 명의 황제가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간결하고 단순한 그림 하나가 한 왕조의 대추세를 남김없이 그려낸 것이다.

남조(한인)가 북방(오호 족속)에게 신복할 것임을 예언한다. ‘리리하수’는 원 태조가 이하(離河)에서 칭제한 것을 가리킨다. 송문(頌文)은 “정족쟁웅사본기(鼎足爭雄事本奇), 일랑이서판수유(一郞二鼠判須臾). 북관쇄욕수뢰고(北關鎖鑰雖牢固), 자자손손오오이(子子孫孫五五宜)”이다. 그중 ‘자자손손오오이’에서 ‘오오(五五)’는 곧 ‘십(十)’과 같은 뜻으로, 원나라가 열 명의 황제를 거치고 멸망할 것임을 가리킨다.

참(讖)에 가로되:

북쪽은 황제요 남쪽은 신하로다,
으뜸 하나(一兀)가 스스로 서니
알란하(斡難河 오논 강)의 물과
연나라 둥지의 보리로다

北帝南臣 一兀自立
斡難河水 燕巢補麥

“북쪽은 황제요 남쪽은 신하로다”는 남조(南朝)가 북방에 신복할 것을 예시한다.

송(頌)에 가로되:

솥발처럼 다투던 영웅들의 일이 본래 기이하니
한 마리 이리와 두 마리 쥐가 순식간에 판가름 나네
북쪽 관문의 빗장이 비록 견고하다 하나
자자손손 오오(五五)가 마땅하도다

鼎足爭雄事本奇
一狼二鼠判須臾
北關鎖鑰雖牢固
子子孫孫五五宜

“자자손손 오오(五五)가 마땅하도다”에서 “오어(五五)”는 “십(十)”이란 뜻이니 원조가 10명의 황제를 거치고 망한다는 뜻이다.

한편 《매화시(梅花詩)》 제3절은 다음과 같다.

“천지상승수일원(天地相乘數一原),
홀봉갑자우흥원(忽逢甲子又興元).
연화이팔건곤개(年華二八乾坤改),
간진잔화총불언(看盡殘花總不言).”

‘천지상승수일원’은 천간과 지지가 서로 곱해진 수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는 뜻으로, 곧 새로운 왕조의 기수가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홀봉갑자우흥원’의 ‘홀(忽)’ 자는 원 세조 쿠빌라이(忽必烈)를 암시하며, ‘흥원’은 원조의 흥기를 가리킨다. 쿠빌라이는 서기 1260년에 대칸의 자리에 올랐으며, 갑자년인 1264년에 원조를 일으키고 연호를 지원(至元) 원년으로 정했으며, 후에 또 연경(燕京 지금의 북경)으로 천도했다. 1271년에 이르러 쿠빌라이는 유병충(劉秉忠)의 건의에 따라 《역경(易經)》 중의 ‘건원(乾元)’의 뜻을 취하여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고치고 중국을 통치했다.

원조는 비록 원 세조 쿠빌라이의 웅재대략(雄才大略) 덕분에 발전할 수 있었으나, 쿠빌라이가 죽은 후에는 곧바로 권력 다툼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원 세조로부터 원 순제(元順帝)에 이르는 열 명의 황제를 거친 후, 이 휘황찬란하며 한때 유라시아를 가로질렀던 단명한 왕조는 멸망의 길로 걸어 들어갔다. 1279년 남송이 최종적으로 멸망한 때부터 1368년 원조가 멸망당한 때까지 계산해 보면 대략 88년이 되니, 바야흐로 “연화이팔건곤개”인 것이다.

“간진잔화총불언”이라는 구절 또한 원 순제 때 환관 박불화(撲不花)가 경보를 가로채 황제에게 보고하지 않아 원조를 해친 일을 암시한다. 진실로 “잔화(殘花 시든 꽃)”가 “총불언(總不言 총명하면서도 말하지 않는다)”했던 것이다.

원조의 건립

원조의 건립을 말하자면, 우리는 마땅히 몽골의 굴기와 발전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몽골의 굴기와 칭기스칸의 몽골 통일

몽골의 조상은 돌궐족의 한 갈래로 중국 북방의 고대 민족에 속했으며 원래는 흑룡강(黑龍江) 상류, 외몽골의 동쪽에 거주하며 유목으로 생계를 꾸리다가 나중에 점차 몽골 고원의 광대한 지역으로 흩어졌디. 남송 때에는 부족들이 난립해 서로 예속되지 않았으나 명의상으로는 모두 금(金)에 속해 있었다. 주요 부족으로는 키야트(乞顏), 타타르(塔塔兒), 메르키트(蔑兒乞), 케레이트(克烈), 나이만(乃蠻) 등이 있었다. 부를 약탈하기 위해 몽골 각 부족 귀족들 사이에서는 잔혹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키야트부의 추장 예수게이(也速該)는 용사로, 일찍이 타타르와 전투를 벌여 연이어 타타르의 추장 두 명을 죽였는데 그중 한 명의 이름이 테무진우그(鐵木真兀格)였다. 마침 이때 예수게이의 아내가 집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신생아가 “주먹에 응고된 피를 붉은 돌처럼 쥐고 있었다.” 예수게이는 이를 매우 기이하게 여겼기에 이에 테무진이라는 이름으로 아이의 이름을 지어 자신의 무공을 기념하고자 했다.

테무진이 아홉 살 되던 해, 예수게이는 테무진을 데리고 한 친구의 집에 가서 혼약을 맺었다. 그는 테무진을 친구 집에 남겨두고 혼자 집으로 돌아오다가 길을 재촉하던 중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좀 찾으려던 참에 마침 초원에서 타타르 부족 사람들이 연회를 베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말에서 내려 군중 속으로 걸어 들어가 현지의 풍속에 따라 타타르 사람들의 연회에 참석했다.

타타르 부족 중에 예수게이를 알아본 사람이 있었고, 몰래 그의 음식 속에 독약을 넣었고 예수게이는 독살당했다. 예수게이가 죽자 키야트부는 우두머리를 잃어 인심이 흩어졌고, 원래 예수게이에게 귀부했던 타이치우드(泰亦赤)부도 그들을 떠나며 예수게이의 노예와 가축도 적지 않게 데려갔다. 테무진의 가정 형편은 점차 악화되었다.

타이치우드부의 추장은 테무진이 장성한 후에 자신들에게 복수할까 염려하여 무리를 이끌고 테무진을 체포하려 했다. 테무진은 소식을 접한 후 한 숲으로 도망쳤다.

테무진은 숲속에서 아홉 날 아홉 밤을 숨어 지내며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다가 마침내 허기를 참지 못하고 걸어 나왔다. 그가 숲을 나서자마자 타이치우드 사람들에게 붙잡혔고 대중에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했다. 테무진은 이런 치욕을 참아내며 훗날 감시 소홀한 틈을 타서 도망쳤다.

그후 테무진은 어머니, 동생들과 함께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 토끼와 들쥐를 잡는 것으로 생활을 유지했다. 이러한 고생스러운 생활은 테무진 형제의 굳센 의지를 연마해 주었다. 테무진은 아버지의 사업을 회복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점차 이전에 부족에서 흩어졌던 친척들과 백성들을 모아들였으며 자신의 힘을 점차 키워나갔다. 테무진 형제가 전쟁에 능하고 용맹했기 때문에 다른 부족들과의 싸움에서 끊임없이 승리를 거두었다.

테무진은 아버지의 원수인 타타르부 추장 메구진(蔑古真)을 잊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메구진이 금나라에 죄를 지었고, 금나라는 승상 완안양(完顔襄)을 보내 테무진과 함께 타타르부를 협공하자고 약속했다. 테무진은 이것이 복수할 좋은 기회라고 여겨 금나라 군사와 함께 타타르부를 협공하였고 타타르부를 전군 몰살시키며 대량의 인구와 가축, 치중(輜重)을 노획했다.

그 후 테무진은 또 몇 차례의 전투를 거쳐 차례로 몽골 고원의 다른 부족들을 소멸시키고 막북 초원을 통일하였으며, 그때부터 초원의 각 부족을 통틀어 몽골이라고 칭했다. 역사는 “승자가 왕이 된다”라는 이치를 다시 한 번 입증했다.

1206년, 테무진은 오논 강변에서 부족대회인 쿠릴타이를 개최하고 몽골 대칸의 보좌에 올랐다. 테무진은 ‘칭기스칸(成吉思汗)’으로 추대되었다. ‘칭기스’는 몽골어로 음이 ‘바다의 의미’이고, ‘칸’은 위대하고 숭고함을 대표하므로 ‘칭기스칸’은 ‘바다의 군주’, 즉 ‘전 세계의 군주’라는 뜻이다. 이 존호에서 우리는 몽골인들이 이 영웅을 매우 숭배했음을 알 수 있다. 테무진은 후에 원 태조(太祖)로 추존되었다. 당시 테무진은 카라코룸(和林)에 도읍을 정했는데, 그곳은 초기에는 궁장(宮帳)만 있었고 고정된 건축물이 없었으며 30년이 지나서야 성곽, 시장, 궁전, 관청을 짓기 시작하여 국가의 규모가 비로소 완성되었다.

칭기스칸은 즉위한 후 먼저 한 세트의 완비된 정치, 군사 제도를 건립했다. 당시의 몽골국은 군사 행정의 연합체로 군사 편제와 영호분봉(領戶分封)의 기초 위에 건립되었다. 그것은 십진제의 방법에 따라 몽골 각 부족의 백성들을 통일해 10호, 백호, 천호, 만호로 나누고 원래의 씨족 조직을 타파했으며 그에 상응하여 10호장, 백호장, 천호장, 만호장을 설치했다.

이 기초 위에 다시 영호분봉제를 건립했다. 만호장과 천호장은 칭기스칸이 직접 임명하고 분봉(分封)했다. 만호장 및 천호장은 그 등급의 고하에 따라 일정한 범위의 대소 영지를 봉지로 영유하였고, 봉지 내에 수량이 같지 않은 봉호를 영유해 대소 영주가 되었다. 영호분봉을 향유한 이는 종친과 이성공신(異姓功臣)들이었다. 또 행정 관리 체계가 초보적으로 형성되었다.

둘째로, 칭기스칸은 법전을 편제하도록 명했는데 이를 ‘대자사(大劄撒)’라고 불렀다.

이 외에도 칭기스칸은 몽골 문자를 사용하도 명령했다. 이때부터 몽골은 자신들의 문자와 도장을 가지게 되었다. 칭기스칸의 ‘대자사'(법령)가 바로 이 문자로 기록된 것이다.

칭기스칸의 통치 아래에서 몽골은 강력한 칸국으로 성장했다.

칭기스칸의 대외 팽창

테무진이 북방에서 칸을 칭할 당시, 남쪽은 여전히 금, 서하, 남송 등 삼국이 정립(鼎立)하는 국면이었다.

금나라는 흑룡강 유역에 정주하던 여진족 완안부(完顔部)의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가 1115년에 건립하였으며 회령부(會寧府, 지금의 흑룡강 아성 남쪽)에 도읍을 두었다. 그 후 금나라는 강대해지기 시작하여 요나라를 멸망시킨 후 송조를 향해 진공을 개시하여 휘종과흠종 등 3천여 명의 황실 성원과 대신을 포로로 잡음으로써 북송을 멸망시켰다. 남송이 임안(臨安)에서 구차하게 안위할 때, 금나라는 중국 북부의 대부분 영토를 통치했다.

서하는 서북에 거주하던 강족(羌族)의 일파인 당항족(黨項族 탕구트족)이 건립했다. 1038년 원호(元昊)가 정식으로 건국하고 칭제(稱帝)했다. 서하는 주로 서북 지역을 통치했다. 서하는 몇몇 웅재대략을 지닌 통치자들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차례로 요, 금, 송과 항거할 수 있었다. 그 문화 또한 중국 역사상에 휘황찬란한 한 페이지를 남겼다.

그러나 몽골이 굴기했을 즈음 금과 서하는 모두 쇠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칭기스칸으로 추존된 테무진은 그의 새로운 대외 팽창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목표를 먼저 서하에 조준하고 1209년에 대거 병력을 보내 서하로 하여금 화친을 청하게 만들었다. 그의 두 번째 목표는 금나라였다. 몽골은 원래 금나라에 신복(臣服)했었고 칭기스칸은 즉위한 후에도 여전히 금나라에 칭신하며 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칭기스칸이 금나라가 날로 쇠약해지는 것을 보고는 신복 관계를 끊어버렸다.

1211년, 칭기스칸은 대거 금나라를 진공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높은 산에 올라 하늘에 “금나라 황제가 우리 조상 암바가이(俺巴孩)를 살해했으니 제가 이 원수를 갚게 허락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이어서 그는 3천 명의 정예 기병을 뽑아 남하했다. 금장(金將) 호소호(胡少虎)가 30만 금나라 군사를 이끌고 저항했으나 몽골 군사에게 참패를 당했다. 이듬해 몽골 군사는 또 거용관(居庸關)을 쳐들어가 금나라의 중도(中都) 연경(지금의 북경)을 포위했다. 칭기스칸은 그의 네 아들과 함께 군사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하북의 광대한 평야 위에서 거침없이 휩쓸며 가는 곳마다 적수가 없었다. 5년도 채 되지 않아 황하 이북은 모조리 몽골의 소유가 되었고 금나라는 어쩔 수 없이 황하를 경계로 삼아 변경(汴京 개봉)으로 천도했다.

이때 금나라 내부 매우 혼란스러워 금주(金主) 완안영제(完顔永濟)가 살해당했고 새로 즉위한 금선종(金宣宗)은 어쩔 수 없이 칭기스칸에게 화친을 구걸하여 대량의 금과 비단을 바치고 공주를 칭기스칸에게 시집보냈다. 칭기스칸이 비로소 군사를 철수해 돌아갔다.

마침 칭기스칸이 계속 남침할 준비를 하던 중,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호라즘에서 몽골의 사신과 상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칭기스칸은 공격의 방향을 서쪽으로 돌리기로 결정하고 일부 병사남 남겨 금나라를 상대하게 했다.

1219년, 칭기스칸이 직접 20만의 몽골 대군을 거느리고 호라즘을 공격하여 호라즘의 도성을 점령했다. 그 뒤를 이어 칭기스칸은 군사를 이끌고 계속 서쪽으로 공격하여 현재의 중앙아시아 각국을 점령하였고 동유럽 오로스(지금의 러시아) 경내로 진입하여 1223년 칼카강 변(지금의 우크라이나 경내)에서 남러시아 연합군 8만 명을 섬멸했다. 몽골 선봉은 줄곧 현재의 유럽 동부, 이란 북부 및 인도의 광대한 구역에 이르렀고 1224년에야 군사를 이끌고 귀국했다.

칭기스칸은 승리를 거둔 후 토지를 분봉하기 시작했다. 칭기스칸은 점령 지역을 ‘울루스(兀魯思)’로 삼아 세 아들에게 분봉했다. 장자 주치(術赤)는 킵차크, 호라즘 및 캉리국(康里國)의 고지에 봉해졌으니 오늘날 아랄해 서쪽, 카스피해 북쪽의 땅들이 모두 이에 속했다. 주치는 칭기스칸보다 먼저 죽었으며 이 봉지는 그의 아들 바투에게 귀속되었다.

둘째 차가타이(察合台)는 서요(西遼) 및 위구르 땅에 봉해졌으니 동쪽으로는 알타이산에서 서쪽으로는 아무다랴 강에 이르며 신강 톈산(天山) 남북로 등의 지역을 포함하였고 나중에 차가타이 칸국으로 불렸다.

셋째 오고타이(窩闊台)는 나이만의 고지에 봉해졌으니 오늘날 오브강 상류 서쪽에서 발하시호 동쪽 일대가 모두 이에 속했으며 나중에 오고타이 칸국으로 불렸다.

몽골의 관례에 따라 칭기스칸이 죽은 후 막내아들 톨루이가 아버지의 직할 영지, 즉 오논河 및 켈룰렌강 유역 일대의 몽골 본부 땅을 얻었다.

칭기스칸이 군사를 이끌고 서정할 때 일찍이 서하에 출병을 도와줄 것을 요구했는데 서하는 병력 파견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금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칭기스칸은 돌아온 후에 서하를 멸망시키기로 결심했다. 1225년 칭기스칸이 직접 서하국을 정벌하니 서하 군사는 죽을힘을 다해 항거하였고 그 도성은 몽골 군대에 의해 반년 동안이나 포위 공격을 받았다. 서하 경성의 포위 공격 마지막 순간에 칭기스칸은 중병에 걸려 막북에서 사망함으로써 그의 66세의 휘황찬란한 일생을 마감했다. 임종 전 그는 송과 연대해 금을 멸하는(聯宋滅金) 전략 방침을 제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하 황제가 항복하였고 서하 왕조는 탁발씨(拓跋氏)가 건국한 지 190년(1038년~1227년) 만에 멸망했다.

칭기스칸에 대한 평가

전해지는 사료의 한계로 인해 우리는 칭기스칸의 위대한 업적에 대해 여전히 아는 바가 적다. 그러나 남아 있는 유한한 자료로부터 우리는 그가 깊이 있고 대략(大略)이 있으며 용병이 신처럼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몽골을 통일했고 서정을 발동하여 몽골을 일시적으로 크게 부각시켰다. 그는 또 몽골 지역에 분봉 제도를 건립하였고, 법전 《대자사》를 반포하였으며, 게다가 사람들로 하여금 몽골 문자를 창조하게 했다. 그의 대외 팽창 정책은 후세 원조 건립을 위해 견고한 기초를 다져주었으며 원조 시기 동서양 교류의 확대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는 이 시기에 칭기스칸을 육성해 그로 하여금 이렇게 독특한 방식으로 유라시아 교류를 강화하도록 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960